닥터 코페르니쿠스 - 뿔 모던클래식 6
존 반빌 지음, 조성숙 옮김 / 뿔(웅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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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출판사 [뿔(웅진)>. 2013년부터 출판한 책이 없다. 그래서 이 책도 품절이다. 존 밴빌. 물 좋은 아일랜드 태생이면서 조이스, 트레버의 맥을 잇는 작가로 이름을 날린 바 있으나, 역자의 간섭 때문인지 유명한 작품 <바다>를 그리 즐겁게 읽지 못해 다른 책을 읽어보기로 했던 차에 눈에 띄어 고른 책. 읽어보면 존 밴빌 특유의 문장이 그대로 드러난다. 윌리엄 트레버 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쓸쓸함에 싸인 소년시대. 옛 집과 부모, 남매들을 그리는 것으로 지동설을 주장했던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의 전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작가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존 밴빌. 세상에. 전기 소설을 이렇게 써도 되는 거야?
  코페르니쿠스 가문은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라는 이름의 석공에 의하여 1396년 상부 슐레지엔에서 시작하지만 성인이 되어 장사꾼, 즉 상인으로 이름을 알린 그의 아들 요하네스를 코페르니쿠스라는 상인 가문의 시조로 친다고 한다. 1450년대 말 우리의 주인공 닥터 코페르니쿠스의 아버지가 슐레지엔에서 프로이센 왕국의 토룬 시로 사업장을 옮겼고, 여기에서 지동설을 주장하게 될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가 2남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다.
  사실 외가로 보면 니콜라스의 어머니의 경우 보잘 것 없는 집안으로 낙혼을 했다고 봐야 한다. 외가 바첼로트 가문은 13세기 말에 토룬에 정착한 세도가로 당당한 체구의 이모 크리스티나 바첼로트는 언제나 조카들에게 코페르니쿠스 가문이 얼마나 하찮은지 늘 험담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실 니콜라스의 외숙 루카스 신부는 비록 “엄격하고 황홀한 정도로 못생기고 거만한 성격이며, 소문이 사실이면 일생동안 웃은 적이 전혀 없는” 인간이지만 몇 년 후에 로마 교황청과 불화하는 지역의 권력자인 주교의 자리에 앉는다. 이 외숙은 니콜라스의 어머니가 일찍 죽고, 열 살 때 아버지마저 죽고 나자,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네 형제, 자매를 후원해야 하는 의무를 갖는데, 형제들 입장에선 구두쇠가 과하게 엄격하고, 냉정하다고 여길 수 있겠으나, 내가 보기엔 당시 독신의 권력자이자 성직자라면 그리 나쁘지 않은 후원을 했다고 생각한다.
  외숙이 니콜라스가 열 살 때 죽은 아버지를 대신해 아이들에게 행한 일을 보면, 애초에 성직에 관심이 있던 맏이 바바라는 쿨름에 있는 시토 수녀회로 보내 훗날 수녀원장까지 지내게 하고, 둘째 딸 카타리나는 자기 성격과 딱 어울리는 상인 남자와 결혼해 왕창 망해버린 아버지에 의해 남의 손에 넘어가버린 집을 다시 구입해 살림집으로 사용하니 비록 싸가지 없는 부부일망정 적어도 자기네 한 식구는 잘 먹고 잘 살았으니 그걸로 된 거다. 셋째 안드레아스와 막내 니콜라스, 두 아들들은 사제가 직접 데리고 키울 수 없으니 폴란드의 중북부에 있는 부오추아베크의 성당 부속학교로 전학을 시키면서, 졸업 후엔 크라쿠프 대학에 다니며 교회 일을 하라고 했다. 비록 조카들을 대하는 태도가 좀 딱딱하고 정이 없다고 해도 이 정도면 어떻게 더 잘할 수 있겠는가. 사회적으로도 바쁜 독신 남자가. 뭐 대학 졸업한 다음에는 알 거 없고. 그러나 외숙 루카스 신부는 대학 졸업 후에도 이탈리아에 유학도 시켜주니 세상에 이런 남자가 어디 있어.
  전기에 절대 빠뜨릴 수 없는 인간이 바로 위의 형 안드레아스. 이이는 어려서부터 죽을 때까지 동생 니콜라스를 싫어한다. 책에는 형이 아우를 싫어하는 이유가 분명하게 나오지 않는다. 그냥 형, 아우 사이에 가끔 있는 이유 없는(또는 사소한 갈등의 축적으로 인한) 미움일 수도 있고, 니콜라스가 워낙 총명하니까 형으로서 어릴 때부터 하도 비교를 당하니 볼 때마다 팍 패주고 싶었을 수도 있겠다. 만일 안드레아스도 나름대로 공부 좀 하는데 동생이 상상할 수도 없이 뛰어나면 미움이 더 심할 수도 있을 것이고. 어차피 책은 품절. <황금 노트북>처럼 다른 출판사가 판권을 얻어 다시 출판해야만 당신이 읽을 수 있을 것이니 스포일러의 위협 없이 그냥 이야기를 풀어버리면, 어쨌든 떡잎부터 삐딱하게 성장한 안드레아스는 명색이 수사이면서도, 수사는 정식 사제가 아니라 언제든 일반 시민으로 돌아갈 수 있기는 하지만, 크라쿠프 대학과 이탈리아 유학 생활 중에서도 한결같이 껄렁패들과 어울려 다니며 나쁜 짓을 일삼다 결국엔 심각한 매독에 걸려 귀신같은 모습을 한 채 프러시아와 폴란드, 이탈리아를 배회하던 중 동생이 머무는 교구에서 거금을 훔쳐 이탈리아로 달아나 객사할 운명이다. 물론 형제간이니 언젠간 화해를 하긴 하는데, 그건 니콜라스의 죽음의 침상. 먼저 죽은 형의 영혼이 동생의 영혼을 인도하는 것으로 끝난다. 아우, 이 정도면 심각한 스포일러? 아니다. 세상에 안 죽는 사람 있어? 이 책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지동설을 주장하는 코페르니쿠스 박사의 저서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가 출판되는 과정이다. 거기에 대해서는 한 마디도 안 할 예정.
  니콜라스가 앞으로 살며 위대한 발견을 했으면서도 이것을 굳이 세상에 알릴 생각을 적극적으로는 하지 않았던 데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그가 부오추아베크의 부속학교를 다닐 때 논리학, 기하학을 가르치던 엄한 교사 카스파르 슈투름을 비롯한 여러 선생들은 자신들이 어렵고 때로는 고통스럽게 습득한 지식을 니콜라스가 너무도 쉽게 소화해내는 것을 보자 질투를 넘어 분노를 촉발시켜버리고 만다. 교사들이 자신의 행동으로 스스로의 모욕감에 휩싸이는 것을 발견한 니콜라스는 이후 오히려 약간 둔한 척을 해 이들의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다. 이럴 때 니콜라스 앞에 등장하는 친절한 교사 보드카 아브스테미우스. 이름이 ‘알콜의존자’라는 뜻이다. 이 선생은 니콜라스에게 신중할 것을 주문한다. 지식은 정신을 단련시켜주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는 가르쳐주지 못한다면서. 세상이 당연하다고 느끼는 것이 바로 의심과 두려움의 원천이라며. 즉, 잘난 척하지 말고 살라는 충고. 대수, 기하학, 천문학과 음악이론을 가르친, 교사로는 형편없지만 적어도 니콜라스가 살아생전 파문당하지는 않게 가르침을 준 교사다. 덕분에 지동설의 진리가 그만큼 늦게 알려지긴 했지만 하여튼 코페르니쿠스를 자연사하게 해주었으니 그걸로 된 거다.
  내 눈을 확 끌었던 학자는 크라쿠프 대학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인 아달베르트 브루제프스키 교수. 니콜라스는 몰랐지만 니콜라스의 천재성에 의하여 몇 년 동안 계속 조롱을 당했다고 생각한 사람. 그래서 당혹과 창피로 이루어진 시뻘건 독기를 간혹 뿜어내는 것을 다른 이도 아니고 못난 형 안드레아스가 목격한다. 이이는 엄격하고 매우 배타적인 성격이었다.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원리를 옹호했지만 니콜라스가 교수의 책을 통해 발견한 바로는 내심으로 프톨레마이오스를 의심하여 기어코 메마른 사막처럼 봉인된 정신 속에서 진주보다 값진 의심의 방울을 증류해낸 훌륭한 과학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당대 최고의 수학자가 부린 속임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현상”을 구하기 위하여.
  브루제프스키 교수 댁을 형 안드레아스와 함께 방문한 니콜라스. 교수의 연약해보이는 겉모습은 속임수에 불과했다. 그는 성마르고 차가우며 세상을 혐오하는 노인이었다. 프톨레마이오스는 틀렸으나, 이 믿음을 가장 핵심적인 공모자에게 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 즉 금기를 들추고 있다는 것을 니콜라스는 짐작도 하지 못했다.
  당대의 최고 학자 브루제프스키는 크게 화를 내며 일갈한다. 니콜라스는 천문학과 철학을 헷갈리고 있다고. 천문학은 우주를 있는 그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한 결과를 말하며, 학자들이 관찰한 것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맞는 이론이라고. 즉, 하늘을 바라보면 별들이 원을 그리는 현상. 이건 모든 행성이 지구를 중심으로 원운동 한다는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완벽하다는 주장이다.
  이 시기가 1495년 경. 누가 생각나는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생몰시기가 1451~1506년. 1492년에 서쪽으로 항해해 자신이 생각하는 인도, 서인도-아메리카를 발견한다. 니콜라스는 지구의 차원에 대한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이 틀렸다는 사실을 콜럼버스가 이미 입증하지 않았느냐고 항변하며, ‘지식은 인식으로 바뀌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고대사상이 완전히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과학의 문은 굳게 닫혀 있는 법”이라고 설파하는 교수를 당해낼 수 없었다.
  그 후에도 이탈리아에 가서 여흥거리 비슷하게 의학박사 학위도 따고 홀로 천문학을 연구하던 그는 필생의 논문집 <천구의 회전에 대하여>를 쓰지만, 옛 시절의 친애하는 보드카 선생의 가르침을 따라 이의 출판을 계속 머뭇거리기만 한다. 그러다가 결국 독일에서 모종의 경로를 통해 책이 나오고, 그가 임종의 마지막 순간에 접어들어 의식이 없어지는 찰나, 죽음의 침상에서 그의 가슴 위에 한 권이 놓여진다.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는 천재 과학자의 신경줄, 성격 같은 것이 아주 잘 표현시켰다. 핵심만 지향하고 나머지 곁가지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것. 올바른 하나를 위해 상대방의 기분에 전혀 관심을 쏟지 않는 것 등등. 이런 성격이 전편을 통해 고르게 나타난다. 딱 한 장면, 임종 시기만 빼고. 원래 마음 약하고 정도 많은 아일랜드의 작가 존 밴빌은 기어코 코페르니쿠스 박사의 숨이 넘어가기 전에 세상과 화해를 하게 만들었다. 읽는 사람에 따라 더 좋을 수도 있겠지만. 위대한 과학자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는 전기 또는 평전. 이런 책을 품절시키는 건 사실 좀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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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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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재미있고, 심각하게 생각해볼 거리도 있으며, 읽고 난 다음에 독자로 하여금 충만함을 갖게 하는 명품. 그러나 컴퓨터 언어가 생소한 나는 겨우 오백 쪽이 조금 넘는 분량임에도 읽는데 사흘 반이나 걸렸다. 읽으면서 얼마나 자주 언어 검색을 해봐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어질어질하다. 작년에 읽은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어 새로운 책이 나온 걸 알고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구입한 책. <오버 스토리>가 그의 최신작으로 2018년 맨-부커 상의 최종후보short list에 올랐고 2019년엔 퓰리처상을 받은 책이니 읽은 순서로 보면 좀 웃기긴 하다.
  <갈라테아 2.2>는 1995년에 출판한 그의 다섯 번째 소설로 작가가 자기 이름 그대로 작품에 등장하는데, 독자는 당연하게, 그렇다고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믿지 않는다. 소설은 작가가 서른다섯 살에 이르러 십년간 동거하던 여인 C와 이별한 후 자신의 모교 U대학이 있는 미국의 도시 U로 돌아와 겪은 이야기를 다섯 번째 소설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작가가 책 속에서 끊임없이 이제 더는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징징대는 건 전부 엄살이라는 정도는 미리 알아두셔도 괜찮을 듯. 은퇴는커녕 이 책 이후에도 일곱 편의 장편소설을 출판하는데 무슨.
  “나는 서른다섯 번째 해를 잃어버렸다.”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랜 도시 U와 나, 뒤에 과학자 렌츠 박사에 의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의 이름 ‘마르셀’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나는 U에서 미분과 프로그래밍을 배운 물리학도였다. 실제로 리처드 파워스가 일리노이 대학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입학해 영문과로 전과를 해 석사까지 공부한다. 이후 보스턴으로 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프리랜스 데이터 프로세서로 일을 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U를 보스턴으로 특정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다만 소설에선 U가, 대학이 도시와 힘을 합해 새롭게 건설한 거대한 고등과학 연구센터이며, ‘나’는 세 번째 소설로 약간의 이름을 얻어 이곳에 일 년짜리, 공식직함으로는 방문학자, 비공식직함으로는 생색내기용 인문학자로 발을 디디게 된다. 작가 스스로가 데이터와 프로그래밍 프리랜서였으니 이런 책을 썼지, 그것도 1995년에, 세상에나, 인문학이나 문학만 공부했더라면 어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책은 크게 두 줄기 가지를 타고 전개된다. 하나가 석사 학위 후 스물두 살의 강사 시절에 만난 두 살 아래 제자 C와의 사랑, U와 네덜란드를 오가며 12년 동안의 동거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나’가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 이야기를 곁들인 과거. 다른 하나는 취미가 된 한밤중 센터의 복도 산책 도중에 들려온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진정제인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K.622의 아다지오 악장을 좇아가다 만난 필립 렌츠 박사와의 공동작업 이야기. 과거는 배려와 사랑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그리 드물지 않은 내용이지만, 현재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각해볼 거리도 있고, 충만한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어려운 프로그래밍 언어가 쏟아진다. 그래 좋다. 마음의 충만함을 위하여 그 정도는 기꺼이 희생할 만하니까. 다만 별점 하나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깎겠다. 독자 마음대로.
  현재 이야기라는 것이, 놀랍게도 AI 인공지능하고 관련된 프로젝트. 170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남자, 적어도 예순 살은 되어 보이는 나이에 여우원숭이처럼 생긴 필립 렌츠 박사가 그 한밤에 하고 있었던 일이란, 5분짜리 모차르트를 기계에게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었던 거였다. 장비 어딘가에 신경 네트워크를 심어 두었을 터. 기계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훈련하고 있었다. 기계가 반복해서 들은 뒤, 단순한 관악기 소리가 어떻게 영혼을 자극하는 가변적 신호 가중치를 가감하는지 알려줄 네트워크. 며칠 후 렌츠 박사가 ‘나’의 연구실을 방문해 마치 비난하는 것처럼 묻는다.
  “당신이 네덜란드에 사는 은둔의 소설가요? 열대 지역은 어때? 매년 6퍼센트의 인구증가에 한 해 수입이 2백 달러인 나라. 세계의 대부분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이거든.”
  ‘나’는 이제 더 이상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싫다. 여태까지 12년 동안 C의 부모와 함께 그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E라는 마법의 마을에서 지내고 이제 상처투성이로 돌아왔기 때문에. 딱 이런 상태일 때, 자칭 사회적 부적응자이고 근시안에다 난쟁이 콤플렉스가 있으며, 대개 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호전적이고 과장된 무례함으로 무장했으나 여기에 더해 척추측만증까지 훈장처럼 보유한데다, 뭐든 다 안다고 나대는 과대망상증 환자이기도 한 필립 렌츠 박사가 ‘나’에게 화해의 선물로 미시마의 <우국>이 실린 단편집을 건네준다. 명예가 실추된 예술가를 위한 자살 매뉴얼 정도로 받아들인 ‘나’. 하여튼 이런 방법으로 관계를 개선한 ‘나’에게 며칠 후 술집에서 다시 만난 박사는 해럴드를 위시한 동료 박사들에게 기계를 가르쳐서 글을 읽게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당연히 ‘나’를 파트너로 해서.
  목표는 학교의 석사자격시험을 위한 여섯 페이지짜리 목록에 있는 책들을 대상으로 어떤 문구라도 해석할 수 있는 신경망, 신경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신경망의 수준은 적어도 스물두 살짜리 인간의 답으로 손색이 없어야 하는 조건이다. 평가는 튜링 테스트. 일종의 맹검법으로 두 명의 응답자를 모르게 하고 일정한 시간에 답을 타이핑해서 채점한다. 만일 렌츠 박사가 이기면 해럴드는 버클리 선불교식 비계산적 창발 이야기를 집어치우고, 박사가 지면 장비의 지능화를 비롯해 여태 렌츠가 해온 것을 철회하고 이를 글로 써서 사과한다는 명예를 건 거창한 도박이 되어버린다. 이제 ‘나’도 엉겁결에 이 곤란한 난장판에 떨어져버린 것. 무리가 따른다고 쉽게 도중에 때려치울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육십이 넘은 노 과학자의 평생 명예가 걸린 일이니.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능의 시뮬레이션은 지능 자체나 다름없다. 블랙박스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주제가 주어지더라도 질문자를 속여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게 해야 하는 것. 신기하게도 작가는 아주 조금의 힌트를 제공한다. ‘나’의 입을 통해 발설하는 작은 열쇠.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공포는 우리가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공포.”
  계약의 완성을 위해 렌츠 박사는 독자는 이해하지도 못할 온갖 프로그래밍과 데이터 프로세싱 용어를 마구 쏟아내며 최초의 인공지능 장비 ‘임플리멘테이션 A’를 만들고 간략하게 ‘임프 A’라고 부른다. 이때 박사는 작업의 ‘핵심은 벡터’라는 말을 하는데, 언어의 습득이 어떻게 벡터와 연결이 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니까 본론의 첫 발자국부터 그래도 이과 출신인 나는 안개 속을 헤매며 시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임프A는 단순한 주어와 동사를 인식했으며 차츰 패턴을 완성한다. 그러나 스스로 문장을 만드는 일은 하지 못한다. 열받은 렌츠 박사는 임프A의 전두엽을 절개해 서킷을 망가뜨려버린다. 그래서 기계의 기억력을 약화시키니까 쇠약해진 임프A는 오히려 축소된 해협에서 학습 알고리즘이 솟아올라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는 거다. 패턴을 읽고 단어들을 의미 있는 관계로 정렬하는 것으로 봐서 임프A는 과도한 학습으로 그동안 죽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렌츠 박사와 ‘나’는 이렇게 개선된 기계에 새롭게 임프B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렇게 임프A, 임프B, 그러다가 기계에 스피커를 부착해 ‘나’를 속여 깜박 속아 넘어가게 만드는 임프C를 거쳐 나중엔 무려 임프H까지 간다. 임프H는 완성형으로 헬렌이란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큰 줄거리는 이렇다. 물론 나는 결론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겠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공포는 우리가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공포.”
  꿈을 이룰지도 모를 공포? 그럼 꿈을 이루어야 좋을까, 이루지 말아야 좋을까. 그건 수다한 프로그래밍과 프로세싱 언어를 검색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동반한 독서를 통해 직접 알아내시기 바란다. 그럴 가치는 충분하다.
  다시 말하는데, 별점 하나를 굳이 깎는 이유는 책 읽는 속도를 내지 못하게 만든 과다한 용어 때문이지 결코 이 작품의 품질 때문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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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2-01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로그래밍 언어를 일일이 다 찾아가며 읽으셨군요. 용어도 생소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저에겐 임프A,B...내용도 어렵게 느껴지네요. 작년에 <오버스토리>폴스타프님 리뷰읽고 사뒀는데 올해 꼭 읽어보려고 해요. 책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묘하게 너무 끌리더라구요.

Falstaff 2021-02-01 15:01   좋아요 2 | URL
옙. 용어 뒤져보느라고 죽을 뻔 했습니다. 오죽 고생을 했으면 그거 하나로 별점 하나를 뺐을까요. ㅋㅋㅋㅋ
<오버스토리>는 꼭 읽어보세요. 잘 읽히기도 하고 배울점도 많습니다.

붕붕툐툐 2021-02-01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갈테면 가라‘로 읽히다니.. 맘 속에 반항심 가득한가봐요~ㅎㅎ
폴스타프님이 명품이라 하시니, 좋은 책이 분명할 듯 합니다~

Falstaff 2021-02-01 15:08   좋아요 3 | URL
옙. 좋은 책입니다.
이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누군가가 번역하고 있나봅니다.
얼른 얼른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파워스한테 전화해서 소주 한 잔 사줄 테니까 한 번 오라고 했더니 요즘 자신도 다른 작품 시작해서 바쁘다고 하더군요. 이 형이 빼는 인간이 아닌데 정말 바쁜 모양입니다. ㅋㅋㅋ

붕붕툐툐 2021-02-01 15:3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었는데, 실제 작가랑 호형호제 하는 사이면 어쩌지;;;;)

Falstaff 2021-02-01 15:4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당연히 농담이지요. ㅋㅋㅋㅋㅋ

수이 2021-02-01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작가는 시작하기가 좀 힘들더라구요, 넘사벽 이런 느낌 강해서. 더구나 프로그....래밍 언어....... 그걸 과연 언어라고 불러도 되는건가요 폴스타프님, 그쪽으로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래도 읽을 수 있을까요......... 넘사벽 중의 넘사벽 느낌;;

Falstaff 2021-02-01 15:31   좋아요 2 | URL
저도 프로그래밍 쪽은 완전 백치라서.... 혼 좀 났습니다.
그냥 대충 넘어가면 수월하겠지만 팔자가 그런 팔자가 아니라서 매번 검색을 하고, (후주만 가지고는 이해불가일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들더라고요.

Falstaff 2021-02-01 15:36   좋아요 2 | URL
아참!
이 책 말고 <오버스토리> 추천합니다. 그 책, 제가 독후감 제목을 <모든 비 문맹인에게 권함>이라고 썼습지요. 그 책은 어렵지 않습니다. 잘 읽히고 뭉클하기도 합니다.

수이 2021-02-01 15:48   좋아요 3 | URL
그럼 오버스토리 먼저!!

Falstaff 2021-02-01 15:51   좋아요 1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잠자냥 2021-02-01 16: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하, 제가 이 책 도서관에 신청해서 받아와서는, 폴스타프 님과 같은 이유로 진도를 못빼다가 결국 어제 반납하고 말았어요. ㅠㅠ 다시 읽어야지....꼭

Falstaff 2021-02-01 16:04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몸 약한 사람 읽으면 심장병 도집니다. 아주 조심해야 해요. ㅋㅋㅋㅋ

han22598 2021-02-02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재밌을 것 같아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2-02 08:51   좋아요 0 | URL
옙! 재미는 있는데 본문에서 몇 번 거론했다시피, 프로그래밍 언어 등 전문용어들을 해독하는 것이 고난의 길입니다. 이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
 
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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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우의 삶을 그가 시편들에 묘사한 구절들을 참고해서 짐작해보면, 1971년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하례마을에서 나이 많은 부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소년기까지 보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자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집으로 놀러오기 시작하더니 소년 박성우의 볼에 입을 맞추는 일도 생긴다. 물론 나중에 선자는 경찰한테 시집을 가 넘볼 수도 없는 인연이 되었지만. 촌에서 할 일이 뭐 따로 있나. 그저 시간나면 염소 끌어다 나무에 매어놓고 흑염소 배를 베고 누워 하늘바라기나 하는 것이지. 아버지가 누에를 치다가 누에곰팡이 병이 도는 바람에 그나마 없는 살림마저 거덜이 나 이제 도회지로 터를 옮긴다. 아버지는 마치 두꺼비를 양 손에 든 것처럼 손의 모양이 변할 정도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인도 여자들 내의 만드는 봉제공장의 보조직공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박성우는 원광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을 했고, 이 즈음해서 시인의 어머니도 원광대학의 청소부로 다니기 시작한다.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도 청소부를 했던 어머니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이때 그만 두었는지 아닌지, 회사에서 잘렸는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박성우가 성인이 된 후, 전형적인 우리의 아버지가 큰 병이 들었고,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데 동의했다. 아마추어인 내가 보기에, 시 속에 담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겠나 싶은 리비도가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이 시집 《거미》가 나온 서른두 살 때까지는 가난하기도 했고, 연애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시인이여, 너무 아쉬워 말라. 원래 가난하면 연애도 안 되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없이 살거나, 나처럼 살다가 집안이 왕창 거덜이 났거나, 아니면 둘 다인 경우의 청춘이 과거에 이미 찍었던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걷지 않았나 싶다. 다만 막내아들이라니 기원하건데 잘 풀린 형제자매가 있어 현금과 건강에 보탬이 되었기를. 그랬을 거 같다. 음, 그런데 어머니가 노구를 끌고 미화원으로 다니는 마당에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으면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지, 그래 대학원에를 다녀?
  박성우는 서른 살 때 이 시집의 타이틀이기도 한 <거미>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한다. 데뷔작이니 그것부터 읽어보자.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전문)



  양조장에 직장을 얻어 다니던 사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든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써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그랬든지, 하여튼 목을 매달아 죽었나보다. 쯧쯧. 하필이면 죽은 사람의 눈이 술 만드는 양조장의 사택을 향하고 있었을까. 거기 사는 사람한테 무슨 원한이 있었나? 시를 다 읽자마자 전경이 눈에 확 그려진다. 2000년에 발표한 시. 이때까지는 그래도 우리 시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쓰인 거 같다. 이후에 우리나라 시의 장을 점령해버리는 것들은, 21세기 현대시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인, 파편화가 급속도로 진행이 될 예정이니까. 이 시의 의문점은, 죽은 사람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거미의)끼니로,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자 사내의 맨 나중 생이라고 했는데, 죽은 사내의 아내가 떠난 다음 아이들은 사내의 집을 거미줄에 걸린 ‘끼니의 집’ 또는 ‘날개달린 곤충의 집’이라 하지 않고 ‘거미집’이라 했을까. 피식자가 아무 설명 없이 포식자로 바뀌어 버렸다. 그냥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는 건 생략해버렸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시를 어떻게 쓰건 그건 시인의 고유한 권리이니 불만은 없다. 뭐 대략 천 편이 넘는 응모작 가운데 당선을 먹은 시니까 쓰기는 잘 썼겠지. 읽는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했을 뿐.
  시 속에 숱하게 나오는 중요 이미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어머니. 이 시집에서도 하필이면 같은 대학의 미화원으로 출근하는 어머니에 관한 시가 좋다고 해설에도 나오고, 내가 읽기도 그렇다. 근데 어머니를 그린 시가 워낙 많으니 오늘은 아버지에 관한 시를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대개 권위적, 폭력적, 괴물, 속물, 바람둥이, 역마살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가득한데 박성우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전문)



  나는 제목이 <두꺼비>고 아버지가 등장해, 이거 아버지가 만날 두꺼비, 즉 진로소주를 두 병씩 해치운 얘기 아닌가 싶었는데, 아이고 이런. 세상에. 누에를 치다 말아먹은 아버지가 도회지로 가솔들을 이끌고 나와 그나마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칠순이 가까워질 때까지 막일 판에 다니는 동안 손이 두꺼비 등처럼 울퉁불퉁해졌다는 이야기다. 시인은 아버지 잠든 새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눈이 벌게졌었고. 그런 아버지가 이젠 돌아가 다시 뵐 날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거미>도 <두꺼비>도 좀 직설적이지 않아? 나는 <초승달>이란 시가 좋았다.


  초승달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뒤로 3연, 다섯 행이 있지만 딱 위의 첫 줄이 진짜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일행시를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초승달>을 저 한 행만 읽으셨으면, 이제 나머지를 더 읽어보시라.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속으로 튀어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한 줄만 읽고, 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다른 분은 모르겠는데, 난 첫 행 하나만으로도 너무 충분하다. 나머지는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군식구들 같다. 작품을 “완벽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 결국 그걸 망칠 수밖에 없다.”고 리처드 파워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청한 새우잠.” 나는 이 구절을 “청晴한” 즉 “맑은 새우잠”으로 읽었는데 독자에 따라서 좀 재미없지만 “청請한 새우잠”, 새우잠을 청한 것으로도 받을 수 있겠다. 어쨌든 거 참 명품이로세. 나중에 좀 써먹어야겠다. 물론 그때마다 박성우의 시에서 따왔다는 말은 잊지 않겠다. 시인이여, 고맙다. 이왕 짧은 시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소개하고 독후감 접는다.



  콩나물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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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1-27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둠을 돌돌말아 청한 새우잠‘저도 제일 좋은데요,
이걸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맛이 안나겠죠? 그런걱정이ㅋㅋ
<거미>도 뭔가 스릴러 같지만 몇번씩 읽어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네요.

Falstaff 2021-01-27 11:10   좋아요 1 | URL
그렇다니까요! 청한 저 새우잠. ㅋㅋㅋㅋ
번역시는 절대 안 읽겠다는 신념은, ˝진짜 시인은 스무 살까지 쓴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러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글을 읽고 랭보를, 무려 김현의 번역으로 읽은 걸로 한 번 깨졌는데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읽은 다음에 이젠 진짜로, 진짜로 죽기 전엔 다시는 번역시 읽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미미 2021-01-27 11:18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면 별 생각 없이 번역 시 봤던 저는 지금 반성의 쓰나미가! 하..
올려주신 시 덕분에 역으로 생각하니 확실하네요!!


Falstaff 2021-01-27 11:53   좋아요 1 | URL
반성은요 뭘.
외국시 좋아하시는 분들은 또 얼마나 열심히 읽는데요.
다 취향에 맞고 안 맞고일 뿐입니다. ㅋㅋㅋㅋㅋ
전 그래도 꿋꿋하게, 앞으로도 절대 안 읽을 겁니다. ^^;;

hnine 2021-01-27 1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꺼비를 가까이서 몇번 본 적이 있어서, 고생해서 불거진 아버지의 손등이 두꺼비 닮았다는 표현이 금방 이해가 되네요. 같은 양서류이면서 개구리는 몸이 매끈하지만 두꺼비는 울퉁불퉁, 꼭 전복 껍데기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새우, 거미, 두꺼비, 곤충 ...등등, 이런 무척추동물이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네요.
청한 새우잠의 ‘청‘을 맑을 청으로 읽으니 느낌이 달라지네요. 신선해요!

Falstaff 2021-01-27 11:52   좋아요 2 | URL
요즘엔 두꺼비 같은 손이 거의 없어요. 남자들도. 험한 일을 해도 다 기계로 하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시인의 아버지는 촌에서 농사 짓고, 망해 도시로 와서 험한 일 하다보니 그렇게 됐겠지요. 힘든 시절 살다 간 분이겠습니다.
그죠, 맑은 새우잠. 어감이 훨 좋잖아요.
 
황금 구슬
미셸 투르니에 지음, 이세욱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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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아프리카 사하라의 오아시스 마을 탈벨발라. 이곳에 정착해 살지만 아직 유목민의 피가 흐르는 열다섯 살의 베르베르족 소년 이드리스가 있었다. 베르베르족은 사십일 동안 방주에 탄 짐승들을 잡아먹으며 포도주만 축낸 늙은이 노아(줄리언 반스, <10 1/2장으로 쓴 세계역사> 참조)의 둘째 혹은 셋째 아들 함의 자손이지만 일찌감치 정착해 농사를 지은 종족으로 20세기에 들어, 같은 함족이라고는 하나 아랍인, 베두인하고는 따로 구분되는 독립된 민족으로 천만의 인구를 유지했었다. 그러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유목민의 피가 완전히 말라버리진 않았을 터. 샴바 부족이 아직 유목생활을 하고 있어서 정착민 탈벨발라 마을에서 오아시스의 낙타를 맡아 기르며 낙타 젖 전부와 새로 낳은 새끼의 절반을 대가로 받아 살았다.

  1. 샴바 부족에 이브라힘 벤 라브비, 즉 라브비의 아들 이브라힘이 살아 이드리스와 친구 비슷하게 지냈다. 대개 유목민들은 자신들이 정착민들에게 일을 받아 살긴 해도, 어딘지 모르게 정착민을 좀 아래로 보는 기색을 감추지 못한다. 이브라힘은 고목나무 숲에 뛰어든 낙타를 찾으러 갔다가 가시나무에 눈을 찔려 애꾸가 됐지만 하나 남은 눈이 놀라운 시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루는 이브라힘이 외딴 우물가에서 암낙타가 새끼를 낳는 걸 보러가자고 이드리스에게 제의한다. 같이 가보니 우물과 오두막 사이에 갓 낳은 낙타 한 마리만 누워 있고 어미 낙타는 보이지 않았다. 출산에 힘을 쏟아 갈증이 나서 물을 마시려다가 깊은 우물에 빠져버린 거였다. 이브라힘이 줄에 매달려 우물에 내려가 보니 다리가 부러져 있어 낙타를 죽이고 해체를 해 고기로 만들어 가져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지하 20미터에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낙타 고기를 전부 끌어 올리고 지상에 올라온 이브라힘. 텅 빈 눈구멍에 핏덩이가 엉긴 흥분 상태에서 승리와 도전의 고함을 치며 우물을 좌우로 지지하던 버팀목 위에서 날뛰다가, 그만 삭은 버팀목이 부러져 다시 우물 속으로 추락했고, 버팀목이 사라져버려 우물 벽의 흙이 쏟아져 순식간에 생매장 죽음을 당해버린다.
  2. 이브라힘이 죽기 전, 대낮에 랜드로버를 몰고 가는 프랑스인 남녀가 이드리스를 지나쳐 가다가 다시 유턴을 해 돌아오더니 이드리스를 촬영하는 일이 생긴다. 이드리스가 금발의 여자 사진사에게 사진을 달라고 요구하니, 여자는 지도를 꺼내놓고 지금 그들이 있는 오아시스를 손으로 가리킨다. 사진을 현상하기 위해 며칠이 걸리니까 여기 오아시스에서, 손가락을 옆으로 밀더니 베니 아베스, 한 번 더 밀어서 베샤르, 그리고 계속해 오랑을 찍고, 오랑에서 페리호를 타고 스물다섯 시간 동안 지중해를 건너면 나오는 마르세유를 거쳐 다시 팔백 여 킬로미터의 고속도로를 타고 파리로 가면 그곳에서 사진을 부쳐주겠다고 말한다. 흰 피부와 금발의 미인. 사실 이 여자가 미인인지 아닌지 모른다. 그러나 이때부터 열다섯 살의 소년에게 금발의 여인은 일종의 거역할 수 없는 이미지로 각인되어 버린다.
  3. 오아시스에서 아흐메드 벤 바디의 딸 아이샤와, 모하메드 벤 수힐의 아들 알리 벤 모하메드의 결혼식이 며칠 동안의 축제 형식으로 열린다. 해가 지고 슈라이아 요새 쪽에서 압둘라흐 페흐르를 일종의 수head광대로 하는 놀이패 하객들이 몰려온다. 이 중에 은으로 된 장신구로 치장한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가 이드리스의 눈을 사로잡는다. 가히 공연의 혼이자 불꽃, 장신구들의 발레라고 할 장면에 취한 이드리스. 베일을 쓴 얼굴과 발을 제외하고 제트 조바이다의 매끈하고 빛나는 검은 배, 이 부분 한 곳만이 바라보기가 허용된 그녀의 속살. 게다가 가죽끈에 매달린 채 빙글빙글 돌아가는 황금 구슬. 이것이야말로 삼라만상을 품은 듯하고 침묵으로 모든 것을 표현한 고독한 귀금속으로, 자체가 자연을 모방하지 않은 순수한 기호이자 절대적인 형상을 갖춘 것이었다. 날이 밝고 조금 지나 이드리스가 슈라이아 요새 근처 놀이패의 숙영지에 가보니 이들은 벌써 떠나버리고 아직 화기가 가시지 않는 꺼진 장작에서 약한 연기만 피워 올랐다. 이때 이드리스의 눈에 들어온 떨어트리고 간 모래 속의 반짝임. 바로 제트 조바이다의 가죽끈에 매달렸던 황금구슬이었다. 나중에야 알았다. 황금구슬이 대가를 요구하는 자유를 의미한다는 것을.
  4. 놀이패 수광대 압둘라흐 페흐르가 모닥불 옆에 깊은 밤에 해준 옛 이야기, 해적 하이레딘의 모험담, 붉은 수염 임금의 초상. 지중해를 벌벌 떨게 했던 해적 하이레딘이 형과 함께 알제의 술탄을 살해한 적이 있다. 형이 틀렘센에서 전사한 후 하이레딘은 헤지라 912년, 서기력 1534년에 튀니지 항구도시 비제르트를 점령했을 때 튀니지의 술탄인 물라이 하산 대신 궁궐에 진입해 스스로 술탄의 자리에 앉는다. 이때 온 궁궐이 비었으나 단 한 명이 남았으니 임금의 초상을 그리는 어진화백御眞畵伯이자 궁전화원인 아흐메드 벤 살람이었다. 아흐메드의 방엔 도망한 술탄의 초상화가 어이없이 영웅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는 것을 보고 전부 불사르라 명령한다. 나날이 지나자 자신도 초상화를 그리고 싶어진 하이레딘 임금. 그러나 이이에겐 치명적 부끄러움이 있었다. 붉은 머리와 붉은 수염. 사라하의 전승에 따르면 엄마가 몸의 것이 있을 때 임신을 하면 붉은 머리카락의 아이가 태어나고, 아이가 아들일 경우 자라서 성인이 되면 역시 붉은 수염이 돋는다고 한다. 생리혈은 불결한 것으로 아이 역시 날 때부터 저주받은 생명으로 지목을 받는다. 그래 하이레딘은 아흐메드에게 자신의 초상화를 흑백으로만 그리라고 주문을 한다. 아흐메드는 흑백 스케치를 그리고 그것을 가지고 황야로 나가 케르스틴이라는 이름의 금발과 파란 눈을 가진 스칸디나비아 출신 여인에게 찾아가 조언을 구한다. 이 여자가 스케치를 바탕그림으로 해서 북유럽의 단풍나무로 만든 베틀에 앉아 양털로 융단을 짜기 시작해 유럽의 가을 풍경을 배경으로 머리털을 조화롭게 하고, 짐승의 털과 깃털로 동화시킨 이미지를 사용해 붉은 수염의 초상 융단을 제작한다. 정복 여행에서 돌아온 하이레딘이 이것을 보고 크게 만족하여 그동안 계속 착용했던 큰 터번과 턱 가리개를 벗어던지고, 이제부터 짐은 붉은 수염 술탄이다. 이를 만 천하에 알리도록 하라! 라고 지시하기에 이른다.


  열다섯 살의 이드리스가 한 순간에 경험한 일들. 이것들이 기어이 이드리스로 하여금 길을 떠나게 한다. 여기에 파리에서 사막으로 보내온 사진 하나. 그건 자신을 찍은 모습이 아니라 사진을 찍던 당시 자신 옆에 있던, 방울 모양의 술을 달고 머리를 치켜든 채 이를 벌씬 드러내고 히힝 웃고 있던 당나귀의 사진이었던 거다. 동네에 크게 소문이 난 사진. 어쩌면 동네 사람들 모두 파리에서 이드리스의 사진이 도착하기를 기다려왔는지도 모르는데, 이런 창피함이라니. 이리하여 이드리스는 흑인 무희 제트 조바이다의 황금구슬을 빼고는 아무 가진 것도 없이 예전 랜드로버를 타고 와 사진을 찍었던 금발여인의 손끝을 따라 오아시스를 떠나 베니 아베스, 베샤르를 거쳐 오랑에 이르고, 오랑에서 배를 타 지중해를 건너 마르세유에 도착해 다시 파리로 가 자신이 구축해왔던 이미지를 찾는 여정을 시작한다.
  책을 읽기 전에, 작가 미셸 투르니에가 사진가 에두아르 부바의 사진을 보고 예리한 통찰을 한 기록인 <뒷모습>을 낸 적이 있다는 것을 알면 더 좋을 듯하다. <뒷모습>과 같은 철학적 통찰이 대신, 사진 찍기라는 행위의 의의부터, 시간 포착의 이미지에 대한 사색을 통해 이드리스가 대륙을 떠나 파리에까지 가야만 하는 상황이 어떻게 의미가 있는지를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을 터이라서. 그러나 투르니에의 진짜 의도는 이미지, 나중에 금발의 여왕으로 대표하는 이미지를 극복하기 위한 기호, 즉 문자, 문자들의 조합인 문장과, 문장의 조합인 문학으로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글쓰기 또는 글자쓰기까지 나아가게 된다. 당연히 결론을 미리 이야기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좋은 작품이 2007년에 초판이 나온 후 어떻게 아직 중쇄도 찍지 않았는지 놀랍다. 스토리도 재미있지만 이야기 속에 확실한 금을 긋는 사색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도 한 번 집중해볼 만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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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의 길 -상 - 세계현대작가선 4
V.S. 네이폴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세계사 / 199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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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노벨상 수상자. 출판사 문학세계사는 ‘세계현대작가선’이란 시리즈를 만들었다. 1번이 죄르지 콘라드의 <방문객>. 이 책은 지금 시공사에서 팔고 있는 김석희 번역이 아니다. 김석희가 영어 또는 일어 책을 중역한 것이라면 정방규는 직역(11년간 한국외대 헝가리어 과 강의)일 확률이 높다. 2~3번이 이번에 어렵게 구한 두 권짜리 살만 루시디의 <무어의 마지막 한숨>, 세 번째 책이면서 시리즈 가운데 지금까지 팔리고 있는 유일한 책이 바로 이 책 V.S. 나이폴의 <세계 속의 길>이다. 이 책 역시 여차 했으면 절판의 딱지가 붙어 헌책방 선반 위에서 엄청 높은 가격이 붙어 있을 터이지만, 2001년에 노벨문학상을 받는 바람에 2001년 10월에 초판 중쇄를 찍었고, 그래서 내가 읽을 수 있었다.
  1932년 서인도제도 트리니다드에서 태어난 V.S. 나이폴은 인도에서 이민 온 브라만 계급의 후손이다. 어떻게 서인도제도에 동인도, 그러니까 진짜 인도 사람이 이민을 오게 되었는지는 라틴 아메리카와 서인도제도의 역사를 좀 아는 게 좋지만 그냥 읽어도 별 상관없다. 이 책 속에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가 유럽인으로는 처음으로 멕시코 만에 진입하고, 3차 항해에 트리니다드에 첫 발을 디뎠으며 금광을 찾기 위해 현지인들을 학살하고 노예로 만들어 스페인으로 데려가 여왕의 신망을 잃은 이야기에서 시작해, 현지인들을 거의 몰살을 시켜 부족한 노동력을 만회하기 위해 아프리카 인 노예를 수입했고, 19세기에 노예해방의 파도를 만나 아메리카로 떠나거나 중산층에 편입된 흑인의 노동력을 만회하기 위해 인도인 이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는 것도 다 나온다. 아메리카나 영국으로 빠져나가기 시작한 인도인 노동력을 다시 중국인으로 대체한 것까지.
  <미겔 스트리트>나 <비스와스 씨를 위한 집>, 그리고 대표작 <도착의 수수께끼>에 이르기까지 그의 작품에서 고르게 등장하는 것이 바로 나이폴 자신이 트리니다드 출신이며, 매우 공부를 잘 해 중,고등학교를 장학금으로 다녔고, 대학도 전액 장학생 자격으로 무려 옥스퍼드에 뽑혔다는 것. 그래 겨우 열일곱, 열여덟의 나이에 트리니다드를 떠났는데, 가족은 물론이고 친척, 동네사람들 모두 비행장까지 몰려나와 환송해주었다는 거. 영국에서는 처음에 런던에, 그러다가 옥스퍼드 근처 형편없는 하숙집에, 나중엔 좀 나은 런던의 집을 거쳐 마지막으로 스톤헨지가 저 멀리 보이는 작은 집에 정착해서 글을 쓰는데 전념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니면 적어도 알아챌 수 있다.
  이 책도 마찬가지여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영국으로 떠나기 전, 열일곱 살이 된 생일 때부터 일 년간 등기사무소의 2급 서기로 근무하며 겪었던 이야기가 나온다. 물론 작품의 시작은 영국으로 떠난 6년 후 증기선을 타고 2주 간이나 걸려 느릿하게 돌아온 트리니다드의 포트 오브 스페인 거리의 털북숭이 장의사 겸 꽃꽂이 강사 겸, 케이크 장식가인 레오나드 사이드라는 이름의 인도계 무슬림을 회상하는 것부터 시작하고, 이후에야 등기사무소에서 잠깐 함께 근무했던 성실한 블레어 씨, 양복점을 해서 꽤나 돈을 모은 재단사 나자날리 박쉬 씨, 성공한 극소수의 흑인인 변호사 에반더 씨 등을 추억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래 상당부분을 읽을 때까지는 자신의 먼 추억 속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든 에피소드 위주의 잔잔한 책이라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때쯤 작가는 다른 이야기를 하기 시작한다.
  바로 트리니다드라는 섬나라 국가의 시작과 역사,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중요한 전환기를 만들었던 인물이지만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을 중심으로. 물론 이 이야기를 끌어내기 위하여 작가는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본토의 무슬림과 전형적인 인도 무슬림과도 다른 아랍풍의 무슬림을 등장시켜 포트 오브 스페인의 무슬림 사원에서 수백 명의 남자들이 총과 폭탄으로 무장하고 세인트 빈센트 거리에 진출해 경찰본부를 습격하고, 병기고 근처를 폭파해 많은 경찰들을 죽거나 부상시킨 폭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 사건을 기점으로 작가의 사색은 저 멀리 1498년의 콜럼버스를 소환하기에 이르고, 이어서 1595년에 금광을 찾아 트리니다드에 들어가 엉뚱하게 모래만 가득 퍼서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가져간 월터 로리 경이 1618년에 목숨을 걸고 시작한 마지막 절망적인 항해와 탐험, 1806년 베네수엘라의 혁명가 프란시스코 미란다의 행적에 이르기까지 촘촘한 그물망을 짜나간다.
  약 550쪽의 분량에 이르는 장편소설. 20세기에 출간한 책이라 한 페이지에 스물여덟 줄, 한 줄에 원고지 기준으로 35자가 들어간다. 그러니 지금 기준으로는 글자 빽빽하다는 의미의 한자어를 써야 할 터. 내가 책을 읽는 기준 속도가 한 시간에 30쪽. 이 책은 집중해서 읽어야 25쪽 정도. 게다가 V.S. 나이폴 특유의 탄탄한 구조물을 짓기 위해 이야기의 연결고리가 되는 사건과 인물에 관한 충실한 보완 등으로 약간은 지루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나이폴을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결코 놓칠 수 없는 작품이다. 작가 스스로 자신의 고향으로 인지하고, 평생 영국과 세계를 떠돌면서도 묻힌 자신의 태胎를 향한 시선을 결코 거두지 않았던 한 시절의 대가가, 바로 그곳, 트리니다드의 진짜 이야기를 털어놓은 작품이니.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등기사무소의 성실한 직원 블레어 씨는 작품의 후반에 다시 등장한다. 작가는 세계적인 이름을 내기 시작한 소설가이면서 기자 직업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이 보인다. 그래 언론인 자격으로 동아프리카의 독재국가에 취재차 방문을 해, 트리니다드 섬의 영국인 거주지와 매우 흡사한 고급 주택단지에서 하인과 운전수를 거느리며 인도계 영국인의 자격으로 머물고 있다가, 유엔에 근무하면서 국제적 경력을 쌓은 나름대로 노련한 트리니다드의 정치가로 변신한 블레어를 다시 만난다. 이제 신생독립국인 동아프리카 국가가 어떠한 일을 해야 하는지 강의를 하러 온 것. 블레어가 ‘나’에게 한 이야기가 인상 깊어 간략하게 소개한다.
  블레어가 뉴욕에서 건강검진을 받았을 때 이야기. 몸집이 커다란 흑인인 블레어는 탈의실에 들어가 네 가지 색깔의 가운을 입어야 했단다. 색깔에 아무런 의미도 없고 그냥 아무거나 입으면 되는 거여서 입고 나갔더니, 이후에 같은 색깔의 옷을 입은 사람들끼리 한 무리로, 은근히 네 무리의 집단이 생겼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제 늙은 블레어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떠나려고 하는 이 세상은, 내가 처음 왔을 때보다는 그래도 많이 좋아졌지요.”
  식민지, 인종차별 등을 다 겪은 1920년 초반 생인 블레어가 보기에 이제는 그래도 좋아진 세상에서, 식민시대를 벗어난 신생독립국에 강사로 초빙되어 신생 아프리카 독립국의 문제 가운데 작은 부분, 마치 성서 시대를 살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는 이야기를 하고는, 황금과 상아의 밀반출에 관해 조사를 하다가 황무지의 바나나 나무 아래에서 암살당하고 만다. 나이폴은 블레어를 통해 이제 트리니다드의 경험이 신생국의 발길을 도울 수도 있다고, 거기까지 왔다고 말하고 싶었을까.
  좋은 책. 그러나 조심하시라, 출발은 매끄럽지만 여차하면 나가떨어질 수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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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1-01-22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비스와스 1권부터 구해야 하는데...
나이폴 경의 책은 사재기만 하고 결국
안 읽고 버티네요.

이 책 아니면 만나보지 못할 트리니다드
토바고에 대한 썰이 너무 궁금하네요.
결국 사서 읽어야 하는 걸까요.

Falstaff 2021-01-22 11:15   좋아요 2 | URL
나이폴이 잔재미는 없습니다. 어떨 때는 심지어 지루하기도 하고요.
사재기 하셨다니 몇 권 가지고 계신 것 같으니 그것부터 읽어보시고 결정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독자하고 맞지 않으면, 제가 썼듯이, 나가 떨어질 수도 있는 작가들 가운데 한 명입니다.

2021-01-24 11: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01-24 12:2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