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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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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성경을 신앙의 근거로 여기는 나에게는 제3자의 눈으로 종교적 텍스트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저 신기할 뿐이다. 특히나 기독교라하면 그런 동네북도 없을만큼 까이는 요즘, 종교적인 텍스트를 다루면서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을지 의문도 들었다. 그러나 꽤나 객관적으로, 역사적인 근거를 통해 종교적인 텍스트를 읽고 쓰는 것이 우리의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이 책은 설명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우리나라만큼은 안까이나보다.) 물론 그렇다고 저자가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에 대해 긍정적인 입장을 가진 것은 아니다. 오히려 한숨을 내쉬며 종교, 신앙, 믿음에 대한 관념을 비판하기에 여념이 없다. 여튼 나같은 예수쟁이와 종교학을 전공한 저자에 관점이 근본적으로 다른 마당에 모든 면에서 관점의 일치를 보기는 힘들었으나, 저돌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밀고가는 부분에서는 왠지 모를 진정성 같은게 느껴졌으며, 또 몇몇 부분은 꽤나 동감이 가기도한 그런 책이었다. 

 시작은 책읽기에 관한 것이다. 저자는 책을 읽는 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에 접속하는 것. 맨 정신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을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저자의 무의식에 빠져버리고 마는 것이므로 결국 미쳐버린다는 얘기다. 자신 내부의 검열로 인해 가려서 읽게 됨으로 미치치 않고 이해한다고 하는 것인데, 제대로 읽으면 미쳐버리고 만다는 주장은 너무 극단적인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논지에 반감이 들어서 덕분에 나도 책 읽기에 대한 나름의 정의를 내려보았는데 이런 시간이야 말로 책 읽기를 통해 가질 수 있는 가장 유익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책읽기가 무엇인지 정의내리기 전에, 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Book의 어원은 '무엇인가 적혀있는 나무판의 묶음' 이라고한다. 초기의 책이라는 것은 정보의 묶음이었을 것이다. 책이던 쓰는 것이던, 읽는 것이던 시작은 정보의 습득에서 시작한다. 정보의 양이 한정적일 때, 우리는 그 정보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이를테면 구구단처럼말이다. 그저 외우기만 하면 될 뿐, 그 이상의 무언가는 필요 없다. 그러나 정보의 양이 무한에 가까울정도로 크다면? 결국 우리는 어떤 필터를 가지고 그것들을 걸러낼 수 밖에 없다. 세상에 널려있는 정보들을 취사선택하여 자신만의 것으로 만드는 힘. 그것이 바로 해석이고 관점이다. 그래서 무한한 정보의 바다에서는 책이라는 것이 단순한 지식의 묶음에서 관점이 있는 편향적인 어떤 것으로 변화한다. 이를테면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같은 책으로.

 결국 책은 글쓴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드러내는 도구인 것이다. 그래서 잘 쓰여진 책은 저자의 의도가 명백히 드러난다. 저자가 열심히 A를 이야기했는데 독자가 B로 받아들인 것? 그것은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오독(誤讀)이다. 이를테면 (저자가 언급했던) 루터가 성경을 읽고 또 읽으면서 자신이 미친게 아닐까 생각했던 것은 성경을 제대로 읽고있는 자신이 오히려 미쳤다고 생각할 만큼 중세 교회가 타락했다는 것이리라. 성경은 명백하게 이야기한다. 구원은 돈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고. 여기에 무의식의 여지가 있는가? 중세 교회의 행태들, 특히나 왜곡된 구원관과 그로 인한 면죄부를 파는 행위는 명백히 오독으로부터 근거한 것이다. 오독이 아니라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왜곡이라고 볼 수 밖에.   

 책읽기에 대한 관점은 공감보다는 그렇지 않은 부분이 더 많았지만, 혁명에 관한 관점은 흥미로웠다. 저자가 말하길, 세상을 바꾸는 힘은 폭력이 아니라 텍스트를 고쳐읽고 다시 쓰는데서 나오며 혁명이라고해서 폭력이 선행하거나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이 부분에서는 상당히 공감하였는데, 내가 저자의 의도를 제대로 짚어냈는지 아니면 나만의 생각인지는 모르지만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이다. 사회를 개혁한다는 것은 구조를 바꾸는 문제이지 단순히 지배계층을 바꾸는 차원에 문제가 아니다. 이를테면 상하관계를 만드는 틀이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았는데, 아무리 누군가를 제거하고 그 자리를 차지해 봤자 시간이 지나면 똑같이 타인을 억압하는 사회가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바뀌었다고 해도, 결국 지배계층 교체 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왕을 정점으로한 계급사회라는 구조가 변하지 않았기때문인 것과 같다. 결국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려면 폭력이 아니라, 그 구조 자체를 변화시켜야한다. 이 구조의 변화가 텍스트를 고쳐 읽고 고쳐써서 새로운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내는 것과 같다면 (글쓴이의 말을 빌리자면) 저자와 나의 무의식이 통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나와는 근본적인 입장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올 때에는 또 다시 고개를 저을 수 밖에 없었다. 역시나, 종교에 대한 관점이다. 저자는 기독교와 이슬람의 기반인 성경과 코란을 들고 나오면서 이를 통한 사회의 구조적 변화에는 환영하면서도, 태생인 종교적인 경전으로서의 의미는 부정하는 것으로 보인다. 참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것들은 사회 변혁을 위해 쓰여진 것들이 아니라, 인간의 내세, 구원,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 아닌가! 여튼 목적에 맞지 않는 사용을 통해서도 의미있는 결과가 나오는 것을 보면 성경과 코란은  꽤나 위대한 책들인가보다. 이와 관련된 저자의 종교에 대한 관점은 더 논하고 싶지 않지만, (중세 해석자 혁명 이후 종교의 딱지를 떼고 세속화된) 기독교가 타자를 억압하기 위한 수단이라는 대목에서는 예수쟁이로써 한마디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의 왜곡된 관점이 타자를 억압하는 수단으로 악용되었다는 것 인정한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책은 의도를 담고 있는 것이고, 오히려 저자의 말대로 성경을 읽고 또 읽는다면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무한한, 그리고 이타적인 사랑 뿐이라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동안 한가지 숙제를 발견했다. 책을 읽는 다는 것이 무의식의 접속이든 아니든지간에, 텍스트를 읽고 또 고쳐쓰는 것이 혁명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과연 우리는 어떤 책을 읽어야하는 것인가하는 것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내내 이야기하는 성경은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책 중에 하나이다. 그만큼 통시적으로 검증이 되었다는 것이고, 또한 종교의 틀 안에서 보았을때 그 자체로도 권위가 있다. 그래서 성경을 읽고 또 고쳐 읽는 기준으로 삼는 것은 어찌보면 쉬운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보가 난무하는 오늘날에 과연 어떤 것을 텍스트로 삼아야 하는지는 쉽게 답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여러모로 나와는 관점이 달랐지만 읽는 동안 지루하지는 않았다. 개인적으로 자신만의 확고한 주장을 가진 사람을 좋아하는 편이라 비록 나와는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는 주제를 이야기하더라도 '아 그렇게 생각할 수 있구나' 하고 받아들였던 것 같다. 어쩌면 학교 같은 온실에 곱게자란 화초가 아니라 기존의 틀에 갖히지 않고 어떻게든 제도권 밖에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가는 의지가 느껴지는 글이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다. 무엇보다 책을 읽는다는 것이 나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유익한 시간이 아니었나싶다. 책 읽기를 통한 혁명을 사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적용시켜본다면 이 책을 적극적으로 읽고 쓰는 또 다른 방법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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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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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대적인 가치는 존재하는가


 오늘날을 지탱하는 원리 중에 하나가 상대주의일 것이다. '어떤 것이든 답이 될 수 있다. 이 기준으로 저 기준을 판단하지 말라'는 황금률은 상대주의적인 가치를 대변한다. 상대주의는 단순히 철학적인 측면에만 머물지 않고 이제는 시장경제에까지 밀접하게 파고든 것으로 보인다. 무엇을 사고 파는 것은 단지 자유의사이지 어떤 것에도 판단받지 않는다는 것이 오늘날 시장경제의 모습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극단적인 자본주의를 실현하고 있는 미국을 보자. 해마다 개인 총기소지로 인한 사망사고가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지만, 총기협회는 '총기 구입은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라는 논거로 총기 규제에 반대하고 있다. (이면에 총기 및 군수업체의 이권이 걸려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동시에 전방위적인 로비는 미국에서의 총기 소지가 합법화되는데 큰 힘을 발휘하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이익을 실현하는 법을 국회에서 발의시키기 위해 의원들에게 금전적인 지급활동을 벌이게하는 로비스트라는 직업이 합법화되어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에서는 이를 뛰어 넘어 상상도 하기 힘들만큼 다양한 곳에 침투한 자본의 모습을 보여준다. 고속도로에서 비용을 지불하고 과속할 수 있을 권리와 같은 이른바 '새치기'와 같은 범주로 시작해 마약 중독자들에게 불임수술을 지원하는 '인센티브'에 관한 사례들까지. 심지어 '삶과 죽음의 시장'에서는 제 3자의 사망을 통해 보험금을 수령하는 사업에 대한 시장이 주택담보대출의 과다한 파생상품으로 파산지경에 이른 미국의 월가를 살릴 수 있는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한다.


 이런 것들을 과연 돈으로 사고팔아도 될까?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모든 재화가 효율적으로 분배될 것이라는 믿음이 어떠한 성역 없이 적용되어야할까? 샌델은 독자들에게 생각해볼만한 두가지 원리를 제시한다. 하나는 우리의 선택 상황이 100프로 자신의 의지가 아닌 어떠한 외부요인이 작용할 수 있다고 하는 '공정성의 원리'(창녀의 매춘이 과연 전적으로 자발적인가?)이고, 다른 하나는 어떠한 재화는 그 자체가 사고 팔아서는 안되는 어떠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그것이 시장경제에 편입되면 그 재화에 대한 가치가 오히려 떨어진다는 것으로 이른바 '부패의 원리'(극단적으로, 엄마가 시장에서 거래된다고 해보자...)라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원리에서 우리가 특히나 주목할 만한 것은 어떤 재화의 가치가 금전적 가치로 대체되는 순간 그 속성 자체가 왜곡된다는 관점이다. 샌델은 영화 '머니볼'을 통해서 자본이 어떻게 야구게임을 왜곡시키는지 이야기한다. '머니볼'은 재정이 빈약한 오클랜드 애슬래틱스가 사구(four ball)을 통한 출루율이 높으면서도 몸값이 싼 선수들을 데려다가 월드시리즈에 진출한다는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이다. 그러나 이런 오클랜드의 성공으로 부자구단들이 출루율이 높은 선수들을 비싼값에 대거 영입하면서 리그의 경기 양상은 완전히 변하고 만다. 사구를 얻어내기 위해 투수와 타자는 지리한 싸움을 벌이게되고, 정작 안타나 홈런이 터지지 않는 경기에 관중들은 흥미를 잃는다. 


 영화< 건축학 개론>에 서울의 정릉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영화의 배경은 90년대로 그때만 해도 북한산을 배경으로 주택과 한옥들이 공존하는 곳이었다. 만약 수지와 제훈이가 재회하여 그 옛날을 떠올리며 오늘 그곳으로 데이트를 나간다면 경악할지도 모르겠다. 둘만의 추억이 담긴 한옥은 헐려나가 재개발이 되어 북한산을 병풍처럼 가로막고 있는 대규모 아파트단지의 어딘가가 되었을테니 말이다. 재개발을 통한 아파트의 건설이 그 자체가 악(惡)은 아니다. 오래된 도시 환경은 개선되어야함이 마땅하고, 좁은 도시에서 좀 더 적은 비용으로 거주를 가능하게 하는 아파트는 경제적인 주거방식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수지와 제훈이 그리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추억이 재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져 버리고 아파트가 산을 가로막으면서 도시의 풍경을 과도하게 해치는 것은 어딘가 모르게 불편한 구석이 있다.
 
 문제의 본질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야구경기를 통해 즐거움을 찾으려는 관중이 오히려 경기를 통해 지루함을 느낀 원인은 야구경기의 속성이 왜곡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삶의 터전이라는 주거의 가치가 손쉬운 자산증식의 수단으로 변질된 것이 삭막한 도시환경의 중요한 원인일수도 있다는 말이다.. 머니볼 전략이나 재개발과 같은 사례에서 얻은 통찰력을 다른 곳에 적용해보자. 자본이 인간성이나 인간 그 자체, 혹은 공동체가 공유하는 가치들을 왜곡시킬 수 있다면? 

 스위스정부는 핵폐기물을 처리할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그 장소의 후보에 오른 주민들에게 찬반투표를 던졌고, 높은 국민의식을 가진 그곳 주민들은 자신들이 사는 그 곳이 핵폐기물 보관의 최적의 장소라면 위험부담은 있지만 국가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수용할 뜻을 내비쳤다. 그러나 그들에게 어느 정도의 금전적 보상을 지급한다고 이야기하자 돌연 그들은 반대의사를 내비쳤는데, 그들의 숭고한 희생정신과 공동체의식이 돈으로 평가받는 것에 반감을 느낀 것이다. 

 우리는 자본의 논리가 득세하는 세상에 살고있다. 어떤 가치의 평가 기준이 단지 돈으로 일원화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모든 것이 돈으로 평가받고 거래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나의 마음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얼마만큼의 돈이 필요할까? 아니 그것이 단순히 돈으로 표현할 수 있기는 할까? 혹시나 가능하다면 그것을 사고 팔 수는 있을까? 사고 팔 수 있다면 그것이 과연 진심일까? 이러한 질문 자체가 넌센스로 들릴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 책에서 제기하는 질문의 핵심은 이와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샌델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지만 어쩌면 대답은 하나다.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아니 사고 팔아서는 안되는 것들은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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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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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자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아직도 기억에 남는 한 장면이 있다. 체리를 너무나 먹고 싶었던 어린시절의 조르바는 부모님의 돈을 슬쩍하여 체리를 '한포대'를 산다. 배가 터질때까지 먹고난후 체리에 대한 어떠한 욕망에서도 벗어날 수있었다. 어리석어 보이는 행위임에도 불구하고 인상적인 장면으로 기억되는 이유는, 욕망을 억누르는 방식으로 통제하려기보다는 욕망에 솔직해지는 방법을 택했기 때문이었다. 어떤 욕망에도 지배받지 않는 인간이야 말로 진정 자유로운 인간이 아닐까 생각했다. 


 <김수영을 위하여>역시 자유에 관한 이야기이다. 김수영이 이야기하는 자유는 무엇일까? 그가 살던 시절로 돌아가보자. 일반 대중들이 그저 먹고살기에 급급했었다면, 지식인이라 일컫는 사람들은 이념에 매몰되어 편가르기에 여념이 없었다. 이런 상황은 위정자들이 자신들의 독재를 합리화 하기에 너무나도 좋은 환경이었다. 경제개발 논리로, 공산주의에 대항하여 체제를 보존한다는 논리로 민주주의와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던 사회. 이러한 상황에서 어떠한 가치에도 매몰되지 않고 스스로의 목소리로 노래한 김수영은 시대의 이단아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김수영이 이야기하는 자유는 온통 붉다. 주변이 온통 가시밭길이기에 조금만 움직여도 상처가 생기고 피가 나지만, 김수영은 자유를 향한 움직임 - 시쓰기 - 를 멈추지 않는다. 조르바의 자유가 낭만이 가득하고 푸른빛이라면, 김수영의 그것은 자기투쟁적이고 붉은빛이 난다. 그러나 단지 김수영이 의지만을 강조하는 비현실적인 초인의 모습은 아니다. 자유를 추구하지만 현실에 부딛혀 실패하고 서러워하는 모습은 우리의 보편적인 삶과 맞닿아있다.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에서 개개인이 자유롭게 자신만이 삶을 살아가는 것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 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 서서 돌고' 있는 팽이에 비유한다. 힘든 현실에 서럽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거대 담론에 매몰되지 않는, 자신만의 삶을 오롯이 사는 사람들이 모여사는 사회. 이것이 김수영이 꿈꾸는 이상향이었다. 


 저자인 강신주는 김수영의 시를 통해 우리들의 삶에 대해 물음을 던진다. 그저 맹목적으로 돈이나 안정만을 추구하며 사는 것은 아닌가? 너무나 어려워진 경제상황과 취업난에 사람들은 반박한다. 언제고 밥줄이 끊길지 모르는 상황에서 자신만의 삶이라니! 그러나 우리는 어떤 상황에도 억눌림 없이 자신의 길을 가보려고 시도한적이 몇번이나 있었던가? 대학에 입학하고 전공을 결정하는 것부터, 직업 선택에 이르기까지. 남들이 미리 닦아논길로, 혹은 남들이 좋다고 한 진로를 택하지 않았나? 혹시나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미래가 걱정되어 시도해보지도 않고 놓아버리지 않았나? 


 조금은 교조주의적인 이 책을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싶은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김수영에 대한 저자 강신주에 대한 눈빛이 워낙에 그윽해서, 읽는 내내 조금은 균형감각을 잃어버린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그만큼 저자가 느낀 김수영의 자유에 대해 강조하고 싶었으리라.) 풍요 속에 빈곤이라고 했던가. 김수영의 시절보다 훨씬 풍요롭고 자유로워 보이는 오늘날이지만 정신적으로는 오히려 더 빈곤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수영이 죽은 지 5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가 도달한 인문정신 근처에도 다다르지 못했다는 저자의 말이 김수영의 시와 공명하며 책장을 덮은 지금도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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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2012-07-13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님의 책을 읽어보진 않았는데 리뷰를 보니 꼭 읽어보고 싶어져요~
정말 먹고 살기 힘들단 이유로 많은 것을 포기해왔는데, 어떤 것이 옳은 것인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일개미 2012-07-14 21:48   좋아요 0 | URL
읽어보고 싶어지신다니 서평을 쓴 보람이 있네요. 저자가 이야기하는 모든 것에 동감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생각할 것을 많이 던져줘서 개인적으로는 많이 배운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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