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솔루트노 공장
카렐 차페크 지음, 김규진 옮김 / 행복한책읽기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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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렐 차페크. 그의 형 요제프는 체코 대표적 입체주의 화가였다는데, 동생 카렐의 책 <왼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오른쪽 주머니에서 나온 이야기>, <작은 새와 천사의 알 이야기>의 삽화를 그려줄 정도로 평생을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카렐 차페크는 자신의 작품 <곤충극장>, <도롱뇽과의 전쟁>, <RUR 로봇>, 그리고 <압솔루트노 공장> 등에서 당시 세계정세와 현실 세계를 비판하는 태도를 견지했으며, 결국 1938년 뮌헨 회의에서 서구 열강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내린 결론에 의하여 나치가 체코 프라하를 침공했을 당시 반 나치 활동의 혐의로 체포당하기 몇 주 전인 크리스마스에 숨을 거두고 만다.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해 어머니가 형인 요제프에게 늘상 동생 카렐을 잘 보살펴주라고 했었다고 했는데 결국 먼저 가버린 것이다. 요제프 역시 서둘러 망명을 하라는 주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프라하에 체류하다 결국 나치에 의하여 체포당해 1945년 종전을 눈앞에 두고 베르겐-벨겐 수용소에서 최후를 맞는다.
  그의 또 다른 작품 <호르두발> 역시 매력적인 작품이다. 보헤미아의 평원에서 벌어지는 호르두발 가족의 이야기로 내용도 내용이지만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드는 안타까운 흐름이 절묘하여 일독을 권하고 싶으나 책값이 만만하지 않다. 그래 내가 거칠게 구분한 카렐 차페크의 작품은 <RUR 로봇> 류의 현실비판/풍자 내용, <호르두발>만 읽어본 차페크의 3부작, 그리고 삽화가 그려진 짧은 이야기나 짧은 이야기들의 모음집 정도이다. 그러면 <압솔루트노 공장> 이야기를 해보자.
  작품은 1943년 1월 1일에 시작한다. 차페크는 1938년에 죽었으며 이 책은 1922년에 쓴 작가 최초의 장편소설이니 애초에 20년 후를 내다본 미래소설이고, 1943년은 체코가 나치 치하에 있으며 세계대전 중인 것도 모르는 상태였다.
  체코 철강 산업의 선두주자로 10개의 공장에 3만4천 명의 노동자에게 일자리를 제공해주는 거대 회사 MEAS의 회장 G.H. 본디가 인민일보를 읽고 있다가 조그만 광고를 발견한다.
  “모든 공장에 / 매우 수지가 맞고, 딱 어울리는 것 / 개인적인 사정으로 즉각 판매함 / 엔지니어 R. 마레크에 연락바람 / 브르제브노프 거리 1651번지”
  R. 마레크가 혹시 루데크 마레크? 본디 회장의 대학 동창으로 약칭 루다 마레크일까? 공대 출신으로 교활한 악마 같은 놈. 고결한 허풍쟁이 같은 젊은 시절을 보냈으나 과학적인 두뇌를 가졌으며 떠벌이이기도 하고, 천재적인 면이 있어 기상천외한 아이디어를 갖고 있으나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실용적 발명이라고는 하지 않는 엉뚱한 천재, 음. 몰락한 모양이구나. 라고 지레짐작해 천 코루나 지폐 석장을 건네는 상상을 하며 직접 브르제브노프 거리 1651번지를 찾아간다. 그리하여 진짜로 루다를 만났는데 매우 여위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지만 어느 정도 기품 있어 보이는 루다가 한다는 말이, “난 자네를 기다렸네.”
  루다는 본디 회장이 직접 올 줄 알았다는 이야기다. 그러면서 풀어놓는 이야기.
  석탄을 태우면 석탄이 가지고 있는 효율의 십만 분의 일만 사용할 수 있단다. 그래 조금의 열을 얻고 재와 석탄 가스, 그을음 등의 부산물이 남는데, 만일 석탄이 가지고 있는 원자까지 모두 연소를 시킬 수 있으면 눈에 보이는 부산물은 전혀 남지 않게 된다. 학자 플루거의 계산에 의하면 석탄 1 킬로그램으로 230억 칼로리의 열량을 얻을 수 있단다. 그러나 플루거는 사실을 너무 확대 해석한 것이 분명해, 루다의 계산에 의하면 70억 칼로리 정도인데, 이 정도면 1 킬로그램의 석탄으로 적당한 크기의 공장을 수천 시간 가동하는 게 가능하며, 자신이 이런 기능을 하는 원자력 보일러를 만들어 이름을 ‘카뷰레터’라 지었다고 한다.
  본디 회장은 카뷰레터를 보기 위해 직접 은행 방탄금고 같은 강화된 출입문을 지나 수도원의 지하실처럼 아치형의 시멘트로 된 깨끗한 지하실로 들어가 기다란 원자력 보일러 카뷰레터를 대면한다. 조금 후, 회장은 이상한 미풍을 맞은 느낌이 들고, 머리칼이 곤두서는 듯한, 날아오를 것 같은 기분이 들면서 자신이 마치 무게가 없는 듯, 놀랍고도 선명한 황홀감에 싸여 소리치고 노래하고 싶은 지경에 이른다. 이때 헬멧과 마스크를 쓴 루다 마레크 박사가 본디를 거칠게 낚아 채 지하실에서 빼내온다. 실제로는 본디 회장에 지하실 바닥을 기어 다녔다나. 혹시 일산화탄소 중독일까? 석탄가스? 아니면 천국가스? 유독가스 포스진?
  조금 헷갈리고 있는 본디 회장에게 마레크 박사가 엉뚱할 수도 있는 이야기를 한다. 자신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지는 않지만 대신 신이 존재하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이라고. 과학이 조금씩 신을 밀어내거나 출현을 방해하고 있고 이것이 과학이 해야 할 가장 큰 사명이라 믿는다고. 그러나 스피노자, 페흐너, 라이프치히 등을 거론하면서, '물질은 정신적 원자들'이며, 성질이 신적인 실체인 모마드Momad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한다. 모든 물질의 저 근본, 즉 원자마저 연소시키게 되면 물질 내에 갇혀 있던 신적인 무엇, 그것을 루다 마레크 박사는 ‘압솔루트노’라 칭하기로 했는데, 원자 내의 신, 화학적 무無, 화학적으로 순수한 신神인 압솔루트노가 생산된다고 한다. 그리하여 마레크 박사의 카뷰레터는 일종의 압솔루트노 공장이며, 가동을 시킬 경우 압솔루트노가 생성되어 인체에 흡수되면 정신적 효과로 이상한 들뜬 기분과 황홀감을 느끼게 된다고 주장한다.
  자신이 네 번째 카뷰레터를 만들어 가동을 시킬 때부터, 그동안 박사의 내부에 농축된 압솔루트노의 작동으로 예언을 시작했고 기적을 시행하여 이미 본디 회장의 방문도 미리 알았던 바이고, 선반 가공 중에 잘린 손톱 부근의 살점이 금세 자라나기도 했고 심지어 공중부양까지 했다고 고백한다. 카뷰레터가 완전 연소로 인해 상상도 하지 못했을 만큼의 열량을 사용하여 석탄 연료의 소비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는 반면에 한 번 사용하면 아무것도 압솔루트노의 침투를 막을 수 없으며 그건 속박에서 풀려난 해악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한다.
  본디 회장은 기업의 경영자이다. 석탄을 구입하기 위해 거금을 들여야 하고, 운반하려고 레일을 깔아 기차의 통로를 확보하는 대신 작고 가벼우며 무한대의 열량을 보장해주는 카뷰레터의 유혹을 어찌 뿌리칠 수 있을까. 부산물로 세상에 신을 배출하고, 이 신을 다루는데 익숙하지 않은 인간으로 새로 만날 신을 저평가 하지 말 것을 경고한 마레크 박사에게 카뷰레터 제조, 판매로 생기는 총 수입의 3퍼센트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발명품을 구입한다. 그리하여 MEAS는 원자력 자동차 공장, 원자력 항공기, 원자력 기관차 공장, 선박엔진공장,, 원자력 대포 등등을 만들어내기에 이르러 런던 주식시장에서 어제 주가가 720파운드였다가 오늘 하루 만에 1,470파운드로 치솟는 확실한 성공을 거두기에 이른다. 카뷰레터는 독일로 5천대, 일본으로 9백대, 러시아로 2백대 수출되는 동안 체코 국내 시장엔 달랑 세 대만 판매하였으나 조금도 걱정하지 않는다.
  문제는 카뷰레터가 작동하는 곳마다 부산물로 신들이 생산되어, 새롭게 등장한 신들이 현지에 성공적으로 적응을 하여 인간을 움직이기에 이른다는 것. 카뷰레터가 수출된 장소, 국가에 완벽하게 적응한 신은 각자 현지인들의 특징, 즉 지역주의, 국수주의 적 모델로 인간을 변화하게 하는데, 이럴 경우에 이들의 충돌로 발생하는 것은? 죄송합니다. 안 알려드립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야 할까? 물론 읽으면 좋다. 내 생각은 만일 당신이 <도롱뇽과의 전쟁>을 이미 읽었다면 굳이 이 책을 구입할 필요까지는 없을 듯하다. 이 작품이 차페크의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서 그랬는지 12부까지는 괜찮게 나가다가, 13부에서 느닷없이 작가가 작품에 개입을 하더니 이후엔, 차페크가 쓴 것임은 분명하지만 마치 습작을 읽는 것처럼 갑자기 중구난방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작가의 말인 13부에서 차페크는 13부를 읽지 않고 그냥 넘어가도 상관없을 거라고 얘기를 한다. 내 생각을 솔직하게 이야기하면, 비록 스스로 카렐 차페크의 팬임을 자처하지만, 작품을 12부에서 끝냈으면 어땠을까, 하는 것. 그러나 분명하게 말하는 바, 감상하는 것이 독자의 권리이듯 작품을 쓰는 건 명백한 작가의 권리이니 책을 12부에서 끝내라 마라는 아무리 독자라도 요구할 수 없다. 그냥 그렇게 느끼고 말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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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0-08-14 09: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약간 번역 문장도 굉장히 어설프지 않던가요? 이 책만큼은 카렐 차페크 작품 치고 별 감흥이 없었는데.... 번역 문장도 한몫 거들었던 거 같아요.

Falstaff 2020-08-14 09:28   좋아요 1 | URL
옙. 번역문이, 제 생각을 그대로 말하자면, 쉽지 않은 우리말로, 될 수 있으면 좀 있어보이려고, 물론 역자가 정말로 그럤겠습니까만, 그렇게 읽히더라고요.
그동안 번역문에다 대고 하도 징글징글한 평을 해 대서 쩝쩝.... ^^;;;
 
나는 별 아저씨 문학과지성 시인선 3
정현종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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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집을 척, 넘기고 처음 실린 시 <불쌍하도다>를 읽고, 나는 픽, 웃었다.


  시를 썼으면
  그걸 그냥 땅에 묻어두거나
  하늘에 묻어둘 일이거늘
  부랴부랴 발표라고 하고 있으니
  불쌍하도다 나여
  숨어도 가난한 옷자락 보이도다 (전문)


  지은이가 직접 쓴 서문 자서自序를 보면, 이 시집을 내면서 시인의 서랍 속에 있는 거의 모든 시를 탈탈 털었나보다. 그리하여 한 권의 시집을 탄생시켰고 자기는 발간(‘빨간’ 비슷하지만 좀 약한 느낌의 색깔, 짐작하시겠지?) 빈털터리가 됐다고 하면서, 시집을 내는 쑥스러움을 슬쩍 밑에 깔았다. 센스 있는 음식점 서빙 알바가 염주 두른 중 앞에 내려놓은, 비빔냉면 밑에 슬쩍 깔아두어 보이지 않게 만든 쇠고기 양지살 같이.
  내친 김에 두 번째 실린 시 <갈 데 없이……>도 읽어보자.


  사람이 바다로 가서
  바닷바람이 되어 불고 있다든지,
  아주 추운 데로 가서
  눈으로 내리고 있다든지,
  사람이 따듯한 데로 가서
  햇빛으로 비치고 있다든지,
  해지는 쪽으로 가서
  황혼에 녹아 붉은빛을 내고 있다든지
  그 모양이 다 갈 데 없이 아름답습니다. (전문)


  책 뒤에 실린 김현의 해설에 의하면, 정현종의 시에서 사람은 이렇게 자연과 동화될 때, “인위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이 하나로서 화해롭게 존재할 때” 아름답다고 말한다고 한다. 물론 시인은 어떻게 하면 사람이 바닷바람이, 내리는 눈으로, 햇빛이, 노을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해서는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알고 있는 것 같지도 않으며, 독자에게 가르쳐줄 의무도 없다. 그리하여 김현의 해설마저 내 눈엔 박제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럼 시인은 사람이 바닷바람, 눈, 햇빛, 노을이 될 때 가장 아름답다, 라고 노래만하면 끝난다는 얘긴가? 그런 거 같다.
  흠. 여태 헛살았다. 나는 사람이 가재, 개구리, 붕어가 될 때가 제일 행복한 건줄 알고 새끼들도 가재, 개구리, 붕어로 키웠는데 그게 아니고 바닷바람, 눈, 햇빛, 노을이 되어야 행복하단다.
  다시 시집 이야기 하자. 잘 나가다가 엉뚱한 데로 빠지는 거, 이거 병이다, 병.
  정현종의 시들이 위의 인용한 것과 같다고, 쉬울 거라고 오해하지는 마시라. 이이와 거의 같은 시기에 시를 쓴 사람 가운데 모더니스트 황동규가 있다. 이이들이 젊었던 시절에 이미 한국의 모더니즘 시는 꽃을 피울 모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하여 <가을, 원수 같은>에서 이렇게 가을을 호출한다.


  가을이구나! 빌어먹을 가을
  우리의 정신을 고문하는
  우리를 무한 쓸쓸함으로 고문하는
  가을, 원수 같은.


  나는 이를 깨물며
  정신을 깨물며, 감각을 깨물며
  너에게 살의를 느낀다
  가을이여, 원수 같은.  (전문)


  물론 지금 시점에서 읽으면 그리 큰 임팩트를 주지 못하지만 하여튼 정현종은 가을의 우수를 반어적으로 표현했다. 당연히 세월이 흐르면 더 독한 후배 최승자가 출현해 “개 같은 가을이 쳐들어온다 / 매독 같은 가을 / 그리고 죽음은, 황혼 그 마비된 / 한쪽 다리에 찾아온다”라고 노래하지만 정현종의 원수같은 가을이 없었더라면 독자들이 ‘개 같은 가을’을 만나기 위해 조금 더 기다려야 했을지도 모른다.
  시인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고통의 축제 2>에서도 이이의 모더니즘은 “몸보다 그림자가 더 무거워 / 머리 숙이고 가는 길 / 피에는 소금, 눈물에는 설탕을 치며 / 사람의 일들을 노래한다 /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 사람 사랑하는 일이어니 / 쾌락은 육체를 묶고 / 고통은 영혼을 묶는도다” 면서 비구상적 감정의 운동 또는 시인의 뇌의 화학적 활동에 착안한 듯하다. 이 시의 부분,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일은 사람 사랑하는 일’은 어쩐지 내가 좋아하는 노래, 양희은의 <사랑 그 쓸쓸함에 대하여>의 가사와 매우 흡사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들기도 한다. “도무지 알 수 없는 한 가지 /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일 / 참 쓸쓸한 일인 거 같아” 안 그런가? 나만 그런가? 우리 이런 걸로 표절 운운하지는 말자. 피곤하다.
  이런 성향은 이이의 또 다른 대표 시 <공중에 떠 있는 것들 3 - 거울>에서도 여전히 유효하다.


  뜻깊은 움직임을 비추는 거울은
  거의 깨지고 없다.
  다만 커다란 거울 하나가 공중에 떠 있고
  거울 위쪽에 적혀 있는 말씀ㅡ
  축와선祝臥禪, 낮을수록 복이 있나니.


  거울 속에는 그리하여
  누워 있는 자와 잠든 자, 혹은
  죽은 자들만이 있다.
  요새 자기의 모습을 보는 방식이다.


  눈감으면 고향이
  눈뜨면 타향.  (전문)


  이 시가 무슨 뜻인지, 나는 모른다. 그냥 거울이란다. 자세히 읽어보면, 이 공중에 떠 있는 거울, 만사를 다 비춰야 하는 기능, 그러니까 문학의 한 장르로서의 시가 견뎌야 하는 사람살이, 사회현상, 심지어 정치제도 등을 온전하게 비추는 거울로의 문학이 거의 깨졌다, 죽어버렸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이미 죽은, 깨져버린 거울 위쪽에 뭐라 씌어 있는가 하니, ‘축’ (줄 바꿔서) ‘와선’. 유신 시대를 맞이하여 입 한 번 벙긋하지 못하고 누워 참선의 경지에 든 시인, 소설가 등의 문학인들을 축하하고 축복한다는 글이다. 거기다가 짓궂게 “낮을수록 복이 있나니”라니. 하여튼 시는 읽는 사람 마음이니까 만일 당신이 이 시를 달리 읽었다면 당신 생각이 맞는 거다. 하여간 내 식으로 읽은 이 시로 말할 것 같으면 모더니스트들 역시 현실 세계에 민감한 건 참여시인들과 마찬가지다. 다만 이렇게 비틀어 놓아 검열의 칼을 비켜나갔을 뿐이지.
  시집에 제일 마지막으로 실린 것이 <절망할 수 없는 것조차 절망하지 말고…… - 노트 1975>인데, 무려 스물아홉 개의 개별적인 시 또는 노트, 그러니까 그냥 끼적거림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각의 제목 대신 번호만 1부터 29까지 나열해 놓았다. 그냥 지나가면 섭섭하니 가운데 <2>를 소개한다.


  나는 내 운명이 이미 결정돼 있음을 모르고 운명을 개선하려 했다. 그러나 내 운명이 결정돼 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내 운명이 바뀌는 소리를 들었다. (전문)


  이렇게 있음-없음, 개선-결정-바뀜(변증?) 같은 순환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는데 예를 들면 “행복은 행복의 부재를 통해서만 존재하기 시작한다. 행복은 불행이 낳은 천사이며 이미지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3> 부분) 거나, “제 몫으로 지고 있는 짐이 너무 무겁다고 느껴질 때 생각하라, 얼마나 무거워야 가벼워지는지를.” (<5> 부분), “승리만이 미덕이고 그것만이 고취될 때 가장 긴요한 미덕은 실패할 수 있는 능력이다.” (<6> 부분), “미답未踏의 공간은 신비롭다. 그러다가 그곳에 간 뒤에는 시간이 신비롭게 느껴진다.” (<7> 전문) 등등 상반되는 정서가 서로를 강조하는 특징을 보이기도 한다.
  이렇게 정현종을 읽었다. 1978년 출간한 시집. 낡았으나 아직도 유효한 시집. 이런 과정을 거쳐 2020년의 우리는 파편화된 개인의 감정을 노래한 시들을 만날 수 있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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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인칭의 자리
윤해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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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해서의 첫 번째 단편집 《코러스크로노스》를 읽고 벌써 3년이 지났다. 단편집을 상당히 흥미롭게 읽어 이이의 다른 책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었으면 단박에 읽어봤을 텐데 그간 소식을 듣지 못했다. 그동안 세 권의 책이 더 나왔다. <그>라는 중편소설과, 짧은 장편 혹은 긴 중편 <암송>. 그리고 문학과지성사에서 2019년 9월에 출간한 이 책 <0인칭의 자리>.
  나는 《코러스크로노스》의 독후감을 쓰면서 “내 독서목록에 이 작가를 보탠다는 것이 축복”이라고 했을 정도로 전작에 열광했다. 그래 이번에 장편소설이 나오긴 했는데, 소설의 음악성과 회화성, 그리고 읽기 쉽지 않은 문장을 장착한 작가가 어떻게 장편소설을 썼을지 궁금한 바가 작지 않았다. 기대가 컸다.
  <0인칭의 자리>는 아무 것도 아니다.
  단, 내가 문학적으로 소양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
  야박하게 말해, 윤해서가 틈틈이 메모해놓은 것들을 모아 짜깁기 하듯 얼기설기 추려놓은 것을 내다 판 거는 아닐까, 하고 의심했다. 첫 작품이 《코러스크로노스》라면 후속 작품은 앞의 것을 능가하거나, 성공 혹은 실패일지라도 적어도 진화된 작품을 내놓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기껏 독자로 하여금 기대치를 올려놓고 후다닥 자기가 가지고 있던 재고 떨이를 시도, 물론 그렇게 하지는 않았겠지만 내가 읽으면서 느끼기에 그런 시도를 했다면 곤란하다.
  원래 윤해서의 소설은 경계가 없거나 애매하거나 아니면 혼동스럽다. 시간과 공간, 소설과 음악, 소설과 그림 등등. 이번엔 산문과 운문, 즉 시와 소설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드는, 혹은 넘나드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 한 거 같은데, 이 정도의 왔다 갔다 가지고 독자에게 참신한 매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면 착각일 듯하다.
  단, 내가 문학적으로 소양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
  사람들이 항상, 적어도 한 시절에는 생각해보는 의문 가운데, 왜 나는 나일까, 하는 것이 있다. 60억 인구 가운데 왜 나는 나고, 이 모습이고, 저런 부모 사이에서 나왔을까. 즉 직접적으로 의식하지는 못하지만 누구나 인칭의 혼동은 한 시절 겪어보았을 터. 윤해서는 꼭 이런 기분, 느낌이 아니더라도 인칭, 1인칭, 2인칭, 3인칭이 아니라 예컨대 183인칭, 54인칭, 그리고 0zero인칭을 꺼내놓음으로 해서 나와 너와 그의 혼돈상태를 보여주기 위하여 다양한 사람들, 거의 공통분모가 없는 많은 주인공들을 묘사한다. 파독 간호사와 독일 남성 부부의 아들은, 책가게 ‘미리보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윤해서의 다른 작품 <암송>에서도 출현하기도 하고 뭐 그렇다.
  소설의 첫 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보면, ① 열흘 전 카페에서 보험을 든 회사원으로 보이는 남자, ② 영하 15도의 추운 날 지하철 6번 출구로 나와 영종도에 들어설 오피스텔 모델하우스에서 상담을 당하는 젊은 여자, ③ 아침부터 순댓국에 소주 반 병 마시고 취한 채 창덕궁과 비원의 문화재 해설사에게 되도 않는 질문을 하는 중늙은이, ④ 새벽 네 시에 사람을 밀어 넘어뜨려 죽음에 이르게 했지만 필름이 끊겨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기러기 아빠, ⑤ 오랜 세월이 지나 바다 위에서 한 사람의 뒷모습을 발견하는 그녀, ⑥ 독일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사진작가의 전시회 2층에 마주보고 걸린 사진 속 여자와 남자, ⑦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 앞에서 구두 수선 컨테이너를 운영하는 신기료장수, ⑧ 인도의 더러운 기차 안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의 재회를 위해 잠실야구장에 온 그녀, ⑨ 아침에 가장 먼저 창문을 여는, 환멸을 가장 멋있게 견디는 사람을 아는 나, 등등, 수십 명의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는 거의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 그리하여 이들 사이의 인칭은 183인칭일 수도 있고, 54인칭일 수도 있으며 0인칭 그리고, 성의 없는 후기, ‘작가의 말’에서처럼 0과 1 사이의 어디쯤일 수도 있다.
  위의 ①부터 ⑨까지, 연관 없는 이야기들. 이건 작가가 <0인칭의 자리>를 구상하면서 쓰기 시작한 것일 수도 있지만, 이이의 창작 노트 또는 랩탑에 저장해놓은 단편斷編의 집합일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을 소지가 생기기도 한다. 이 책 한 권으로 윤해서에게 실망하기에는 《코러스크로노스》가 너무 매력적이었다. 지금 책가게에 진열되어 있는 두 권, <그>와 <암송> 말고 다음에 나올 책을 한 권 더 읽고, 윤해서의 팬을 계속 할까 말까를 결정하겠다.
  단, 내가 문학적으로 소양이 전혀 없는 아마추어라는 점을 잊지 마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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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
베른하르트 슐링크 지음, 김재혁 옮김 / 시공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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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년 만에 세 번째 슐링크를 읽었다. <귀향>과 <계단 위의 여자>에 이어 <올가>. 3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그동안, 슐링크가 법학을 공부했으며 심지어 베를린 훔볼트 대학에서 법학 교수도 지냈고 18년 동안 헌법재판소 판사를 겸임했었다는 전력을 잊고 있었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면, 슐링크의 문장들이 (말장난을 해보자면) 잡다한 수사 없이 슈링크shrink시켜 건조된 문체로 되어 있으나 그것들이 합쳐져 독자의 가슴이 시린 쓸쓸함을 만든다는 말이다.
  올가, 슬라브 민족의 여성 이름. 부두노동자로 일하는 아버지 링케 씨와 세탁부 일을 하는 슬라브 출신 올가 노박 사이의 외동딸. 부부는 가난하고 말이 없어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누지도 않았고 딸과도 이야기를 하지 않아 아이는, 낙상을 해 몸이 자유롭지 못하지만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이웃 여자에게 많은 것을 배우고 사물에 대한 개념이 생겼으며, 심지어 글 쓰는 법까지 익힌다. 돌이 되어 설 수 있게 될 때부터 그냥 서서, 선 채로 모든 사물을 관찰하는데 시간을 보내던 조금은 이상한 아이, 엄마 이름을 물려받은 올가. 그러다가 부모 둘 다 발진티푸스에 걸려 3일 간격으로 세상을 뜨고, 올가는 할머니를 따라 농촌도시인 포메른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도무지 아이들과 어울려 지내지 못하는 올가는 선생을 졸라 도서관의 책을 열람할 수 있게 됐고 그러자 너무 자주 열람을 해서 책이 헤질 것을 두려워한 선생은 차라리 대출을 해줄 수밖에 없었다. 교회 오르간 연주자를 졸라 오르간 연주를 연습하기 시작했는데, 나중엔 오르간 선생 대신에 가끔 성가대의 반주를 맡는 수준으로 발전한다. 비록 생애를 걸쳐 중고 피아노 한 대를 사는 꿈은 이루지 못하지만. 다른 아이들과 달라 외로운, 그러나 외로움을 별로 느끼지 않는 아이.
  헤르베르트. 혼자 설 수 있게 되자마자 뛰려고 했던 아이. 세 살부터 달리기 시작한 포메른 최고 부잣집 맏아들. 일곱 살 때 부모는 혼자 뛰는 아이의 호신을 위해 영국산 양치기 개 보더 콜리를 선물해 항상 함께 뛰기 시작했다. 역에서 기차가 출발함과 동시에 나란히 뛰기 시작해 기차의 마치막 차량이 자신을 앞설 때까지 달리던, ‘빛나는 전사’라는 뜻의 이름 헤르베르트. 한 세대 전에 귀족의 칭호를 받고 싶어 했던 할아버지가 구입한 장원과 저택. 아버지 역시 철십자 훈장을 받은 보불전쟁의 영웅으로 여전히 귀족 칭호를 원했지만 결국 아버지와 같은 쉬뢰더 씨에 머문 상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장원 경영에다 설탕공장과 양조장을 짓고 주식투자를 할 만큼 큰 재산을 만들었으며 헤르베르트 역시 할아버지와 부모, 누이동생 빅토리아, 가족의 장원, 상당한 재산과 훌륭한 저택을 자랑스러워했다. 남매는 초등학교 4학년까지 다닌 후 두 명의 가정교사로부터 가정교습을 받고 가외로 헤르베르트는 바이올린, 빅토리아는 피아노와 성악 레슨을 따로 받는다. 장원의 아이들과 비교해 너무 우월해 외로운 남매의 유일한 친구가 역시 외로운 성격의 올가. 이들을 찍은 사진이 한 장 남았다. 사진을 보면 ‘헤르베르트와 올가는 빅토리아를 떠받드는 걸까? 빅토리아가 오빠와 연상의 친구를 지배할 줄 아는 걸까?’ 라는 의문을 갖게 만들기도 한다는데, 이건 틀림없는 복선이리라.
  견진성사를 끝내고 빅토리아는 부모를 졸라 쾨니히스베르크에 있는 기숙여학교에 들어가고, 올가는 포젠에 있는 국립초등교원양성소에 가고 싶어 하지만 할머니도, 목사도 여자가 더 이상 교육을 받는 건 무의미하다고 반대하는 바람에, 혼자 공부해 요즘말로 검정고시를 보리라 작심을 한다. 다행히 이십 리 떨어진 상급학교에 재직하는 선량한 여선생을 만나 공부에 박차를 가하게 되고, 헤르베르트 역시 자신의 교과서를 제공해주어 훗날 시험에 합격한다.
  헤르베르트는 열여덟 살이 되면 당연하고도 자연스럽게 근위부대에 입대를 해야 하니 그 전에 대학입학자격시험에 합격을 해야 할 터. 훗날 설탕공장과 양조장이 딸린 장원을 물려받아 경영을 할 것이라 경영학을 전공으로 선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가 농장이나 공장 주인으로 적임자가 아님을 알고 있어서 곤란한 상태였다. 헤르베르트는 언제나 낮 동안 태양과 함께 달리는 꿈속에 살았다.
  빅토리아가 떠난 후, 올가와 헤르베르트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는 없었다. 보는 눈 때문에. 집에서는 할머니가 올가의 공부를 끊임없이 방해해 숲 속의 한 공터에서 책을 펴 놓고 공부하다가 날이 추워지자 헤르베르트가 사냥용 오두막을 가르쳐 줘 그곳에서, 때론 교회의 후원자를 위한 칸막이 좌석에서 쉬지 않고 공부를 이어간다.
  방학을 맞아 집에 돌아온 빅토리아는 올가를 잊지 않고 산책과 차모임에 초대를 한다. 그러나 헤르베르트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촌스런 여자애하고는 상대하기 싫어. 올가 링케는 슬라브 식 이름 아냐? 그런데 왜 내 앞에서 당당하게 구는 거야? 맞먹듯이?”
  하지만 헤르베르트는 이 말을 들은 다음에서야 올가를 자세하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제 나는 한참을 두고 쳐다볼 거야. 네 얼굴, 네 목, 네 목덜미. 바로 너를. 나는 여태껏 그렇게 아름다운 것을 보지 못했어. 너는 나와 결혼할 거야.”
  그러나 올가가 열악한 곳에서 공부하는 일 년 동안 둘은 성적 접촉을 하지 않는다. 헤르베르트가 올가를 범해도 아무도 비난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만, 올가에게 헤르베르트는 장원 주인의 아들이 아니었고, 그는 그녀가 그냥 마을 처녀가 아니었기 때문에.
  새해가 되고, 쉬뢰더 저택에서는 거액을 들여 불꽃놀이를 하고, 올가는 최우수 성적으로 국립사범대학에 진학을 하고, 헤르베르트는 근위부대에 입대해 파란 상의와 하얀 바지로 된 제복을 입는다. 올가는 2년 과정의 교육을 마친 후 예전에 자신이 다니던 초등학교로 발령이 나고, 헤르베르트는 독일-서남아프리카로 파병을 가기 전에 3주 기한으로 집에 와 올가와 드디어 첫 밤을 지낸다. 꼼꼼한 피임과 함께. 그리고 이별. 첫 이별.
  헤르베르트가 파병을 가자마자 빅토리아는 자기가 아는 모든 친구의 아버지들에게 부탁하여 결국 올가를 지방행정부의 행정장관 명령에 의하여 동프로이센의 틸지트 지방 북쪽에 있는, 교사 한 명이 전 학년을 담당해야 하는 작은 초등학교로 발령 받게 한다.
  몇 년이 지나 헤르베르트가 귀환을 하고, 부모에게 올가와의 결혼을 승낙해달라고 하지만, 그럴 경우엔 모든 상속권을 박탈하겠으며 평생 의절을 각오하라는 통보를 얻은 그는 조국의 위대한 지리학자 훔볼트의 발자취를 좇아 여행을 떠난다. 아르헨티나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파라나 강을 따라 로사리오에 도착해 다시 기차를 타고 코르도바로 가서 말을 사 투쿠만으로 가 안데스 산맥에 이르기 직전에 독사에 물려 혼절한다. 인디오에게 구출돼 다시 투쿠만으로 돌아오지만 열병에 걸린 상태였고, 열병에서 다 낫자 시간과 돈이 고갈되어 귀국한다. 헤르베르트는 또다시 즉각 러시아와 핀란드의 접경지 카렐리야로 가 혹한의 눈 속에서 혼자 일 주일을 버티고 역마차 역에 도착해 스스로 생명을 구한다. 이 일을 기점으로 헤르베르트는 모든 일을 해낼 수 있으며 단지 포기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믿기 시작한다. 이어서 그의 여행은 브라질, 콜라 반도, 시베리아, 캄차카 반도를 넘어 심지어 북극해를 향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올가가 했던 일은? 기다림. 그리고 외로움에서 벗어나는 일. 기다림이 길수록 더 헤르베르트를 사랑하게 되는 일. 동프로이센의 벽지에서 재능이 뛰어난 아이 아이크를 더욱 훌륭하게 가르치고 돌보고, 상급학교에 갈 수 있게 지원하는 일. 올가는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더욱 현명해지고 넓은 포용의 가슴을 지니게 되면서, 광활함과 총과 칼에 과감하게 도전하지만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인지 투표권도 없는 여자에게 설명하지도 못하는 남자들의 무모함을 깨우치고 싶어 한다. 세월은 흘러 흘러, 올가는 가슴에 여전히 길을 떠난 헤르베르트에 대한 사랑을 간직한 채, 귀가 들리지 않게 되고, 나이를 먹는다. 그리고 누군가가 올가를 기억하고 기념하기에 이른다. 가슴이 먹먹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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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드의 물고기 책
리처드 플래너건 지음, 유나영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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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고른 건 당연히 플래너건의 2012년 맨-부커 수상작인 <먼 북으로 가는 좁은 길>을 공감하며 읽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하게는 알고 있지 않았던, 2차 세계대전 중 자바 섬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포로로 잡힌 오스트레일리아 병사들의 비참한 경험, 열악한 음식, 구타, 극한의 노동, 말라리아, 뎅기열, 부종, 콜레라, 이질 등의 질병 같은 것들, 전쟁이란 명목으로 벌어진 인간집단에 의한 다른 인간집단에 대한 학대를 실감나게 그렸던 것이 마음에 와 닿아서 이번에 같은 작가가 2001년, 40세 전성기의 나이에 출간한 <굴드의 물고기 책>을 선택하는데 망설임이 없었다.
  빅벨리해마, 켈피, 가시복, 별바라기, 쥐치, 장어 등 모두 열두 종의 어류를 표제로 한 부part로 구성한 독특한 책이다. 1부 ‘빅벨리해마’는 일인칭 화자, 이름을 ‘시드 헤밋’이라 유추할 수 있지만 꼭 그렇다고 단언할 수는 없는 ‘나’는 실업률이 높은 오스트레일리아 남동쪽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직업 없이 살고 있는 인물이다. 그래도 그냥 놀 수는 없어서 썩어가는 고가구를 사들여 거기에 상상할 수 없는 온갖 모욕을 추가해 돈 많은 미국 관광객에게 테즈메이니아의 옛 이름인 벤디먼스랜드 고미술품 협회라는 유령단체의 보증서를 붙여 고가로 팔아먹기도 한다. ‘나’의 보호관찰관, 즉 공무원이라서 가명으로만 등장하는 ‘레니 콩가’도 이 지역에서 가구 위조는 매우 전망이 좋은 직업이라고 선언하고는 썩은 가구에 모욕을 가하는 일에 가세를 하는 것도 모자라, 베트남에서 콩나물시루 같은 폐정크선을 타고 무작정 오스트레일리아로 떠나온 난민 라이 푸 훙 씨를 영입해 과감하게 고가구 제조 공정을 추가해버린다.
  존경심을 품으라는 이유로 ‘훙 선생’이라고 불리우기를 바라는 훙선생은 베트남에서 증기 기중기 기사로 있었으나 진짜 야심은 시인이 되는 거였다. 문학은 훙선생의 종교 자체라서, 그는 빅토르 위고를 모시는 불교 종파인 까오다이교의 정식 신자였단다. 이 양반에 의하여 첫째 파트인 ‘빅밸리해마’가 탄생하고 이어 물고기 파트가 등장할 수 있으니 소개를 해야 할 밖에.
  태즈메이니아에 ‘살라망카’라는 항구가 있었나보다. 나는 책을 읽으며 고가구 위조를 하고, 살라망카, 하니까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스페인의 살라망카만 생각하고, 거기가 내륙지방인데 어떻게 항구가 있을까, 싶어서 구글, 위키피디아 등을 아무리 검색해도 항구라는 내용이 없었다. 왜 이런 유난을 떨었는가 하면, 부두 근처 오래된 창고 건물에 있던 고물상에서 1940년대 흑목黑木 옷장과 낡은 함석 고기 찬장이 눈에 띄었고, 찬장 안엔 과월호 여성잡지가 수북하게 들어 있었는데 그 속에 비단 끈 같은, 제본할 때 표지나 책등에서 몇 가닥 빠져나온 것이 눈에 띄어 봤더니 윌리엄 뷜로 굴드라는 유형자가 1828년에(조심하시라, 책의 27쪽에는 1928년이라고 나와 몇 페이지 더 넘어가면 마구 헷갈리게 되어 있으니), 지금은 태즈메이니아라고 불리는 밴디먼스랜드 아래에 있다고 주장하는 유형지, (허구의) 세라 섬에서 외과의사가 과학연구목적으로 이곳에서 잡히는 모든 어류를 그림으로 묘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그린 책이었다.
  이 책이 특별하게 ‘나’의 관심을 끈 것은 예전 종이가 귀했던 때 흔히들 그랬듯이 세밀한 글씨로 빽빽하게, 하여간 종이의 여백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물고기를 동반한 이야기를 써 놓았기 때문이었다. 형식으로 보면 일기나 일지라 할 수 있으나 때론 속세의 진흙탕에 매몰된 실제 사건이 나열되어 있어 당시 거대한 유형지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서도 가장 비참한 곳이라 흉학범들이 몰리던 벤디먼스랜드, 또 그곳에서도 보급이나 파견 등이 극히 불량했던 외딴 세라 섬, 얼마나 자연 그대로의 상태인가 하면, 그곳의 우거진 밀림을 일컫기를 원주민을 제외한 사람의 발걸음을 허락하지 않아 드라큘라 백작이 살던 ‘트란실바니아 숲’이라고 할 정도였던 곳에서 벌어진 책. 1820년대에 ‘검은 전쟁’이라 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원주민 학살이 대대적으로 있었다고 한다. 책에서는 굴드가 물고기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시점을 전쟁이 바로 끝난 시기 정도로 설정을 했다.
  그러나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니라, ‘나’가 빌리 굴드가 그림과 함께 기록한 내용에 흠뻑 빠져, 급기야 함석 찬장을 사버렸고, 얼마나 마음에 들었는지 책을 이용해 이득을 챙길 생각을 버리고 책의 진실, 이 지역에 있었던 역사의 진위 여부를 파헤치기에 이른다는 거. 그리하여 태즈메이니아 섬의 기록물 보관소의 킴 피어스 씨에게 도움을 받아 같은 책, 그러나 글이 없고 그림만 있는 굴드의 물고기 책을 올포트 도서관에서 또 한 권 발견하기에 이르고, 수형자 사망 기록에서 몇 명의 윌리엄 굴드를 발굴해낸다. 이 가운데 왼쪽 가슴에 파란 날개가 달린 붉은 닻 그림이 “Love & Liberty”라는 명문epitaph으로 둘러싸인 문신을 한 인물이 1828년에 세라 섬 유형지에 도착한 상습 위조전문가이자 화가인 윌리엄 뷜로 굴드가 맞다. ‘나’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대학의 전공 교수한테 쫓아가 책을 보여주고 진위 여부를 가리기에 이르렀지만 교수는 책 자체는 당시에 그리고 쓴 것이 맞으나, 내용은 전부 허황된 허위라고 판정을 한다.
  늘 책을 끼고 살던 ‘나’가 어느 날 호텔 바에 앉아 책을 모두 읽고 화장실에 갔다 와보니 탁자가 깨끗하게 치워져 있었던 것. 당연히 <물고기 책>도 사라져버렸다. 이런 황당함이라니. ‘나’는 근본적인 무엇을 잃은 듯했고, 그 대신 기이한 전염병 같은, 지독한 짝사랑 비슷한 느낌에 감염된 것이 분명했다. 그리하여 올포트 도서관에서 같은 책을 빌려와 그것을 보며 자신이 기억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쓰기로 작정한다. 이 일을 ‘나’는 “굴드의 물고기 전부를 바다로 돌려보낼 수 있는 배를 만드는 것”이라 단정하면서, 소설은 본문을 시작한다.
  플래너건은 <북으로 가는 좁은 길>에서 수용소라는 한정된 장소에서 집단을 대상으로 하는 가혹한 처우를 현미경 적으로 관찰했다. 이번엔 태즈메이니아의 부속 섬인 유형지 세라 섬을 무대로 포로와 비슷한 범죄자 죄수들을 모아놓은 일종의 노역장을, 2차 세계대전 120년 전,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관찰하고 있다. 첫 장면이 바다 감옥. 영화에 가끔 나오는 건데, 만조 수위보다 낮은 곳에 감옥을 지어 문제 유형수들에게 징벌을 하는 의미에서 몇 주, 몇 달, 또는 몇 년을 집어넣으면, 만조 때마다 호흡을 위해 머리 위 대들보에 매달려 머리, 때로는 코만 내밀고 견뎌야 하는 모습이다.
  처음에 책을 열 때부터 앞부분을 읽으면서 리처드 플래너건의 놀라운 필력에 혀를 차게 된다. 짧지 않은 문장으로 마땅하게 화려하기도 하고 반어적이기도 한 글을 읽는 재미에 푹 젖을 수 있다. 그런데, 아쉽게도 1부 격인 빅벨리해마를 제외하면 책의 무대가 딱 한 군데, 좁디좁은 세라 섬에 국한되어 있어서 중간 이후 한 시점이 지나면 지루해질 수도 있다. <북으로 가는 좁은 길> 역시 자바 섬 수용소와 강제노역장에 국한하지만 포로들의 각기 특색 있는 과거 시절과 행위와 노동과 치료 및 수술 등 장면이 다양한데 비하여 이 책은, 놀라운 필력에도 불구하고, 여차하면 나처럼 질려버릴 위험이 있다. 작가도 이런 현상을 이해한 듯, 가끔 표현의 수위를 높이기도 하나, 내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 꽃노래도 삼세번이다. 어림도 없는 의견이지만, 만일 분량을 250쪽 정도로 팍 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존 바스의 요절복통 유쾌한 작품 <연초 도매상>을 떠올렸다. 기발한 상상력과 적절하게 코믹한 문장에 정상인이라면 상상을 하지 못할 엽기적 장면까지. 그러나 솔직하게 이야기하자면 <굴드의 물고기 책>은 <연초 도매상>에 대지 못한다. <연초 도매상>은 아메리카 대륙에 오기까지 온갖 우여곡절과 아메리카에 도착한 다음에 겪는 다채로운 파노라마가 독자를 끊임없이 감탄하게 만들지만, 아쉽게도 이 책 <굴드의 물고기 책>은 처음부터 고양되었던 호기심과 경탄과 재미와 긴장이 급격하게 무너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다만 이것이 전형적인 아마추어의 감상문이라는 것을 전제로 한다. 많은 독자가 이 책을 상찬한 바 있음도 기억할 만하다.
  한 줄로 내 소감을 이야기하자면, “재미있지만 아쉬운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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