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테아 2.2 을유세계문학전집 108
리처드 파워스 지음, 이동신 옮김 / 을유문화사 / 2020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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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단히 재미있고, 심각하게 생각해볼 거리도 있으며, 읽고 난 다음에 독자로 하여금 충만함을 갖게 하는 명품. 그러나 컴퓨터 언어가 생소한 나는 겨우 오백 쪽이 조금 넘는 분량임에도 읽는데 사흘 반이나 걸렸다. 읽으면서 얼마나 자주 언어 검색을 해봐야 했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어질어질하다. 작년에 읽은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 스토리>가 너무 재미있어 새로운 책이 나온 걸 알고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구입한 책. <오버 스토리>가 그의 최신작으로 2018년 맨-부커 상의 최종후보short list에 올랐고 2019년엔 퓰리처상을 받은 책이니 읽은 순서로 보면 좀 웃기긴 하다.
  <갈라테아 2.2>는 1995년에 출판한 그의 다섯 번째 소설로 작가가 자기 이름 그대로 작품에 등장하는데, 독자는 당연하게, 그렇다고 진짜 자신의 이야기를 썼다고 믿지 않는다. 소설은 작가가 서른다섯 살에 이르러 십년간 동거하던 여인 C와 이별한 후 자신의 모교 U대학이 있는 미국의 도시 U로 돌아와 겪은 이야기를 다섯 번째 소설로 쓰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그러니까 작가가 책 속에서 끊임없이 이제 더는 소설을 쓸 수 없을 것이라고 징징대는 건 전부 엄살이라는 정도는 미리 알아두셔도 괜찮을 듯. 은퇴는커녕 이 책 이후에도 일곱 편의 장편소설을 출판하는데 무슨.
  “나는 서른다섯 번째 해를 잃어버렸다.”
  소설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랜 도시 U와 나, 뒤에 과학자 렌츠 박사에 의하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쓴 프루스트의 이름 ‘마르셀’이란 별명으로 불리는 나는 U에서 미분과 프로그래밍을 배운 물리학도였다. 실제로 리처드 파워스가 일리노이 대학에서 물리학 전공으로 입학해 영문과로 전과를 해 석사까지 공부한다. 이후 보스턴으로 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와 프리랜스 데이터 프로세서로 일을 하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U를 보스턴으로 특정해도 크게 무리는 아닐 듯. 다만 소설에선 U가, 대학이 도시와 힘을 합해 새롭게 건설한 거대한 고등과학 연구센터이며, ‘나’는 세 번째 소설로 약간의 이름을 얻어 이곳에 일 년짜리, 공식직함으로는 방문학자, 비공식직함으로는 생색내기용 인문학자로 발을 디디게 된다. 작가 스스로가 데이터와 프로그래밍 프리랜서였으니 이런 책을 썼지, 그것도 1995년에, 세상에나, 인문학이나 문학만 공부했더라면 어디 상상이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싶다.
  책은 크게 두 줄기 가지를 타고 전개된다. 하나가 석사 학위 후 스물두 살의 강사 시절에 만난 두 살 아래 제자 C와의 사랑, U와 네덜란드를 오가며 12년 동안의 동거의 시작부터 끝까지를 ‘나’가 문학으로 전공을 바꾸게 된 이야기를 곁들인 과거. 다른 하나는 취미가 된 한밤중 센터의 복도 산책 도중에 들려온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진정제인 모차르트의 클라리넷 협주곡 K.622의 아다지오 악장을 좇아가다 만난 필립 렌츠 박사와의 공동작업 이야기. 과거는 배려와 사랑이 오히려 상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는 그리 드물지 않은 내용이지만, 현재 이야기가 재미있고, 생각해볼 거리도 있고, 충만한 즐거움을 준다. 그러나 어려운 프로그래밍 언어가 쏟아진다. 그래 좋다. 마음의 충만함을 위하여 그 정도는 기꺼이 희생할 만하니까. 다만 별점 하나는 오직 그 이유 때문에 깎겠다. 독자 마음대로.
  현재 이야기라는 것이, 놀랍게도 AI 인공지능하고 관련된 프로젝트. 170센티미터도 안 되어 보이는 남자, 적어도 예순 살은 되어 보이는 나이에 여우원숭이처럼 생긴 필립 렌츠 박사가 그 한밤에 하고 있었던 일이란, 5분짜리 모차르트를 기계에게 반복해서 들려주고 있었던 거였다. 장비 어딘가에 신경 네트워크를 심어 두었을 터. 기계로 하여금 아름다움을 인식하도록 훈련하고 있었다. 기계가 반복해서 들은 뒤, 단순한 관악기 소리가 어떻게 영혼을 자극하는 가변적 신호 가중치를 가감하는지 알려줄 네트워크. 며칠 후 렌츠 박사가 ‘나’의 연구실을 방문해 마치 비난하는 것처럼 묻는다.
  “당신이 네덜란드에 사는 은둔의 소설가요? 열대 지역은 어때? 매년 6퍼센트의 인구증가에 한 해 수입이 2백 달러인 나라. 세계의 대부분은 검은 머리칼을 가진 사람들이란 말이거든.”
  ‘나’는 이제 더 이상 네덜란드라는 나라가 싫다. 여태까지 12년 동안 C의 부모와 함께 그들의 고향인 네덜란드의 E라는 마법의 마을에서 지내고 이제 상처투성이로 돌아왔기 때문에. 딱 이런 상태일 때, 자칭 사회적 부적응자이고 근시안에다 난쟁이 콤플렉스가 있으며, 대개 이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호전적이고 과장된 무례함으로 무장했으나 여기에 더해 척추측만증까지 훈장처럼 보유한데다, 뭐든 다 안다고 나대는 과대망상증 환자이기도 한 필립 렌츠 박사가 ‘나’에게 화해의 선물로 미시마의 <우국>이 실린 단편집을 건네준다. 명예가 실추된 예술가를 위한 자살 매뉴얼 정도로 받아들인 ‘나’. 하여튼 이런 방법으로 관계를 개선한 ‘나’에게 며칠 후 술집에서 다시 만난 박사는 해럴드를 위시한 동료 박사들에게 기계를 가르쳐서 글을 읽게 만들겠다고 선언한다. 당연히 ‘나’를 파트너로 해서.
  목표는 학교의 석사자격시험을 위한 여섯 페이지짜리 목록에 있는 책들을 대상으로 어떤 문구라도 해석할 수 있는 신경망, 신경 네트워크를 만드는데, 신경망의 수준은 적어도 스물두 살짜리 인간의 답으로 손색이 없어야 하는 조건이다. 평가는 튜링 테스트. 일종의 맹검법으로 두 명의 응답자를 모르게 하고 일정한 시간에 답을 타이핑해서 채점한다. 만일 렌츠 박사가 이기면 해럴드는 버클리 선불교식 비계산적 창발 이야기를 집어치우고, 박사가 지면 장비의 지능화를 비롯해 여태 렌츠가 해온 것을 철회하고 이를 글로 써서 사과한다는 명예를 건 거창한 도박이 되어버린다. 이제 ‘나’도 엉겁결에 이 곤란한 난장판에 떨어져버린 것. 무리가 따른다고 쉽게 도중에 때려치울 수 없는 처지가 됐다. 육십이 넘은 노 과학자의 평생 명예가 걸린 일이니.
  완벽하고 총체적인 지능의 시뮬레이션은 지능 자체나 다름없다. 블랙박스가 해야 할 일은 어떤 주제가 주어지더라도 질문자를 속여 자신을 인간이라고 믿게 해야 하는 것. 신기하게도 작가는 아주 조금의 힌트를 제공한다. ‘나’의 입을 통해 발설하는 작은 열쇠.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공포는 우리가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공포.”
  계약의 완성을 위해 렌츠 박사는 독자는 이해하지도 못할 온갖 프로그래밍과 데이터 프로세싱 용어를 마구 쏟아내며 최초의 인공지능 장비 ‘임플리멘테이션 A’를 만들고 간략하게 ‘임프 A’라고 부른다. 이때 박사는 작업의 ‘핵심은 벡터’라는 말을 하는데, 언어의 습득이 어떻게 벡터와 연결이 되는지, 나는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니까 본론의 첫 발자국부터 그래도 이과 출신인 나는 안개 속을 헤매며 시작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임프A는 단순한 주어와 동사를 인식했으며 차츰 패턴을 완성한다. 그러나 스스로 문장을 만드는 일은 하지 못한다. 열받은 렌츠 박사는 임프A의 전두엽을 절개해 서킷을 망가뜨려버린다. 그래서 기계의 기억력을 약화시키니까 쇠약해진 임프A는 오히려 축소된 해협에서 학습 알고리즘이 솟아올라 말을 알아듣기 시작하는 거다. 패턴을 읽고 단어들을 의미 있는 관계로 정렬하는 것으로 봐서 임프A는 과도한 학습으로 그동안 죽어가고 있었던 거였다. 렌츠 박사와 ‘나’는 이렇게 개선된 기계에 새롭게 임프B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이렇게 임프A, 임프B, 그러다가 기계에 스피커를 부착해 ‘나’를 속여 깜박 속아 넘어가게 만드는 임프C를 거쳐 나중엔 무려 임프H까지 간다. 임프H는 완성형으로 헬렌이란 이름을 지어주게 된다.
  큰 줄거리는 이렇다. 물론 나는 결론에 관해서는 입을 다물겠다. 그러나 기억하시라.
  “어릴 적부터 가지고 있던 공포는 우리가 꿈을 이룰지도 모른다는 공포.”
  꿈을 이룰지도 모를 공포? 그럼 꿈을 이루어야 좋을까, 이루지 말아야 좋을까. 그건 수다한 프로그래밍과 프로세싱 언어를 검색하는 고통스런 과정을 동반한 독서를 통해 직접 알아내시기 바란다. 그럴 가치는 충분하다.
  다시 말하는데, 별점 하나를 굳이 깎는 이유는 책 읽는 속도를 내지 못하게 만든 과다한 용어 때문이지 결코 이 작품의 품질 때문이 아니라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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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2-01 16: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프로그래밍 언어를 일일이 다 찾아가며 읽으셨군요. 용어도 생소하지만 상상력이 부족한 저에겐 임프A,B...내용도 어렵게 느껴지네요. 작년에 <오버스토리>폴스타프님 리뷰읽고 사뒀는데 올해 꼭 읽어보려고 해요. 책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묘하게 너무 끌리더라구요.

Falstaff 2021-02-01 15:01   좋아요 2 | URL
옙. 용어 뒤져보느라고 죽을 뻔 했습니다. 오죽 고생을 했으면 그거 하나로 별점 하나를 뺐을까요. ㅋㅋㅋㅋ
<오버스토리>는 꼭 읽어보세요. 잘 읽히기도 하고 배울점도 많습니다.

붕붕툐툐 2021-02-01 15: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갈테면 가라‘로 읽히다니.. 맘 속에 반항심 가득한가봐요~ㅎㅎ
폴스타프님이 명품이라 하시니, 좋은 책이 분명할 듯 합니다~

Falstaff 2021-02-01 15:08   좋아요 3 | URL
옙. 좋은 책입니다.
이 작가의 또다른 작품을 누군가가 번역하고 있나봅니다.
얼른 얼른 다른 책들도 읽어보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파워스한테 전화해서 소주 한 잔 사줄 테니까 한 번 오라고 했더니 요즘 자신도 다른 작품 시작해서 바쁘다고 하더군요. 이 형이 빼는 인간이 아닌데 정말 바쁜 모양입니다. ㅋㅋㅋ

붕붕툐툐 2021-02-01 15:39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ㅋ(농담이라 생각하고 웃었는데, 실제 작가랑 호형호제 하는 사이면 어쩌지;;;;)

Falstaff 2021-02-01 15:47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 당연히 농담이지요. ㅋㅋㅋㅋㅋ

수이 2021-02-01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새로운 작가는 시작하기가 좀 힘들더라구요, 넘사벽 이런 느낌 강해서. 더구나 프로그....래밍 언어....... 그걸 과연 언어라고 불러도 되는건가요 폴스타프님, 그쪽으로는 진짜 아무 것도 모르는데 그래도 읽을 수 있을까요......... 넘사벽 중의 넘사벽 느낌;;

Falstaff 2021-02-01 15:31   좋아요 2 | URL
저도 프로그래밍 쪽은 완전 백치라서.... 혼 좀 났습니다.
그냥 대충 넘어가면 수월하겠지만 팔자가 그런 팔자가 아니라서 매번 검색을 하고, (후주만 가지고는 이해불가일 경우가 많더라고요) 그러다보니 시간이 많이 들더라고요.

Falstaff 2021-02-01 15:36   좋아요 2 | URL
아참!
이 책 말고 <오버스토리> 추천합니다. 그 책, 제가 독후감 제목을 <모든 비 문맹인에게 권함>이라고 썼습지요. 그 책은 어렵지 않습니다. 잘 읽히고 뭉클하기도 합니다.

수이 2021-02-01 15:48   좋아요 3 | URL
그럼 오버스토리 먼저!!

Falstaff 2021-02-01 15:51   좋아요 1 | URL
탁월한 선택입니다!!!

잠자냥 2021-02-01 16: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하, 제가 이 책 도서관에 신청해서 받아와서는, 폴스타프 님과 같은 이유로 진도를 못빼다가 결국 어제 반납하고 말았어요. ㅠㅠ 다시 읽어야지....꼭

Falstaff 2021-02-01 16:04   좋아요 2 | URL
ㅎㅎㅎㅎ 몸 약한 사람 읽으면 심장병 도집니다. 아주 조심해야 해요. ㅋㅋㅋㅋ

han22598 2021-02-02 0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재밌을 것 같아요^^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Falstaff 2021-02-02 08:51   좋아요 0 | URL
옙! 재미는 있는데 본문에서 몇 번 거론했다시피, 프로그래밍 언어 등 전문용어들을 해독하는 것이 고난의 길입니다. 이거 잊으시면 안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