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36
김민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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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김민정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 출간되었다. 아는 사람은 아는 사실이지만 출판사 <난다>의 대표이면서 문학동네 시집의 편집자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이를 두고 왜 출판사 대표가 다른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는지 이해불가라고도 했지만 출판사 대표와 시인으로써의 김민정이라는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속 좁은 오류에서 나온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껏 네 권의 시집이 나왔고 나는 그 가운데 세 권의 시집을 보았다. 특별히 애정하거나 관심을 가진 시인은 아니지만 첫 시집부터 보여주던 특유의 걸죽한 입담을 시로 옮겨놓았다는 것이 오래 기억하는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물론 sns상에서 보여지는 소식도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워 아는 시라는 것의 두루뭉술한 이미지나 흔히 생각하는 시라는 것에 대한 생각을 단박에 박살내 버리는 게 김민정 시인의 시이니만큼 그렇게 직진 일변도의 시가 궁금한 독자라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이번 네 번째 시집 <<너의 거기는 작고 나의 여기는 커서 우리들은 헤어지는 중입니다>>에는 재미있는 시들이 많았다. 이 재미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해선 왈가왈부할 수 있겠다. ‘곡두라는 부제에 번호가 매겨진 시가 44편 실려 있다.

지난 1116일부터 18일까지 신내림을 받듯 시들이 쏟아져 내렸고 그걸 받아 적었다는 신문 인터뷰 기사가 있다. 그래서인지 어디로 튈지 모르는 문장들의 행렬이 유난히 많이 읽힌 시집이 아닌가 싶었다.

특히나 제목의 거기여기’, ‘는 저승과 이승, 그리고 산자와 죽은자에 관한 것이라고 하는 만큼 유명을 달리한 가까운 문인들에 대한 시가 많은 것도 특징이랄 수 있겠다.

그 한 예로, 고인이 된 허수경 시인을 떠올릴 수 있는 수경의 점 점 점이란 시의 일부를 옮겨와 본다.




마침표라는 땅, 쉼표라는 하늘, 그 사이에 온전치 못한 우리니까 해보다 아니면 말든가 만나보고 아니면 헤어지든가 할 수 있는 능동의 자유로움이, 그 천진이 우릴 시인이게 하는 걸 거라고 맘껏 찍게 했던 점 점 점 여섯 개

 

수경의 점 점 점일부

 

 

김민정의 시에는 시인의 일상이 곧잘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가 많은 편이다. 이름만 들으면 아는 유명 시인들이나 작가들이 선배, 동생, 친구들로 소설 속 인물들처럼 등장하며 시인과 혈연 관계에 놓인 인물들도 곧잘 등장한다.

이쯤에서 첫 시집에 실린 첫 번째 시를 소개해 본다.

 

내가 그린 기린 그림 기림

 

 

계란이 터졌는데 안 닦이는 창문 속에 네가 서 있어

 

언제까지나 거기, 뒤집어쓴 팬티의 녹물로 흐느끼는

 

내 천사

 

은총의 고문으로 얼룩진 겹겹의 거울 속 빌어먹을 나야

 

 

다음으로는 두 번째 시집에 실린 시 한 편을 더 소개해 본다

 

 

젖이라는 이름의 좆

 

네게 좆이 있다면

내겐 젖이 있다

그러니 과시하지 마라

유치하다면

시작은 다 너로부터 비롯함일지니

 

어쨌거나 우리 쥐면 한 손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빨면 한 입이라는 공통점

어쨌거나 우리 썰면 한 접시라는 공통점

 

(, 난 유방암으로 한쪽 가슴을 도려냈다고!

이 지극한 공평, 이 아찔한 안도)

 

섹스를 나눈 뒤

등을 맞대고 잠든 우리

저마다의 심장을 향해 도넛처럼,

완전 도--넛처럼 잔뜩 오그라들 때

거기 침대 위에 큼지막하게 던져진

 

두 짝의 가슴이,

두 쪽의 불알이.

 

어머 착해

 

 

이 시는 이번 네 번째 시집의 마지막 시에서도 언급되는데 그 부분을 소개해 본다

 

 

 

...제각각 쳐진 하나의 커튼 너머로 앞을 보고 누워 있을 남자와 뒤를 보고 누워 있는 나를 젓가락 두 짝처럼 여기자니 젖이라는 이름의 좆2탄 쓸 것도 아니고 필요한 게 마스크가 아니라 모자구나...

 

모자란 모자라

마침표는 끝내 찍지 아니할 수 있었다

-곡두 44 _부분

 

앞뒤 맥락 없이 읽자면 무슨 소린지 모를 것이란 걸 알지만 꽤나 오래전에 썼던 시를 다시 언급한다는 건 그만큼 시인에게도 각별한 시인가 싶었다. 아무래도 좀 발칙한 시이기도 해서 많이 옮겨졌지 않을까 짐작도 해본다. 누군가는 이게 왜 시냐고 손가락질 할 수도 있는데 조금만 찾아보면 시인 이유를 나름 설명해놓은 글들을 찾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작가와 작가의 글도 함께 나이를 먹고 늙어간다고 생각하는데 그런면에서 시인들의 시집을 순서대로 살펴보면 시에도 나이듦이 보인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당연할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인지 이번 시집은 좀 잘 읽힌다고 해야하나 그런 느낌을 받았다.

 

이번 시집의 첫 시를 소개 한다.

 

 

11일 일요일

-곡두 1

 

낮에는 도끼와 톱을 봤고

밤에는 꿩과 토끼를 봤다.

 

시에다 씨발을 쓰지 않을 것이고

눈에다 졸라를 쓰지 않을 것이다.

 

하루 종일 눈 내렸다.

머리로 가 붙을 수 있는 대목은 다

덮이었다.

더도 덮일 것이었다.

 

쑥차 마시면서

쑥대머리 들었다.

 

 

과연 시인의 다짐대로 쓰지 않겠다고 한 말을 안썼을까 궁금하다면 시집을 찬찬히 읽어봐야 할 것이다

 

시집을 읽기 전이든 후든 박준 시인이 쓴 발문의 일부를 한번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발문의 일부다.

 

저도 시인의 시가 어떤 경계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경계를 살펴보는 것은 어쩌면 무용합니다. 무용하지만 무용한 것을 알고 있다는 믿음으로 더 말해볼 수도 있겠습니다. 먼저 시인이 만들어낸 경계는 그간 우리가 시라고 합의한 것과 이제껏 합의되지 않은 것의 사이에 있습니다. 동시에 시인과 화자가 만들어내는 거리에 대한 각각의 경계입니다.

 

박준 시인은 시인 이장욱이 쓴 첫 시집의 해설 가운데 경계에 대한 부분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이 시집의 지지자이지만, 나의 지지를 넘어선 곳에서조차, 이 시집은 여전히 경계에 걸려 아슬하다.

 

<<날으는 고슴도치 아가씨>> 해설 시인 이장욱

 

당신이 이 시집을 읽어볼지 안볼지 알 수 없지만, 만약 읽어본다면 앞에서 언급된 시라는 것의 합의라는 게 무슨 말인지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44편의 시를 읽어가다보면 이게 뭐지 싶은,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시도 분명 있다. 한편으로는 아닌척 하면서 능글맞게 요즘 말로 뼈 때리는 말을 하는 시도 있다. 누군가는 하얗게 빛나는 백골과도 같은 게 시여야 한다고 하고 또 누군가는 뼈에 붙은 부들부들한 살점을 뜯는 맛에 시를 읽는다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다만 비만에 가깝거나 골다공증에 걸려 쉽게 부러지는 뼈와 같은 시는 걸러져야 하고 그런 안목은 많은 시를 읽어보는데서 갖추어질 것이다.

 

시집이 나온걸 핑개삼아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해보았다.

이번 시집에서 딱 한 편을 골라 읽어본다면 서슴없이 다음의 시를 택하겠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라고 하는 반복이 가져다주는 리듬감과 마냥 시소 위에 앉아 있게 하는 정황들의 이끌림이 마음에 들었다

일부만 낭독해 본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곡두 35

 

 

엉덩이가 시려 보니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반팔 티셔츠에 팬티 바람으로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정글짐도 있고 그네도 있고 철봉도 있고 미끄럼틀도

있는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없으니 세월아 네월아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건너편에 누가 정말 없는 걸까 노려보다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누가 불러 나왔나 내가 홀려 나왔지 혼자니까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발에 묻은 모래 털기 귀찮으니까 모래 속에 발을 더 파묻어가며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어느 밤 그랬으니까 다신 그런 밤 없기를 하였는데 또

까먹고 시소 위에 앉아 있는 밤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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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 가치에 대한 탐구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 지음, 장경렬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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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 보든 빌려 보든 베껴 보든 빼앗아 보든 훔쳐 보든!”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의심하고 돌아본 적 있다면 볼만한 소설

121군데 출판사가 거절한 베스트셀러


오늘의 소설은 소설 같지 않지만 분명 소설인 소설이다.

제목의 조합부터 이게 소설인가 아니면 철학이나 종교서적인가 하겠지만

그 무엇도 아닌 여행기이기도 한데 또 여행기라기엔 좀 부족해 보이는 것 같기도 하다.

내 마음대로 이 책을 정의하라면 신념에 관한 소설이라고 하겠다.


먼저 소설 주변에 관한 이야기를 알고 가야 할 것 같다.


이 책을 주목하고 읽게 된 건 특이한 제목도 제목이지만 저자의 이력을 훑어보는데 있었다.

9살 때 아이큐 170을 기록했다거나 15살 때 대학 화학과 신입생 과정을 수료했다는 것보다 그가 생화학 분야에서 재능을 보였지만 궁극적 의미를 찾는 데 실패해

학업을 중단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그후 저자는 입대하여 한국에 근무하기도 했고

이를 계기로 동양철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갑작스럽지만 당신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 같은 게 있는지 물어보고 싶다.

나는 어떤 대단한 신념을 말하는 건 아니다. 우리는 각자 어떤 신념을 가지고

살아간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신념이란 것을 몸으로 실천한다거나

인생에 직접 대입해 살아가기는 의외로 어렵다고 생각한다.


당신의 신념이 어떤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 신념이 하찮으면 하찮을수록 흔들려

그만 포기해야겠다 싶을 때 이런 책을 한번 보면 어떨까 싶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당신에게 용기를 북돋우거나

얄팍한 감상적인 위로를 줄 거라는 오해는 없었으면 한다.


책의 어려웠던 탄생 과정을 소개해 본다.

초판 출간이 1974년이니까 출간된지 좀 오래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1999년 출간 25주년 기념 서문이 실려 있다는 것은 반짝 팔리고 만 책이 아니라

꾸준히 사랑받았을 만큼 책에 힘이 있다는 반증이다.

저자는 이 책의 출간을 위해 122곳의 출판사에 의뢰를 했으나

1곳의 출판사만이 긍정적 반응을 보였고 담당 편집자와 4년간의

서신 교환 작업 끝에 책으로 묶을 수 있었다.


서론은 이 정도로 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본론의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이렇게 리뷰랍시고 떠들고는 있지만

이 책에 대한 어떤 선입견이 생기지 않기를 바란다. 왜냐하면

기본적인 철학 지식이 없는 사람이 어쩌면 자가당착에 빠진 해석을

떠들어댐으로써 행여나 잘못된 사실의 전달이 있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다.

800여 쪽에 다다르는 제법 두꺼운 책의 내용 가운데 극히 일부일 따름이다.


제목 이야기부터 해보자면 이나 모터싸이클 관리술에 대한 책인가 싶을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선 보다는 오히려 서양 고전 철학 가운데 아리스토텔레스의 수사학이나

플라톤에 관한 이야기가 많다는 느낌이다. 그리고 모터싸이클 관리술이라고는 했지만

거기에 다른 모든 것을 대입해도 무방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논두렁에 앉아 그 마음을 깨끗히 하면 그 사람이 중이고

그 논두렁이 절간이라는 말과 같이 형식에 집착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 나는 이 책은 여행기라고 하면서도 신념에 관한 책이라고 했다

책은 크게 두 가지 이야기가 병렬로 배치되어 있다

그 한 가지는 화자가 그의 아들과 함께 오토바이를 타고

미국 미네소타부터 캘리포니아까지 가는 여정이다. 나머지 한 가지는

그 여정에서 이야기 되고있는 이 책에서는 줄곧 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부제가 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것을 눈여겨 봐야 한다.

이 책에서 quality’ 이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비슷한 말로는 다음과 같은 말들이 있다.


, 아레테arete


덕이라거나 아레테 같은 말들이다.


다음은 작품 속에서 질에 대해 설명한 문장이다.


질은 우리를 자극하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를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지속적인 자극 요인, 세계의 모든 것을, 어느 한 부분도 빠짐이 없이

세계의 모든 것을 창조하도록 유도하는 자극 요인이다.

p623



이 질이라는 것을 추구하는 삶과 그것이 실현된 대상을 저자는

한국의 성벽에서 발견했다고 하는데 그 부분을 읽어보자.



파이드로스가 한국에서 보았던 성벽은 기술 공학적 행위의 산물이었다.

아름다웠지만, 이는 노련한 지적 기획 때문도 아니었고, 작업에 대한

과학적 관리 때문도 아니었으며, 그 성벽을 멋들어지게하기 위해

과외로 지출한 경비 때문도 아니었다.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그 성벽을

쌓는 일을 하던 사람들이 대상을 바라보는 나름의 독특한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기 초월의 상태에서 그 일을 제대로 하도록

자신들을 유도하던 방식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그들 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으로써 일을 그르치지 않았던 것이다.

총체적인 해결책의 핵심이 바로 여기에 존재한다.

p516



갑자기 무슨 뜬금없이 성벽 이야길 왜 하냐고 할 것이다. 앞뒤 맥락 없이 읽다 보면

이해가 어려운 건 당연하다. 이 부분을 읽고 지나가면서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런데 책 후반부쯤 읽어나가다보면 그게 그 뜻인가보다 하고 자연스레 이해하게 된다. 소개한 부분에서 강조 표시한 단어들을 연결해보면 그나마 짐작할 힌트가 되지 않을까 싶다.


자기 초월자신과 일을 따로 분리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쉽다.

적절할지 모르겠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극단적인 비유를 나름대로 해보자면

우리는 達人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것이 있다. 사람이 어떤 일을 오래 하다보면

그 일이 몸에 붙어 그 일을 할 때 지금 내가 이 일을 한다는 자각을 하지 않아도

몸이 알아서 실수 없이 해내는 그런 경지에 오르는 것을 달인의 경지라고 한다.

달인이 자신의 일에 몰입해 있는 그 순간을 자기 초월이라거나 주체와 객체의 합일

그렇게 부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우리는 자기 이외의 모든 외부 환경을

객체로 인식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교육 받기 때문이다.

거기에 대해 저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과학이라는 합리성을

거의 신봉하고 있는 수준임을 한번 생각해볼만한 말이다.



정서적으로 공허하고, 미학적으로 무의미하며, 영적으로 빈곤한 것,

이것이 바로 우리를 지배하는 합리성의 본래 모습이다.

p211


그렇다고 이 합리성을 포기하자는 게 아님을 다음과 같이 말하기도 한다


합리성을 포기하는 것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다 정도가 아닌가 싶어요.

오히려 해결책은 합리성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있도록 합리성 자체의

본질적 경계를 넓힐 때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p305


나와 타자 또는 인간과 사물로 주체와 객체를 나누어 보는

이원론적 시각을 탈피해야 한다는 문장을 소개해 본다.


주체와 객체로 나누어놓는 영원히 이원론적인 모터사이클 접근 방법이

우리에게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 것은 우리가 이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올바른 방법이 아니다. 이는 항상 현실 위에 덧씌워놓은

인위적 해석일 뿐이다.

p500


동양의 모든 종교에서 지고의 가치는 ... “그대가 바로 그것이다” ... 이처럼

나와 나 아닌 것 사이의 경계가 없음을 완벽하게 인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깨우침의 경지다.

p258


여기까지 살펴보면 이 책은 철학적인 부분에 치우친 게 아니냐 할 수 있다.

앞에서 이 소설은 두 이야기가 병렬로 흐른다고 했다.

아들과 함께 여행을 하고 있지만 이 부자지간은 뭔가 서먹한 관계임이 노출 된다.

파이드로스로 소개 되고 있는 화자 자신과의 불화와 함께 아들과의 갈등과 해소가

이 소설을 소설로써 읽히게 하는 하나의 중요한 줄기이다.


8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이니만큼

여기에서 소개하지 못하는 많은 읽을거리들이 있다.

여행기이기도 한 만큼 여행기에서 공감갈만한 문장들도 있다.


때때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보다

목적지를 향해 여행하는 것이 더 좋을 때도 있다.

p213


무언가 미래의 목적만을 위해 사는 삶이란 피상적인 삶일 수밖에 없다.

삶을 지탱하고 있는 것은 산비탈이지 산꼭대기가 아니다.

바로 여기가 만물이 성장하는 곳이다.

p365


신념에 관한 소설책이라고 나름 장담하면서 이야기해봤는데

정작 제대로 이야기했나 싶기만 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게

분명 그것이구나 하는 게 있는데 그것을 너무 파편화시켜 이야기한 것만 같다.

단순하게 지루한 철학적 문학소설로 치부할 수 없다는 것은

이 두꺼운 책이 2010년 한국에서 출간된 후

4년만에 7쇄를 찍었다는 것을 참고할 수 있을 것 같다.

삶의 근본적 문제에 대해 의심하고 돌아본 적 있는 당신이라면

일독할만한 책이라고 생각한다.

인상적으로 읽었다면 이 책의 속편이라고 할 수 있는

<<라일라 도덕에 대한 탐구>>를 추천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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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입장들 4
배수아 지음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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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기 전에 잡썰

2. 간단한 줄거리와 작품에 대한 썰

2-1 그리고 어떤 한 문장

3. 마치며 하는 잡썰

4. 책 만듦새와 오탈자에 대한 빡침 이야기



1. 들어가기 전에 잡썰


어쩌다보니 배수아 작가의 책이 12권이 되었다. 참고로 모든 책을 가지고 있는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배수아 작가의 열혈 독자냐 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오해는 금지) 절판된 책을 중고로 구입한 것도 있고 신간이 나오자마자 구입한 것도 있다. 그 가운데 반 정도 읽고 반 정도 안읽은 것 같기도 하다. 어떤 책은 여전히 인상 깊게 남아 있고 또 어떤 책은 읽긴 읽었지만 무얼 읽었는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한편으론 단지 배수아 번역이라는 이름 때문에 구입한 번역서들도 눈에 띄고 단지 배수아 작가가 호평했기 때문에 관심을 가지고 읽게 된 외국 작가, 이를테면 토마스 베른하르트나 제발트 그리고 페소아. 최근 읽은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까지 있으니 이쯤 되면 배수아 열혈 팬 맞네 라고 하겠지만 다시 한번 거듭 말하지만 그렇지는 않다. 다만 뜨뜨미지근한 관심을 두고 있다는 데에는 인정하겠다.


어떤 작가를 말할 때 마니아적인 작가라고 한다면 그런 평판은 작가에게 긍정적일까 부정적일까. 그와 상관없이 나는 배수아 작가가 일반적으로 두루두루 읽히는 작가는 아니라고 본다. 일군의 확고한 지지를 보내는 독자층을 가진 작가가 아닐까 하는데 왜냐하면 당연한 소리지만 그 작품들이 가지는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오늘 이야기 할 <<멀리 있다 우루는 늦을 것이다>> 역시 그러했다.



2. 간단한 줄거리와 작품에 대한 썰


책을 읽기 전에도 그랬고 읽고 난 지금도 마찬가지인데, 과연 제대로 읽고 제대로 작가의 의도를 이야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다. 아무리 책읽기가 주관적 영역이라 해도 너무나 얼토당토 않은 말을 할 수는 없다. 지금처럼 자꾸만 변죽만 울리고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어디로 들어가고 나와야 할지 입구도 출구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기때문에 코끼리를 손으로 더듬는 정도가 아니라 울음소리만 듣고 코끼리를 안다고 하는건 아닌지 싶다. 눈 밝고 귀 밝은 독자들은 부디 코끼리 등에 직접 올라타 그 느낌을 체험하기를 바란다.


이 소설은 전체 3부로 이루어져 있다. 1부는 모든 기억을 까맣게 잊은채 여행지 숙소에서 잠에서 깨어난 두 남녀가 어떤 무녀를 찾아가는 이야기다. 2부는 1부와는 상반된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여행에서 돌아온 듯한 여자와 그의 손님으로 등장하는 남자가 서로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 3부에서는 우루라는 여자가 보고 기억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하는데 1부와 2부의 이야기들이 혼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이 소설을 읽는다면 어쩌면 1부로 돌아가 다시 읽어야만 아 이게 그건가 하는 것들도 있을 것 같다.

아주아주 후려친 줄거리라고 할 수도 있지만 이 소설은 주인공이 뭘 하느냐 같은 줄거리는 중요하지 않다. 굵직굵직한 서사의 줄기를 따라가며 등장인물과 사건의 전개를 기대하지 않는게 좋다.

어떤 문장이나 문단이 주는 의미를 곱씹어 본다거나 추상적 의미 속으로 자신이 밀려가는 독서체험이 재미라고 느낀다면 소설가 배수아의 애독자가 될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꼽아본 몇 문장을 읽어보고 이야기해보는 것이 이 소설의 리뷰가 되겠다. 인용하는 문장에 대한 코멘트는 소설적 맥락과는 상관이 없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 첫 번째 문장이다.



하지만, 어디 있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찾아갈 수가 있나요?

당신은 그 사람에게 가지 않아. 그 사람을 찾지도 않아. 그 사람과 마주치는 거지. 그래서 그 사람을 알아보는 거야. 그게 아니라면 의미가 없어.

_26p


굵은 글씨체는 본문에서 강조된 것이다.

나는 이 문장에서 강조된 말들 가운데 마주치는이라는 것에 생각이 쏠렸다. 이 마주침에 엮어볼만한 본문 가운데 일부를 읽어보기는 하겠지만 납득을 바라는 건 아니다.


유일한 일, 눈부신 일, 압도하는 일,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느낌으로 비범한 일, 매혹하는 일오래오래 기억에 남아 있거나 혹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때가 되면, 불현듯 기나긴 망각을 깨고 터져 나오게 될 일, 의미 있는 일, 혹은 아무런 의미를 찾아낼 수 없는 채로, 모든 의미를 몰아내 버리는 일의미와 모순되는 새로운 의미를 만드는 일, 오직 예감으로 이루어진 일. 그 일이 지금의 나 자신과 어떤 맥락을 형성하는지 절대 알 수는 없겠지만, 나 자신의 존재가 그 일이 있기 위한 어떤 맥락이었음을지금 현재 분명히 직관하는 일. 그 일은 잃어버린 시간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갖는 것은 삶의 가장 놀라우며 신비한 사건에 속한다그런 일이 있었다. 낯설고 놀라운 일이. 믿을 수 없는 일이. 범상하지 않은 일이. 거의 신비에 가까운

일이.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 일이 일생의 달빛처럼 내 위를 희게 지나갔다.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나를 관통하면서 지나갔다. 그것은 내게 일어났고, 동시에 그 일은 내게서 유예되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지만그것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 이미 일어난 일이겠지만, 그것이 다가오는 예감을 항상 느낀다. 나는 그것을 오직 모르면서 안다. 망각으로서만 그것을 기억한다. 그러다 아주 뒤늦게, 믿을 수 없을 만큼 지연되어 효력이 나타나는 수면제처럼, 그것이 불현듯 내 위로 떠오를 때가 있다. 유예된 효력이 언제 나타나는지, 나는 절대로 알지 못한다. 냉장고 문을 열다가, 길을 걷다가, 책을 읽다가, 양파를 썰다가, 심지어는 잠을 자던 중에도, 그것이 의식의 표면을 찢어발기며 떠오른다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그것을 모르면서 안다! 마치 어느 날 문득 마주친 어떤 사물을, 어떤 대상을어떤 느낌이나 이야기를, 스스로 이유를 모른 채 물끄러미 주시하게 되고, 그것과 연관을 맺기를 간절히 원하다가, 마침내는 그것이 세상의 다른 어떤 우물도 아닌, 바로 나 자신으로부터 나왔기를간절히 그리워하고, 상상하고, 믿고, 마침내 알게 되는 것처럼.

그런 일이 있었다.

_83p


인용한 부분에는 네 번의 그런 일이 있었다라는 말이 있는데 나나 당신들 역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딸려 나오는 어떤 일이, 사람이 있을 것이다. 작가의 표현대로 모르면서 알고 망각으로서 기억하는 일들은 굳이 몰라도 그만이고 안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그런 일들은 부지불식간에 길을 걷다가’ ‘양파를 썰다가마른 하늘에 번개가 번쩍 하고 빛나듯이 기억 속에서 튀어나오는데 그럴 때면 가던 걸음이 썰리던 양파가 모두 정지 된다.

나는 앞에서 마주치는이라는 말에 생각이 쏠렸다고 했다. 길을 가다 누군가를 마주치든 아니면 어떤 생각을 마주치든 이 마주침은 어디서 오는 것이며 왜 오는 것인지 어쩌자고 무방비로 마주쳐야 하는 것인지 같은 생각이 들 때 마다 대책은 속수무책임을 느낄 뿐이다.

그렇게 내던져질 뿐이다. 우리가 이 세계 안에서 존재하는 것은 기억으로 시작하는데 그렇기 때문에 이 소설이 기억을 잃은 남녀로 시작해 각자의 기억에 대해 이야기 한다는 것도 우연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소설이 기억에 관한 소설은 아니다. 소설의 오독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앞뒤 맥락도 없이 문장을 인용하고 어줍잖은 말들을 늘어놓았는데 여기에 무슨 소설적인 줄거리와 사건이 있겠는가. 이 영상에서는 이 정도의 말들만 꺼내겠지만 한 문장을 마주치고 한 문단을 마주치고 잠시 책을 내려놓고 어떤 블랙홀 같은 세계로 빠져들면 거기에 시간이란 정지가 아니라 시간이 없는 세계가 되버린다. 생사를 넘나드는 찰나를 경험한 사람들의 이야기엔 공통적으로 그 짧은 순간에 지금까지 자신의 인생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하지 않는가. 그것과 같은 것이다.

소설의 주인공과 사건이 전개되는 줄거리를 따라가느라 정신이 쏙 빠지는 그런 소설도 좋겠지만 나는 딱히 그런 소설에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어떤 몰입이 되었든 각자 즐기면 그만인 일이겠지만 내 안에 있는 뭔가를 건드리고 떠올리게 하거나 마주치게 하는 어떤 것들을 찾는 일 가운데 하나가 글자를 읽어대는 일 같다. 여하튼 이제 시작인데 이렇게나 지루한 말하기를 시키고 있으니 이 소설 읽기는 나름대로 대박이랄 수도 있겠다. 한편으론 흥행과는 거리가 먼 영화를 만들고 있는 대책없는 감독의 심정이 이 비스므리 한건가 싶기도 하다. (편집은 뭐 어쩌려고 이렇게도 지껄여대나)

두 번째 문장을 읽어 본다.


당신은 놀라운 일, 혹은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을 경험한 적이 있나요?

사실, 잘 생각해 보면 그런 일은 우리가 짐작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일어난다고 손님은 대답한다.

그런데 그것은 대개 불완전한 파편의 형태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 삶의 그림을 완성하는 데 불필요한 조각처럼 보이고, 그래서 우리의 의식은

그것이 무엇의 예감인지 알지 못하는 채 대개 그것을 기억하지 않고 파기해 버린다.

설명할 수 없는 이상한 일, 우리의 삶과 논리적 맥락을 이루지 못하는 이질적 파편들을 우리는 그렇게 부른다.

_106p


인간이 지속적으로 과학 기술을 발전시켜나가는 근원에는 설명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는 설명할 수 없었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과학의 이름으로 얼마나 많이 설명의 범주 안에 포함되었는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이 설명의 범위가 어디까지 가 닿을지는 모르겠지만 끝내 설명될 수 없는 미지의 영역도 남겨지긴 할 것 같다. 어쩌면 그래야만 한다. 우주의 끝의 끝을 넘어서까지 명명백백하게 밝혀져 그야말로 모든 것이 설명 가능해진 다음의 인간에게 남겨진 것은 무엇일까. 더이상 설명할 티끌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인간은 아마 신이 되었을텐데 그땐 무엇을 할까.


일상이라고 이름 붙여지면 놀랄 것도 이상할 것도 없는 일들의 연속이다. 연속이라하지만 연속이 아닌 한 장의 평면이다. 설명이 필요 없기 때문이다. 평면은 설명을 요구하지 않는다. 설명의 대상은 밝혀지지 않는 것, 밝혀지고 있는 것인데 한 눈에 간파되는 평면은 설명이 불필요한 세계인 것이다.

뭐 이런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귀신이 씨나락 까먹는 소릴 하게 하는 인용문장이었으므로 이 또한 만족한 독서의 한 증거라고 할 수 있겠다.

삼 세 번이라고도 했으니 지겹고 어처구니가 없어도 세 번째 문장까지는 가자.


나는 그 사진이 나 자신과 깊게, 이 세상의 다른 무엇보다도 더욱 깊게 연관되어 있음을 안다.

구체적으로 어떤 연관인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보는 순간 그냥 알게 되는, 휘발되는 향기와 같은 앎이 있다.

_121p


직관이라고 하면 맞는지 모르겠지만 이해와는 상관없이 그냥 알게 되는 순간이 있다. ‘휘발되는 향기와 같은 앎이라는 감탄을 부르는 표현에 역시나 소설가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학습을 통하여 습득하는 지식으로 아는 앎이 아니라 살아오고 견뎌온

어떤 순간 찾아오는 예감으로써의 앎도 여기에 포함된다고 한다면 왜 그런 앎은 피하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풍경으로 흐를까. 어쩌면 모든 예감이란 것은 다분히 결과론에 걸러지고 남은 과거의 확인일 뿐인걸까 싶다. 순식간에 휘발되는 증기를 붙잡을 수 없듯이 모든 앎이란 과거지향적일 수밖에 없다.



앵콜 요청도 없지만 내 맘대로 하나 더 추가해 본다.


오래전 처음으로 요나스 메카스의 영화를 본 다음, 우루는 그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우루는 자신이 발견했다고 믿는 어떤 아름다움에 대해 몇 줄 언급한 다음,

의례적인 작별의 인사말도 없이, 그런데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요? 하는 질문으로 돌연히 편지를 마쳤다.

/.../ 그는 우루의 질문에 대해 문득 떠오른 답을 전해 주기 위해 엽서를 보낸다고 했다.

그는 썼다.

아름다움이란 후회하는 것입니다.”

_134p



실재 인물인지 검색을 해봤다. 참고로 요나스 메카스Jonas Mekas 는 리투아니아 계 미국인 영화 감독이자 시인으로 종종 "아방가르드 영화의 대부"로 불렸다고 한다. 192212월 출생하여 20191월 미국 뉴욕에서 사망했다.

인용한 문장의 상황이 실재인지 소설적 상황인지 확인하고 싶지는 않지만 실재로 엽서를 보내고 받았다는 것에 내기를 하라면 걸겠다. 감독의 작품 가운데 아름다움 이라는 키워드로만 짐작해보자면 2000년 작품인 <<우연히 나는 아름다움의 섬광을 보았다>>가 아닐까 짐작만 해본다.


아름다움이란 후회하는 것이다, 라는 말을 한참이나 붙잡고 있어 봤다.

아름다움과 후회는 일란성 쌍둥이 같은 것이겠구나.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는 말처럼 영원한 아름다움은 없을 테니 아름다움이 시들고 나면 아름다움의 자리엔 후회가 차지하는 거구나 뭐 그런 생각을 하자니 후회할 아름다움이라면 가지지 않는 게 나은 건가, 후회할 값이라도 한번 아름답게 피어보는 게 나은 건가. 해보고 후회하자 주의와 후회할 걸 왜 하냐는 주의로 나눠볼 때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라서 저 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던가 싶었다.



2-1 그리고 어떤 한 문장


상점 깊숙한 안쪽에서 백발의 여인이 낯선 악기를 연주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

우루는 자신도 모르게 한 손을 뺨으로 가져갔다. 그 모습이 악기 상점의 유리창에 비치며,

우루의 얼굴이 안에서 연주하는 백발 여인이 얼굴과 순간적으로 겹쳐졌다.

아니 처음부터 그것은, 우루가 아닌 백발 여인이 얼굴이었던가.

그리고 그날, 나는 죽는가? 이런 의문이 들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오늘은 위대한 날이므로. 희미하게 반사되는 유리창 너머로

우루는 미소지었다. 아니 그것은, 우루가 아닌 백발 여인의 미소였던가.

_132~134


이 문장만 따로 뺀 이유는 문장을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면 알 것이라 생각한다. 그리고 왜 따로 설명을 붙이지 않는지도 알 것이라 억측을 해본다. 당신이 생각하는 그것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 별 것도 아닌 이런들 어떠리요 저런들 어떠리요인 것이다.

딱 한 마디 붙이자면 좀 오묘한 문장이란 것이다. 내 말은 여기 까지다.



3. 마치며 하는 잡썰

소설 리뷰를 빙자하여 소설과는 하등의 상관도 없는 장황한 자뻑 독백을 구구절절 해봤다.

이런 것도 따지고보면 소설이 주는 영향력임은 분명하다. 주인공이 어떻고 반전이 어떻고 하는 소설이었다면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고 끝냈지 이런 어처구니 없는 썰은 풀지 못했을 것이다.



4. 책 만듦새와 오탈자에 대한 빡침 이야기


이 작품은 출판사 워크룸프레스에서 입장들이라는 이름으로 출간하고 있는 한국문학 시리즈 가운데 4번째 작품이다. 이 시리즈의 책 만듦새에 관해 이야기를 안할 수가 없다.


보는 바와 같이 이 시리즈는 앞표지에 독특한 그림만 있고 저자 이름이나 제목 조차 표시하지 않고 있다. 책등, 업계 용어로는 세네카에 그런 정보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좀 쌩뚱맞다고 해야할까 무려 비니루!가 씌어져 있다는 것인데 난 이건 좀 아니올시다 같다.

본문의 편집도 양끝맞춤이 아닌 낱말 기준 왼쪽맞춤이다. 이런저런 디자인적인 면에 공을 많이 들이긴 했지만 디자인을 위한 디자인 같기만 해서 썩 달갑지만은 않은 시리즈이지만 네 권까지 나온 현재 나는 세 권을 구입했고 한 권은 읽다 말고 내다 팔았고 두 권을 가지고 있고 다음에 나올 다섯 번째 작가의 애독자라서 내심 기다리고 있기도 하다. 선정된 작가들의 면면만은 인정하겠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분노폭발 까진 아니지만 읽으면서 짜증을 유발케 한 것은 눈 침침한 독자가 보는데도 160여 페이지 짜리 단행본 한 권에 무슨 오탈자가 8개나 발견 되는가 하는 것이다. 오탈자의 위치는 밝혀놓겠다. 한두 개는 애교로 봐주고 서너 개 까지는 뭐 그렇다 치겠다.

500 페이지 600 페이지 짜리 벽돌책이라면 이렇게 대놓고 뭐라 하지도 않겠다. 3교가 아니라 2교만 봐도 발견하고 고칠 수 있는 정도의 오자가 특히나 중후반 부에 몰려 있다는 건 그만큼 교정자가 안이했다는 것이다. 출판사를 탓해야 하나 외주 교정자라면 한 개인의 부주의를 탓해야 하나. 답답할 뿐이다. 최근에 읽은 500페이지 짜리 소설에서도 여서일곱 개 오탈자가 있던 탓에 보이는 과잉반응인가. 아 진짜.


21p 8 생각이 날거라고 더붙였다. : ->

79p 7 후추과 소금을 : ->

102p 6 산으로 올라갔다고 했요. : 했요 -> 했어요

102p 12 남아 있었고 우리를 그것을 : 우리를 -> 우리는

123p 11 역겨움으로터 : -> 부터

141p 9 우루는 승려는 따라가던 : 승려는 -> 승려를

149p 7 교실의 차들은 : 교실의 창들을 또는 교실과 차들을(확인 필요)

158p 8 소년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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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이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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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번 그런건 아니지만 어떨 때 시집을 사러 가거나 읽고 싶냐고 묻는다면

지금은 이렇게 이야기 하고 싶다


기승전결과 인과로 짜여진 소설의 숲 같은 빽빽함 속으로 들어가는 게

내키지 않거나 심드렁한데 그럼에도 어떤 활자를 눈으로 확인하고 싶을 때가 그렇다고 하겠다

단박에 어떤 상황 속으로 내던져지는 느낌이고 싶을 때라고 하겠다


소설과 같은 산문은 늪에 빠지듯 서서히 빠져들지만 시는 순식간에

허공에서 수중이라는 다른 세계로 내리꽂히는 다이빙과 같은 그런 것이다.

물론 나는 다이빙대에 한번도 서본적은 없지만

시는 그렇게 단박에 진입할 수 있다는 게 마약같은 중독성이라고 해두자





책꽂이의 시집 가운데 읽지 않은 것도 많고 읽었다 하더라도 그걸

모두 외우고 있을 수도 없을뿐더러 한두 번 읽었더라도

언제 읽었냐 싶은 시집은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지만 기시감을 안고 있는 책꽂이의 시집에 선 듯 손이 가지 않을 때

그럴 때 오프라인 서점에 가서 시집이나 신간 코너에서 아무거나 뽑기를 하듯 펼쳐 본다

어떤 문장이나 시 한 편이 꽂히는 시집이면 앞뒤 보지않고 그 시집을 구입한다

뒤쪽부터 보든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든 아니면 차례의 제목만 훑어 보다가

눈길이 멈추는 제목의 시부터 본다

한 권의 시집에 묶인 시들 가운데 단 한 편의 시만 좋아도 괜찮은 시집 읽기였다고 생각한다

설령 단 한 편의 시에도 마음이 가지 않았다 해도 시집을 붙들고 있는 그 시간만은

나는 여기에 있지 않고 문장을 따라 어딘가를 배회하거나

나를 잊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요즘말로 개이득인 것이다



무턱대고 서점에 가서 최근 발간된 이영주 시인의 <<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이라는 시집을 발견했다

차례를 거꾸로 훑어가다가 제목에 끌려 읽은 <우물의 시간> 이란 시의 일부분을 소개해 보겠다



우물의 시간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왔지. 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 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 불행은 물속으로 녹아드니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 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_부분


전체를 모두 읽고 싶을 만큼 마음에 드는 시지만 감질맛 나라고

궁금하면 시집을 사보라고 일부를 읽었다.


그렇다면 왜 이 <우물의 시간> 이란 시에 감응했을까 하는 것을 말로 옮기는 것은

道可道非常道인 것과 같다고 하면 어처구니가 없는 건가.

일찍이 조용필 옹께서도 이렇게 노래하셨다


묻지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


_조용필


살다보면 때론 몰라도 그냥 닥치고 있어야 할 때도 있더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몇 마디 보태보자면 오래된 우물이거나

더이상 물이 올라오지 않아 입구를 닫아놓은 인적 끊긴 우물이거나

여하튼 우물가에 서서 어둡고 서늘한 우물 바닥을 내려다본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아니면 우물이 등장하는 소설의 한 장면을 가슴 깊숙이 간직하고 있거나

가슴 속에 오래된 우물 하나가 있어 틈날 때마다 그 우물 밑바닥을 들여다보고 있어도 괜찮겠다.

그런 경험이나 상상을 하고 있다면 이 시에 감응하지 않을까 싶지만

개인의 경험과 취향에 따라 천차만별로 읽히는 게 시라서 뭐라 말은 못하겠다.



4월의 해변


해변을 걷다 보면 내가 자꾸 떠내려온다. 발이 많으면 괴물처럼 보이지. 나는 편지를 쓰러 해변에 자주 온다. 무엇인가를 썼다고 생각했는데 다 젖어버렸다. /.../

오래된 과자 봉지를 뜯으며 다 죽었는데 발처럼 많아지는 마음을 들여다본다. 너무 살려고 애쓰지 마. 물을 뚝뚝 흘리며 소녀들이 모래사장을 걸어간다.


_부분


내륙 분지 출생인 내가 바다를 처음 본 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이었다.

탁 트인 수평선을 처음 본 꼬꼬마에게 바다는 그야말로 네츄럴 쇼크였다.

한산도를 가기 위해 탄 작은 배에서 내려다 본 검푸른 바다에서는 금방이라도

짙푸른 손이 스윽 하고 수면 위로 올라올 것 같은 무서움의 기억도 선명하다.

한편으로는 신발을 벗고 걸어본 백사장의 느낌과 쉼없이 밀려왔다 가기를

반복하는 파도와 하얀 포말의 느낌 역시 신기하기만 해서 한참을 바라봤던 것 같다.

바다에 대한 처음의 기억과 그 이후 한참이나 지나 찾아갔던 겨울바다의 상념이

어지럽게 뒤섞여 바다나 해변이라고 하면 고착된 한 장의 이미지가 되었다.

어떤 시는 오래된 기억을 굳이 끄집어내 준다. 멀어지지만 사라지지 않고

다시 가까워지는 파도처럼 잊었는가 싶은 기억을 불쑥 단박에 끼얹어 준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자꾸 떠내려 온다’.

한번씩 해변을 거닐어 보고 싶다는 것은 잊었다는 것조차 잊은

어떤 기억이 튀어나오길 바라는 건지도 모르겠다.



많은 페이지를 접었지만 그 가운데 두 편의 일부를 소개해 본다


우유 급식


이렇게 깊고 깊게 파고드는 날이면 연필을 깎고 또 깎습니다. 저는 이제 편지를 쓸 사람이 없네요. 제게는 도착할 편지가 없습니다. 너무 미안해서 아무에게도 쓸 수가 없는 걸까요. 너무 미안해서 죽이고 싶은 걸까요. 다른 세상은 없으니까. 다른 너도 없으니까. 미안하면 미안한 채로 이를 갈며 뜬눈으로 잠이 들어야 하니까. 여기에는 여기도 없으니까. 어두운 시간은 어두운 곳에 없고, 쌓인 편지를 어느 시간 안으로 버려야 할지 알 수가 없습니다.


_부분



여름에는


내가 아는 밑바닥이 있다. 물이 가득하지. 나는 한 번씩 떨어진다. 물에 젖어 못 쓰게 되는 노트. 집에는 빈 노트가 너무 많다. 버릴 수가 없네. 밑바닥이 들어 있다. 자꾸만 가라앉지. 어디도 내 집은 아니지만. 첨벙거리며 잔다. 베개가 둥둥 떠내려간다. 괜찮아. 어차피 바닥이라 다시 돌아와.


_부분


이런저런 말들을 덧붙일 수도 있었겠지만 괜한 말로 감상에 방해가 될까 싶어 부분만 소개했다다음으로는 이 시집을 열고 있는 첫 시와 닫고 있는 마지막 시를 소개해 본다. 아무렇게나 시를 배치하는 건 아니기 때문에 나름의 의미 같은 걸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십대


불과 물. 우리는 서로를 불태우며 물속으로 밀어 넣었다. 우리는 망해가는 나라니까. 악천후의 지표니까. 우리는 나뭇가지를 쌓아놓고 불을 붙였고, 오줌을 쌌고, 자주 울었고, 나무들이 그 모습을 지켜보곤 했다.


_전문



연대


어둠이 쏟아지는 의자에 앉아 있다. 흙 속에 발을 넣었다. 따뜻한 이삭. 이삭이라는 이름의 친구가 있다. 나는 망가진 마음들을 조립하느라 자라지 못하고 밑으로만 떨어지는 밀알. 옆에 앉아 있다. 어둠을 나누고 있다.


_전문


아주 간략하게 살펴본 이영주 시인의 네 번째 시집이었다. 뭔가 코드가 맞다 싶다면 일독, 아님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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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
린 울만 지음, 이경아 옮김 / 뮤진트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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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어나보니 아버지 나이 48 엄마 나이 27

나의 엄마는 4.5번째 아내였다

최고의 영화 감독 아버지

최고의 여배우 엄마

 

린 울만의 소설 <<불안>>을 읽기 전에 몇 가지 검색을 해보지 않을 수 없었는데

그것은 책 뒷표지에 실린 첫 문장 때문이었다

 

스웨덴 영화감독 잉마르 베리만과 노르웨이 배우 리브 울만

이 위대한 예술가들을 부모로 둔 여자아이

 

물론 이 말은 사실이겠지만 그들이 누구인지 궁금했다

검색해 보면 쉽게 확인이 가능한데 그의 부모는 그야말로 대단한 유명인사다

그리고 그 여자아이가 바로 이 소설의 작가 린 울만이고

자신의 부모에 대해 쓴 소설이 이 작품이다

 

그렇다면 소설 <<불안>>은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인데 어디까지가 허구이고

어디부터 사실일까 하는 의구심과 호기심을 가질 수 있다

그것에 대해 작가는 소설 속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실존 인물들-부모님이나 아이들, 연인들, 친구들, 적들, 형제들, 삼촌들, 이따금 지나치는 사람들-에 대해서 글을 쓰려면 그들을 허구로 만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방법은 그것뿐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기억하는 것은 다시 또다시 주위를 둘러보며 매번 똑같이 경탄하는 행위다. /.../ 하지만 어떤 일은 아마도 내가 지어냈을 것이다.

373~374p

 

아버지가 일정표에 내 이름을 쓰는데 손이 떨린다. /.../ N 하나, N 하나, 자 끝났다.

484p

 

참고로 작가의 이름 철자다. Linn Ullmann



우리가 소설을 읽는다고 할 때는 작품에 속아야만 한다. 속지 않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따지고 드는 건 비평가들이나 할 짓이고 소설을 읽는 독자의 바른 자세는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읽다보면 이 부분은 경험하지 않았다면 못썼겠다 싶을 때가 있는데 그런 부분이 이 소설을 읽는 맛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드러내서 좋을 게 없어 보이는 아버지나 어머니에 대한 시시콜콜한 모습들과 카세트테잎 녹음 작업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시간 속의 감정 부침들이 그러했다.

 

 

자식들은 부모가 전매특허처럼 쓰는 단어와 표현을 알고 있지 않은가. 자식은 부모가 입버릇처럼 쓰는 말들을 알기 마련이다.

396p

 

 

이 소설은 반전이 있다거나 하는 소설은 아니다. 줄거리라고 해봐야 어린 여자아이에서부터 아버지의 사망 후까지 양친에 대한 담담한 서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끝까지 지루하지 않게 읽게 하는 힘은 사실적 기억이든 왜곡된 기억이든 대부분의 사람들이 경험하고 기억하는 부모와 자식 간의 이야기라는 공통적 기억 가운데 다른 집 부모와 자식은 어떠했을까 하는 점이 아닐까 싶다. 특히나 소설 속 아버지와 어머니라는 냥반들은 결코 평범하지 않는 성격과 지위의 소유자들이다.

그 두 인물을 검색하다 본 것 가운데 잉마르 베리만 감독은 지독하게 영화를 찍는 것 때문인지 악마 감독이라나 뭐라나 그런 말도 있었고 배우 리브 울만에 대해선 실생활에서 대단히 잘 웃는 놀랍도록 쾌활한 사람이라는 평도 있었지만 소설 속에서 그 딸이 이야기하는 어머니 리브 울만은 결코 쾌활한 사람으로 보이진 않는다. 물론 사람은 자신의 위치마다 꺼내 쓰는 가면이 다르긴 하다.

 

 

하지만 부모님이 /.../ 아이를 키우는 법도 모른다는 사실을 나는 크면서 깨달았다. 자식을 향한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식을 분명 사랑하셨다. 내 말은 양육에 대해서 몰랐다는 뜻이다.

396p

 

 

주인공인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 나이는 마흔여덟이었고 어머니의 나이는 스물일곱이었다

거기다 결과적으로 보면 내 어머니를 제외한 다른 어머니는 다섯이며 나는 여덟명의 형제 자매가 있다. 그리고 나의 친어머니는 네 번째와 다섯 번째 어머니 사이에 끼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정식 결혼 관계가 아닌 사이에서 태어난 혼외자식인 것이다. 모계 성을 따르고 있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다.

 

앞서 올린 책보관함 영상에서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 같은 걸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그때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고,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언급하며 나름 이 소설에 대한 기대 또는 나름대로 짐작한 게 있었다면 그것과는 좀 다르게 전개가 되었다. 뭔가 극적이거나 반전이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주 냉소적으로 흐르거나 할 줄 알았다.

만약 이 소설이 완전한 픽션이었다면 그게 가능했을 것 같다. 하지만 말했다시피 자전적 소설이기 때문에 등장인물들이나 상황을 극한으로 몰아부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점과 맞물릴 수도 있는 아쉽다고 해야할까 어울리지 않는다고 할 점은 <<불안>>이라는 소설의 제목이다.

 

원제 Unquiet [형용사] 침착하지 못한, 불안해하는, 동요하는

 

불안이라고 번역한 제목이 틀렸다거나 그런 게 아니라 불안이라고 하면 정신의학이나 심리학적 느낌의 용어 같아서 소설 제목으로써의 맛이 나지 않는다. 그리고 불안이라는 말은 너무 의미가 넓고 큰 말이 아닐까 한다. 대안을 제시하지는 못하겠지만 느낌이 그렇다는 것이다.

 

소설 속에서 직접 불안을 언급하는 몇 문장을 옮겨와 본다

 

왜냐하면 아침이 다가올수록 더 불안해지거든. 121p (아버지의 말)

아버지는 작별 인사를 하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고, 불안과 위통이 생긴다. 129p (어린 주인공의 말)

엄마는 곧 떠날 것이다. 캐더린은 공포의 의미를 모른다. 303p (어린 주인공의 말)

물론 엄마를 잃을까봐 두려운 마음은 그대로였다. /.../ 내게 이런 일들을 억지로 시키는건 내 망상이라는 걸 나도 알았다. 314 (어린 주인공의 말)

눈앞에 떠오르는 나는 너무 큰소리로 말하고 너무 빠르게 걸으며 상대해 주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불안에 집어 먹힌 여자다. 389p (중년의 주인공의 말)

 

불안의 극단까지는 아니라도 좀 더 깊은 불안의 심리나 상황들을 기대했는지 모르겠다. 그래야 제목과 어울리는 소설이 아니냐는게 내 생각이지만 제목을 지우고 읽는다면 작품의 전체적인 균형은 잘 잡았다고 본다. 자극적 소재나 대단한 반전이 당연시 되는 세상의 유행에 젖어 이거 아니면 저거여야 한다는 식으로 편향된 내 성격 탓일 수도 있겠다.

 

소설의 제목을 소홀히 여기는 작가는 단 한 명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 린 울만 역시 아무렇게나 제목을 Unquiet 로 짓지는 않았을 것인데 솔직히 나는 이 소설이 불안에 대한 소설인지 그게 아니라고 해도 불안을 잘 드러내 보여주고 있는지에 대해선 동의하기 어렵다. 물론 제목 따로 내용 따로인 소설들도 많다는 것을 잘 안다. 책 보관함 영상에서 제목 때문에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고 했듯이 만약 제목이 <<불안>>이 아니었다면 나는 이 책을 눈여겨 보지도 읽지도 않았을게 분명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렇게 제목에 대해 투덜댈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으론 바로 그 제목 때문에 낯선 작가의 소설을 만났기도 했으니 잘 지은 제목인건가?(이 뭔 뜬금없는 소린지)

 

늙어가는 건 일이다. 늙어가는 육신이 뇌를 고분고분 따르도록 설득하고, 결과적으로 뇌가 그 자신에게 고분고분 따르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363p

 

총평

 

자전소설의 한계라느니 제목이 마음에 안든다고 떠들었지만 그런 점들은 괜한 트집일 수도 있을만큼 독서욕구를 끝까지 이끌고 가주었다. 독특한 소재는 아니지만 픽션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독특한 환경에서 나고 자란 자식이 그 부모에 대해 차분하게 써나갔다는 점이 장점이자 매력으로 읽혔다. 지독하게 깐깐하고 고집스럽던 아버지가 치매증상을 보이고 사망하기 까지 그 옆에서 지켜보는 자식의 심정을 잘 그려냈다. 그런 점에 끌리는 독자라면 충분히 읽어볼만한 작품이란 것이다. 그리고 허구의 인물이 아닌 실존 인물로써의 두 유명 인사의 개인사나 가족사에 관심이 있는 독자라면 더욱 추천할 만하다 하겠다.

 

 

오자 몇 개

 

227~228p 묵는다 묶는다 혼용

268p 밑에서 첫 줄 딱 한 번 나는 프렌치 양'' ->

301p 위에서 첫 줄 전에 한 번 들''라고 -> 들르라고

411p 밑에서 첫 줄 엄마는 내가 파리'' 가기를 원치 -> 파리''

441p 밑에서 셋째줄 돌아''기를 -> 돌아''기를

490p 위에서 10행 스위치를 킨다 -> 켠다

14행 스위치를 켠다 -> O

15행 스위치를 키면 -> 켜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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