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토리아의 발레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지음, 김의석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평점 :
품절


 

  사회자가 청중들에게 질문을 할 때, 많은 사람의 동의를 구하기 위해 손을 들어보라고 한다. 아주 가끔은 자기 의견과 다른 사람이 없음을 알리기 위해, 동의하지 않는 사람더러 손을 들어보라고도 한다. 나는 지금 두 번째에 해당하는 질문을 해보기로 한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읽어보신 분 중에서 그 책을 재미없게, 또는 그냥저냥 읽으신 분이 계시면 손을 들어보시라.”
  있어? 읎지? 나도 마찬가지다. 재미있게 읽었다. 그런데 그렇게 재미있는 책을 지은 이의 이름이 ‘안토니오 스카르메타’라는 건 기억하지 못하고 여태 살았다. 그러다가 이이가 쓴 다른 책 <빅토리아의 발레>라는 것이 있었고, 그것도 벌써 2003년에 간행을 했으며 이미 출판사가 ‘품절’ 딱지를 붙인 상태란 걸, 헌책방에서 이 책을 고르며 알았던 거다. 그러니 발견한 순간 잠시라도 머뭇거릴 이유가 있었겠나. 얼른 사서 읽었다. 역시 재미있다. 겁나게 재밌다. 진즉에 스카르메타를 검색해볼 것을. 이래저래 사람이 게으르면 늘 이 꼴이다.
  소설을 통해 칠레의 현대사를 알고 싶으면 이사벨 아옌데의 삼부작을 읽으면 대강 감이 잡힌다. 스토리의 시간적 순서로 <운명의 딸>, <세피아 빛 초상> 그리고 <영혼의 집>. 딱 하나만 선택하면 <영혼의 집>. 이 빼어난 작가 자신이 1970년에 칠레 대통령으로 당선된 살바도르 아옌데의 조카딸이다. 그리하여 당연히 민선 사회 민주주의 권력인 아옌데 정권을 상대적인 선으로 설정하기도 했고, 사실 그 의견이 맞다. 아옌데 정권에 반발해 1973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피노체트는 대통령 궁에서 아옌데 대통령을 기총소사해 살해하고, 권력을 쥐자마자 반대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했는데, 그 방법이 20세기 후반에 저질러졌다고 하기엔 과하게 잔인하기로 유명했다. 작가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역시 이 시절을 견디지 못하고 1973년부터 아르헨티나, 포르투갈, 동독 등지로 유랑 망명생활을 했다고 책의 해설에 씌어 있다.
  이 시절, 산티아고의 한 고등학교에 재직하고 있다가 정문 앞에서 독재 반대의 죄목으로 경찰에 체포되어 이틀이 지난 후 하수도에서 머리와 몸통이 분리된 시신으로 발견된 남자, 폰세 씨가 있었으니, <빅토리아의 발레>에 등장하는 여주인공 빅토리아 폰세의 아빠다. 생각해보라. 사랑하는 남편이 어느 날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경찰에 체포되어 두려움에 떨면서 며칠 밤을 지새웠는데, 어느 새벽, 소란스런 이웃들에 이끌려 달음질 쳐 가보니 더러운 구정물 속에 두 뭉치의 끔찍한 육신이 잠겨 있으니 하나는 머리요, 다른 하나는 남편이 평생 머리를 받치고 다니던 몸통이란 걸 발견한 상황을. 그래 아내는 그길로 심각하고도 고질적인 우울증을 앓게 되고, 게다가 다섯 달이 지난 다음 유복자 빅토리아를 출산한다. 시절은 흘러 드디어 1990년이 오고, 피노체트가 대통령 직에서 물러나 드디어 칠레에도 민주주의가 움트기 시작한다. 그러고 나서야 폰세 씨가 다니던 학교에서도 폰세 씨를 기리기 위한 사업의 일환으로 그의 딸 빅토리아의 학비를 전액 면제해주기로 결정을 했지만, 극도의 우울증으로 늘 죽고 싶다는 말을 달고 다니는 엄마가 딸 부양을 제대로 할 수 있었겠나, 어디.
  게다가 빅토리아는 총명한 지능을 갖추었음에도 라틴 아메리카 최초의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의 시를 비롯한 문학작품을 빼고는 학업에 전혀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오직 발레 한 가지에 관심을 쏟고 있다. 책의 초반에 빅토리아는 집에선 엄마한테 학교에 간다고 말해놓고 하루 종일 산티아고의 극장 구석에나 박혀 있다가 발레 학원이 여는 오후가 되면 학원에서 발레를 배우는데 여념이 없다. 하지만 벌써 석 달이나 교습비가 밀려 있는 상태. 엄마한테 교습비를 달라고 할 수 없으니 어디서 돈을 벌긴 벌어야 하는데, 교복을 입고는 마땅한 아르바이트도 구할 수 없는 열여섯 살의 삐쩍 마른 아이의 꿈은 산티아고 국립극장이나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콜론 극장, 조금 욕심을 내자면 메트로폴리탄 극장에서 독무를 추어보는 것. 그러나 전기요금, 임대료도 제대로 내지 못하는 작은 교습소에서 이룰 수 있는 건 기껏해야 시골 장마당의 무희 정도라고 스스로 인식하고 있다. 엄마의 우울증에 조금은 전염이 된 상태일까?
  빅토리아의 상대역, 앙헬 산티아고. 수도 산티아고에서 남쪽 방향으로 차로 두세 시간 걸리는 곳. 안데스 산맥을 넘어 아르헨티나로 밀수꾼들의 통로가 있는 탈카 지방 출신으로, 일찍이 소년 시절에 발파라이소 항구에서 재단사 작업복을 입은 채, 소작농 남편을 증오한 나머지 하나밖에 없는 아들과 영원히 이별한 엄마의 아득한 추억을 가슴에 담고 있는 청춘. 앙헬에게는 중요한 취미가 있으니 바로 말 타기다. 그래 열여섯 살 시절에 지주의 아들이 가지고 있는 검은 말을 실컷 타고, 지주네 마구간에 매어 놓는 대신 집에 끌고 왔다가 말 절도범으로 몰렸을 때, 비루먹은 아버지는 지주를 향해 굽실거리며, 자기 자식이 사람이 좀 되도록 엄벌에 처해달라고 하는 바람에, 지주의 사촌인 지역 판사로부터 5년 형을 받아 교도소로 가야 했던 불행한 소년. 특기할 만한 건, 기억력이 대단히 뛰어나다는 것. 한 번 보고 들은 건 절대 잊는 법이 없는 살아있는 환등기 또는 녹음기.
  그러나 교도소에 입소하고 맞은 환영식에서 잘생긴 청년 앙헬 산티아고는 간수 산토로를 포함한 건장한 죄수들 여러 명에게 집단 윤간을 당해 파열상을 입어 심각한 출혈 때문에 당일로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앙헬이 생각하기를, 장기수 또는 종신형을 받은 죄수들을 넓은 마음으로 보면 그들이 꼭 동성애가 아니더라도 감옥이란 특수 환경에서 장난 또는 취미로 신입 수형자에게 한 번 그럴 수 있다는 거. 그러나 간수 산토로는 도저히 봐줄 수가 없다. 처자식이 있고 가정이 있는 간수라는 자가 수감자들과 한 편이 되어 새로 들어온 어리고 잘 생긴 죄수를 강간하는 짓은 절대로 용서하지 못할 모욕이라고 여겨, 시간만 나면, 형기를 마치고 사회로 복귀하면 제일 먼저 저 새끼 산토로 간수를 죽여 버리겠다고 온갖 죄수들에게 귀에 못이 박이도록 떠들고 다니는 우를 범한다. 그게 진심이면 오히려 발설하지 말고 가슴 속에만 간직해야 할 것이고, 농담이라면 안 하느니 못한 농담이니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앙헬에게 이 다짐은 농반진반(half joke half serious)였다.
  또 한 명의 주인공. 환갑을 맞은 칠레 최고의 기술자 니콜라스 베르가라 그레이. 세계최초로 전화기를 만들어 미국 특허청으로 달려갔으나 불과 몇 시간 차이로 벨에게 등록 순위를 놓친 불운의 과학자 그레이의 후손임을 자랑으로 아는 인물. 어떤 기술자인고 하니, 금고 따기. 제아무리 복잡하고 웅장해 마치 강철로 만든 산성 같아도 베르가라 앞에만 놓여 있으면 흐물흐물한 메밀묵이 된다는 말 그대로의 전설. 한 가지 흠이라면 이미 너무 유명세를 누려 누구나가 얼굴만 척 봐도 이이가 칠레의 자랑스런 국가대표 금고 절도범인 것을 다 안다는 거. 이이는 또 순정이 넘쳐 환갑이 지나도록 오직 한 여인, ‘테레사 카프리아티’만을 사랑하는데, 무려 이 여자가 아내이기도 하다. 베르가라는 그토록 휘황찬란한 경력을 쌓는 과정에서 단 한 명의 사람도 해치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한 번도 권총을 손에 쥐어본 적도 없는 신사도에 입각한 절도범이었다. 이이의 마음속에 흐르는 남을 향한 동정, 연민, 따사로움은 책을 읽으면 읽어갈수록 더욱 독자의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순정을 바친 여인인 테레사는 수감 십년 내내, 비록 혼인의 순결 하나만큼은 끔찍하게 지켰을지언정, 한 번도 면회조차 오지 않았고, 아들 페드로 파블로만 일년에 딱 한 차례 형식적인 면회만 이어졌을 뿐이다.
  앙헬과 베르가라에게 같은 날 닥친 기쁨이 있었으니, 바로 광복절 특사. 같은 날 대규모로 행해진 특사의 은전을 입어 출소를 하게 되는데, 앙헬을 내보내는 간수 산토로의 두통이 극심해진다. 평소 앙헬이 해왔던 말을 집중분석해보면 자기를 죽이겠다는 걸 도저히 농담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지경이라, 일단 앙헬에게 좋은 말을 하고 내보낸 다음, 청부살인으로 종신형을 받은 리고베르토를 불러 한 달의 특별 외출을 허락한다. 대신 다시 교도소로 들어오기 전에 앙헬을 살해하는 조건으로. 청부살인자의 생명은 약속이다. 그러나 살인청부업자도 사람이다. 더구나 앙헬은 출소할 때 난쟁이 종신수형수가 준 예전 피노체트의 똘마니 칸테로스의 금고를 털 수 있는 보물지도가 있는 바에.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이미 그라운드 제로가 등장하는 21세기 초. 이제 등장인물들은 젊은 시절 아옌데와 피노체트를 경험한 늙은이와 그들의 손자녀뻘인 10대 후반의 연인들. 이들은 빅토리아의 꿈, 여전히 이어지는 칠레의 구조적 비극을 그대로 감당하고 있는 가난하지만 꿈이 있는 소녀, 즉 칠레의 미래를 위하여 정말로 크게 한 탕을 할 것인가. 그리고 그 ‘큰 한 탕’이 진짜 예전 군사정부의 개가 가진 금고를 터는 일에 국한할 것인가. 이건 알려드리지 않겠다. 겁나게 재밌다.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를 생각하면 오산이다. 그런데도 재미있다. 그리고 귀엽게 야하다. 귀엽게 무척 야하다. 어때, 끌리시지? 헌책방 뒤져보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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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10-15 18: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2006년에 읽고 리뷰를 썼는데 온갖 미사여구를 쓰며
극찬했는데 내용이 하나도 기억이 안 나네요.
그런 걸 보면 입에 발린 소리를 했나.....
현재는 가지고 있지 않네요. 아마도 사이판에 사는 친구한테
보냈던 것 같습니다.
거기에 귀엽게 야한 장면이 나오던가요? 아참-- 난감하군요. (긁적긁적)ㅋㅋ

Falstaff 2020-10-15 20:53   좋아요 0 | URL
아, 그러셨군요.
전 본문에 썼다시피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참 근사하게 읽었으면서도 이 책이 그이가 쓴 건 줄 진짜 몰랐어요. 그래 오히려 더 재미 있었달까요.
ㅎㅎㅎㅎ 다 뭐 인생입지요.
귀엽게 야한 장면은 정말 야~합니다. ㅋㅋㅋㅋ

coolcat329 2020-10-15 2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루다...이사벨 아옌데 책들 그리고 ‘겁나게 재밌‘는 이 책 모두 적어놨습니다. 큰일입니다. 폴님때문에 분수도 모르고 눈만 높아지고 ...

Falstaff 2020-10-16 08:43   좋아요 1 | URL
근데, <네루다의 우편배달부>는 별 다섯 개 만점인데요, 이 책은 별 하나를 빼서 네 개입니다. <네루다의....>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더 좋을 듯합니다.
아이고, 책 읽는 취미 때문에 스트레스 받지 마세요. 전 회사 와서 하루종일 일 없이 노는 사람이니까 그냥 책이나 읽으면서 시간 때우는 인종입니다. ㅋㅋㅋ 걍 편하게 책 고르고 읽으세요.

coolcat329 2020-10-16 1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네~그렇잖아도 네루다를 먼저 읽어 보려고 했습니다 ~^^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