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자살 사건 철학이 있는 우화
최승호 지음 / 달아실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눈사람 자살 사건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에 누워 있었다.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그는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자살의 이유가 될 수는 없었으며

죽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에 혼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최승호 시인의 우화집 <<눈사람 자살 사건>>이 출간 되었다.

신간은 아니고 1997년에 출간되어 지금은 절판된 <<황금털 사자>>의 개정판인 셈이다.

이 우화집에는 74편의 글과 43점의 명화들이 함께 실려 있어 볼거리가 풍부하기도 하다.

이번 개정판 시인의 말에서 읽을 수 있는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에 대한

독자들의 소감이 그냥 하는 말로 들리지 않는건 나 뿐만은 아닐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시인의 말을 읽어 본다.


책머리에


오랫동안 절판되었던 책 황금털 사자(해냄, 1997)를 다시 내게 되었다. 책 제목을 눈사람 자살 사건으로 새로 정하고, 작품도 부분적으로 수정하였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표제작 눈사람 자살 사건은 우울하고 슬픈 작품이다. 그럼에도 어떤 독자는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시를 읽은 느낌이라 했고, 어떤 독자는 눈사람 자살 사건을 읽고 다시는 자살하지 않기로 했다는 긴 편지를 보내오기도 했다.


_부분


시인의 말처럼 <눈사람 자살 사건>이라는 작품은 우울하고 슬픈

이야기로 읽을 수 있다.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간

내가 읽고 느껴온 최승호 시인의 작품들과 이 우화집의 작품들의 결은

흡사하다고 할 수 있다. 우화라고는 하지만 시라고 해도 되고 시집이라

불러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다.

단순하게 우울과 슬픔에서 그쳤다면 우화라고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야기의 표면이 슬쩍 감추고 있거나 세태에 대한 단순해 보이는

조롱 속에 감추어진 의미를 읽어낼 때 이 우화집은 빛을 발할 것이다.



<눈사람 자살 사건>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면, 죽어야할 이유도 살아야할

이유도 없다는데 나는 주목한다. 많은 사람들은 삶은 의미가 있어야 하고

그 의미를 찾아 어디론가 떠나기도 한다. 정말로 인간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일까?

어떤 승려는 삶에는 의미가 없다고 한다. 그냥 사는 것이라고 하는 말에

나는 동의하는 편이다.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할 때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냥 좋아하고 그냥 사랑하는 게 나는 맞다고 본다. 어떤 이유가

붙게 되었을 때 그 이유가 사라지면 그 사랑은 어떻게 되는가?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라는 문장은

너무나 가슴 시리게 다가오는 문장이다. 녹아 사라진다는 눈사람의 죽음처럼

우리 인간 역시 각자 언젠가 죽게 마련이란 점은 눈사람과 동일하지만 어떻게

살고 죽을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내가 눈사람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생각해 봤다. 눈사람처럼 춥게 살아 왔으니

따뜻한 죽음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그래도 조금이라도 더 천천히 죽음을

유예 시키는 선택을 할 것인지.

그 어느 선택도 만족한 선택은 아닐 것 같다가도 그 어떤 선택을 한다는 게

무슨 소용이 있나 싶기도 하다.


삶에는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한다면 끝내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때

해야할 일은 무엇인가? 찾지 못한다는 건 실패한 것일까? 의미를 부여한다는 건

그만큼 삶이 좁아지는 일이다.

길지 않은 한 편의 우화 또는 시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가 두툼한 소설 한 권

보다 더 묵직한 느낌을 안겨준다. 시인들의 글에서 자주 느껴지는 지점이다.



이 우화집에 실려 있는 다른 작품도 소개해 본다.



고슴도치 두 마리


고슴도치 두 마리가 가시를 상대방의 몸에 찌른 채 피투성이가 되어 함께 죽어 있었다. 그들은 서로 너무 사랑했던 모양이다.


도둑


황소를 훔친 도둑이 경찰서에 끌려와 말했다.

저는 고삐를 하나 훔쳤을 뿐입니다. 고삐를 들고 오니까 소가 따라오더군요. 소까지 훔칠 생각은 없었는데 말입니다.”

경찰서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우리도 자네 손을 잡아왔을 뿐이네. 손만 오지 자네는 왜 따라왔나. 우리는 자네를 형무소에 넣지 않겠네. 자네 손만 집어넣을 걸세.”


나는 이 우화집을 읽고 다른 독자들은 어떻게 읽었나 싶어 몇몇 리뷰들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 가운데 어떤 이는 이 우화집을 다소 불편하게 읽었다고 했다.

안도현 시인은 우리나라에 우화가 드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 하기도 했다.


일차적으로 현실 비판을 토대로 하는 우화가 설 땅을

우리 사회가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비판을 싫어하는 위정자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도 은연중에

진실이라고 믿고 있던 허상이 우화라는 틀을 통해 들춰지고

까발려지는 것을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우리

문학사가 보유하고 있던 넉넉한 풍자와 해학의 정신은

텔레비전 속 천박한 코미디물의 웃음거리로 전락하게

된 것은 아닐까.


_안도현



우화가 이야기하는 표면적인 이야기나 대상에만 치중하면

우화는 이게 뭔 말인가 싶고 조롱조의 이야기가 불편하게 읽힐 수도 있다.

흔히 하는 말로 달을 바라보라는데 달은 보지 않고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는 경우와 같다고 할 것이다.


면도날로 가슴을 긋는 듯한 서늘한 이야기

온 가슴이 더 이상 물을 머금을 수 없는 스펀지가 된 듯한 이야기

그러다가도 피식 옆구리를 찌르는 이야기

이토록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는 책을 요근래에 만난적이 있었던가 싶다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나지만

직접 두 눈으로 읽어볼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 놓으며 다음 우화들을 소개하며 마친다



열등감


황소개구리에 놀란 도롱뇽들이 바위 그늘에 모여서 깨알만 한 심장을 할딱이며 말했다.


우리 조상님은 공룡이다.”



물 위에 쓰는 우화


글을 쓰고 싶을 땐 강가로 나가 흐르는 물 위에 손가락

으로 글을 쓰던 다올 씨가 있었다. 그는 강가에서 혼자

슬퍼하기도 하고 웃기도 하였으나 우화집 한 권 내지 않

았기 때문에 함께 웃은 독자도 없고 함께 눈물 흘린 독

자도 없는 영원한 무명작가였다.


다올 씨가 죽고 나서 세상에 그의 기이한 행동이 조금씩

알려지면서 소문에 헛소문이 덧보태져 나중에는 많은 사

람들이 다올 씨가 살던 마을을 찾게 되었다. 그가 손가락

으로 글을 썼던 개야강은 관광지가 되었으며 작가의 집

은 명소가 되었다. 주위에는 작은 호텔들과 음식점들이

들어섰고 기념품 가게들도 생겨났다.


관광 안내원들도 나타났다. 그들은 어찌된 일인지 앵무

새들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 개야강이 바로 다올 씨의 책입니다. 물의 책, 혹은 물

의 우화집이라고 해도 좋겠지요. 글씨가 보이지는 않지

만 이 흐르는 물에 숱한 우화들이 녹아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다올 씨가 강으로 내려오면 낚시

가 전혀 안 됐다고 합니다. 슬픈 우화를 쓸 때면 물고기

들이 슬퍼하여 먹을 생각을 하지 않았고 우스운 우화를

쓸 때는 물고기들이 입을 벌리며 물 위로 튀어 올랐다는

군요. 물고기들만이 그의 독자인 셈이었죠. 아름답지 않

습니까. 전해 오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