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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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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근대 이전의 우리나라는 유교적 가르침을 숭상하는 국가였다. 효와 충와 같은 수직적인 인간관계를 근본으로한 이 체계는 예의와 같은 포장지로 잘 싸여져 겉으로 보기에는 군더더기 없는 상품과 같이 보였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한정된 자원을 소수의 기득권이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의미와, 그 안에서 발생하는 억압을 숨김으로서 안정적인 사회를 만드는 목적이 숨어있었다. 


 이 책은 가족 안에 숨어있는 억압적인 구조에 대해 밝힌다. 서로에 대한 애정과 믿음으로 구성되어야할 가족 안에 숨겨진 권력구조와 욕망을 파해치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남성의 성적 욕구를 합법적으로 해소하기 위한 처첩제와 거기에서 발생하는 적자와 서자의 구조는 그 시대의 가족이 가진 가장 근본적인 문제 중에 하나였다. 처는 권력이 있었으나 사랑받지 못했고, 첩은 사랑받았으나 대를 잇지 못했다. 높은 사회적인 지위에 대한 욕망과 육체적인 욕망이 두개로 나뉘어 처와 첩에게 투영되었다. 분리된 두개의 자아 처첩으로 대응되어 끈임없는 갈등을 겪었고 그 두개를 동시에 취하기 위한 처와 첩의 보이지 않는 다툼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홍계월전, 옥루몽)


 여기서 태어난 자식들은 필연적으로 화목하지 못했을 것이다. 처의 자식들은 사랑받지 못하는 어머니를 보면서 아버지에게 실망을 느꼈을 것이고, 첩의 자식들 역시 첫째 부인에게 억압받는 자신의 어머니를 보면서 분노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 사이에 흐르는 적자와 서자의 수직적 위계는 팽팽한 긴장감을 형성시키켰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이들의 왜곡된 자아는 유교의 충이나 효와 같은 가치로 표면적으로는 봉합된 것처럼 보였지만, 그 안에는 갈등으로 가득했을 것이다. 이미 가정에서의 불합리와 수직구조를 체화했다면, 이들은 사회에서 어떠한 행동양식을 보여왔을까. (홍길동전)

 

 권력을 가진 이는 처첩을 두고 이를 통해 왜곡된 가족관계를 만들어냈다면, 일반 서민들 다른 방식으로 왜곡된 가족관계를 만들어냈다. 원앙새 한쌍과 같이 아름다운 가정을 꾸린 사람도 있었겠지만, 남존여비를 기반으로한 유교사상은 서로 소통하는 가족을 만들어내기 보다는 가부장 중심의 작은 독재사회를 만들었으리라 예상할 수 있다. 지금도 내려오는 부모님과는 겸상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가부장제의 수직적 위계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가부장의 권한에 따라 온 가족이 수동적으로 움직이는 것이 일반적인 가정의 모습이 아닐까 상상해본다. (흥부전, 쥐 변신 설화, 옹고집전)

 

 한편, 일찍이 과부가 된 여성들은 재가하지 못하고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며 평생을 살아가야했다.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양반의 숫자를 제한해야했기에 과부들이 재혼한다는 것은 양반의 숫자를 늘리는 일이고, 과부의 재혼은 국가적으로 억압당했다. (열녀함양박씨전)


 이러한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고자하는 욕망이 있었지만, 그것은 이 땅이 아닌 상상의 나라에서 실현되거나 혹은 실패하게된다. (홍길동전, 최고운전) 


 그러나 이렇게도 생각해본다. 그들이라고 가족을 사랑하지 않았을까. 아무리 구조적으로 한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가족구성원간에 서로를 사랑하는 것은 본능에 가까운 것이니까 말이다. 어쩌면 그토록 억압적인 가부장제라는 틀을 유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족체계가 유지된 것은 그래도 부모가 자식을, 그리고 자식이 부모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가끔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부모와 자식을 위해 희생한다. (여우누이, 심청전)


  어디선가 재미있게 들었던 이야기들이 실은 그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었다. 그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람들의 이중적인 행동과 약자에 대한 억압이 드러난다. 할머니가 손자에게 해주는 재미있는 이야기 정도로만 여겨지던 전래동화가 실은 이면에 감추어진 시대상을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이다. <가족 기담>이라고 이름 붙은 이 책을 읽고 난 소감은 눈앞에서 선혈이 낭자하는 B급 공포영화의 소름끼침이라기보다, 김기덕의 영화와 같이 사회의 가장 밑바닥을 가감없이 보여주기에 느껴지는 공포스러움에 가까웠다. 아니, 당연하다고만 생각했던 현실에 대한 이면의 것을 알게 되었을때 느껴지는 무기력감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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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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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향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공산주의를 꿈꾸던 사람들은 적어도 이상향이란 노동자 계층이 자신의 삶에서, 또 사회에서 주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 핵심에는 마르크스 사상이 있고, 이를 이어받은 러시아 혁명가들로부터 시작된 공산주의 혁명은 직접적으로 반세기 동안 세계사적인 영향력을 발휘했다. 


 공산주의라는 이념은 인류가 만들어낸 가장 이상적인 목표을 가진 체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든다. 일단 개인의 이기심을 극대화하자는 자본주의와는 달리, 목적부터가 노동자(크게 보면 인간)해방 아니겠는가. 노동자(인간)의 의지를 통해 억압받는 체제를 뒤엎고 누구나 평등한 사회를 만들자는 목표 자체는 오늘날에 생각해보아도 참으로 숭고한 이상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목표에도 불구하고 왜 사멸할 수 밖에 없었는지는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반복되는 구조에서 조금은 힌트를 얻을 수 있겠다. 

 급진적인 변화를 통해 권력을 잡은 소련의 볼세비키당은 소수의 인원으로 거대한 영토를 다스리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권력의 피라미드와 같은 이 방법론은 하나의 꼭지점에서 시작되는 일방향적인 억압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공산주의 국가 자체를 보면 그 곳엔 언제나 독재적인 권력을 행사하는 절대자가 존재했고, 이것은 소련과 그 명령에 따르는 위성국가와 같은 국가적 수직관계로 확장된다. 

  이러한 구조의 전제에는 엘리트 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는 독단이 숨겨져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엘리트가 주도적으로 국가를 움직여야만 궁극적인 평등사회, 즉 공산주의 사회가 이 땅에 더 빨리 도래할 것이라는 믿음이 바로 그것이다. (오늘날에도 남들보다 조금 더 공부하고 성공했다는 사람들은 이러한 유혹에 빠진다.) 노동자의 억압을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회시스템이 오히려 엘리트와 민중을 구분함으로, 엘리트의 정책을 일방향적으로 따르게 만드는 또 다른 억압체계가 생겨난 것이다. 가장 평등한 국가를 만들고자한 꿈은 아이러니하게도 또 다른 형태의 불평등 구조를 양산해냈다.

 불평등 구조에 저항하려는 시도들이 있었지만, 강하게 억압되자 사람들은 이중적으로 행동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기 보다는 생존할 수 있는 말을 택했으며, 또 생존을 위해 서로를 밀고하기 시작했다. 공산주의 체제에 빠짐없이 존재하는 노동 수용소는 말살된 인간의 자율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공산당이 선전하는 것 외에 다른 의견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산주의 체계는 고인 물처럼 썩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경제 계획이 시도되었으나, 목표량은 인간의 자율성과 이기심을 전제로 하지 않고서는 채워지지 않았고, 그결과 관리자들은 달성량을 조작해야했다. 그것이 상부에 보고되었고, 독재자들은 자신들의 나라가 앞으로 나아간다고 믿었으나 그것은 단지 지표상의 숫자에 불과했다. 물론 과학 및 군사 기술이 발달하기는 했지만, 일반 민중들이 사용하는 소비재는 조악했으며 그나마도 물량부족에 허덕였다. 

 공산주의 국가의 마지막 시기였던 1980년대 말, 개혁을 추구했지만 억압이라는 고삐를 풀어버린 공산주의는 각자의 길을 가려는 개인을 통제하지 못했다. 개인의 발언권과 자율성이 주어지자 사회는 통제되지 않는 상태로 빠져버렸다. 억압체제를 유지하지 못하는 공산주의는 결국 내부로 부터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인간의 자율성과 공산주의의 독단은 양립하지 못하는 물과 기름과 같았던 것이다.

 이상적인 목표만 존재했던 공산주의 체제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렸다. 이 책을 읽는 동안 떠오른 오만가지의 생각 중에 지금까지도 남은 몇가지 질문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0. 어떻게 하면 노동에서 의미를 찾고 노동자가 소외당하지 않을 수 있을까.
1. 어떠한 방식으로라도 폭력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2. 추상적인 목표와 구체적인 정책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좁힐 수 있을까. 

3. 어떠한 선의의 목적을 위해 - 이를테면 경제발전 혹은 인간해방 - 일시적인 독재체제가 가능한가.
4. 개개인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것과 효율적인 목표추구 - 이를테면 경제개발 - 는 양립 가능한 것인가.
5. 민중에게 더 큰 자율성을 부과했던 고르바초프가 경제적 위기로 신임을 잃은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하는가. 
6. 진정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수단은 무엇인가. 급진적인 변화가 근본적인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가.
7. 경제를 성장시킬수 있다면 어떠한 억압적인 사회체계도 용납될 수 있는가. (중국의 예)
8. 독재적 억압체계는 무너진다는 역사를 통해 북한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가. 북한을 고립시키는 것이 그 체제를 무너트리는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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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의 배신]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노동의 배신 - '긍정의 배신'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워킹 푸어 생존기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최희봉 옮김 / 부키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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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어떤 국가가 경제적으로 절대 빈곤의 위치에 놓여있다면, 그 국가에 속한 개인의 삶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그 국가에 속한 사람들은 열심히 일하면 사회 전체의 부가 언젠가는 늘어나고, 자신 역시 열심히 일하면 잘살게 될 것이라는 희망을 가지고 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의 전체적인 부(富)가 세계에서 손꼽힐만큼 충분함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열심히 일함에도 불구하고 헤어나올 수 없는 가난에 허덕인다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의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지금, 지구상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중 하나라는 미국에서 바로 그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이자 사회운동가인 바바라 에런라이크가 미국 사회의 워킹 푸어(Working Poor : 끊임없이 일함에도 불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일컫는 신조어)의 삶을 온몸으로 겪어낸 현실 고발적인 이야기를 담고있다. 저자가 이 체험을 시작한 1998년은 IT 산업이 극적으로 성장하면서 벤처 사업가들의 성공이야기가 언론에 오르내리던 시기였다. (지금와서 평가하자면, 버블 현상으로 인한 착각에 가까웠다.) 당시의 경제적 배경은, 오늘날의 미국을 만들어낸 구호 중 하나인 'American Dream' , 즉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면 꿈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 그저 환상만이 아니라 손에 잡힐 듯 가까웠던 때였던 것이다.

 

 그러나 저자가 체험한 경제적 하층민들의 생활은 비참함 그 자체였다. 신자유주의 체계의 미국은 정부가 담당해야할 공적인 기능조차 시장에 넘겨버림으로서 공교육과 의료, 그리고 보육 제도의 붕괴를 가져왔다. 미국 정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소비자는 가장 합리적인 선택을 할 것이며 공급자는 최저의 비용으로 최고의 재화를 제공하기 때문에 신자유주의 체계야말로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할 사회시스템이라고 말이다. 그러나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저자가 경험한 워킹 푸어들의 삶을 돌이켜볼때, 정치인들의 말에 심각한 오류가 있다는 것을 부정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 문제를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할까. 저자가 현장에 뛰어들었을 당시인 1998년, 저임금 노동자들은 약 시간당 7달러를 받고 일했다. 그들이 그런 저임금 노동을 선택한 까닭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시작이야 어찌되었던간에, 일단 저임금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는 순간 그 삶은 자의에 상관없이 돌아가기 시작한다. 벌어들이는 돈의 반 이상은 주거비용으로 나가는데, 일정한 정도의 임대 보증금을 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보증금이 있다면 지불하지 않아도 되었을) 더 높은 월세를 지불해야하는 모텔이나 컨테이너 주거를 전전할 수 밖에 없다. 아이러니하게도 1990년대 말의 부동산 시장의 활황은 저임금 노동자들이 그나마 살만한 저렴한 주거를 도시 밖으로 내몰았다. 다시 말하자면, 경제적 호황인 시대에도(자세히 들여다보면 2008년의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라는 파국을 맞이한 부동산 버블의 일부였지만) 저임금 노동자들의 삶은 오히려 어려워졌던 것이다. 반이상의 소득을 주거, 그것도 되돌려받지 못하는 임대료에 쏟아부어야만하는 그들의 삶에 저축이라는 것은 꿈꿀수도 없었고, 따라서 부의 축척이라는 장미빛 미래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의 삶을 좀 더 들여다보자. 문제는 그나마 정적인 평형상태를 유지하던 소득과 소비의 균형이 깨어질 위협에 직면해 있다는 것이다. 저자와 청소용역 업체에서 함께 일하던 여직원이 자신의 다리가 사고로 인해 걸을 수 없게 된 지경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아프다는 것을 팀 매니저에게 이야기하는 것을 꺼려했던 사례를 보자. 오늘날의 미국에서 왜 60년대의 개발도상국이었던 대한민국의 일화가 떠오르는 것일까? (전태일 열사가 평화시장에서 일할 때 각혈을 토하며 기침하는 여직원을 보고 걱정하자 그 여직원이 자신의 건강을 염려하긴 커녕 이때문에 일을 못하게 되면 어떻하냐고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 말이다.) 의료보장 시스템이 완전히 민간으로 넘어간 미국의 상황에서 병원을 가는 일은 곧 큰 돈을 써야만하는 일이기때문에 자신이 부양해야하는 가족이 있는 경우에는 그 결과가 단순이 개인의 파산을 넘어서게된다. 경제적으로 아무런 여유가 없는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신의 몸이 어떠한 상태에 이르더라도, 묵묵히 참고 견디며 끊임없는 노동에 자신의 몸을 던져야하는 것, 단지 그 뿐이다.  

 

 끊임없이 일해야만하는 챗바퀴같은 삶만이 워킹 푸어들이 가진 문제점의 전부가 아니다. 무엇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주체적인 판단과 자유로운 사고를 하는 개인으로의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개개인이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노동에 있어서 최적의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관리자들은 그들의 자율적인 판단을 억누르고, 업무시간에 노동자들이 온전히 자신들의 일을 하는지 감시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산주의 사회의 비효율성 역시 이러한 끊임없는 감시 체제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것이다. 노동자를 감시하는 감시자는 또 누가 감시할 것인가?) 저자 역시 이러한 것을 언급하면서, 관리자에게 들어가는 돈은 그들이 얻어내는 효율에 비해 너무 크다는 것을 지적한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스스로 업무를 분석하고, 효과적인 방법을 찾으며, 또 책임의식을 느끼고 일할 수 있는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고, 오히려 관리자의 임금을 노동자에게 투자한다면, 다른 긍정적인 결과- 주체적으로 일하면서도 효율성을 가진 노동자-를 이끌어 낼 수 있으리라고 예상한다. 

 

 이러한 억압된 체계에서 개인들은 자신감을 잃고 하나의 부속품으로 변해간다. 마르크스는 왕은 누군가가 자신이 신하라고 생각하기때문에 존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신하가 있기에 왕이 있는 것 처럼, 저임금 노동자들이 자신을 부속품으로 여기는 것은 그들의 삶을 부속품 보다 못한 것으로 취급하는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러한 환경에서는 어떤 특출난 개인도 부속품으로 전락할 수 밖에 없다. 인간이 자신이 하는 노동에서 어떠한 주체적인 결정도 내릴 수 없다면, 그 인간의 삶은 그저 영혼 없는 기계에 불과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저자의 이중생활(중산층의 저널리스트로써의 삶과 저임금 노동자의 삶)은 해피엔딩을 이끌지 못하고 마무리된다. 어떠한 방식으로 열심히 일해도, 결국은 수입과 지출의 균형을 찾지 못하고 파산하고 만다. 물론, 주거 비용을 더 줄이거나(타인과 동거) 수입을 늘리거나(한가지 이상의 직업을 꾸준히 유지)하는 방법을 선택할 수는 있다. 그러나 과연 미국이라는 부유한 나라에서 한가지 직업으로 기본적인 소득조차 얻을 수 없다는 것은 정말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이상한 일이 아니라 분노해야할 일이다! 

 

 저자가 제시하는 가능성 중 하나가 노동운동이다. 그러나 이러한 노동법에 보장된 노동운동 조차도 쥐꼬리만한 임금에 생존이 걸려있는 그들에게는 쉬운일이 아니다. 솔직히 말하면 이 책을 읽는 동안 분노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였다. 자본의 논리와 그리고 시장의 효율성이라는 허상앞에 모든 것을 내어 맞긴다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교훈 이외에 실제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있을까? 이러한 위기의식은 앞으로 미국식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정책 방향성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우리는 상생하는 자본주의를 선택할수도, 소수의 이권만 챙겨주는 자본주의를 선택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 이 책에서 볼 수 있듯, 그 결과는 그야말로 비극적이다. 나의 일이 아닐거라고 자위할 수 있겠지만, 오늘날 같은 불안정한 고용시장에서 우리는 언제든지 이러한 삶으로 내던져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예전보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가고 있다.

 

 오늘날의 풍요로움에 있어서 자본주의라는 체제가 중요한 요인이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선진국이라고 불릴만큼 충분히 경제적으로 성장한 사회에서 개인이 끊임없는 노력에도 불구하고 빈곤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지금의 방향성은 한번쯤 재고해봐야하지 않을까. 우리가 가는 길에 이상이 있다는 신호이니까 말이다. 이는 단지 물질적인 문제 뿐 아니라, 이 사회에 속한 개개인이 노동자로써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더욱 중요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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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25 08: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5 0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뱀파이어, 끝나지 않는 이야기
요아힘 나겔 지음, 정지인 옮김 / 예경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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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떤 문화권마다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문화적 산물이 있습니다. 동아시아 문화권에는 삼국지가 있다면 서구에서는 뱀파이어물이 그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문화적 산물이 고정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 변화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삼국지가 유교적 가치관과 맞물려 촉한 정통론이 강조되는 것이나 충의를 상징하는 관우가 신격화되는 것과 유사하리라고 봅니다. 뱀파이어에 관한 이야기 역시 역시 어둠의 존재인 뱀파이어를 기본으로 인간의 욕망, 성적인 환상, 공포, 죽음, 선과 악의 대립과 같은 다양한 요소들이 시대의 요구에 맞게, 혹은 작가의 의도에 맞게 쓰여진 변화무쌍한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뱀파이어의 원형이 되는 신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두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 한가지는 '두려움'이고 또 한가지는'욕망'이라고 생각합니다. 두려움은 인간의 경험이나 감각이 미치지 못하는 어떤 것으로 부터 오는 것이지요. 인간이 두려워하는 두가지 요소인 죽음과 밤에 대해 생각해보면 인간의 이성이나 감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은 공포스러운 감정과 연결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죽음 혹은 사후세계는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고, 밤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감각인 시각을 이용할 수 없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욕망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끊임없이 추구하지만 한편으로는 완전히 충족될 수 없는 어떤 것입니다. 우리는 성적인 욕구와 같은 본능적인 것에서부터 영원히 살고 싶은 초월적인 욕구까지 다양한 욕망을 가지고 살아지만, 이러한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지요. 알 수 없는 것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충족되지 않는 욕망이라는 우리의 심연에 존재하는 두가지가 뱀파이어를 만들어낸 중요한 재료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이 책은 뱀파이어에 대한 다양한 변주곡이 어떤 기원으로부터 시작했는지 밝혀갑니다. 수메르와 바빌로니아 혹은 히브리 신화에 등장하는 릴리트(23p)는 악행을 통해 인간을 죽음으로 이끄는 사악한 존재입니다. 여기에 유혹적이며 파괴적인 매력을 가진 이미지가 덧붙여지는데, 이를테면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의 선원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몰고가는 세이렌(30p), 로마 신화에서 한밤중에 나타난다 성적인 환상으로 희생자의 생기를 뽑아간다는 인쿠부스와 수쿠부스(36p)를 들 수 있겠네요.

 

 이쯤되면 뱀파이어를 만들어내기위한 가장 기초적인 밑그림이 준비된 셈입니다. 여기에 역사적인 근거와 실제적인 장소를 덧붙이고나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흡혈귀의 이야기가 완성되는 것이지요. 그 중 중요했던 몇가지 재료들을 덧붙이면, 영생을 위해 젊은 이들의 피를 마시거나 목욕했다는 소문이 파다했던 '피의 백작부인' 에르제베트 바토리(117p)나 적군들을 창에 꿰뚫고 그 앞에서 식사를 했다는 드라쿨레아라고 불리웠던 블라드 체페슈 3세(134p)와 같은 용맹하지만 잔인했던 실존 인물들의 사례 를 들 수 있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준비되자 18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흡혈귀물들이 조지프 셰리던 레퍼뉴의 <카르밀라>나(110p) 브램 스토커의<드라큘라>와(128p) 같은 거의 완성된 형태로 드러나게됩니다. 1900년대에 이르러서는 상업자본과 맞물려 영화화되고 그것은 오늘날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재생산됩니다. 오늘날 만들어지는 흡혈귀물들은 앞서 이야기한 두려움과 욕망이라는 재료에 또 다른 것들을 추가해 만들어낸 요리라고 생각하면 쉽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관심이 많이 가는 것은 자본주의와 연결된 흡혈귀라는 문화적 양식에 대한 끊임없는 소비라는 측면입니다. 매년 여름의 무더위를 식힐 요량으로 만들어지는 흡혈귀 공포영화와, 인간의 성적 환상을 묘하게 자극하고 한편으로는 충족시켜주기도하는 섹시한 주인공들이 등장하는 뱀파이어물들 끈임없이 만들어지고 소비되고있는 오늘날 입니다. 가벼움과 더불어 끊임 없는 소비를 추구하는 오늘날의 신자유주의 체계와 흡혈귀물이 가진 표면적인 공포스러움이나 에로틱함과 같은 자극적인 소재는 어쩌면 둘도 없는 궁합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의 제목에 붙은 '끝나지 않는' 이라는 수식어는 흡혈귀물이 가질 수 있는 삶과 죽음, 혹은 욕망과 같은 근원적인 주제를 떠오르게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벼운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소비되고 또 소비되어야만하는 오늘날의 상황과 묘하게 일치하는 것 같아서 씁쓸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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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 - 피터 버거의 지적 모험담
피터 L. 버거 지음, 노상미 옮김 / 책세상 / 2012년 5월
평점 :
절판


 비트겐슈타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한다고 했는데, 나는 모르는 것에 대해 침묵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잡다한 인생사에 관한 이야기라 쉬워보일법도 했지만 사회학적인 지식이 전무한데다가 무슨무슨 ism과 내가 모르는 인물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는 바람에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되었다는 것을 고백한다. 사회학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려고 하기 보다는 그저 80인생을 살아온 인생의 선배가 들려주는 세상살이 정도로 받아들이는것이 나에게는 유익할 듯 싶었다. 할아버지의 그 긴 여정을 한 책에 담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회에서도 조금만 고참이 되면 신참들에게 '내가 말이지~' 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밤새 늘어놓으려고 하는데, 80살 정도 산 할아버지라면 하고 싶은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게대가 현존하는 사회학의 대가라고 하지 않나! 잘만 듣는다면 결국 나의 인생에 피가되고 살이되는 말일테니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할아버지의 인생사를 들어보았다. (그러나 이내 눈이 감기고...)



< 할아버지의 가르침 - 1. 다양한 경험 >

 

 흔히들 다양한 경험이 사람을 성장시킨다고 하는데, 피터 버거야말로 정말 (사회학의 연구로 귀결될 수 있는) 경험을 통해 성장한 사람이 아니었나 싶다. 오스트리아 사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와서, 20대 초반에는 먹고 살기 바쁜 와중에도 학구열에 불타 야간 대학교를 다니면서 열심히 공부, 그리고 박사학위 취득. 연이은 징집으로 생각지도 않게 사회학자를 사회복지사로 착각한 인사관리자에 의해 군대 내 정신상담소에 배치된다. 그리고 동부와 서부, 남부를 오가는 교직생활에 이어 연구소 소속으로 각국의 문화를 체험하러 돌아다닌 끝에 한국에도 방문했다! 개인적으로도 뭐든지 먼저 해보고 판단하는 경험주의자에 가까운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사는 것이 맞는 것 같다. (지금으로썬 그렇다.) 일단 후회도 없을 뿐 더러, 좋은 결과던 아니든 피드백이 되어 조금 더 나은 내일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도 종종 나오는, 이렇게 해보았더니 실패의 경험이 생겨 다음번에는 실수하지 않을 수 있었다, 라는 말들이 대가의 입에서 나오니 경험에 대한 나의 생각에 좀 더 확신이 든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 2. 다양한 만남>


 피터 버거는 기본적으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좋아했다. 성격유형검사인 MBTI로 따지면 그야말로 외향적 성향(E타입)을 가진 사람, 즉 사람만나고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속할게 분명하다. 저서들을 보면 공동 저작들이 많은데, 사람들과 함께하는 것을 즐기는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 것이리라. 저자가 이야기하는 '커피하우스법칙 - 적당한 사람들을 불러다가 충분히 오랫동안 함께 앉혀 놓으면 흥미로운 것들이 나오기 마련 '이라는 것에서도 결국 사고라는 것이 혼자할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과의 이야기와 토론에서 더 큰 시너지를 낼 수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여튼,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혹은 의지로 버거 할아버지는 수많은 사람을 만나는데, 재미있는 것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입장이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뉴스쿨의 세명의 교수를 통해 사회학을 보는 관점을 형성했고, 동료가 바라보는 종교의 관점에 대응하여 자신의 이론을 펼쳤으며, 한편 유난스런 페미니즘 학생들 덕분에 페미니즘에 대한 반감이 생긴것 처럼 말이다. 확실히 사람의 영향은 크다. 지금의 나는 나와 관계맺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대로 투영되기도, 정반대로 나타나기도 한다. 피터버거 할아버지의 인간형도 수많은 사람들의 합집합처럼 느껴진다. 


<할아버지의 가르침 - 3. 웃음 >


 자신의 말에 웃음으로 답하는 사람을 만나면 아무래도 호감이 가기 마련이다. 웃음과 함께하는 대화에서는 긴장이 풀려 말이 술술 나오는 반면, 싸늘한 분위기에서는 아무래도 점점 움츠러들어 번데기가 되어가는 경우를 다들 경험해 보지 않았는지? 피터 버거는 천성적으로 유머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유쾌하게 이야기하면서도 자기 할 얘기는 다 하는 점이 대가만이 가질 수 있는 여유가 느껴진다. (아쉽게도, 그 코드가 보편적인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말이다. 책 말미에도 웃어야할지 울어야할지 모르겠는 유머를 한가닥 늘어놓는 걸 보면 확실히 개그 욕심이 있으신듯 싶다.) 그런데 책을 읽고 나면 그 웃음은 감성, 즉 남들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격에서 나오는게 아닐까 한다. 책 말미에 움직이는 기차 장난감보다는 그안의 사람들과 즐겁게 대화를 나누었더라는 어릴적 회상을 들으며 특히나 그랬다. 웃음의 근원은 사람에 대한 따스한 시선에서 나오는 것이고 결국 이런 인간에 대한 애정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고 웃고 소통할 수 있는 근원이 아니었을까.



 다양한 경험, 만남, 그리고 웃음을 가지고 살자! 라고 교훈적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그저 사회학적 지식이 전무한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어갈 수 있는 것들을 찾아본다면 이 정도가 아니었을까 싶은 것일 뿐이다. 다시한번 이야기하지만 학문적으로 내가 범접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그래서 오히려 나같은 비전공자혹은 사회학에 관심이 덜한 사람들에게는 조금은 붕뜬 구석이 없지 않았다. (전문지식을 전달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완전히 신변잡기식도 아닌.) 나와 전혀 무관한 사람이 수백페이지에걸쳐 자긴 이렇게 이렇게 살았어라고 써놓은 것만큼 재미없는 것이 또 있을까. 그래도 긍정하는 것은 어떤 사람이건 나보다 먼저 살아간 사람들의 삶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역사와 인물에 대해 배우는 것 아닌가라는 훈훈한 마무리로, 쉽지만 어려웠던 <어쩌다 사회학자가 되어>의 읽고 쓰기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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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opuha 2012-07-25 1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커피하우스 법칙' 저도 이걸 즐겨하는 사람 중에 하나인 것 같아요. 그래서 혼자서 뭘 생각하면 가라앉는 데 반해 여러 사람들과 함께하면 기발한 아이디어가 나오더라고요. 리뷰 재미있네요^^

일개미 2012-07-25 15:03   좋아요 0 | URL
부끄러운 글인데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ㅜ 커피하우스 법칙 좋지요. 특히 요새같이 더운때는 커피숍에 죽치고 앉아 책읽고 놀고 수다떠는게 최고인 듯 합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