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개를 들여놓았나
마틴 에이미스 지음, 허진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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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에서 유명한 유머 작가를 고르라면 제롬 K. 제롬과 킹슬리 에이미스를 꼽을 듯하다. 훨씬 선배인 제롬은 <보트 위의 세 남자>로, 에이미스는 <럭키 짐>으로 명성을 즐기고 있는데 이 에이미스의 아들이 또 블랙 유머의 펜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으니 <런던 필즈>를 비롯해서 <돈 혹은 한 남자의 자살 노트>를 재미있게, 인상 깊게 읽은 적이 있다. <누가 개를 들여놓았나>는 책 표지 디자인과 제목이 좀 오버스러워서 영 손이 가지 않아 여태까지 읽기를 미루어왔다가 이번에 ‘해치웠다.’ 원래 제목은 ‘Lionel Asbo’, 주인공 이름인 ‘라이오넬 애즈보’ 그대로 썼으면 더 좋았을 것을 그랬다.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른 한 명은 데스먼드 또는 데스 혹은 데시 페퍼다인. 라이오넬 애즈보가 외삼촌이다. 이 복잡한 가계를 먼저 소개해야 하겠다.
  먼저 그레이스 페퍼다인. 아주 어려서부터 비틀스의 광팬이었다. 근데 매우 조숙한 어린이여서 초등학교 시절이었던 만 열두 살 때 그만 덜커덕 임신을 해 딸 실라를 낳아버렸다. 그리고 열여덟 살이 될 때까지 아래로 연달아 여섯 명의 아들을 낳았으니 이름을 존, 폴, 조지, 링고, 다섯째에 와서 이제 거의 기억하지 못하는 옛 비틀스 멤버의 이름을 따 스튜어트라고 했고, 여섯 번째 또 아들은 낳으니 더 가져다 붙일 비틀스 멤버가 없어 신경질을 벅벅 내다가 안무가 라이오넬 블레어에서 따온 ‘라이오넬’이라 불렀다. 이 라이오넬의 아버지가 첫째 딸 실라의 아버지와 같을 뿐이고, 나머지 다섯 명의 친아버지는 스칸디나비아, 라틴 아메리카, 아시아 등의 어떤 나라 출신인 ‘것 같았다.’ 쉽게 말해 누구인지 모른다는 말씀.
  이런 환경에서 나온 아이들이 보통의 영국인처럼 자라기는 매우 힘든 일. 멀리 갈 것 없이 맏이 실라만 보더라도, 문제적 환경과 문제적 인간들의 집합소인 디스턴 타운에 하나밖에 없는 스퀴어스 프리 초중등학교, 영국에서 경찰출동이 제일 많고, 중등학교 자격시험 합격률이 제일 낮고, 무단 결석률이 제일 높으며, 정학, 퇴학, 청소년 범죄 선도회 정도인 PRU 강등 비율이 가장 높아, 자연스럽게 소년원을 거쳐 청소년 감옥의 코스를 따르는 경우도 제일 많은 학교에서 완벽하게 공부도 하지 않는데도 수업시간에 들은 것만 가지고 전 과목 A를 받는 천재성을 지녔음에도 나중에 노숙자로 떨어질 운명을 지닌 자신보다 몇 살 더 먹은 흑인 아이와의 사이에서, 자신의 엄마와 같은 나이인 열두 살 때 그만 또 다른 주인공 데스먼드 페퍼다인을 출산해버렸다. 데스먼드, 데스, 데니는 생전에 딱 한 번 친부를 본 적이 있는 바, 공원의 벤치 위에서 잠을 자던 광경이었으며, 어머니는 그것이 자기 생전 딱 두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본 자기 아들의 친아버지 모습이었단다.
  실라와 유일하게 같은 아버지를 둔 우리의 주인공 라이오넬 페퍼다인은, 문제아들의 집합소인 스퀴어스 프리에서도 눈에 띄는 말썽꾼이라서 PRU를 거쳐 소년원, 청소년 감옥을 밥 먹듯 들락날락 거렸고, 성인이 돼서도 삶의 반 정도의 세월을 주로 폭력과 장물취득의 범죄에 연루되어 교도소에서 보낸 인물이다. ‘반사회적 행동금지 명령 Anti-Social Behaviour Order’을 하도 많이 받은 라이오넬은 그것도 근사한데, 싶어서 이름 자체를 페퍼다인에서 애즈보Asbo로 바꾼 인간이다. 리오넬 메시와 같은 이름을 쓰는 라이오넬에게 누구보다 빠삭한 세 가지 분야가 있었으니 바로 ‘직업 범죄자의 삼위일체’라 불리는 악행과 감옥과 형법이었다. 책을 열면 벌써 로즈 놀스라는 남자를 병원에 입원해 장기 치료를 받아야할 만큼 폭행해 고소를 당하느냐 마느냐 하는 기로에 서 있는 장면이 나온다. 물론 결코 고소 같은 걸 당할 인간은 아니지만. 라이오넬은 조와 제프라는 이름의 미친 핏불 테리어를 (엘리베이터가 21층까지만 올라오는, 즉 고장난)아파트 33층에서 사업상 필요 때문에 용맹성 증강을 위해 갖은 학대를 가해가며 키우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업은 주로 채권추심이나 경쟁자 협박, 때로는 처치용을 말한다. 이 정도면 그림이 그려지시지?
  근데, 독후감을 읽는 분께서는 불쾌하고 지저분한 느낌이 들 수도 있지만 마틴 에이미스의 코믹한 필설로 인해 경쾌하게 그리고 있으니 너무 그쪽으로 생각은 하지 마시고, 그레이스 페퍼다인 할머니에게 새로운 애인이 하나 생긴다. 바로 외손자 데스먼드. 데스먼드는 이제 열다섯 살에 불과하다. 데스는 학교를 거의 빠지지 않고, 수업 중에 졸지도 않으며, 선생을 공격하거나 화장실에서 마약에 절어 있지도 않는데다가 공부도 엄청 잘 해서 학교 안에서 겉도는 아이로 찍혀 흉포한 괴롭힘을 당할 충분한 이유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불과 여섯 살 많은 막내 삼촌의 막강한 영향력의 그늘 아래에 잘 다니고 있는 모범생이다. 모든 과목을 잘 한다. 진짜다. 가끔 이런 재수 없는 아이들이 있다. 그리하여 책 표지에 데스를 일컬어 “르네상스 소년” 즉, 다빈치처럼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뛰어난 소년이라 씌어 있는 거다. 근데 할머니가 사는 아파트에 배수관을 고쳐주러 갔다가 할머니가 슬슬 분위기 잡아가며 만지는 통에 정말로 성적인 접촉까지 간 것인데, 생각만 해도 징그럽지? 열두 살에 엄마를 낳고, 엄마가 데스를 또 열두 살에 낳아서 할머니와의 나이차이가 불과 24년, 이제 겨우 서른아홉 살이다.
  이런 일이 벌어지면, 틀림없는 중범죄인데, 상대적 약자, 이 경우엔 손자인 데스에게 더 깊은 상흔이 남는다. 그는 남은 전 생애에 걸쳐 끔찍하지만 아물지 않은 상흔을 지니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어떻게 관계가 끝이 나느냐고? 할머니가 같은 학교에 다니는 학 학년 아래, 입술에 피어싱을 한 미소년 로이 나이팅게일과 관계를 시작하면서, 할머니도 손자와는 아무래도 좀 그래서 일찌감치 정리를 했던 거다. 그러나 아뿔싸, 막내 삼촌 라이오넬이 이 사실을 알아내고 로이를 납치해 모종의 장소에 팔아넘긴다. 쥐어뜯어 뜯긴 입술 살점이 붙은 피어싱을 데스에게 기념으로 준다. 나, 라이오넬의 엄마하고 했다면 이 정도는 각오를 하고 해야지.
  지금 데스는 삼촌하고 함께 산다. 몇 년 전, 슈퍼마켓에서 살짝 미끄러져 넘어지면서 머리가 바닥에 부딪혔지만 금방 일어나 웃음을 지었던 엄마가 다음날 아침에 그만 숟가락을 놔버렸던 거다. 라이오넬도 그렇고 데스도 그렇고, 불과 여섯 살 많은 삼촌이 마치 아버지처럼 데스를 보살폈다고 주장할 정도로 많은 도움을 준 건 맞는 듯하다. 하여튼 삼촌이 시키고, 권하고, 가끔 강요하는 딱 반대로만 하면 세상사는 정답이 된다는 것을 일찍 깨친 데스먼드에게는.
  그런데, 크고 크고, 또 큰 사건이 벌어진다. 삼촌의 친구이자 사촌인 말론 웰크웨이와 한때 대외적으로 애인사이였던 지나 드래고의 결혼식 때 난리법석, 패싸움을 유도하여 크게 사고를 쳐서 또다시 교도소로 간 라이오넬을 면회 갔을 때였다. 평소 절대 복권 따위는 사지 않는 라이오넬이 단지 늙은 수감자를 괴롭히고 싶어서 복권 교환권을 강탈을 했는데 면회 온 데스먼드에게 로또 번호를 써 우편으로 보내라고 지시를 했었다. 근데, 데스먼드가 찍은 번호의 로또가 그만 무려 1억 4천만 파운드, 우리 돈으로 약 2,300억 원에 당첨이 된 거다. 와우!
  자, 여기까지만.
  이제 짧은 감상. 서양 유머 코드지만 요새 사람이라서 읽으면서 낄낄대는데 문제가 없다. 즐거운 시간을 만들 수 있는 재미있는 책이지만, 내 경우에, 후반에 들어 불길하고 끔찍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장면이 있고, 비슷한 유머 또는 말장난이 워낙 계속되니 나중엔 좀 질리는 감이 있었다. 그래도 이만한 블랙 유머를 선택하기 위하여는 행운이 필요하니 한 번 읽어봄 직도 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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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토 창비시선 2
조태일 지음 / 창비 / 197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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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1년생 조태일. 스무 살 때 4월 혁명의 한복판에 섰고, 스물한 살 때 5월 쿠데타로 자유와 민주주의의 종막(이라기보다 오랜 단절)을 목도한다. 스물네 살, 1964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아침 船舶선박>이 당선되어 중앙 문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등단 2년 전에 <다시 鋪道포도에서>를 전남일보에 실은 적이 있다. 거구와 튼튼한 골격을 지닌 이 사내의 스무 살 시대에는 이후에 꾸준하게 내보일 강건한 반골反骨의 기색을 발견할 수 없었다. 반면에 1975년에 간행한 《國土국토》는 출간하고 불과 몇 년 후 내가 읽어보려 책을 구하던 시기엔 이미 금서의 목록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이이의 초기 시들이 당시 모더니즘을 구가하던 상투성과 모호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었다는 것을 알고, 나의 20대 시절에 약간 놀랐던 기억이 난다. 이후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國土국토》는 내 손을 떠났고, 이제 다시 책을 주문해 읽었을 때에야 그랬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다행이다. 알라딘에서 내가 책을 구입하고 곧바로 품절 표시가 떴으니. 그리고 아쉽다. 글씨체는 예전 금속활자 특유의 모습이로되 실제 활자로 찍은 질감이 나지 않아서.
  조태일. 말이 필요 없는 반골기가 가득한 강건한 반항시인. 1964년에 등단하여 굴욕적인 한일 협상과 베트남 파병이 결정되는 것을 본 그는 다음해인 1965년에 《나의 處女膜처녀막》 연작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반항시인의 대열에 서게 된다. 시인이 말하는 ‘처녀막’은 자유이고, 민주주의이고, 자유와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한 시민들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어느 한 순간 5월의 쿠데타에 의해 열상裂傷을 입고 말아서 시인을 통탄하게 만든다.


  오월 내가 누워 있던 잔인한 새벽은 / 침실은 저 가까운 기억의 바다로 가 / 크게 생각하라. 크게 생각하라. // (중략) // 나의, 당신의, 상한 처녀막은 / 혁명으로(65년에 박정희 쿠데타라고 말하는 자체가 자살행위라 ‘혁명’이라 불렀던 것으로 짐작함) 파열돼서 부끄러워라. / 부끄러워라. 당신의 병사의, 시인의 처녀막도 / 혁명으로 파열돼서 정말 원통해라. / 아아, 내 작은 한줌의 자유여. 민주여. / 나의 상한 처녀막 근처에 웅성이는 / 고달픈 아우성을, 쫓기던 음성을 듣는가. (후략)  <나의 處女膜 ①> 부분.


  평론가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는데, 나는 위의 연작시를 읽으면서 ‘울분의 시’라는 의미가 주는 명확한 한계, 즉 현재 처한 상태에 관한 슬픔과 분노와 그것들의 토로 이상을 발견하지 못한다. 이런 ‘울분의 시’는 일찍이 김수영이 말했던 바, 혁명은 이루어지지 않고 방만 바꾸어버린 것과 유사하다. 그리하여 조태일 역시 반항시인에서 진정한 반항이란 뜻의 ‘저항시인’으로 한 발 더 나갈 것을, 독자들은 원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시인 스스로도 시대가 점점 더 혹독한 정치적 겨울로 진입함에 따라 저항의 방편으로 시작詩作의 방향타를 조정했을 수밖에 없었으리라.
  <참외>를 읽어보면, 먼저 참외의 생김을 “누우런 주먹들”이라고 칭함으로써 그 달큰하고 부드러운 과육을 미각의 유혹으로 느끼지 않고 “불끈 쥐고 불끈 쥐고 사랑을 불끈 쥐고” 세상 곳곳에, “어느 놈들은 벌판에 홀로 홀로 남아 / 어느 놈들은 청과물시장 멍석 위에서 / 불붙는 살빛 불붙는 서러운 마음씨 부비며 / 누우렇게 허옇게” 우는 강건한 주먹들, 미음의 대상을 타도할 수 있는 가장 기초적인 무기로 인식하기에 이른다. 반면에 현실을 압도하는 파시스트 정권에 대하여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 / 때 찌든 삼베치마 앞에서 털 앞에서 / 땀나는 가슴 앞에서 콩크리트 앞에서 / 저것들은 하느님이다. 얼굴 고운 악마님이다.”라고 선언을 하니 이제 남은 건 때가 찌든 삼베치마를 입은 아낙들, 땀나는 알 가슴을 내놓은 남정들이 하느님, 얼굴 고운 악마님을 물리치는 것. 그리하여 “자유가 있느냐, 숨죽여 눈으로 물으면 / 민주가 있냐, 숨죽여 뼉다귀로 물으면 / 없다, 안 돼 있다, 뚜렷하게 대답하고 / (중략) / 침들도 그 말 좀 들어 보자고 /불끈 쥐고 불끈 쥐고 주먹을 불끈 쥐고 / 왼쪽 오른쪽 귀 앞세우고 솟아”나야 한단다.
  그러나 세월은 오리무중, 후배 시인 최승자 말대로 “아무리 기총소사를 가해도 현실은 요지부동이었다.” 오히려 터져 나온 것이 1972년 소위 ‘10월 유신’이라는 괴물. 대통령은 장충체육관에서 미리 선발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에 의하여 투표로 결정을 하고(첫 번째 투표에서 99%의 찬성을 기록했다.), 국회의원의 삼분의 일을 대통령이 임명하며, 대통령은 헌법의 효력을 일시 중지시킬 수 있는 초헌법적인 기구로 상승시키며, 임기 6년에 무제한 연임이 가능한, 본격적인 독재 체제로 접어든다. 유신을 기점으로 박정희는 국민의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황제로 등극한다.
  암울한 시기. 암살이 아니라면 결코 종식되지 않을 것 같은 독재의 시절. 이때 조태일은 마흔일곱 편의 시로 구성되어 있는 연작시 《國土국토》를 1971년부터 5년간에 걸쳐 마무리하고, 75년에 <國土序詩국토서시>를 덧붙여 이 시집을 간행한다. 그리고 순식간에 판매금지 조치를 당한다. 국토 연작은 애초에 국토-1, 국토-2... 이런 식으로 썼으나 시집 간행 즈음해서 각각의 시에 따로 제목을 붙였다고 시인의 말에 나와 있다. 당시 잡지에서 조태일의 시를 찾아 읽기에는 나도 너무 어렸을 적이다. <국토> 연작에서도 고르게 현 시대에 대한 슬픔과 울분과 통음이 등장한다. 동시에 저항의 노래도 포함을 하고 있으나, 때는 엄혹한 공포의 시대, 판을 뒤집자는 직설은 간혹 일신의 생명을 담보로 해야 했으니 깊숙한 은유의 옷을 입고 등장한다. 이렇게.


  번개가 친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흐린 눈빛이지만 부딪쳐 보자.
  천둥이 운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쉰 목소리지만 합쳐서 목청을 뽑자.
  벼락이 친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四足(사족)을 동원해서 맨바닥이라도 치자
  우박이 쏟아진다, 아내야 바싹 다가오렴
  메마른 눈물이라도 곧게 떨쿠어 보자.


  아내야 흐린 날은 서러운 살결이나
  축축하게 부비다가
  전류가 잘 통하는 피뢰침을
  당나귀 귀처럼 머리 위에 꽂고
  의좋은 꼭둑각시처럼 춤을 추자
  높은 데 아니면 벌판이라도 좋다.
  피뢰침을 꽂고 춤을 추자.  <흐린 날은 - 國土·20> 부분


  이외에도 명편들이 즐비한 시집이다. 어떻게 지난 시절을 견디고 왔는지 뒤돌아보면 참 대견하기도 하고 짠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안타깝기도 하다. 오래 기억해야 마땅할 시인을 나는 너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낸 것이 아닐까 싶어 조금은 송구한 마음과 함께 시집을 읽었다. 뭐 세상이 다 그런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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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마지막 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3
로랑 고데 지음, 이현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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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주 오래 전, 희랍에 정말 잘 생기고 힘도 좋은 홀아비가 살았다. 이 홀아비는 죽은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서 식음을 전폐하고 만날 리라를 타며 마누라 타령만 하고 있으니 이를 어쩔꼬. 어떻게 청승을 떠는가 하면, 아래 영상을 보시라. “에우리디케 없이 아무 것도 할 수 없네.” 프랑스의 카스트라토, 아니, 카운터테너 필리프 자루스키가 노래한다.

Che far​o senza Euridice


  이하 내용은 아실 것. 아내를 너무 사랑해 횃불 대신 황금가지를 들고, 아니다, 황금가지를 손에 들었던 인물은 아이네이스구나, 하여간 지하에 내려가 하데스와 담판을 지어 에우리디케를 다시 세상으로 끌어올리려는데, 여봐 오르페우스, 당신을 위해서 하는 얘긴데, 이왕 죽은 마누라를 다시 살린다고? 다시 생각해봐, 지하의 왕이자 유피테르와 동등한 힘을 가진 형제인 하데스가 진지하게 조언을 하다가, 도무지 오르페우스의 뜻을 꺾을 수 없음을 알고 할 수 없이 허락을 하니, 단 조건 하나를 건다. 지상에 도착할 때까지 뒤를 돌아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보면 오르페우스의 아내는 다시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것. 그리하여 오르페우스는 에우리디케를 뒤에다 달고 지상을 향하는 끝없는 계단을 오르는데, 뒤에서 에우리디케는 연신 여보, 낭군, 나 보고 싶었어? 보고 싶었는데 어떻게 얼굴 한 번 안 보는 거야? 속도 모르고 쫑알대다가, 나중에는 아예 강짜를 부린다. 오르페우스가 처음엔 다시 아내를 찾았다는 기쁨 때문에, 그러다가 좀 귀여워서 참고 올라가긴 하지만 점점 신경질이 돋기 시작한다. 신경질도 삼세번이라 자꾸 여보 영감, 나 죽자마자 좋아서 변소 가서 웃었지? 아니면 어째 잘 지냈냐고 말 한 마디가 없어? 바가지 박박 긁는지라, 늦게나마 지옥의 황제 하데스의 충고가 머리에 떠올라, 그래, 그래도 명색이 신이 한 조언이잖아, 에잇 좋다, 이제는 끝내자, 이만큼이면 됐다, 하고 고개를 휙, 돌려 에우리디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고, 그 순간 에우리디케는 까마득한 지옥의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이제 여자라면 신물이 난 오르페우스는 본격적으로 예쁘게 생긴 남자애를 사냥하기에 이르렀다가, 디오니소스 축제 때 성난 여인들에 의하여 몸이 갈기갈기 찢겨 죽는 끔찍한 최후를 맞는 이야기.
  왜 이 이야기를 하느냐고? 그냥 심심해서. 안 알려준다.


  1980년 6월, 나폴리. 마테오와 줄리아나 데 니티스 부부, 남편 마테오는 택시 운전수, 아내 줄리아나는 산타루치아 그랜드 호텔의 청소부를 하면서 여섯 살 먹은 외아들 필리포를 키우며 가난하지만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 하루는 줄리아나의 직장에 단체손님이 들어 조금 일찍 출근을 해야 해서 아빠 마테오가 꼬마 피포를 학교에 데려다 주기로 했단다. 근데 아빠도 아침 일찍 공항까지 가는 손님과 예약이 된 상태라 피포를 깨워 함께 택시에 태워 손님을 공항까지 모셔드리기는 했으나 도시로 오는 길에 그만 지옥 같은 교통체증에 걸려버리고 말았다. 거의 다, 나폴리 시내까지 와서. 이미 지각을 한 상태라 조급해진 아빠는 차를 길가 한 구석에 세워두고 꼬마 피포의 손을 잡고 뛰기 시작했다. 차라리 뛰어가는 게 빠를 거 같아서. 피포가 어른인 아빠를 따라가기가 쉬웠겠어? 그래 자꾸 좀 쉬었다 가자고 하는데도, 지각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빠진 아빠는 억지로 피포를 끌고 가다가 파체(Pace, 평화)골목과 포르첼라 거리가 만나는 모퉁이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모여선 가운데를 기어이 뚫고 들어간다. 부자가 군중들의 가운데쯤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총소리가 귓전을 때려 본능적으로 아빠는 꼬마 피포를 품에 꽉 안고 인도에 팍 엎드렸지만, 조금 후, 총알 하나가 꼬마 피포의 복부를 관통해버렸고, 피포는 그 길로 세상을 등진다.
  1980년 9월, 장례식이 끝나도 부부에게 일상적 생활이라고는 없다. 마테오는 택시를 끌고 밤새 나폴리 시내와 시외를 손님도 태우지 않고 돌아다니고, 줄리아나는 기묘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남편 마테오를 볶아댄다. 장소가 이탈리아 남부도시 나폴리임을 유념할 것. 치욕을 당하고도 복수를 하지 못하면 가문의 수치이자 불명예가 되는 곳. 엘레나 페란테의 《나폴리 4부작》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니 궁금하면 읽어보시라. 재미있으나 좋은 책은 아닌 거 같지만. 그리하여 줄리아나는 어느 날, 마테오에게 치명적인 주문을 한다. “내 아들을 돌려줘, 마테오. 내놓으라고.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적어도 내 아들을 죽인 놈의 대가리라도 가져와!” 그리하여 마테오는 결심한다. 그렇게 하기로. 이런 종류의 사건, 나폴리 조직폭력배 집단의 대빵을 가리는 전쟁은 결코 진상이 밝혀지지 않는다는 담당형사의 말에도 불구하고, 마테오는 살인자 토토 쿨라초를 찾아간다.
  2002년 8월. 필리포 스칼파로. 커피 전문가. 세상에서 제일가는 커피 귀신. 아버지 가리발도 스칼파로로부터 커피의 비법을 전수받은 명인이면서 청출어람. 그는 베르살리에라 레스토랑에서 오직 커피만 담당하는 직원에 불과함에도 워낙 실력이 좋아 레스토랑의 주인은 ‘베르살리에라의 마법 커피’라는 카피가 든 새 메뉴판을 주문해 인쇄중이다. 사실 필리포 스칼파로는 세상의 모든 욕망과 기분에 따라 다른 커피를 만드는 귀신같은 실력을 지닌 것으로 이미 나폴리의 명사가 된 인물이다. 나이 스물일곱 살에. 종업원을 부르는 목소리가 아니라 개를 부르는 주인의 모습으로 커피를 주문한 토토 쿨라초에게 커피를 담은 쟁반을 가져간 필리포는 그의 앞에 서서 큰 소리로 그의 이름을 외친 다음, "토토 쿨라초! 토토 쿨라초!" 예리한 칼로 쿨라초의 배를 찌른다. 딱 죽지 않을 만큼의 깊이로. 최대의 고통을 느끼지만 결코 숨이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그의 죽음을 바라는 것이 아니라 고통, 괴로움과 눈물만을 원하기 때문. 필리포는 쿨라초의 목에 칼날을 대고 파르테노페 거리로 가기 위해 계단을 오르고, 한 계단을 오를 때마다 충격에 의해 쿨라초의 고통은 새록새록 심해지면서 계단을 오르고도 조금 더 걸어 세워놓은 차의 조수석에 늙은 조직폭력배를 던져 넣고 자기는 운전을 한다. 쿨라초는 고통이 너무도 심해 도망할 생각조차 못하고.
  필리포가 쿨라초를 데리고 간 곳은 1980년 6월에 짧은 생을 마감한 꼬마 피포의 무덤. 필리포는 그의 왼손을 피포의 비석 위에 올려놓고 엄지손가락을 제외한 네 개의 손가락을 잘라 그냥 땅 위에 떨어지게 만든다. 지하의 피포가 알 수 있도록. 이어서 오른손을 올린 다음, 바로 그날, 1980년 6월의 아침에 권총의 방아쇠를 당긴 검지와 중지를 절단해 그건 자신의 주머니에 넣고 자리를 뜬다. 그가 원했던 것은 쿨라초가 살아남는 것. 아무 것도 손에 쥘 수 없고, 가장 기초적인 일도 할 수 없는 무능력자로, 일어나기 위해, 머리를 빗기 위해, 코를 풀기 위해서 매번 도움을 요청해야 하는 수모를 겪으면서 자연사하는 것.
  이 두 장면이 총 24부 중에서 책을 열자마자 나오는 처음 세 부의 내용이다. 그러면 1980년 6월에서 2002년 8월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도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려고 초장에 오르페우스 이야기를 했을까? 미안하다. 안 알려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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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워치
세라 워터스 지음, 엄일녀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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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라 워터스, 하면 <핑거스미스>가 떠오른다. 아무래도 박찬욱의 강렬한 영화 <아가씨>의 원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핑거스미스>, <나이트 워치>, <리틀 스트레인저>는 작가의 3, 4, 5번 작품으로 각각 2002년, 2006년, 2009년 맨 부커 상의 최종 리스트에 올라간 것들로 워터스의 전성기에 쓰였다고 봐도 무방하다. 나도 세라 워터스는 <핑거스미스> 한 권을 읽었을 뿐이지만 재미있고 독특한 구성과 소재를 사용한다고 생각해 망설임 없이 <나이트 워치>를 구입했다. 나이트 워치. 야경꾼이라.
  세라 워터스는 켄트 대학에서 학사, 랭카스터 대학에서 석사를 하고, 런던의 퀸 메리 대학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얻는데, 1870년대부터 현대까지 레즈비언과 게이 문학을 공부했다. 학위 공부를 마친 그간의 연구 결과가 바로 워터스 표 빅토리아 시대의 동성애 소설로 나오게 됐고, 빅토리아 삼부작을 마친 다음 무대를 2차 세계대전 중과 종전 후의 런던으로 옮겨 여전히 여성 동성애를 담았으니 바로 <나이트 워치>가 된다.
  <나이트 워치>는 모두 세 개의 부로 나누어져 있으며. 1부가 1947년, 2부는 1944년, 3부는 1941년으로 구분해, 각 시점에서 약 1924년생 정도로 보이는 청년 한 명과 여성 세 명의 “실망과 상실과 배반, 뿐만 아니라 사람들과 진실한 관계 사이에 대한 진지한 접근”(wikipedia, ‘sarah waters’ 참조)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독자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이다. 그저 즐기기만 하면 장땡이다.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인물은 케이 카마이클. 주인집 레너드 선생이 1층에서 환자들을 돌보고, 케이는 2층 세 들어 산다. 서른여섯 살. 훈훈한 9월 중순에 외출을 하기로 결심을 해, 몸에 딱 맞는 슬랙스와 부드러운 흰색 칼라가 달린 셔츠에 소매에 은제 커프스를 하고 짧은 갈색머리카락을 기름 발라 깔끔하게 넘긴 헤어스타일을 했다. 무심코 케이를 본 사람들은 첫 눈에 잘 생긴 청년으로 착각을 하지만 얼굴엔 세월의 흔적이 담긴 주름이 자잘하고 머리칼 사이로 잿빛 가닥이 담겨 있는, 신사화를 신고 있으나 이미 중년에 근접한 여성이다. 케이는 할 일도 갈 곳도, 볼 사람도 없음에도 서쪽을 택해 폭격을 맞아 초토화된 거리를 지나 원즈워스로 발길을 옮긴다.
  조금 후 덩컨 피어스는 ‘호러스 삼촌’이라 부르는 먼디 씨를 부축하며 레너드 선생 집에 당도하면서 다락방 창가에 서서 몇 시간이고 거리를 내다보던 짧은 머리의 케이가 없는 것을 알고 ‘오늘은 바커 대령이 안 보이네요,’라고 말한다. 케이가 여성 파일럿이나 영성공군지원부대 하사관 출신 정도로 생각해왔으나 사실은 전시 야간구급대원 출신으로 자기 누나 비비앤 피어스 양을 죽음의 위기에서 구해준 적이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고 앞으로도 모르면서 살 것이다. 덩컨은 전쟁 초기에 양심적 병역거부자임을 밝혀 몇 년 간의 징역을 마치고 출소해, 소위 ‘애국심’의 감옥에 갇힌 시민들과 어울려 살기 힘들어 집에서 나와 자신의 전력을 모르는 양초가공공장 생산지원으로 근무 중이다. 오늘 함께 온 먼디 씨는 은퇴한 교도관으로 감옥에서 덩컨을 만나 함께 살기에 이른 후덕한 인물이지만, 보는 사람마다 이이에 대한 평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덩컨의 누나 비비앤, 약칭 비브는 스물여섯 또는 일곱 살의 예쁘장하게 생긴 아가씨로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시고 지금은 아버지와 함께 런던 남부에 살며, 여태까지 약혼도, 결혼도 한 번 안 해본 여성인데 1940년대에 미모를 가지고도 스물여섯 일곱이 될 때까지 결혼하지 않는 일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한때는 ‘결혼상담소’라고 불리웠던 결혼 정보업체의 대기실 책상에 앉아 고객들을 안내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고 있다. 안쪽 방에서 고객들과 개별적으로 면담을 하는, 보다 중요한 업무는 서른두 살의 헬렌 지니버 양이 하고 있으며, 비브의 어릴 때 희망직업은 전문변호사의 비서였단다. 헬렌의 희망직업이 마굿간에서 일하는 것이었는데 반해서. 헬렌이 보는 비브에게는 얇게 덮인 한 겹의 재 같은 우울함이 표면 바로 밑에 드리워져 있다. 매주 화요일에 비브가 싫어하는 런던의 지하철을 타고 화이트시티에 가서 동생, 먼디 씨와 함께 저녁을 (얼른)먹고, 빈곤의 시대임에도 고기 통조림을 건네준 다음, 9시 15분에 집을 나와 10시 28분에 지하철 출입구에 정차해 있는 자동차에 타자마자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이탈리아 이민 출신의 애인 레지 니그리와 깊은 키스를 나눈다. 레지 니그리는 적어도 아이 둘 이상을 둔 유부남이며 이 빈곤의 시절에 비브와 한 번씩 재미를 보고난 후에 거의 어김없이 고기 통조림(기껏해야 햄이나 스팸일 뿐이지만)을 선물한다.
  남들이 자기를 숭배해줄 것을 바라고, 누가 자기보다 더 사랑을 받는 걸 참지 못하는 줄리아 스탠딩이란 이름의 작가를 애인으로 두고 있는 헬렌 지니버 양은, 전장에 나가 전사한 남자들 때문에 여자의 수가 많아진데다가, 해외복무를 끝내고 귀국한 병사들이 전쟁 동안 변한 아내나 애인의 모습에 질겁하는 경우가 많아 날로 번창하는 결혼정보업체에서 동료 비브와 점심시간을 이용해 창문 밖 베란다에서 샌드위치를 먹고, 담배를 피우며 나날을 지우고 있으나 전시엔 시청에서 전쟁피해복구에 관한 업무를 보던 재원이었다. 애인 줄리아에 관한 집착이 대단해 책 출판을 위해 어슐러 웨어링이라는 여자와 만났던 일을 가지고 줄리아에게 심한 강짜를 부릴 정도다. 전쟁 말기까지 잘 생긴 한 야간구조대원으로부터 열렬한 사랑을 받았음에도 줄리아를 알게 된 이후 이별을 고했던 전력이 있다.
  이렇게 세 여인, 케이 카마이클, 비브 피어스, 헬렌 지니버와 한 남자이자 비브의 동생인 덩컨이 ‘진실하게 친밀한 관계genuine intimacy’였다고 믿는 타자와의 우정 혹은 사랑이 무너지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게 된다. 아름다운 이별? 웃기는 말 말라.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모든 이별은 적어도 한 명에게는 실망과 상실과 배신당한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한다. 그런 기분을 모른다면, 당신은 행운아다.
  그런데, 내 생각을 말하자면, 이렇게 시대를 거꾸로 배열하는 것이 과연 좋은 구성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결론을 먼저 이야기하고 어떻게 해서 지금의 결말이 나타나는지 설명을 하는데, 1947년, 44년, 41년, 이렇게, 책을 다 읽고 나면 처음 읽었던 1947년은 괜찮다는 평을 받는 현대소설의 경우엔 구태여 쓸 필요가 없는 부분이고, 근대 소설의 경우에도 에필로그 형식으로 짧게 언급하고 말 수준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거꾸로 배열을 하니 독자의 호기심을 유발하기 위해서라도 ‘사실은 쓸데없는 부분’에서라도 충격을 주어야 했을 터이다. 상대적으로 이런 형식은 작품의 클라이맥스를 달려야 할 마지막 챕터chapter의 결정적 한 방이 별로 효과가 없게 만들지 않는가, 의문이 들었다. 결말을 이미 알고 있는데 결말보다 충격적인 발단?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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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20-07-21 16: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 이 책 있는데...... 미리 읽어둘걸. 그렇다면 이 책에 있어서만큼은 폴스타프 님보다 먼저 읽는게 되었을텐데요... 아쉽네요.....(리뷰 내용과 무맥락 댓글입니다)

그건 그렇고,
리뷰 중에 ‘세상에 아름다운 이별이란 없다, 적어도 한 명에게는 실망과 상실과 배신당한 끔찍한 기분이 들게 한다‘에 밑줄 긋고 갑니다. 맞아요. 아름다운 이별이 어딨어요. 적어도 한쪽은 무너진단 말예요.

Falstaff 2020-07-21 17:20   좋아요 0 | URL
아이고, 전 다락방 님의 라이브러리가 부러운 걸요!
그죠, 아름다운 이별이 어디 있답니까. 근데 또 살면서 염병할 이별 때문에 심장에 먹줄 한 줄 안 긋고 사는 사람도 불쌍하긴 할 거 같네요. ㅋㅋㅋㅋ

다락방 2020-07-21 17:25   좋아요 1 | URL
그런 오래된 격언이 있다잖습니까.
한번도 사랑해보지 않은 것보다 사랑을 잃고 아파해본 게 낫다.....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호르헤 셈프룬 지음, 윤석헌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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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애하는 서재 친구 ‘서산_影' 님의 글을 읽고 서슴없이 사 읽은 책.
  호르헤 셈프룬. 이런 사람을 파란만장하다, 라고 해야 할 터. 1923년 12월 생. 아버지 호세 마리아 데 셈프룬 이구레아는 법률학자이며 톨레도 도지사를 지냈으면서 시집도 두 권을 낸 박식하고 부유한 부르주아이며, 어머니 수사나 마우라 가마조는 아버지(호르헤의 외할아버지)가 무려 다섯 번이나 수상을 역임한 가문 출신이니 남편보다 더 휘황찬란한 정통 귀족이었다. 부모가 금슬이 좋아 순서대로, 마리벨, 수사나, 곤살로, 호르헤, 알바로, 카를로스 프란시스코, 이렇게 두 딸과 내리 다섯의 아들을 두었으니, 프랑코가 내전만 일으키지 않았으면 엄마 소원대로 입헌군주국 스페인의 대통령이나 작가가 되었을 호르헤 셈프룬이었다. 그러나 1936년 7월에 시작한 내전으로 정국은 돌이킬 수 없는 혼돈으로 치닫고 와중에 스페인 공화국의 처절한 분열이 백일하에 드러나게 된다. 이때 호르헤의 아버지 호세 셈프룬은 재 네덜란드 스페인 공화국의 공사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는데, 당연히 일곱 아이 모두와, 취리히 호수 인근 베덴스빌 마을 출신 독일어 가정교사 여성이며 나중에 계모가 될 여인을 데리고 벨기에 국경을 넘는다. 엄마는, 일찍 세상을 떴다.
  벨기에 국경을 넘을 당시부터 벌써 유럽 각국이 프랑코가 세운 부르고스 정부를 인정하는 분위기라 스페인 공화국의 외교관 여권을 가진 자들을 체포해야 할지, 통과시켜야 할지 망설이던 수준이었으니, 39년에 뮌헨협약에 의거하여 독일의 전차와 기관총 부대가 프라하에 진입을 하던 즈음 스페인 공화국의 기치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다만 시간문제였다. 이 책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는 스페인의 내전시기, 즉 ‘나’ 호르헤가 열다섯 살 시기를 즈음한 시절, 네덜란드와 스위스의 칼뱅 중학교를 거쳐 파리의 앙리4세 고등학교에 재학할 무렵의 시절을 그린 자서전적 작품이다. 그렇다고 1939년만 서술한 것은 결코 아니다. 자신이 처음 기억난다고, 분명히 어머니였을 것이지만 누군가에 의하여 끊임없이 주입된 내용이 기억으로 정착되었을 것이라 주장하는 1925년경부터 1990년 프랑코 사후 필리페 곤살레스 정부의 문화부장관을 지내며 마드리드 알폰소 11세 거리의 장관 공관에 거처하던 시기까지 일정한 순서 없이 글의 진행에 따라 필요한 기억을 서술하기 때문에 읽는데 집중이 필요한 책이다.
  게다가 60년이 넘는 드라마틱한 세월을 살았으니 숱하게 많은 사람들과 사건들이 빽빽하게 등장하고, 다양한 사건을 설명하여야 하는데, 문제는 여태까지 말한 소재나 스토리 등 일종의 하드웨어가 아니라, 이이가 빌려 쓰고 있는 프랑스와 스페인의 시를 비롯한 문학, 현학적이기까지 한 신학과 주로 공산주의 쪽 철학이라는 소프트웨어일 수도 있다. 본문이 360쪽 정도의 분량이지만 문장 자체가 유려하고, 지적이고, 섬세하기까지 해서 저절로 꼼꼼하게 읽을 수밖에 없어 여간해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나중에 큰 누나 마리벨과 결혼하는 아버지의 비서, 그리고 이 책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을 헌정한 ‘장 마리 수투’에 의하여 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입문한 후에 프랑스어에 몰두, 이후 지드의 <팔뤼드>를 비롯해 말로의 <인간 조건>, <희망>, 마르탱 뒤 가르의 <티보가의 사람들>, 심지어 작가 자신이 전에 쓴 작품 등 소설까지 섭렵하는 과정. 마드리드가 함락됨으로써 이제 조국을 떠나 망명지의 낯선 영토에서 모험을 나서야 하는 장면들이 빼어난 문장과 인용으로 나타난다.
  호르헤 셈프룬의 생애를 감추고 독후감을 쓰려 했지만 특이한 경험을 공유하지 않으면 읽는 분들이 공감하지 못하겠기에 소개한다. 이이의 아버지는 사회주의 성향을 가지고 있는 가톨릭 교도였으며, 이에 당연히 영향을 받았을 셈프룬은 어려서부터 교회에 가지 않으려 갖은 노력(거짓말)을 해 자연스럽게 사회주의자가 된다. 내전 중에 헤이그에 공사로 나가게 된 아버지를 따라 네덜란드, 스위스를 거쳐 프랑스에 왔고, 파리에서 공화국의 패배, 독일의 프라하 점령과 폴란드 침공, 영국과 프랑스의 독일에 대한 선전포고, 전투 한 번 없이 파리를 내준 프랑스와 페텡에 의한 비시 정부를 겪으며, 반파시스트 운동의 일환으로 적극적인 레지스탕스 조직에 가담해 활약하다가 스무 살 때인 1943년에 게슈타포에게 체포당해 부헨발트 수용소로 보내진다. 부헨발트에서의 경험이 워낙 커서,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독일어를 구사하는 덕택에 다른 수용자들에 비해 나은, 그러나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열악한 조건에서 살아남아 1945년 소련군에 의하여 해방이 되고나서도 일종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 때문에 천생 작가인 셈프룬일지언정 한 줄의 글도 쓰지 못하고 십여 년을 보내게 된다. 그러는 가운데 1945년 스페인 공산당에 가입해 여러 가지 가명을 쓰면서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을 넘으며 세포 또는 스파이로 활약한다.
  1964년에 이르러 스페인 공산당에 의하여 추방된 이후에 비로소 (프랑스어로)글을 쓰게 되니 자연스럽게 부헨발트 수용소 등의 자전적 요소가 많이 섞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많은 소설과 산문, 영화작업 등을 했고, 나중에 스페인의 문화부장관까지 역임하다가 2011년에 자연사하는 인물이다. 그러니 초년 운이 좀 복잡해서 그렇지 한 시절 잘 살다 간 사람이긴 하다.
  이 자전적 작품 <잘 가거라, 찬란한 빛이여…>는 자신의 소년시절이 공식적으로 끝났다고 하는 1939년을 기억해 20세기 말에 쓴 것으로 그 시절, 스페인 공화국이 멸망해서 파시스트가 집권을 하고, 2차 세계대전이 벌어진 때가 자신에게는 찬란한 빛의 시절이었음을, 그러나 지독하게 우울한 빛의 시절이었음을 보여주는 책이다. 약간의 독서력이 있는 분들에게 후회 없는 선택일 것이라고 권하고 싶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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