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력업체에 돈이 지급되지 않았다고한다. 그 사무실은 사개월째 월급을 주지 못하고 있다. 계약된 돈은 다음달에 지불된다고한다. 열심을 다하고 있고 심지어 밤도 샌다. 최선을 다할 뿐 아니라 괜찮은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그런데 왜 가난하지? 이건 전적으로 체제의 문제다. 기분이 별로 좋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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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찾아가는 블로그에 포스팅이 올라왔는데 목표가 분명하면 전략적으로 행동하게된다라고 하네. 나의 경우에는 어떨까 생각해보았는데, 목표는 항상 명확했지만 멘탈이 약해서 나가떨어지는 경우가 많았다. 스스로 의지가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느끼기로는 내게 의지라는게 있긴 한가 하는 생각. 내가 가진 의지의 총량의 대부분을 그 옛날 수능을 준비하며 다 써버린듯 하다. 하여간 꽤나 와닿는 얘기여서 앞으로 내 사는 방식에 적용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목표가 분명해지면 마이너한 일들이 아무리 괴로워도 인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사소한 것에 집착하면 큰 것까지 잃으니까. 통크게 가자 통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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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회사 근처에 있는 커피숍의 직원이 꽤나 이뻤던건 사실이다. 사람인가 싶을 정도였고 나랑 같이간 형은 아예 대놓고 뚫어져라 쳐다보더군. 밀려있던 수많은 커피을 지나 우리가 주문한 음료가 나올때까지 말이다. 압구정역에 보이는 광고판들이 역겹기는 하지만 새생명을 얻은 그들을 보면 경외감이 들기도한다. 신은 인간을 창조했고 성형외과 의사들은 미인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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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화를 외치던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했던 남영동 대공분실의 설계자가 건축가 김수근이라고 한다. 경동교회나 공간사옥과 같이 아름다운 건축물을 빚어낸 한국 건축의 거장인 김수근 말이다. 이런 건물을 잘 모른다면 다른 예가 있다. 88올림픽 경기장과 세운상가.

  대한민국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건축가이고, 유걸, 승효상과 같은 오늘날 한국 건축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는 사람들을 키워낸 스승이었다. 그게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 현대 건축은 김수근의 존재를 빼놓고는 이야기 될 수가 없다. 김수근은 그런 사람이다.

 경동교회의 숭고함을 빚어낸 김수근이 그 설계를 담당했다는 것은 슬픈일이다. 그리고 김수근이라는 개인과 그가 가진 의식에 대해 큰 실망을 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개인의 가치판단을 넘어선 건축과 사회의 관한 문제이다.

 건축은 시대를 보여주는 자화상이다. 그래서 모든 나라는 그 수준에 맞는 건축물을 가진다. 우리가 쓰나미처럼 몰아치는 서울 신청사를 가지게 된 것도, 오리배만도 못하게 한강에 둥둥 떠있는 새빛둥둥섬을 가지게 된것도 이 시대의 결정권자들이 가진 가치 판단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 결정권자들을 선출한건 다름아닌 바로 우리들이다.

  국민들을 박정희를 지도자로 뽑았고 - 물론 후에 독재를 했지만 - 그 시대와 수준을 보여준 상징적인 건물이 바로 남영동 대공분실이라는 것이다. 그 안에서 김수근이라는 개인이 그 상황을 피하려고 발버둥쳐 보았자 누군가는 그 건물을 설계했을 것이고 어떠한 방식으로든 지어졌을 것이다.

 김수근을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 설계로 분명히 그는 인생에 오점을 남겼다. 그러나 문제는 건축이라는 물리적 구조체를 형성하기 이전의 상위구조의 영향을 받는 다는 것이다. 건축은 그저 건축가가 상상속에서 만들어내는 허상이 아니라, 시대의 요구가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그릇인 것이다. 사회가 건강해야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건축물이 건강해질 수 있다.

 건축가는 약자다. 누군가가 건축가의 손에 망나니의 칼을 쥐어주는, 그리고 자신의 의사와 관계 없이 그 칼을 휘둘러야하는 일이 다시는 없었으면 좋겠다. 아름답고 숭고한 공간을 만들어내기에도 건축가의 일생은 너무나도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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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영동 1985>가 개봉을 앞두고 있다. 얼마전에도 민주주의자 김근태의 묘라고 적힌 묘비를 보고 울컥했는데, 그분에 대한 영화가 나온다니 또 울컥한다. 사실 말이 쉬워 고문이지 나는 생각만해도 아찔한데, 그것을 온 몸으로 받아낸 그분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고통이라는 한 단어로 추상화 시키는게 죄스러울만큼 그가 느낀 총체적인 아픔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으리라. 사실 이 영화를 볼 자신이 없다. 그냥 상상만 해도 끔찍한데 그 장면이 눈앞에서 펼쳐진다니. 나는 공포영화도 잘 못보는 사람이다. 하물며 이런 실화를 바탕으로한 고문은 말할 것도 없다. 눈으로 그 참상을 확인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분명히 고통스러운 시간이겠지만 아무래도 이 영화는 봐야만할 것 같다.



 나는 먹고 살만하게 만들어준다는 핑계로 타인을 억압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한 박정희와 같은 사람이 대통령의 자리에 앉은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처절한 고통 속에서도 인간의 삶은 돼지의 그것과는 다르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그분이 살아간 대한민국이 자랑스럽기 때문이다. 내가 그러한 삶을 살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감사해할 줄은 아는 사람이 되고싶다. 혹자는 이러한 민감한 시기에 이런 정치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영화를 개봉하는 것은 예술의 정치적 중립성을 훼손하는 행위라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다. 당신들 역시 박정희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를 만들던 박근혜의 삶을 담은 영화를 만들던 마음대로 하라고. 그들의 삶에서 이러한 감동을 받을 수 있다면 난 충분히 그들을 지지할 열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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