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미 창비시선 219
박성우 지음 / 창비 / 200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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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성우의 삶을 그가 시편들에 묘사한 구절들을 참고해서 짐작해보면, 1971년 전라북도 정읍군 산내면 하례마을에서 나이 많은 부부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소년기까지 보낸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선자라는 이름의 여자 아이가 집으로 놀러오기 시작하더니 소년 박성우의 볼에 입을 맞추는 일도 생긴다. 물론 나중에 선자는 경찰한테 시집을 가 넘볼 수도 없는 인연이 되었지만. 촌에서 할 일이 뭐 따로 있나. 그저 시간나면 염소 끌어다 나무에 매어놓고 흑염소 배를 베고 누워 하늘바라기나 하는 것이지. 아버지가 누에를 치다가 누에곰팡이 병이 도는 바람에 그나마 없는 살림마저 거덜이 나 이제 도회지로 터를 옮긴다. 아버지는 마치 두꺼비를 양 손에 든 것처럼 손의 모양이 변할 정도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는다. 시인도 여자들 내의 만드는 봉제공장의 보조직공으로 들어가 일정기간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박성우는 원광대학 문예창작과에 진학을 했고, 이 즈음해서 시인의 어머니도 원광대학의 청소부로 다니기 시작한다. 대학원에 다닐 때까지도 청소부를 했던 어머니는 아킬레스건이 끊어지는 부상을 입기도 했는데, 이때 그만 두었는지 아닌지, 회사에서 잘렸는지 아닌지는 불명확하다. 박성우가 성인이 된 후, 전형적인 우리의 아버지가 큰 병이 들었고, 형제자매들은 아버지의 산소 호흡기를 떼는데 동의했다. 아마추어인 내가 보기에, 시 속에 담지 않았으면 더 좋지 않겠나 싶은 리비도가 곳곳에 숨어 있는 것을 보면 시인은 이 시집 《거미》가 나온 서른두 살 때까지는 가난하기도 했고, 연애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었던 것 같다. 시인이여, 너무 아쉬워 말라. 원래 가난하면 연애도 안 되는 게 정상이다. 그러니까 애초에 없이 살거나, 나처럼 살다가 집안이 왕창 거덜이 났거나, 아니면 둘 다인 경우의 청춘이 과거에 이미 찍었던 발자국을 따라 그대로 걷지 않았나 싶다. 다만 막내아들이라니 기원하건데 잘 풀린 형제자매가 있어 현금과 건강에 보탬이 되었기를. 그랬을 거 같다. 음, 그런데 어머니가 노구를 끌고 미화원으로 다니는 마당에 아들이 대학을 졸업했으면 돈을 벌어 가계에 보탬이 되어야지, 그래 대학원에를 다녀?
  박성우는 서른 살 때 이 시집의 타이틀이기도 한 <거미>로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해 등단한다. 데뷔작이니 그것부터 읽어보자.



  거미



  거미가 허공을 짚고 내려온다
  걸으면 걷는 대로 길이 된다
  허나 헛발질 다음에야 길을 열어주는
  공중의 길, 아슬아슬하게 늘려간다

  한 사내가 가느다란 줄을 타고 내려간 뒤
  그 사내는 다른 사람에 의해 끌려 올라와야 했다
  목격자에 의하면 사내는
  거미줄에 걸린 끼니처럼 옥탑 밑에 떠 있었다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 그물에 걸려 멈춰 있듯
  사내의 맨 나중 생이 공중에 늘어져 있었다

  그 사내의 눈은 양조장 사택을 겨누고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당겨질 기세였다
  유서의 첫 문장을 차지했던 주인공은
  사흘 만에 유령거미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양조장 뜰에 남편을 묻겠다던 그 사내의 아내는
  일주일이 넘어서야 장례를 치렀고
  어디론가 떠났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

  거미는 스스로 제 목에 줄을 감지 않는다  (전문)



  양조장에 직장을 얻어 다니던 사내가 부당한 일을 당했든지, 아니면 억울한 누명을 써서 자신의 결백을 밝히기 위해 그랬든지, 하여튼 목을 매달아 죽었나보다. 쯧쯧. 하필이면 죽은 사람의 눈이 술 만드는 양조장의 사택을 향하고 있었을까. 거기 사는 사람한테 무슨 원한이 있었나? 시를 다 읽자마자 전경이 눈에 확 그려진다. 2000년에 발표한 시. 이때까지는 그래도 우리 시가 별다른 교육을 받지 않은 독자들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형식으로 쓰인 거 같다. 이후에 우리나라 시의 장을 점령해버리는 것들은, 21세기 현대시의 가운데 가장 중요한 특징인, 파편화가 급속도로 진행이 될 예정이니까. 이 시의 의문점은, 죽은 사람이 마치 거미줄에 걸린 (거미의)끼니로, 곤충의 마지막 날갯짓이자 사내의 맨 나중 생이라고 했는데, 죽은 사내의 아내가 떠난 다음 아이들은 사내의 집을 거미줄에 걸린 ‘끼니의 집’ 또는 ‘날개달린 곤충의 집’이라 하지 않고 ‘거미집’이라 했을까. 피식자가 아무 설명 없이 포식자로 바뀌어 버렸다. 그냥 내 생각을 솔직히 말하자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아이들은 / 그 사내의 집을 거미집이라 불렀다’는 건 생략해버렸으면 어땠을까 싶지만, 시를 어떻게 쓰건 그건 시인의 고유한 권리이니 불만은 없다. 뭐 대략 천 편이 넘는 응모작 가운데 당선을 먹은 시니까 쓰기는 잘 썼겠지. 읽는 내가 이해를 제대로 못했을 뿐.
  시 속에 숱하게 나오는 중요 이미지,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이미지는? 어머니. 이 시집에서도 하필이면 같은 대학의 미화원으로 출근하는 어머니에 관한 시가 좋다고 해설에도 나오고, 내가 읽기도 그렇다. 근데 어머니를 그린 시가 워낙 많으니 오늘은 아버지에 관한 시를 한 번 읽어보면 어떨까? 문학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대개 권위적, 폭력적, 괴물, 속물, 바람둥이, 역마살 등의 부정적 이미지가 가득한데 박성우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두꺼비



  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 살짝 만져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대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 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전문)



  나는 제목이 <두꺼비>고 아버지가 등장해, 이거 아버지가 만날 두꺼비, 즉 진로소주를 두 병씩 해치운 얘기 아닌가 싶었는데, 아이고 이런. 세상에. 누에를 치다 말아먹은 아버지가 도회지로 가솔들을 이끌고 나와 그나마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칠순이 가까워질 때까지 막일 판에 다니는 동안 손이 두꺼비 등처럼 울퉁불퉁해졌다는 이야기다. 시인은 아버지 잠든 새 아버지의 손을 쓰다듬으며 땅에 떨어지지는 않았지만 눈이 벌게졌었고. 그런 아버지가 이젠 돌아가 다시 뵐 날이 없다는 거다.
  그런데 <거미>도 <두꺼비>도 좀 직설적이지 않아? 나는 <초승달>이란 시가 좋았다.


  초승달



  어둠 돌돌 말아 청한 저 새우잠,


  뒤로 3연, 다섯 행이 있지만 딱 위의 첫 줄이 진짜 마음에 들었다. 차라리 일행시를 썼더라면 더 좋았을 것을. <초승달>을 저 한 행만 읽으셨으면, 이제 나머지를 더 읽어보시라.

  누굴 못 잊어 야윈 등만 자꾸 움츠리나

  욱신거려 견딜 수 없었겠지
  오므렸던 그리움의 꼬리 퉁기면
  어둠속으로 튀어나가는 물별들,


  더러는 베개에 떨어져 젖네



  한 줄만 읽고, 이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읽으면, 다른 분은 모르겠는데, 난 첫 행 하나만으로도 너무 충분하다. 나머지는 잘 어울리기는 하지만 군식구들 같다. 작품을 “완벽한 첫 문장으로 시작하면 결국 그걸 망칠 수밖에 없다.”고 리처드 파워스가 이야기한 것처럼. “청한 새우잠.” 나는 이 구절을 “청晴한” 즉 “맑은 새우잠”으로 읽었는데 독자에 따라서 좀 재미없지만 “청請한 새우잠”, 새우잠을 청한 것으로도 받을 수 있겠다. 어쨌든 거 참 명품이로세. 나중에 좀 써먹어야겠다. 물론 그때마다 박성우의 시에서 따왔다는 말은 잊지 않겠다. 시인이여, 고맙다. 이왕 짧은 시 나온 김에 하나만 더 소개하고 독후감 접는다.



  콩나물


  너만 성질 있냐?
  나도 대가리부터 밀어올린다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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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1-27 10:5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둠을 돌돌말아 청한 새우잠‘저도 제일 좋은데요,
이걸 외국어로 번역하면 이맛이 안나겠죠? 그런걱정이ㅋㅋ
<거미>도 뭔가 스릴러 같지만 몇번씩 읽어보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네요.

Falstaff 2021-01-27 11:10   좋아요 1 | URL
그렇다니까요! 청한 저 새우잠. ㅋㅋㅋㅋ
번역시는 절대 안 읽겠다는 신념은, ˝진짜 시인은 스무 살까지 쓴 낙서를 찢어버리고 상아 장사를 하러 아프리카로 떠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글을 읽고 랭보를, 무려 김현의 번역으로 읽은 걸로 한 번 깨졌는데요,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읽은 다음에 이젠 진짜로, 진짜로 죽기 전엔 다시는 번역시 읽지 않겠다고 각오를 다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미미 2021-01-27 11:18   좋아요 1 | URL
그러고 보면 별 생각 없이 번역 시 봤던 저는 지금 반성의 쓰나미가! 하..
올려주신 시 덕분에 역으로 생각하니 확실하네요!!


Falstaff 2021-01-27 11:53   좋아요 1 | URL
반성은요 뭘.
외국시 좋아하시는 분들은 또 얼마나 열심히 읽는데요.
다 취향에 맞고 안 맞고일 뿐입니다. ㅋㅋㅋㅋㅋ
전 그래도 꿋꿋하게, 앞으로도 절대 안 읽을 겁니다. ^^;;

hnine 2021-01-27 11:2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두꺼비를 가까이서 몇번 본 적이 있어서, 고생해서 불거진 아버지의 손등이 두꺼비 닮았다는 표현이 금방 이해가 되네요. 같은 양서류이면서 개구리는 몸이 매끈하지만 두꺼비는 울퉁불퉁, 꼭 전복 껍데기 같기도 하고요.
그러고 보니 새우, 거미, 두꺼비, 곤충 ...등등, 이런 무척추동물이 시 속에 자주 등장하는 경향이 있네요.
청한 새우잠의 ‘청‘을 맑을 청으로 읽으니 느낌이 달라지네요. 신선해요!

Falstaff 2021-01-27 11:52   좋아요 2 | URL
요즘엔 두꺼비 같은 손이 거의 없어요. 남자들도. 험한 일을 해도 다 기계로 하기 때문인 거 같습니다. 시인의 아버지는 촌에서 농사 짓고, 망해 도시로 와서 험한 일 하다보니 그렇게 됐겠지요. 힘든 시절 살다 간 분이겠습니다.
그죠, 맑은 새우잠. 어감이 훨 좋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