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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란 무엇인가 - 예일대 17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 삶을 위한 인문학 시리즈 1
셸리 케이건 지음, 박세연 옮김 / 엘도라도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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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비리그로부터의 명강의라는 이름으로 우리나라의 서점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 2010년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부터 였던 것 같다. 2011년에는 와튼 스쿨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이 공전의 히트 상품으로 떠올랐고, 올해는 예일대의 인기 강의라는 죽음이란 무엇인가가 한국에 출간 되었다. 명강의라 함은 오랜기간 학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는 것이고 이는 실용적으로 도움이 되거나 내적인 의미가 있었다거나, 아니면 적어도 강의 자체에 매력이 있었다는 이야기다.(학점을 잘 줬을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원하는 것을 얻는 법은 삶의 실용적인 측면에서, 정의란 무엇인가는 사회적인 측면에서 유용한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무엇인가는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줄 것인가. ’죽음이라는 단어에서 예상할 수 있는 것처럼,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하는지에 대한 방향성을 제시해주리라고 기대해 볼 수 있다.

 

 그러나 너무 커다란 기대는 하지 않는 것이 좋겠다. '죽음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지며 거창하게 시작하지만, '물리주의자가 바라보는 생의 긍정'이라는 어쩌면 특이할 것 없는 결론으로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은 물질로 이루어진 유한한 존재라는 관점을 강력하게 견지하면서 이러한 관점을 독자들이 수용하기를 바래마지 않는다. 꽤나 정교하게 짜여진 것처럼 보이는 논리의 틀 안에서,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영혼이나 인격과 같은 요소들의 존재는 부정당한다. 그러나 육체는 어떠한가. 시간이 지나면서 노쇠하고 결국 썩어서 없어지기는 하지만 그 자체가 우리를 구성하고 있다는 것을 그 누구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에, 저자에게 육체야 말로 우리 존재의 본질적인 것으로 여긴다.

 

 '물리주의적 관점'은 인간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기계와 같다는 것이다. 인간의 육체는 다만 컴퓨터나 여타 기계에 비해 더욱 다양하고 복합적인 기능을 수행할 뿐이라고 말한다. 이런 관점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이 충분히 설명된다고 보기 때문에, 영혼이나 절대자의 개념을 상정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무신론적이고 유물론적인 인간관을 가지고도 생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 어쩌면 조금은 새로운 시선일 수도 있겠다삶의 가치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쇼펜하우어와 같은 철학자들과 비교해보면 특히나 그렇다. (심지어 몇몇 철학자들은 자살이야말로 인간이 자유의지로 행할 수 있는 유일한 행위라고 말하지 않던가?) 저자는 인생 자체가 축복이라는 관점에 기울어 있는데 읽어나가다보면 물질 이상의 것은 없다는 유물론적인 관점위에 인생은 (신의) 축복이라는 기독교적인 시선을 교묘하게 덧칠해놓은 듯 한 인상을 받게된다.

 

 이는 논리적인 전개를 통해 얻게된 일반해라기 보다는미국이라는 상황에만 성립하는 특수해라는 인상을 준다. 이른바 '박탈이론'이라고 불리는, 살지 못하면 누리지 못하는게 많기 때문에 생이 가치있다고 하는 주장을 오늘날 여전히 대부분의 주민이 극빈한 상태에 놓여있는 소말리아나 북한에서는 어떻게 받아들여야할까? 저자의 관점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빈곤에 의해 고통받지 않아야하며 자기의 노력에따라 자신의 꿈을 성취할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구비되어 있어야한다. 구상에 이 정도의 요건이 갖춰진 나라는 많지 않기 때문에 저자의 주장은 의심스럽다.

 

 두가지 정도만 더 지적하고 마무리하려고 한다. 한가지는 개념의 정의에 관한 문제이다. 명확한 경계란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은 신체 기관을 향하면 더욱 문제가 된다. 이를테면 인간의 인격을 담는 장기가 있다면 그것은 아마 뇌일 것이라는 가정이 그렇다. 뇌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을 조절하는 중추인 것은 맞지만, 뇌는 다른 장기나 신체 부분에 영향을 받기도 한다. 육체가 쇠락해질때 뇌에 영향을 미쳐 우울증을 가져오기도 하는 것을 보면 뇌와 다른 신체조직이 상호작용을 하고 있다는 것이 명확해진다. 인격의 핵심이 뇌에서 온다는 논의를 진전시키려면, 뇌는 다른 장기에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중추 기관이라는 것이 입증되어야한다. 

 

 다른 한가지는 많은 것을 계량화시킴으로 설명 되는 것에서의 문제점이다명확하고 구체적인 정의가 명확한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것은 사실이다. 과학에서 정확한 실험 결과를 위해서는 명확한 실험값이 요구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그러나 인생의 행복이나 슬픔이 객관적인 수치로 표현 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설령 수치화될 수 있다고 해도 행복과 슬픔을 구분하는 기준점은 어디쯤 위치하고 있는 것일까. 삶 자체를 긍정 혹은 부정하기 위해 우리의 삶의 행복과 불행을 수치화시킨다는 가정은 그야말로 머리 속에서만 행해지는 사고실험일 뿐이지 않은지? 

 

 이런 비판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통해 미국의 아이비리그의 명강의라 불리기 위한 필요 요건들을 조금이나마 확인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유용하다. '정의는 무엇인가'의 구성방식과 유사하게, '죽음이란 무엇인가' 역시 죽음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 개념과 의미에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독자는 그 질문에 답하기도 하고 저자의 관점을 수용하기도 하고 반박하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관점을 형성해 나간다.

 

 이 책을 통해 우리가 자신만의 관점을 만들어나갈 수 있다면, 조금은 비판적인 관점을 가지고 이 책을 바라보더라도 저자는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면서 즐거워 할 것이리라. 주입식 교육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신만의 삶을 살기 시작한 저학년의 대학생들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실제로도 이 책의 시작은 대학생들을 위한 교양 철학강의 였으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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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닦고 스피노자]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눈물 닦고 스피노자 - 마음을 위로하는 에티카 새로 읽기
신승철 지음 / 동녘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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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은 2011년 기준 10만명당 31.7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OECD 국가 중에서 자살율이 1위라고 한다. 20대의 가장 높은 사망 원인이 자살이라고 하니, 우울증을 비롯한 마음의 병은 이미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적인 문제가 된 것이다. 현대인을 괴롭히는 정신병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할 수 있을까. 정신분석학과 현대의학이 주류인 시대에, 이 책은 철학을 통해서 해결책을 모색하는 새로운 접근법을 취한다. 철학자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통해서 말이다.  


 스피노자를 이야기하면서 데카르트에 관한 언급을 빼놓을 수는 없겠다. 스피노자는 데카르트에게 큰 영향을 받았지만, 향후에 데카르트와는 다른 독자적인 세계관을 구축하게 된다. 저자는 스피노자 관점을 통해 데카르트의 철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현대인들의 마음의 병에 대한 주요한 원인 중에 하나로 데카르트적인 세계관을 지적한다. 그렇다면 데카르트인 세계관은 무엇이고,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일까. 스피노자의 관점은 어떠한 대안을 제시할 수 있을까. 


 자아

 

우선 자아을 바라보는 관점을 비교해보자. 모든 것이 의심스러웠던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자아만이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불변의 존재였다. 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사라져가던 당시에 신을 대체할 수 있는 가능성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스피노자는 자아가 고정된 실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진다. 오히려 자아는 고정적인 것이 아니라 '변용', 즉 '~이 되기(becoming)'를 통해 유동적으로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는 한가지의 역할만 가지고 또 거기에 고정된 상(像)을 쫒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역할을 수용하고 또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변할 수 있는 자아를 가지자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논지를 발전시켜 나아가 불안이나 강박은 고정된 상(像)을 자신에게 억압적으로 투영시켰을때 역시 정신질환 일어날 수 있다는 관점을 취한다. (1장 불안증, 5장 강박증) 

 

 정신과 육체

 

  그들이 바라보는 정신과 육체에 대한 관점은 어떠했을까. 데카르트는 정신과 육체를 이분법적인 것으로 바라보고, 육체에서 나오는 감각은 신뢰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이성이라는 도구만을 가지고 끊임없는 회의했으며,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긴다. 한편 스피노자는 정신과 신체를 상호작용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운동을 통해 체력이 좋아지면 그에따라 정신도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나, 건강이 나빠진 사람이 쉽게 우울증에 걸리는 것이 좋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스피노자는 육체로부터 오는 감각이나 욕망을 부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오히려 그것들을 억압하는 것이 정신질환을 유발할 수 있다고 본다. 육체와 정신의 균형이 깨어지는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정신병을 일으킬 수 있다. (7장 도착증, 8장 공황장애)  

 

 개인과 공동체

 

 그럼 개개인을 다수로 확장시켜서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살펴보자. 데카르트의 개인은 공동체 속에서 고립된 섬처럼 작용한다고 본다. 그 안에서 각각의 개인은 상호간에 영향을 미치는 존재라기 보다는, 고정적이고 불변하는 개체이다. 스피노자가 바라보는 관점은 다르다. 어떠한 관계를 갖느냐, 어떤 식의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느냐가 한 사람의 정서를 좌우한다고 본다. 상호 긍정하는 관계에서는 기쁨을, 억압된 관계에서는 슬픔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나와 타인이 맺고 있는 관계망을 재설정하지 않고, 단지 개개인의 태도나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을 통한 치유는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2장 우울증)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


 한편 공동체 안에서의 개인을 스피노자는 '특이성'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개개인을 공장에서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낸 기성품과 같이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각각의 개성을 가진 수공예품으로 여기는 것과 같다고도 할 수 있겠다. 특이서의 관점은 전체를 지배하는 신은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신은 유일무이한 개체 안에 내재되어있다는 범신론적인 관점으로 발전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체에 매몰된 개인이 그 틀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개성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한다. (4장 신경증, 9장 중독)

 

 결론

 

 데카르트가 고정적이고 이성 중심적인 관점 취한다면, 스피노자는 유동적이고 관계 중심적인 입장을 지지한다. 이성이라는 도구는 과학과 기술을 발전이라는 성과를 이루어내기도 했지만, 누군가를 억압하고 착취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 것이다. 이성과 함께 이루어온 근대 서양사의 공과를 모두 데카르트에게 돌릴 수 는 없겠지만, 근간에는 데카르트의 철학이 있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따라서 대안적인 차원에서 관계 중심적인 스피노자의 관점은 관계망의 재설정을 통한 정신적인 아픔의 치유를 포함해, 수평적관계 속에서 각자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패러다임으로 유용하게 사용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다.

  
 안타까운 점은 우리 시대의 아픔이 단지 개개인의 '내재적인 역능'을 변화시키는 차원에서는 해결되기는 쉽지 않다는 것에 있다. 청년 실업이나 비정규직과 같은 사회 문제를 통해 생겨나는 개개인의 상실감은 사회 구조적인 문제를 손보지 않고 개개인이 관계망을 재설정 하는 것으로는 해결하기 힘들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지는 의미는 사람은 결국 부대끼며 살아야한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것에 있다. 저자가 스피노자의 입을 빌려 '관계망을 재설정하라'는 말은, 인간은 서로가 서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존재라는 또 다른 표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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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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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새 양자물리학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고 했더니 친구 중에 하나가 양자물리학이야말로 이 시대의 종교라고 이야기한다. 상당부분 동의한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감각 이상의 것을 동원해야 겨우 이해할 수 있을까 말까한 체계이니까 말이다. 이성적인 이해를 통해 본질로 깊숙하게 들어가다보면 어느 지점에서는 선택을 해야하는 순간이 온다. 이걸 믿어야하나?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신비롭다. 원자보다 더 작은 양자-전자,광자 등을 포함하는 최소 단위의 총칭-의 세계에서는 고전물리학의 논리가 완벽하게 들어맞지 않게된다. 가장 중요한 문제 중에 하나는 빛이 파동이냐 입자이냐에 관한 것인데, 고전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명확한 반면 양자물리학의 세계에서는 이 둘의 경계가 모호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보는 가시적인 세계에서는 파동은 파동이고 입자는 입자일 뿐이다. 그러나 미시 세계에서 양자는 파동이기도 하고 입자이기도 하다. 

 이런 모호함, 그리고 경계 없음 이상으로 놀라운 것은 조건이 완벽하게 주어져도 양자의 세계에서는 양자의 위치를 확률적으로 밖에 파악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이다. 조건이 완벽하게 주어지더라도 그 정확한 결과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조건을 통해 정확한 결과를 예측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는 고전물리학 체계를 완전히 뒤엎는 것이었기에 충격적으로 다가올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물리학은 양자물리학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마치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설을 통해 우주의 중심은 지구라는 천동설 패러다임을 흔들어 놓았듯, 양자물리학은 조건을 알고 있으면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에 근거한 신념 체계를 깨트려 놓았다. 양자물리학은 모든 것을 결정론적으로 바라보는 우리의 사고체계를 바꿔놓았다. 인간의 이성은 모든 것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겸손 혹은 무기력함을 심어준것이다.

  이 책 만으로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이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할 수는 없다. 양자 물리학에 흥미를 가지게 되는 출발점으로는 적당할지 모르지만, 이 책을 통해 현대 물리학의 체계를 완전하게 이해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고 여겨진다. 양자물리학은 우리가 쓰는 일상어로 설명되어질 성질의 것은 아니다. 물리학의 체계는 수학적인 설명이 필요하고, 양자물리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수학에 대한 학습이 필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양자물리학에 호기심이 생기는 사람들은 더 다양한 책들- 특히 수식으로 설명하는- 을 접해보기를 바란다.

 구체적인 양자물리학의 체계에 대한 이해라는 측면에서는 한계가 있을지는 모르지만, 이 책에 등장하는 물리학의 거장들의 대화와 사고의 흐름은 꽤나 흥미로운 부분임을 부인할 수 없다. 보어, 보른, 파울리, 아인슈타인, 하이젠베르크, 슈뢰딩거, 드브로이, 봄, 오펜하이머, 파인만, 벨과 같은 기라성 같은 물리학의 거장들의 대화가 이 책을 수놓고 있다면 물리학에 관심있는 그 어느 누가 이 책을 거부할 수 있겠는가. 생생한 대화들은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 자리에 동참하고 싶다는 욕망을 불러 일으킨다. 

 이들의 대화는 물리학이 어떠한 수식 체계 이전에 하나의 신념체계라는 것을 보여준다. 아인슈타인은 평생동안 양자물리학이 이야기하는 불확실성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했다고 한다. 신은 주사위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말은 이러한 아인슈타인의 신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한마디였다. 물론 아인슈타인의 신념과는 달리 양자물리학의 불확실성이 양자의 세계를 설명하는 적확한 체계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말이다. 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논증하기도하고, 타인의 체계를 이어받기도 하며, 또는 반박하면서 물리학의 체계를 더 정교하게 가다듬고 있다. 

 왜 많은 학자들이 왜 눈에도 보이지 않는 미시세계의 원리를 밝혀내는 것에 자신의 인생을 바친 것일까. 몇가지 생각이 든다. 이 체계를 밝혀냄으로 효용을 만들어 낼 수도 있고, 그 자체가 세상을 설명하는 지적 유희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호기심이야말로 그 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우주의 시작과, 형성에 대한 물음에 답해줄 가능성이 있는 몇 안되는 도구가 바로 양자 물리학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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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하비 리벤스테인 지음, 김지향 옮김 / 지식트리(조선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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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불확실한 현대사회에서 의지하는 가장 큰 기준 중 하나가 소위 '전문가'라고 하는 해당 분야의 전공자들의 의견일 것이다. 그런데 그 전문가들의 의견이 객관적인 사실이 아닌 자신을 후원하는 이익집단의 요구사항이라면? 차라리 '이게 다 돈때문이야!' 라고 이야기하는게 오히려 마음이 편할 정도로 객관적인 기준마저 돈에 의해 좌지우지 되는 역사를 우리는 이 책에서 보게된다.

 1900년대를 전후로 미국 사회에서 끈임없이 제기되었던 음식물과 영양소에 대한 소비구조의 근원을 파해친다. 개략적인 패턴은 다음과 같다.

0. 과학적 근거에 기반한듯한 실험 결과를 발표한다. 
1. 그 발표 중에서 우리의 건강에 관계된 요소를 부각시킨다. 
2. 부각된 요소은 부족할시에 우리의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고 조작되고, 충분한 양을 섭취하면 건강한 삶은 물론 장수할 수 있다고 선전된다. 
3. 촉진된 소비로 관련 기업이 돈을 번다.
4. 0-3의 패턴이 무수히 반복된다.

 이 책을 읽다보면 객관적인 사실이라는게 존재하는가하는 의문이 든다. 이를테면 비타민이라는 것 이름부터가 정치적이라는 것이다. 생기넘친다는 의미의 vital이라는 파생된 vitamin이라는 단어는 마치 이 성분을 충분히 섭취해야지만 생기있는 삶을 살 것 같은 환상을 우리에게 심어준다. 이러한 환상은 대중의 소비욕구와 기업의 시장개척과 맞물려 비타민 관련 산업을 부추기게되고 그 사이에서 영양학자들은 비타민이 함유된 제품들을 선전하며 적지 않은 돈을 손에 쥐게되는 것이다.

 애매하게 밝혀진 과학적 사실과 과학자들의 부와 명예에 대한 욕구, 그리고 기업가들의 욕심과 소비자들의 맹목이 만들어낸 음식에 대한 어리석은 믿음에 관한 이야기들이 이 책에 있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과연 십수년전 미국에서만 존재하는 이야기들일까? 음식뿐 아니라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결과물이라고 믿는 수많은 선택 중에서 과연 이러한 우스꽝스러운 행위들이 없는 것인지는, 글쎄, 나는 오늘날 이러한 일이 없다고 확신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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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 - 유동하는 근대 세계에 띄우는 편지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조은평.강지은 옮김 / 동녘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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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가 성장하고 자신이 누군지 고민할때 즈음에 이 편지를 읽어보면 좋을 것 같구나. 오늘 아빠는 <고독을 잃어버린 시간>이라는 책을 읽었단다. 오늘날을 어떻게 표현해야할까. 이 책의 저자는 현대 사회를 유동하는 세계라고 표현하더구나. 어떤 가치도 고정되있지 않고 액체 마냥 흘러다닌다는 것이지. 세상은 너무나 빠르게 변해서 한가지 가치만을 고집한다는 것은 도태됨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우리와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액체 마냥 빠르게 유동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구나. 

 나는 이런 세상을 인스턴트 라면에 비유하고 싶다. 출출할 때 먹는 라면 만큼 맛있는게 없지. 거기에 계란과 치즈까지 넣었다고 생각해보렴. 갑자기 배가 고파지는구나. 그런데 라면만큼 빠르게 조리되고 입맛을 자극하면서도 열량은 큰, 그러나 건강을 해칠 수 있는 음식도 없는 것 같다. 세상은 마치 라면처럼 재빠르게 끓어오르고 또 소비된단다. 그리고 그 맛은 꽤나 입맛을 자극하지. 이런 인스턴트 라면과 같은 문화적 컨텐츠들이 쉴새없이 만들어지는 요즘이다. 가끔 라면을 먹을 수는 있지만 매일 이러한 것을 섭취한다면 우리의 건강은 자신도 모르게 나빠지게 될거야. 오늘날 세상이 우리에게 주는 유익과 해악은 인스턴트 라면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날 수 있다고 생각한단다. 

 유동하는 그리고 인스턴트 식품과 같은 세상에서의 인간관계는 어떠할것 같니? 이 시대는 sns를 통해서 그 어느때 보다 서로가 긴밀하게 엮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는 사람들은 외롭기 때문에 사람들과 소통하기 원하고, 그래서 이런 sns는 사람들의 이러한 욕구를 해소시켜줄 수 있은 도구로 각광 받고 있지. 온라인 인간관계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오가고 있구나. 이 책에서는 sns가 우리가 가진 본질적인 외로움을 해소시켜줄 수 없다고 이야기하지만, 그 의견에 찬성하면서도 나는 한편으로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sns은 하나의 도구일 뿐이라고 말이야. 너가 너 자신의 모습을 진솔하게 보여줄 수 있다면 자칫하면 공허해질 수 있는 sns를 진정한 인간관계를 이룰 수 있는 보조적인 수단으로 이용할 수 있으리라 확신한다. 아빠도 sns를 통해 너의 엄마에 대해 많은 것을 알 수 있었어. 물론 온라인을 통해서 좁혀진 정신적인 간격만큼 육체적으로도 좁혀디는데는 얼마간의 시간이 필요했지만 말이야.

 결국은 아빠는 이렇게 생각한단다. 어떤 도구에도 너 자신이 매몰되어서는 안된다고 말이야. 아무리 거대한 온라인의 세계가 있다고 해도 결국 그것은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니까. 너가 진정한 우정과 사랑을 나눌 수 있다면 그 교류의 창이 온라인을 기반으로 한다고 해서 무슨 문제가 있겠니. 어떠한 방식으로도 사람들과 우정 그리고 사랑을 나누는 일을 멈추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너가 이 편지를 읽을때쯤이면 자신의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아빠는 어릴적부터 막연하게 꿈꿔온 건축가라는 인생을 살고 있지만 이 삶이 항상 꿈꿔오는대로 진행되어 왔던건 아니란다. 아직도 내가 추구하는 건축을 완성해나가고 있는 입장이라 조심스럽지만, 젊은 시절에 열정을 바쳤고 또 여전히 이 일을 사랑한단다고 이야기할 수 있단다. 어떤 일을 선택하든 나는 너가 오랜시간동안 식지않을 열정을 쏟을 무언가를 찾았으면하는 마음이야. 이 책에서도 그러더구나. 우리의 삶은 불확실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 삶 하나하나가 예술작품이라고. 비록 생물학적으로 너를 만들어낸 것은 엄마와 아빠이지만 너만의 인생 일정표를 만들어가면서 너의 삶을 스스로 창조해 갔으면 좋겠구나. 

 물론 세상은 너무나도 불확실하단다. 그렇기때문에 이 책의 저자도 이 세상을 유동하는 현대라고 부르는 것이겠지. 어떠한 일도 확실하게 성공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것은 냉혹한 현실이다. 그러나 너가 힘들때 아빠가 옆에서 힘이 되어줄게. 그리고 아빠도 너의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가족들이 항상 힘이 되어주었단다. 힘들때야말로 서로의 사랑과 소중함을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 아닌가한다. 무엇보다도 너는 혼자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졌으면 좋겠구나. 이렇게 불확실한 시대야말로 우리가 혼자가 아니라 서로 기대며 나아가야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건 그저 가족 간에 머무르는게 아니라 나의 주변사람들을 돌아보며 함께 갈 수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 

 이 책을 읽으면서 우리가 정말 소중하게 지니고 살아가야할 가치들이 무언가 다시한번 깨닫게 되었단다. 우선 인간 그 자체보다 세상에 중요한 것은 없다는 신념, 즉 모든 체계는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기 위한 도구라는 것이지. 그러면서도 우리를 서있게하는 지구에 대한 존중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단다. 이 터전이 없다면 우리도 살아갈 수 없으니까 말이야. 그리고 인간들 사이의 이뤄지는 진실한 소통을 빼놓을 수 없겠지. 마지막으로 무엇보다 나 자신이 어떠한 사람인지 알고 나만의 인생을 창조해가는 것을 잊지 말고 꾸준히 이루어 갔으면 좋겠다. 항상 아빠가 응원할게. 사랑한다. 그럼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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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name 2012-10-21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음 이건 끝까지 읽지 못했다.. 먄..

일개미 2012-10-21 15:46   좋아요 0 | URL
딸래미에게 쓰는 44개의 편지 중에 첫번째...아 오글거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