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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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사회자가 청중들에게 질문을 할 때, 많은 사람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손을 들어보라고 한다. 아주 가끔은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더러 손을 들어보라고도 한다. 나는 지금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질문을 해보기로 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어보신 분 중에서 그 책을 재미없게, 또는 그냥저냥 읽으신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보시라.”
  있어? 읎지? 나도 마찬가지다.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는 책을 지은 이의 이름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라는 건 기억하지 못하고 여태 살았다. 그러다가 이이가 쓴 다른 책 <빅토리아의 발레>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도 벌써 2003년에 간행을 했으며 이미 출판사가 ‘품절’ 딱지를 붙인 상태란 걸, 헌책방에서 이 책을 고르며 알았던 거다. 그러니 발견한 순간 잠시라도 머뭇거릴 이유가 있었겠나. 얼른 사서 읽었다. 역시 재미있다. 겁나게 재밌다. 진즉에 스카르메타를 검색해볼 것을. 이래저래 사람이 게으르면 늘 이 꼴이다.
  소설을 통해 칠레의 현대사를 알고 싶으면 이사벨 아옌데의 삼부작을 읽으면 대강 감이 잡힌다. 스토리의 시간적 순서로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그리고 <영혼의 집>. 딱 하나만 선택하면 <영혼의 집>. 이 빼어난 작가 자신이 1970년에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민선 사회 민주주의 권력인 아옌데 정권을 상대적인 선으로 설정하기도 했고, 사실 그 의견이 맞다. 아옌데 정권에 반발해 1973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대통령 궁에서 아옌데 대통령을 기총소사해 살해하고, 권력을 쥐자마자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이 20세기 후반에 저질러졌다고 하기엔 과하게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역시 이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1973년부터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동독 등지로 유랑 망명생활을 했다고 책의 해설에 씌어 있다.
  이 시절, 산티아고의 한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가 정문 앞에서 독재 반대의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이틀이 지난 후 하수도에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시신으로 발견된 남자, 폰세 씨가 있었으니, <빅토리아의 발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빅토리아 폰세의 아빠다.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남편이 어느 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어 두려움에 떨면서 며칠 밤을 지새웠는데, 어느 새벽, 소란스런 이웃들에 이끌려 달음질 쳐 가보니 더러운 구정물 속에 두 뭉치의 끔찍한 육신이 잠겨 있으니 하나는 머리요, 다른 하나는 남편이 평생 머리를 받치고 다니던 몸통이란 걸 발견한 상황을. 그래 아내는 그길로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우울증을 앓게 되고, 게다가 다섯 달이 지난 다음 유복자 빅토리아를 출산한다. 시절은 흘러 드디어 1990년이 오고, 피노체트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드디어 칠레에도 민주주의가 움트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야 폰세 씨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폰세 씨를 기리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그의 딸 빅토리아의 학비를 전액 면제해주기로 결정을 했지만, 극도의 우울증으로 늘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다니는 엄마가 딸 부양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나, 어디.
  게다가 빅토리아는 총명한 지능을 갖추었음에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을 빼고는 학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발레 한 가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책의 초반에 빅토리아는 집에선 엄마한테 학교에 간다고 말해놓고 하루 종일 산티아고의 극장 구석에나 박혀 있다가 발레 학원이 여는 오후가 되면 학원에서 발레를 배우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벌써 석 달이나 교습비가 밀려 있는 상태. 엄마한테 교습비를 달라고 할 수 없으니 어디서 돈을 벌긴 벌어야 하는데, 교복을 입고는 마땅한 아르바이트도 구할 수 없는 열여섯 살의 삐쩍 마른 아이의 꿈은 산티아고 국립극장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 조금 욕심을 내자면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독무를 추어보는 것. 그러나 전기요금, 임대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작은 교습소에서 이룰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시골 장마당의 무희 정도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엄마의 우울증에 조금은 전염이 된 상태일까?
  빅토리아의 상대역, 앙헬 산티아고.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 방향으로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곳.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밀수꾼들의 통로가 있는 탈카 지방 출신으로, 일찍이 소년 시절에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재단사 작업복을 입은 채, 소작농 남편을 증오한 나머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영원히 이별한 엄마의 아득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 있는 청춘. 앙헬에게는 중요한 취미가 있으니 바로 말 타기다. 그래 열여섯 살 시절에 지주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 말을 실컷 타고, 지주네 마구간에 매어 놓는 대신 집에 끌고 왔다가 말 절도범으로 몰렸을 때, 비루먹은 아버지는 지주를 향해 굽실거리며, 자기 자식이 사람이 좀 되도록 엄벌에 처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지주의 사촌인 지역 판사로부터 5년 형을 받아 교도소로 가야 했던 불행한 소년. 특기할 만한 건,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 한 번 보고 들은 건 절대 잊는 법이 없는 살아있는 환등기 또는 녹음기.
  그러나 교도소에 입소하고 맞은 환영식에서 잘생긴 청년 앙헬 산티아고는 간수 산토로를 포함한 건장한 죄수들 여러 명에게 집단 윤간을 당해 파열상을 입어 심각한 출혈 때문에 당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앙헬이 생각하기를, 장기수 또는 종신형을 받은 죄수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면 그들이 꼭 동성애가 아니더라도 감옥이란 특수 환경에서 장난 또는 취미로 신입 수형자에게 한 번 그럴 수 있다는 거. 그러나 간수 산토로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처자식이 있고 가정이 있는 간수라는 자가 수감자들과 한 편이 되어 새로 들어온 어리고 잘 생긴 죄수를 강간하는 짓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모욕이라고 여겨, 시간만 나면,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하면 제일 먼저 저 새끼 산토로 간수를 죽여 버리겠다고 온갖 죄수들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고 다니는 우를 범한다. 그게 진심이면 오히려 발설하지 말고 가슴 속에만 간직해야 할 것이고, 농담이라면 안 하느니 못한 농담이니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앙헬에게 이 다짐은 농반진반(half joke half serious)였다.
  또 한 명의 주인공. 환갑을 맞은 칠레 최고의 기술자 니콜라스 베르가라 그레이. 세계최초로 전화기를 만들어 미국 특허청으로 달려갔으나 불과 몇 시간 차이로 벨에게 등록 순위를 놓친 불운의 과학자 그레이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아는 인물. 어떤 기술자인고 하니, 금고 따기. 제아무리 복잡하고 웅장해 마치 강철로 만든 산성 같아도 베르가라 앞에만 놓여 있으면 흐물흐물한 메밀묵이 된다는 말 그대로의 전설. 한 가지 흠이라면 이미 너무 유명세를 누려 누구나가 얼굴만 척 봐도 이이가 칠레의 자랑스런 국가대표 금고 절도범인 것을 다 안다는 거. 이이는 또 순정이 넘쳐 환갑이 지나도록 오직 한 여인, ‘테레사 카프리아티’만을 사랑하는데, 무려 이 여자가 아내이기도 하다. 베르가라는 그토록 휘황찬란한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사람도 해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한 번도 권총을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신사도에 입각한 절도범이었다. 이이의 마음속에 흐르는 남을 향한 동정, 연민, 따사로움은 책을 읽으면 읽어갈수록 더욱 독자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순정을 바친 여인인 테레사는 수감 십년 내내, 비록 혼인의 순결 하나만큼은 끔찍하게 지켰을지언정, 한 번도 면회조차 오지 않았고, 아들 페드로 파블로만 일년에 딱 한 차례 형식적인 면회만 이어졌을 뿐이다.
  앙헬과 베르가라에게 같은 날 닥친 기쁨이 있었으니, 바로 광복절 특사. 같은 날 대규모로 행해진 특사의 은전을 입어 출소를 하게 되는데, 앙헬을 내보내는 간수 산토로의 두통이 극심해진다. 평소 앙헬이 해왔던 말을 집중분석해보면 자기를 죽이겠다는 걸 도저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라, 일단 앙헬에게 좋은 말을 하고 내보낸 다음, 청부살인으로 종신형을 받은 리고베르토를 불러 한 달의 특별 외출을 허락한다. 대신 다시 교도소로 들어오기 전에 앙헬을 살해하는 조건으로. 청부살인자의 생명은 약속이다. 그러나 살인청부업자도 사람이다. 더구나 앙헬은 출소할 때 난쟁이 종신수형수가 준 예전 피노체트의 똘마니 칸테로스의 금고를 털 수 있는 보물지도가 있는 바에.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이미 그라운드 제로가 등장하는 21세기 초. 이제 등장인물들은 젊은 시절 아옌데와 피노체트를 경험한 늙은이와 그들의 손자녀뻘인 10대 후반의 연인들. 이들은 빅토리아의 꿈, 여전히 이어지는 칠레의 구조적 비극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는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소녀, 즉 칠레의 미래를 위하여 정말로 크게 한 탕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큰 한 탕’이 진짜 예전 군사정부의 개가 가진 금고를 터는 일에 국한할 것인가. 이건 알려드리지 않겠다. 겁나게 재밌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그리고 귀엽게 야하다. 귀엽게 무척 야하다. 어때, 끌리시지? 헌책방 뒤져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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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15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006년에 읽고 리뷰를 썼는데 온갖 미사여구를 쓰며
극찬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런 걸 보면 입에 발린 소리를 했나.....
현재는 가지고 있지 않네요. 아마도 사이판에 사는 친구한테
보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귀엽게 야한 장면이 나오던가요? 아참-- 난감하군요. (긁적긁적)ㅋㅋ

Falstaff 2020-10-15 20:5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전 본문에 썼다시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참 근사하게 읽었으면서도 이 책이 그이가 쓴 건 줄 진짜 몰랐어요. 그래 오히려 더 재미 있었달까요.
ㅎㅎㅎㅎ 다 뭐 인생입지요.
귀엽게 야한 장면은 정말 야~합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0-10-1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이사벨 아옌데 책들 그리고 ‘겁나게 재밌‘는 이 책 모두 적어놨습니다. 큰일입니다. 폴님때문에 분수도 모르고 눈만 높아지고 ...

Falstaff 2020-10-16 08:43   좋아요 1 | URL
근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별 다섯 개 만점인데요, 이 책은 별 하나를 빼서 네 개입니다. <네루다의....>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아이고, 책 읽는 취미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전 회사 와서 하루종일 일 없이 노는 사람이니까 그냥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 때우는 인종입니다. ㅋㅋㅋ 걍 편하게 책 고르고 읽으세요.

coolcat329 2020-10-16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렇잖아도 네루다를 먼저 읽어 보려고 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 창비시선 156
함민복 지음 / 창비 / 199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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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민복. 1962년 충북 중원군 노은면 출생. 반가운 동네다. 청춘 시절에 충주 목행리에 있는 직장에서 한 3년 먹고 산 적이 있어 중원군 나오면 은근히 기분 좋다. 그 동네가 산 좋고 물 좋지만 오랜 세월 발전하지 않고 고립되어 온 지역이라 사람들 또한 약간 텃세가 있었다. 그러나 한 번 친해지면 참 정이 많은 좋은 사람들이 산다. 여름부터 겨울까지 인근 충주호를 비롯해 저 남한강 상류를 훑으면서 온갖 민물생선회를 섭식하다가 얼어붙은 충주호의 얼음이 쩡, 소리를 내며 갈라진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꽃망울이 지는 봄이 오면 한 움큼씩 디스토마 약을 입에 털어넣고 일주일 동안 약 먹은 병아리새끼처럼 꾸벅꾸벅 졸다가 깨어난다. 그러곤 다시 또 온갖 민물생선회를 초고추장에 찍기 시작한다. 재미있는 시절이었다.
  지역의 명문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해 대중적으로 유명세를 탄 사람을 꼽자면 첫째가 국제연합 사무총장을 지낸 반기문이고 둘째가 지금 통일부 장관을 하고 있는 이인영이다. 반 선생은 설마 그렇지 않았겠지만 이 장관은 대학 다닐 때 부모님 속을 엄청 썩였겠지? 말 하면 뭐하나. 덕분에 지금 장관까지 하니까 그걸로 된 거지 뭐. 문학인으로는 두 말 할 것 없이 신경림. 산세 유려하고 물 맑은 고장이라 몇 명 안 되는 인구로 이 정도면 괜찮은 동네다. 나 장가들어 첫 사글세 신방을 차린 곳이 교현동 예성공원 길 건너 소방서 옆 인쇄소 옥탑방이었는데 인쇄소와 소방서 사이에 목욕탕이 있어서 뱅뱅 돌아가는 팬 사이로 여인네들 목욕하는 거 자주는 아니지만 간혹 봤다. 오해하지 말자. 연예인 몸매는 천 명 가운데 하나 있는 거다. 다 엄마, 이모, 아내의 체형과 비슷하다. 볼 거 하나 없다. 보이니까 보는 거지 일부러 찾아보면 그건 미친놈 아니면 변태다.
  함민복 얘기하다가 어째 충주 이야기가 길었다. 함민복은 태어나긴 거기서 났어도 서울에 있는 수도공고, 당시의 정확한 명칭으로 ‘수도전기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월성 원자력 발전소에서 4년간 근무하고 (그걸로 군역을 대체했는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그러지 않았을까 싶다.) 87년에 남산에 있는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과에 입학한다. 2년제 학굔가 그랬는데, 나이 스물여섯이었으니 입학 때부터 꽤 꼰대인 척했을 듯하다. 어쨌든 시재詩才가 있어 2학년 시절인 88년에 등단을 해, 이번에 읽은 시집 《모든 경계에는 꽃이 핀다》를 통해 넘겨짚은 그는 이후 대책 없이 시를 쓰기로 결정한 시인답게 가난한 혼자살이를 조금 겪었나보다. 여자나 남자나, 아니다, 나는 여자였던 적이 한 번도 없으니 그냥 이렇게 말하자. 남자들은 힘겹고 가난하고 외로울 때 엄마 생각을 많이 하나보다. 난 갓난이 때 외갓집에 보내져 자라서 그런지 몰라도 그런 적 없었다. 한 번도. 하여간 그는 1996년, 나이 서른다섯 살에 낸 시집 속에서 참 징그럽게도 어머니를 찾고 가끔 아버지까지 찾는다.
  여기서 함민복과 나의 궁합이 극적으로 멀어진다. 나는 어머니, 아버지, 특히 어머니 팔아가며 옛 생각에 궁상떠는 걸 무지하게 싫어한다. 물론 정말로 잘 써서 궁상을 탈피할 빼어난 수준이 된다면 모르지만. 시집의 1부, “선천성 그리움”이라는 제목을 달아놓고 대책 없이 어머니 타령을 하고 있다. 세상에 어머니 없는, 없었던 인간은 하나도 없는지라 웬만하면 어머니를 끌어들여 사람의 심금을 울릴 수 있을뿐더러, 이게 시인의 진심이기도 하니 독자는 여차하면 별 수 없이 눈물바람을 하기 마련이다. 두 번째 시 <칠석七夕>을 보면, 짧으니까 전문을 그대로 인용하는데, “달빛/내/리/고/장독대/정/안/수/한 사발/어/머/니/아, 저것이 미신美信이다”이다. 미신迷信이 아니고 아름다운 믿음 미신美信이 칠석날 달을 바라보며 정안수 한 사발 떠다놓고 객지를 떠도는 외로운 아들을 위해 칠성님께 기도하는 어머니란다. 그 다음 시 <동지冬至>도 전문을 인용해보자. “한석봉 어머니 깜박 책을 써는 사이//한석봉이 꾸뻑 떡을 읽는 사이”. 이게 뭘까? 뭐 한석봉, 즉 아들과 어머니 사이의 물체에 대한 동화현상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네 번째 시는 <세월 1>이란 제목을 가지고 있다. 이것도 읽어보자.


  나는 어머니 속에 두레박을 빠뜨렸다
  눈알에 달우물을 파며
  갈고리를 어머니 깊숙이 넣어 휘저었다


  어머니 달무리만 보면 끌어내려 목을 매고 싶어요
  그러면 고향이 보일까요


  갈고리를 매단 탯줄이 내 손에서 자꾸 미끄러지고
  어머니가 늙어가고 있다  (전문)


  어머나, 세상에. 서른다섯 살이나 먹은 다 큰 아들이 이게 뭔 어리광이람. 이러니 나하고는 도무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말씀. 심지어 그의 절창 가운데 한 편이라고 일컫는 <눈물은 왜 짠가>라는 시 속에서는, 가난한 시인이 어머니를 부양할 능력이 없어 어머니를 고향 이모님 댁에 모셔다드리는 날 터미널 부근의 국밥집에서 점심을 먹는 광경을 그린 것도 있는데, 이 시에서 함민복은 정말 국가대표급 궁상의 극치를 과시하고 있다. 인용하기에 과하게 길어 생략하겠지만 궁금하시면 검색해보시라. 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라니 금방 찾으실 수 있을 듯.
  함 시인이 등단을 한 1988년. 시절은 이미 6.29선언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졌고 문학판에선 이젠 마음대로 써도 남영동이나 남산이나 경찰서 정보과로 끌려갈 염려가 없으니 본격적으로 유신시절과, 5공화국 때와, 광주시민운동과 노동현장에 대한 작품들이 말 그대로 폭포처럼 쏟아지기 시작했고, 물론 이 가운데 우리가 오래도록 기려서 기념할만한 작품은 별로 없지만 거의 모든 작가들은 이 기운에 동참하지 않기도 쉽지 않았으리라. 그래 “꽃”이란 부제를 단 책의 4부에 이르면 소위 참여시, 아니면 리얼리즘 시의 면모를 보여주기에 이른다. 나는 이 4부에 실린 시가 나머지 시들보다 훨씬 마음에 들었다. 어느 개 잡는 개백정의 독백인 <여름, 그 무덥던 어느 날>이란 짧지 않은 시의 마지막 두 연을 인용해본다.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잡으면서
  인생의 비린 맛 신맛을 알아야
  참 사람살이를 알 수 있다는 말놀이를 떠올리면서
  이 정도 비린내 나는 삶이라면
  한번 살아볼 만하지 않는가 호언하면서
  한 달에 개 두 마리씩 먹지 않고는
  화물기차에서 시멘트 하역작업을 할 수 없다는
  노무자들의 말을 들으면서
  개 쓸개 여섯개를 지푸라기끈으로
  포도나무 섶에 종자주머니처럼 매달면서


  하루 여섯 마리 개를 죽이면서
  하루 여섯번 나를 죽이면서  (부분.   맞지 않는 띄어쓰기는 원문에 따랐음)


  시멘트 한 포대에 40킬로그램. 그걸 하루에 몇 톤씩 짊어져야 하는 화물기차 하역부들과 그들에게 개를 잡아 고기를 파는 개백정의 여름 한 나절을 잘 묘사했지만, 결과적으로 절창까지는 아닌 것이 비장미만 두드려지게 하려다가 자간에 절묘한 위트 한 방울을 놓치고 말았지 않는가 싶기 때문이다. 물론 아마추어의 감각으로 그렇다는 거다. 이 감상을 함민복의 팬이 읽으셨으면 양해 바란다.
  이 시를 읽고 조금 뒤에 <긍정적인 밥>이란 시가 나온다. 이걸 읽고, 아, 이 시가 여기에 실려 있는 거구나, 할 정도로 유명한 시다. 인용해볼까, 말까. 엣다 모르겠다. 옮겨보자.

  詩 한 편에 삼만 원이면
  너무 박하다 싶다가도
  쌀이 두 말인데 생각하면
  금방 마음이 따뜻한 밥이 되네


  시집 한 권에 삼천 원이면
  든 공에 비해 헐하다 싶다가도
  국밥이 한 그릇인데
  내 시집이 국밥 한 그릇만큼
  사람들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줄 수 있을까
  생각하면 아직 멀기만 하네


  시집이 한 권 팔리면
  내게 삼백 원이 돌아온다
  박리다 싶다가도
  굵은 소금이 한 됫박인데 생각하면
  푸른 바다처럼 상할 마음 하나 없네  (전문)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읽는 즉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는 쉽고 좋은 시다. 그리고 따뜻하다. 안도현이 멋만 잔뜩 부려 쓴 시 “연탄재 함부로 차지 마라”보다 낫다. 하지만 내가 읽은 이 책의 가장 재미있는 시는 따로 있어서 전문을 소개하며 오늘의 독후감을 마치고자 한다. 그래도 되겠지? 안 되도 내가 하면 그만이지 뭐.



  금호동의 봄



  똥차가 오니 골목에
  생기가 확, 돕니다
  비닐 봉지에 담겨
  골목길 올라왔던 갖가지 먹을 것들의 냄새가
  시공을 초월 한통속이 되어 하산길 오르니


  마냥 무료하던 길에
  냄새의 끝, 구린내 가득하여


  대파 단을 든 아줌마가 코를 움켜쥐고 뜁니다
  숨 참은 아이가 숨차게 달려 내려갑니다
  부르르 몸 떨며 식사중인 똥차의 긴 호스 입 터질까
  조심, 목욕하고 올라오던 처녀가 전봇대와 몸 부딪쳐
  비눗갑 줍느라 허둥대는
  살내음


  라일락꽃에 걸쳐 있던 코들도 우르르 쏟아지고 말아  (전문)



  근데 어쩌자고 한 번에 함민복의 시집을 두 권이나 샀는지 몰라. 독후감 여기서 딱 마치려 했더니 도무지 주둥이가 근질거려서. 난 금호동에선 한 번도 살아보지 않았지만, 금호동인가 옥수동인가에 사는 수수한 아가씨와는 데이트 한 번 해봤다, 1970년대까지는 서울 종로구에서도 똥 푸는 아저씨들이 똥지게를 지고 다녔다. 60년대 말 초등학생 시절, 장난기로 범벅이 된 내 동무 하나가 똥을 잔뜩 짊어지고 지나가는 아저씨 앞에서, “똥 퍼!” 했다가, 똥 푸는 군용 바가지를 냅다 휘두르는 바람에 진짜 똥 범벅이 된 옛 동무의 모습이 떠올라 굳이 사족을 단다. 걘 집에 가서 엄마한테 얼마나 얻어 터졌을까? 그 나이에 도리짓고땡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하던 동문데. 위의 시 금호동은 21세기 정화조에 쌓인 분변 슬러지를 위생업체 차량이 와서 처리하는 장면이니 조금 차이가 나긴 한다. 추억은 언제나 그렇듯 이렇게 좀 남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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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10-12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대학 시절에 남자 선배들이 그렇게 함민복 운운해서 함 읽어봤다가 아니 다들 엄마랑 떨어져 사나 생각했던 적이 있더랍죠. ㅎㅎ 당시에는 그냥 그렇게 넘기고, 정작 함민복이 좋게 다가온 건 아주 나중에 그의 산문집을 통해서였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밥’은 오랜만에 다시 봐도 좋군요. ㅎㅎ

Falstaff 2020-10-12 14:00   좋아요 0 | URL
저도 함민복, 하니까 어디서 많이 들어본 듯한 친밀감이 있더라고요. 마치 오래 읽은 시인인 것처럼. 그래 덜컥 두 권을 사긴 했습니다. ㅎㅎㅎ 더 읽어봐야겠어요.

hnine 2020-10-12 23: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보다 더 재미있다니까요. ^^

Falstaff 2020-10-13 08:40   좋아요 0 | URL
ㅋㅋㅋ 재미있게 읽어주시니, 아이구 좋아라. ^^;;
 
코스타리카 라스 로마스 - 200g, 홀빈
알라딘 커피 팩토리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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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후에 받아 오늘 아침에 내려 마시고 출근. 예상외로 좋음. 고소한 맛과 약한 산미가 으뜸. 흠, 조만간 더 사 먹어야지. 바리스타 아내도 만족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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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마거릿 애트우드 지음, 이은선 옮김 / 민음사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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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의 베팅 업체에서 누가 올해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될까 하는 사이트를 개설한 바, 캐나다의 추리/미스터리, 페미니즘 작가인 마거릿 애트우드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함께 공동 3위의 낮은 배당률을 기록했다.

 뭐 대한민국의 시인 고은 역시 다른 세 명과 함께 공동 6위로 랭크되어 배당률에 의한 선정 가능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 어쨌든 세계적으로 이름이 난 작가인 것은 분명하다. 우리나라에서 애트우드, 하면 근래 <시녀 이야기>와 <증언들>의 연작으로 장안 을지로 인쇄골목의 종이 값을 대폭 올려놓은 바 있으나, 나는 <눈먼 암살자>로 이이를 처음 읽었던 바, 그거 딱 한 권 가지고 팬이 되리라 작심을 해버렸다. 그렇다고 졸졸 따라다니면서 나오는 책마다 족족 읽어 해치운 수준은 아니고 이후 <시녀 이야기>, <도둑 신부>, <고양이 눈>에 이어 이번에 겨우 다섯 번째 애트우드를 읽은 것에 불과하긴 하지만.
  일단 애트우드의 책을 한 마디로 하자면, 재미있다. 재미야말로 소설문학을 즐기는데 제일 중요한 요소 아닐까. 전에 읽었던 것들과 달리 1996년 작품인 <그레이스>는 1843년 토론토에서 있었던 엽기 살인사건을 소재로 가져왔다. 그럼 책 이야기를 해보자.
  북부 아일랜드의 신교도로 감리교회 목사를 하다가 교회 운영비에 관한 수상한 집행의 혐의로 목사직을 박탈당한 전직 목사가 있었는데, 딸, 아들, 딸을 두었다. 큰딸은 집안이 그래도 괜찮을 때 건실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해 잘 살았는데, 두 번째부터 거덜이 나서 아들은 신대륙과 구대륙을 왕복하는 선원을 한다고 집을 나가 이후 전혀 소식이 없다. 작은 딸은 아일랜드 사람들 눈에는 가시 같아 보이는 잉글랜드 출신의 석수장이로 생긴 건 멀쩡한데 하는 일이라고는 애 만드는 일하고 돈 생기면 술 퍼먹는 일밖에 없는 날건달에게 시집을 갔다. 이 석수장이는 목사님 둘째 딸과의 사이에 무려 열세 명의 아이를 만들었으니, 이 가운데 살아 있는 게 아홉이요, 일찌감치 고단한 세상 마감한 것이 셋이고, 나머지 하나는 조용한 출생still born을 선택했다.
  석수장이 일도 일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근데 때마침 아일랜드에 기근이 닥쳤으니 무려 열두 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아갈꼬. 그래 큰이모와 후덕한 이모부의 도움으로 하루 하루 살아가다가, 이모부 댁에서도 하루 이틀, 한 명 두 명이지 어떻게 하고 한 날 열하나의 군식구를 봉양하겠느냐고. 그리하여 신대륙으로 이민을 권했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잉글랜드 출신 아버지는 누더기를 걸친 처자식을 데리고 이민선 삼등실에 몸을 뉘었던 거다. 그런데 그리 많지도 않은 나이에 열세 번이나 출산을 겪은 엄마가 아기집에 그만 종양이 생겨, 냄새나고 지저분하고, 쥐들이 어슬렁거리는 배 밑창에서 밤새도록 복통을 호소하다가 그만 세상을 뜨고 말았다. 큰딸 그레이스의 가방 속에는 집에서 가져온 낡은 린넨과 이모가 이별선물로 준 깨끗하고 좋은 린넨 천이 있었고, 그레이스는 이미 죽은 엄마도 자식들에게 좋은 린넨을 남기고 싶어 할 거라고 생각해 낡은 린넨으로 숨을 거둔 엄마를 싼 다음에 빙하가 둥둥 떠다니는 차디찬 대서양에 엄마를 수장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북아메리카. 캐나다. 애초부터 처자식에게 별 애정을 보이지 않던 아버지는 캐나다에 도착하자마자 육갑을 하시느라고 돈은 하나도 벌어오지 못해 아이들을 만날 쫄쫄 굶기면서도 자기만 어디 가서 떡이 되게 술을 마시고는 소위 ‘주취폭력’을 자식들에게 가하기 시작했다. 불과 조금 후 가정폭력이 상습화된 무능한 아버지를 피하고, 얼마 되지는 않지만 자신도 돈을 벌기 위해 그레이스는 하녀로 들어가기로 결정을 한다. 당시 하녀로 들어가 돈을 웬만큼 모은 다음 건실한 청년을 만나 시골에 작은 집을 짓고 가축도 몇 마리 기르면서 조금씩 가세를 확장하는 것이 이민 온 가정의 딸이 밟는 코스였단다. 그래 친절한 부자 올더먼 파킨슨 저택에서 월급을 1달러 받기로 하고 잔심부름을 했고, 월급날만 되면 아버지가 쳐들어와 삥을 뜯으려 했으나 그레이스는 25센트만 주고는 했다. 동시에 자기보다 고참인 ‘메리 휘트니’라는 절친을 만나 메리가 죽을 때까지 깊은 우정을 쌓는 행복을 누린다. 하녀 신분이라고 행복이 없는 건 아니니까.
  그러다가 메리가 죽은 다음, 어떻게 죽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몇 번의 이주를 거쳐 월급 3달러를 받기로 하고 리치몬드 근방의 시골에 있는 토머스 키니어 씨 댁의 하녀로 들어가게 되는데, 이 집에는 안주인이 없고 자신을 영입한 하녀 출신 가정부, 쉽게 말해 여성 집사인 낸시가 안주인 대신 집안일을 주관하고 있었다. 흠. 19세기 중반에 다른 집의 두 배(1달러→1달러 반→3달러) 수준에 달하는 월급을 받는 하녀. 유럽 작가들의 많은 작품 속에서는 주로 집주인의 아직 성숙하지 않은 아들이 자연스레 성적 접촉을 경험하게 되는 대상이 주로 하녀들이었던 터라 아랫것들 대하는데 별로 허물이 없는 키니어 씨가 처음부터 좀 수상하긴 했지만 결국 그레이스를 상대로는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으니, 왜 그런고 하면, 이미 낸시 몽고메리 양이 주인님의 침대 봉사를 담당하는 대신 가정부 주제에 심지어 순금 귀고리까지 달고, 멋진 드레스에 기타 부속 의류까지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아지 버릇을 남 줄 수 있나. 아직 열여섯 살이 채 되지 않은 그레이스. 아버지 닮아 곱게 생긴 외모에, 그래도 목사님의 손녀딸이라 예절도 바르고, 손까지 매워 일도 잘 하니 예쁘지 않을 수 없었을 것.
  이런 와중에 모난 돌 하나가 벌써 이 집에 들어와 있었으니 전직 사병私兵 출신 삐딱이 제임스 맥더모트. 주인님 키니어 씨가 새로 온 하녀 그레이스를 조금씩 귀여워하기 시작하니까 침대 봉사하는 낸시가 기분이 좋을 리 없을 것. 게다가 맥더모트는 사람 자체가 뻣뻣하니 매사에 삐딱이라 벌썬 눈 밖에 나 언젠가는 해고할 것임이 분명했는데 여기에 눈치 없는 낸시가 날이 갈수록 그레이스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맥더모트 자신도 그레이스의 어린 몸에 욕심이 없는 바는 아니어서 농담반 진담반으로 낸시와 키니어 씨를 살해하고 현금과 귀중품을 챙겨 미국으로 도망가 결혼하자고 제의했고, 위협적은 맥더모트의 말에 그저, 불만이 있는 상전들에게 하녀들이 자주 그러하듯이 그러자고, 절대 실행하지 않을 것이란 전제로 죽여버리자고 동의를 했는데, 정말로 맥더모트는 낸시의 머리통을 도끼로 팍 찍은 다음 피가 철철 흐르지만 아직 숨이 넘어가지 않은 낸시의 목을, 하필이면 그레이스의 손수건 또는 스카프로 졸라 죽인다. 이어서 외출하고 돌아온 주인님 키니어 씨의 가슴에 엽총을 발사해 살해하고 지하 창고에 쑤셔 넣은 다음, 계획대로 귀중품을 챙겨 주인의 말과 마차를 타고 밤새 토론토로 달려 새벽 다섯 시에 힐튼 호텔에 도착, 종업원들을 깨워 아침을 먹는다. 날이 밝자 배를 타 호수 건너 미국 땅에 도착해 여인숙에 방을 두 개 얻어 따로따로 자다가 새벽에 캐나다 리치몬드에서부터 따라온 추격팀에게 붙잡혀 토론토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게 된다. 맥더모프는 즉시 교수형, 그레이스는 최초로 사건을 수임 받은 법정변호사의 전략적 변호로 무기징역을 받아 목숨을 구하는, 당대의 엽기 사건이었단다.
  이게 1843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 시간이 흘러 1859년, 정신병원을 거쳐 그리스 신전 양식으로 킹스턴에 신축된 교도소에 입감된 그레이스는 맵찬 손끝으로 바느질과 재봉, 하여튼 그런 방면에 대단한 솜씨를 발휘하고, 수감생활 역시 타의 모범이 되던 바, 낮에는 교도소장의 집에서 침모 역할을 하고 밤에는 다시 교도소로 들어가 잠만 자는 행운을 얻게 된다. 여기에 지역 목사를 위시해 킹스턴에서 방귀 좀 뀐다는 부인네들을 주축으로 그레이스의 사면을 위해 진정서를 넣기 시작하는 일단의 집단이 생겨, 유럽에서 정신병리학을 전공한 의사이자 남자 주인공인 사이먼 조던 박사를 초빙하기에 이른다. 그리하여 조던 박사는 아름다운 그레이스 양을 자기가 원하는 날의 오후에 몇 시간씩 마주 앉아, 물론 방문은 열어놓은 상태로, 어렸을 때부터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의 모든 것을 듣고, 이를 메모해 정리한 다음, 진짜로 그레이스가 살인에 가담을 했는지 아닌지를 판별하려고 한다. 여기서 그레이스는 침착한 태도로 바느질을 하면서 바늘땀을 쉬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모든 것을 밝히며 무죄를 주장하는데, 바로 이게, 여태까지 앞에서 떠는 모든 건 다 곁가지에 지나지 않고, 그레이스가 진짜로 자신이 주장하는 것처럼 적어도 살인에 관해서 무죄인지, 아니면 거짓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이걸 밝히는 과정이, 찐이다.
  물론 그레이스가 진짜로 낸시의 목을 조르는 맥더모트를 도와 함께 교살에 가담을 했는지 아닌지, 나는 죽어도 알려드리지 않겠다. 진짜다. 지금 누가 내게 달려와, 그레이스가 죽였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라고 목에 칼을 들이밀고 알려달라고 해도 난 그럴 수 없다. 아 글쎄 진짜라니까. 하나만 말씀드리지. 그레이스가 사십대 중반, 한 마흔네 살 가량 되었을 때 정말로 사면을 받아 미국으로 이주해 나름대로 편안한 인생 후반을 누린다는 거. 이 정도야 말해드릴 수 있지. 나머지는 알아서들 생각하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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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10-08 09: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메리가 죽은 다음, 어떻게 죽는지는 알려드리지 않겠지만‘

에서 웃었습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저도 읽어볼래요. 큰일났네. 리뷰 읽을 때마다 책은 잔뜩 사두고 이걸 다 언제 읽나요.

잠자냥 2020-10-08 09:39   좋아요 1 | URL
이거 증말 재미나요. 꼭 읽으세요. 폴스타프 님 말처럼 애트우드 여사는 정말 재미 하나는 보장입니다. 아니 뭐 다른 것도 다 보장이지만 ㅋㅋㅋㅋ

Falstaff 2020-10-08 09:4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다 읽으셔야 왜 제가 목에 칼을 들이대도 알려주지 않으려 하는지, 아시게 될 겁니다. ㅋㅋㅋㅋ 잠자냥 님은 버~얼써 알고 계시고요. 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10-08 09:52   좋아요 0 | URL
샀어요 방금전에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발머리 2020-10-08 1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이 책 1.5번 읽었는데 제가 내용을 많이 잊어버렸다는 사실을 Falstaff님 글을 읽으며 확인했습니다 ㅎㅎㅎㅎㅎㅎㅎ
전 <미친 아담 3부작>을 좋아합니다. 오늘 아침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은 <도둑 신부>구요.
마거릿 애트우드님 노벨상 타시길 기원합니다!!

Falstaff 2020-10-08 15:10   좋아요 0 | URL
엉엉엉.... 반차 내고 치과 갔더니 어금니 뽑고 임플란트 하래요! 벌써 몇 개 째야 이거. 흠. 나이가 몇 갠데 좀 차분하게 답글 쓰겠습니다.
<도둑신부> 죽이게 재밌습니다. 재미만 보면 이 책보다 훨 더 합니다. 탁월한 선택입니다!!!!!
저는 코맥 맥카시가 명단에 든 거 보고, 와, 노벨 문학상도 이젠 그만 하지, 싶었답니다. 극혐 작가 가운데 한 명인데 와.... 그래서 제가 아마추어인줄 모르겠지만요. ㅋㅋㅋㅋㅋ
저는 희망사항이, 매릴린 로빈슨이예요! 정말 멋있는 이모님. 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0-08 15:21   좋아요 0 | URL
Falstaff님~~~ 저도 치과를 싫어하지만 자주 가는 입장으로서ㅠㅠ 심심한 위로를 전합니다. 잘 치료받으시기 바래요.
그리고, 제가 가까운 사람이 코맥 맥카시를 좀 좋아해서요. Falstaff님이 싫어하시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ㅎㅎㅎㅎㅎㅎ

Falstaff 2020-10-08 15:24   좋아요 0 | URL
아휴, 그건 읽어보셔야 해요. 엽기. 전 사람이 순진하고 착해서 엽기 잔혹은 극혐이랍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단발머리 2020-10-08 15:37   좋아요 0 | URL
아아아.... 글쿤요. 아직 코맥 맥카시를 읽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해야 할까요? ㅎㅎㅎㅎㅎㅎ

다락방 2020-10-08 17:00   좋아요 0 | URL
코맥 매카시 좋아하는 제가 여기있습니다! ㅋㅋㅋㅋㅋ
저는 코맥 매카시의 문장들을 너무 좋아해요 ㅠㅠ 그래서 막 이것저것 사두었는데 언제 나머지를 다 읽을지 모르겠어요. 내친김에 코맥 매카시를 읽어볼까봐요. 여전히 좋은지 말입니다.

저 도둑신부 되게 재미없게 읽었던 기억이 나거든요. 아주 오래전에요.
이것도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아이참 뭐 이렇게 읽을게 많아 ㅠㅠ

Falstaff 2020-10-08 17:18   좋아요 1 | URL
으.... 근데 다락방 님 좀 엽기 기운이 있으신 건 맞죠? ㅋㅋㅋㅋ
전, 으아, 총질하고, 그것도 모자라 신체 절단하고, 아이고, 정말 억지로 억지로 끝까지 읽었는데요. ㅎㅎㅎㅎ
도둑신부, 두 번 읽기는 좀 그렇잖을까 싶습니다. 걍 참으세요. ^^

syo 2020-10-08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늘 궁금했던 건데, 이런 글을 내리 파바바박 쓰시는 건가요? 전 책 덮는 순간 망각이 시작되서 소설 리뷰를 쓸 수가 없어요 ㅠㅠ

소설왕 폴스타프님 부디 비결을 전수하옵소서....

잠자냥 2020-10-08 18:47   좋아요 0 | URL
메모하시면서 읽는대요 (소곤소곤)

Falstaff 2020-10-09 08:10   좋아요 3 | URL
ㅎㅎㅎ 영업비밀인데 들켰네요,
등장인물의 관계도 그림만 하나 그려놓으면 나중에 생각이 다 납니다. 연관관계는 관계도 아래에 작은 글씨로 써보세요.
중요한 거 하나. 전 읽다가 무릎을 탁, 치는 멋있는 문장은 절대 메모 안 해요. 나중에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거 써먹을까봐요. 세상 싫어하는 게 그래서 필사입니다.

stella.K 2020-10-09 16:58   좋아요 0 | URL
멋지시군요. 무릎을 탁, 치는 멋있는 문장은 절대 메모 안하시고,
필사를 안하신다니!
저는 팔이 아파서 못하고 있는데 꼭 해야하나 희의하고 있었습니다.
명쾌하시네요. 저도 안 할랍니다.ㅋ

Falstaff 2020-10-09 19:11   좋아요 1 | URL
에그, 뭘요. 그냥 그렇게 사는 거지요.
하여튼 전 필사 반대합니다. 신o숙, 이 여자가 필사로 인생 삑사리 낸 대표적인 사람일 겁니다. 에휴.... 사는 게 뭔지, 참.

coolcat329 2020-10-08 2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제가 폴스타프님 글 읽고 사다놓은 책이 지금 한 뭉치인데요 그 중 알지도 못했던 메릴린 로빈슨도 있죠. 근데 빨리 읽지도 못하는데, 또 마가렛 애트우드가 이리 재밌다하시니 등에서 땀이 나네요. <시녀이야기>만 읽어 봤는데 네 참 재밌었어요.

Falstaff 2020-10-09 07:23   좋아요 1 | URL
근데 매릴린 로빈슨, 정말 재밌죠? 아니, 재미라기 보다 아휴, 그 쓸쓸함이라니. 요즘 같은 가을에 친짜 어울리는 작품들입니다. ^^

coolcat329 2020-10-09 20: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 읽어봤지만 이 가을에 진짜! 어울리신다니 11월에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Falstaff 2020-10-09 21:28   좋아요 1 | URL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노베첸토 비채 모던 앤 클래식 문학 Modern & Classic
알레산드로 바리코 지음, 최정윤 옮김 / 비채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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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우연하게 표지 그림이 촌스러운 <이런 이야기>를 사서, 정말 별 기대 없이 읽은 후에 무릎을 탁, 치고 나서 단박에 이이의 다른 작품을 검색해 <비단>도 읽었다. 이어서 여간해 선택하지 않는 ‘얇은 책’ <노베첸토> 마저 찾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바리코의 유혹적 글쓰기에 매료되었나보다. 19세기 말에 토리노 근방의 시골 진흙바닥 한 가운데에다 자동차 정비소를 세운 파르리 씨의 아들 울티모 파르리가 자동차가 아닌 ‘길’을 탐색하는 한 평생을 그린 아름다운 소설 <이런 이야기>, 최상의 누에알을 얻기 위해 남프랑스에서 오스트리아를 거쳐 유라시아 대륙을 횡단하고 시베리아 스텝지역과 바이칼 호를 지나 아무르 강을 따라 드디어 태평양과 만나면 여기서 다시 네덜란드 밀수꾼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가 이시카와, 도야마, 나가타, 후쿠시마, 사라카와라에 도착해 다시 배를 타야 도착하는 섬까지 일 년에 한 번 왕복을 해야 하는 역마살 낀 인간 에르베 종쿠르의 이야기인 <비단> 역시 ‘길’이 중요한 매개물이었다. 이번에 읽은 <노베첸토>는 아예 부르주아 상류층부터 가난한 이민자들을 싣고 유럽과 아메리카를 왕복하는 배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단 한 번도 배에서 내리지 않는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 이야기 역시 평생을 ‘바다’라는 ‘길’ 또는 ‘물의 유동성’이란 운동이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한다. 왜 바르코는 자기 소설에서 이렇게 번번이 길에 집착할까, 또는 집착하는 것처럼 보일까. 혹시 길, 그것을 따라 걷거나 말을 타거나, 배나 차를 타고 가는 것이 인생을 살아가는 일과 비슷해서 그런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지.
  20세기가 시작되는 1900년의 보스턴 항구. 승객들이 모두 내린 버지니아 호의 일등실 연회장 그랜드피아노 위에 푸른 색 잉크로 ‘TD 레몬’이라고 인쇄된 상자 안에 이제 낳은 지 열흘이나 됐을까 한 갓난 사내아이가 울지도 않고 눈을 똘망똘망하게 뜨고 누워 있는 것을 필라델피아 출신의 엄청난 거구 흑인인 대니 부드먼이 발견해 마치 자신의 아이처럼 키우기로 결심을 한다. 누구의 아이일까? 1900년, 유럽에서 밀려드는 가난하고 임신한 엄마가 악취가 코를 찌르는 삼등 객실 안에서 낳기는 낳았지만 낯선 땅에서 도무지 키울 엄두가 나지 않아서 아이를 상자에 담아, 누가 데려가 키우더라도 이왕이면 부잣집 마나님이 키우라고 일등실 전용 연회장의 피아노 위에 올려놓았을 터. 선원 노릇 일박이일 하는 게 아니라서 그 정도는 일반 상식이지만 대니 부드먼이 직접 아이를 발견한 건 이번이 처음이라, 피부색은 다르지만 진짜 자신이 아버지인 듯한 기분도 들고 그래 자기 이름을 앞에서 붙인 후, 상자 속 인쇄된 ‘TD 레몬’을 합해 아이를 ‘대니 부드먼 TD 레몬’으로 해놓고 보니 뭔가 하나 빠진 것 같아, 제일 뒤에다가 20세기를 뜻하는 이태리 말, ‘노베첸토’를 얹어 아이의 이름을 ‘대니 부드먼 TD 레몬 노베첸토’라고 정해버린 내력이다.
  이날부터 정확하게 8년 2개월 11일 후에 폭풍우가 몰아치던 날, 배위에서 커다란 구조물이 쓰러지며 대니 부드먼의 등을 후려 갈겼고, 3일 후에 노베첸토는 두 번째로 고아 상태가 되어 버린다. 애초에 노베첸토가 세상에 살고 있다는 서류 적的 증명 한 장 없는 터이라 이번에 아이를 사우샘프턴에서 하선시켜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배려하고자 했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순간 아이는 사라져버린다. 어디 갔을까. 22일 동안 배 안을 샅샅이 수색해도 아이를 찾을 수 없어 결국 실족했을 거란 결론을 내리고 슬픔에 빠진 선원들이 리우데자네이루로 향하고 있을 때, 이틀 뒤 한밤중, 선원들은 처음으로, 노베첸토가 발을 달랑거리면서 자기가 최초 발견된 그랜드피아노를 연주하는 모습을 구경할 수 있었다. 갑자기 들리는 피아노 소리에 잠에서 깨어 나이트가운 차림으로 객실에서 쏟아져 나온 온갖 VIP들 가운데 미국의 유명 보험회사 사장 사모님은 나이트크림 위로 눈에서 흘러내린 닭똥 같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단다.
  이로부터 20년 후, 인생에 중요한 것은 오직 하나, 트럼펫 연주뿐이던 화자 ‘나’가 빅토리아 호의 밴드 멤버로 승선한다. ‘나’의 나이는 열일곱. ‘나’는 대니 부르먼 TD 레몬 노베첸토와 점점 친하게 지내, 이 작품 <노베첸토>의 가장 화려한 장면으로 다가간다. 폭풍우가 거센 밤, 빅토리아 호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은 ‘나’는 비틀거리며 복도를 배회하고 있다가 급기야 길을 잃어버릴 찰나, 슈트를 입고 완벽하게 안정된 가벼운 발걸음으로 다가온 노베첸토에 이끌려 예의 일등실 연회장에 입장한다. 피아노 앞에 앉은 노베첸토는 ‘나’에게 피아노의 바퀴 고정용 죔쇠를 풀어달라고 부탁하고, ‘나’는 완전히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기어이 죔쇠를 풀고 만다. 이어 자기 옆자리에 ‘나’를 앉힌 노베첸토는 큰 파도가 닥쳐 배가 기울 때마다 휙, 휙, 미끄러지는 검은 범선, 그랜드피아노를 지휘하는 선장처럼 꿈같은 연주에 골몰한다. 피아노가 중력에 이끌려 좌르륵 굴러 벽에 부딪힐 것 같은 순간, 마치 무언의 명령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처럼 반대 방향으로 확 쏠려 바퀴를 굴리고, 또 다른 방향으로 굴리기를 몇 차례, 피아노와 우리는 하나가 되어 정신 나간 발레리노처럼 음울한 왈츠에 맞춰 춤추고 있던 것이다. 그러다가 드디어 어느 순간 통유리를 향한 돌진이 멈추어지지 않아 이 검은 범선, 검은 발레리노의 왈츠는 끝맺게 되고, 노베첸토와 ‘나’는 극도로 화가 난 선장에 의하여 아래층 기관실에 유폐당해 내려가며 킬킬킬 웃고 있다.
  버지니아 호에서 태어나 배 안에서 한 평생을 보내는 사내, 대니 부르먼 TD 레몬 노베첸토의 한 살이를 아름다운 문장과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알레산드로 바리코. 피아노 여든여덟 개의 건반으로 여태까지 없었던 음악을 연주한다는 착상까지는 누구나 가능하겠지만, 어떻게 폭풍우 부는 배에서 피아노의 고정용 죔쇠를 풀 생각을 했을까. 아이디어가 놀랍다.
  혹시 그랜드피아노를 이용해 담뱃불을 붙이는 방법을 아시나? 잘 하면 라면 한 봉지 정도는 끓일 것도 같은데. 정답은 책에 나와 있으니 궁금하시면 직접 읽어보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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