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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이런 주제로 책이 한 권 나온 모양이다. 책을 통해 민음사가 출간한 세계문학전집 시리즈를 대표하는 다섯 작품으로 작가 김하나는 카를로스 푸엔테스 <아우라>, 이디스 워튼 <순수의 시대>,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셰익스피어 <맥베스>, 프란츠 카프카 《변신∙시골의사》를 꼽았다. 내가 이 다섯 작품에 관한 에세이집 “금빛 종소리”를 읽어본 것은 아니지만, 우리나라에서 가장 방대한 라이브러리를 자랑하는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에서, 책을 냈다 하니 조예가 있다고 여길 수 있는 김하나라는 작가가 꼽은 다섯 작품을 다행스럽게 다 읽어본 것이 기특했으며, 나도 이 시리즈 좀 읽었다고 평소에 어깨에 후까시 좀 잡고 다니던 터, 만일 내가 다섯 작품을 꼽으면 어떤 것을 선택할지 궁금했던 것 반, 한 번 골라보고 싶었던 것 반. 그리하여 오늘, 며느리와 아이들, 손녀, 손자가 온다고 해서 도서관 제낀 기념으로 간단하게 한 방 꽝!



1번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고른다. 자우메 카브레, <나는 고백한다>


카탈루니아 언어로 쓴 명작. 이제야 카브레라는 작가의 이름을 듣게 된 것이 의아할 정도였다. 저 14세기 말, 종교재판관에게 능욕을 당했다고 고발해 온 여성의 주머니에 든 단풍나무 씨와 솔방울로 이후 6백년에 걸친 거대한 죄와 악의 흐름을 시작한다. 자객에 의하여 주검이 된 수사의 주머니로 자리를 옮긴 씨앗은 수사의 몸을 양분삼아 거대한 나무로 성장하고, 나무는 풍미한 선율을 공명해주는 바이올린으로 변해 더 큰 죄를 잉태하는 거대한 이야기. <나는 고백한다>는 21세기가 최초로 발굴한 시대의 걸작 반열에 올라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2. 도심 속의 섬에 핀 꽃. 글로리아 네일러, <브루스터플레이스의 여자들>


  뉴욕 도심에 높이 솟은 콘크리트 벽. 저쪽 앵글로색슨 플로테스탄트들의 유토피아로 절대 접근하지 못하는 이쪽 폭력과 마약과 성폭행의 우범지대 흑인 지역. 60년 전 <미국의 아들>을 쓰던 리처드 라이트 시대에서 거의 몇 발 떼지 못한 차별과 불평등과 혐오가 만발한 도시. 그곳에 또한 약자들끼리의 차별과 폭행이 생겨나고, 다시 한번 더 소외되고 피학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그들의 이름은 여성. 이런 여성들이 이루는 거대한 연대. 어차피 버린 인생 속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여자들은 새로운 형태의 생명력 넘치는 모계사회를 이룬다.



3. 철저하고도 명징한 상상력의 승리.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로망 이후의 신문학을 탐색하던 유르스나르가 이런 작품을 썼다는 것에 충격 먹었던 소설. <알렉시> 같은 장르를 기대했다가 예상 외로 고집스러운 고증의 긴 터널을 걸으며 한 인간의 생애를 오로지 상상력으로 새롭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거장의 풍모를 발견했다. 말년의 하드리아누스가 양세손이자 당대의 철학자, 로마의 가장 위대한 황제가 될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 남기는 회상록. 나는 내 아이들에게 나의 삶을 통해 인생의 본질, 권력이 포함하고 있는 투쟁성, 아릿한 사랑, 인간과 역사에 대한 사색을 남길 수 없어 대신 이 책을 사 주었다.



4. 페트로니우스, 페트로니우스여! 헨릭 시엔키에비츠, <쿠오 바디스>


  새해연휴가 3일이었던 시절 흑백 더빙 영화로 TV에서 자주 볼 수 있었던 영화의 원작. 영화를 여러 번 봐 오히려 찾지 않았던 책. 원작에서 잘생긴 미남 주인공 비니키우스의 외삼촌인 페트로니우스는 강력한 폭군이자 황제인 네로에게 이렇게 유언한다. “폐하, 만수무강 하더라도 앞으로 대중 앞에서 노래는 하지 마소서. 양민을 학살하더라도 아무튼 시는 짓지 마소서. 신하를 독살하더라도 부디 춤은 추지 마옵소서. 또다시 로마에 불을 싸지르더라도 부탁이니 서투른 키타라 연주는 하지 마소서.” 하필이면 카타콤 시대의 로마가 어지러워 정치적 목적으로 원시 기독교 신자들을 탄압하던 시절,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는 베드로 앞에 다시 십자가를 진 예수가 나타나니, 베드로 왈, 쿠오 바디스?



다음 자리에 올리고 싶었던 목록

  그리스 고전작가, 단테, 보카치오, 초서, 셰익스피어, 괴테, 플로베르, 위고, 뒤마 같은 사람들은 제쳐두자. 위대한 극작가 유진 오닐, 마르케스, 불가코프, 레마르크도 자리를 양보하자. 그래서 남은 작품은:

  밀란 쿤데라 <불멸>, 토마스 만 <파우스트 박사>, 이사벨 아옌데 <영혼의 집>, 미셸 트루니에 <마왕>, 존 바스 <연초 도매상>, 엔도 슈샤쿠 <깊은 강>, 치누아 아체베 <사바나의 개미 언덕>, 아이리스 머독 <그물을 헤치고>, 조지프 헬러 <캐치-22>,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카를로스 푸엔테스 <의지와 운명>, 에벌린 워 <다시 찾은 브라이즈헤드>, 에두아르도 멘도사 <의지와 운명>, 마거릿 애트우드 <눈 먼 암살자>, 응구기와 시옹오 <피의 꽃잎들>. 이 가운데 선택을 했다. 앞의 네 권이 전부 엄숙무비한 것이라 좀 경묘한 작품으로.



5. 잃어버린 세대는 결코 잊히지 않았다. 잭 케루악, <길 위에서>


  진지한 것을 저 멀리 던져버린 세대. 중요한 건 일단 살고 보는 일.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노력할 것인가는 개나 줘버려라! 일을 하는 목적과 인생의 목표가 없어도 우리는 발산하고 발광하리라. 그리하여 샐과 딘, 잭 케루악과 윌리엄 버로스 일당은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면서 히치 하이킹 또는 훔친 차를 과속으로 운전하며 미국 동부에서 중부를 거쳐 서부로, 다시 남으로 핸들을 꺾어 멕시코시티에 이르기까지 쉼 없이 술과 마약과 섹스와 싸움과 절도에 탐닉한다. 내일은 없다.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공장으로 우뚝 선 번영과 기회의 위대하고 위대한 나라, 미국에서 자진해 소외당한 젊은이들의 우울하고 발칙한 행진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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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4-08-17 10:2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이 페이퍼는 민음사 세계 문학 전집을 좀 읽어 본 독서인만이 쓸 수 있는 것이 아닙니까!
여기 있는 책들 다 찜합니다.
읽은 책도 있지만 언제나 읽지 않은 책이 더 많습니다.ㅎㅎ
저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딸아이에게 선물해야겠어요^^

Falstaff 2024-08-17 10:45   좋아요 2 | URL
ㅎㅎ 재미있게 읽으시면 좋겠습니다! 다만 마지막 <길 위에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많이 엇갈리는 책이라 조심스럽네요. 다른 독자의 평도 감안하시기 바랍니다. ^^

독서괭 2024-08-17 11:1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1번 읽어서 뿌듯! 하지만 나머진 읽은 게 없네요 흑흑 진짜 하나도 없.. ㅜㅜ

Falstaff 2024-08-17 11:39   좋아요 3 | URL
아휴, 없으면 어때요! 천천히 읽으시면 되지요. ㅎㅎㅎ
근데 1번 진짜 좋지 않습니까! 그거 안 읽은 사람이 훨씬 더 많습니다! ㅋㅋ

단발머리 2024-08-17 1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과 같은 댓글을 저도 답니다 ㅠㅠㅠㅠㅠ 1번 아는 책 나와서 괜히 좋아했다가.....
저도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을 제일 먼저 주워봅니다. 어흑 ㅠㅠㅠ

Falstaff 2024-08-17 12:07   좋아요 3 | URL
ㅋㅋㅋㅋ 1번은 잠자냥 님이 영업을 엄청나게 하셨지 뭡니까. 하긴 아무리 영업을 해도 모자랄 명작이기도 하지요.
2번도 좋습니다. 단편 연작 비슷해서 읽기도 매우 편하고요.

coolcat329 2024-08-17 12: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폴스타프님 이런 페이퍼가 정말 재밌습니다. 이중에서 <나는 고백한다>만 읽어봤는데, 저도 한 권을 고르라 한다면 이 책입니다. 2,4번은 가지고 있는데 나머지도 구비해놔야겠습니다.

Falstaff 2024-08-17 12:19   좋아요 2 | URL
4번은 독자들이 잘 안 읽어요. 시엔키예비치가 폴란드 국적으로 좀 오래된 사람이라서 그런가 봅니다. 영화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었는데요.

coolcat329 2024-08-17 12:24   좋아요 2 | URL
네 저도 그중 한 사람이네요. 영화가 워낙 유명하고 또 어떤 내용인지 대충 알기도 하니 손이 안 가는 거 같아요. 근데 폴스타프님 리뷰읽고 구입은 해둔거에요. ㅎㅎ

coolcat329 2024-08-17 1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르케스가 없어서 조금 섭했는데 양보했군요 ㅎㅎ

Falstaff 2024-08-17 12:20   좋아요 1 | URL
만일 제쳐두거나 양보하지 않았으면 그런 작가들로만 채워야 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팍, 드는 거였거든요. ㅎㅎ 그래서 누구나 아는 작가/작품은 빼고 고른 겁니다.

stella.K 2024-08-17 12: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우, 여간해서 주말엔 글을 쓰시지 않으시는데 무슨 일인가 와봤더니 안 보면 클날 뻔했습니다. ㅎㅎ 민음사가 이 페이퍼 보면 꽤 뿌듯하겠어요. 전 민음사의 이 책들 싸서 좋은 거 빼면 딱히 판형이 맘에들지않아 언제부턴가 멀리했는데 다시 읽어야겠다는 생각이드네요. 폴님도 폴님만의 금빛 종소리 쓰시려면 쓸수도 있을텐데 말입니다. ㅋ

Falstaff 2024-08-17 12:30   좋아요 2 | URL
큰 일은요 뭘... ㅋㅋ
저는 민음사 교정 교열이 마음에 들지 않아요. 다른 출판사보다 심해요. 문장 자체에 대한 고민도 덜 하는 거 같아서, 이젠 이상한 문장이 나오지 않으면 민음사가 왜 이러지? 이런 생각이 들 정도라니까요. ㅋㅋㅋㅋ

페넬로페 2024-08-17 13: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폴스타프님, 책 냅시다^^

Falstaff 2024-08-18 07:09   좋아요 1 | URL
아마존 밀림을 보존하기 위하여 안 그러기로 했습니다. ㅋㅋㅋ

moonnight 2024-08-17 13: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길 위에서만 읽었네요ㅠㅠ 1번 외에는 다 가지고 있는데도ㅠㅠ 일단 1번을 사는 일부터 해야겠어요. 언젠간 읽겠지 하는 맘으로ㅎㅎ;;;;

Falstaff 2024-08-18 07:09   좋아요 1 | URL
1번은 사시고요, 즉시 읽으셔요. 일단 손을 대면 떼기 힘드니까 조심하시고요. ^^

다락방 2024-08-17 13: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한 권도 읽은 게 없다니!! 부끄럽네요!! 그리고 민음사 고전에 대한 서평집인지 그런 거 나올 거라면 폴스타프 님이 제일 먼저 써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잠자냥 2024-08-18 01:30   좋아요 0 | URL
제발 나는 고백한다 좀 읽으라구!!!

Falstaff 2024-08-18 07:10   좋아요 2 | URL
1번하고 2번, 특히 2번이 다락방 님한테도 맞을 거 같습니다. 2번 강추!!

다락방 2024-08-19 09:06   좋아요 1 | URL
1번은 가지고 있고 2번 사러 갑니다.

잠자냥 2024-08-19 09:35   좋아요 1 | URL
아! 2번도 정말 다락방 님이 좋아할 거 같습니다~!!
(저도 5별 줬던 거 같은데, 다락방 님도 그럴 거 같음)

햇살과함께 2024-08-17 1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3번 김하나 작가와 폴스타프님 중복이니 꼭 읽어야겠고 1번도 사두고 아직 못읽었네요ㅠㅠ

Falstaff 2024-08-18 07:10   좋아요 1 | URL
1번 읽으셔요. 순식간에 며칠 지나갑니다! ^^

자목련 2024-08-18 07: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은 게 없어요. <나는 고백한다>는 제목은 익히 알고요. ㅎㅎ

Falstaff 2024-08-18 07:43   좋아요 0 | URL
천천히 읽으셔요. 날들은 새털처럼 많습니다. ^^

유부만두 2024-08-18 07: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도 안 읽어서 빵점 맞은 학생이 되어버렸어요 ㅎㅎ

Falstaff 2024-08-18 07:45   좋아요 0 | URL
빵점이라니요. ㅎㅎㅎ 1, 2, 4 재미있고요, 3은 좀 장황할 수 있습니다. 5는 다른 독자평도 감안하시는 걸 권합니다. 재미나게 읽으셔요. ^^

독주가 2024-08-18 19: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쿠오 바디스의 진가를 알아봐줘서 감사할 따름. ^^

젤소민아 2024-08-21 0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판형, 표지, 본문 폰트 건 본문 디자인이건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는데 그래도 민음사만큼 묵직한 고전을 충실해 출판해 주는 것도 없으니까요~

Falstaff 2024-08-21 06:07   좋아요 0 | URL
요즘 민음사 세계문학전집은 예전에 찍은 품절 판을 다시 내는 데 정신이 쏠린 거 같더라고요. 고전은 세대별로 새롭게 번역해야 한다는 최초 출간 의지가 어느새 색이 하얗게 바래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