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리눅스 수업이 든 날인데.. 수업은 안하고 교수님의 당부(?)말씀 정도가 있었다. 그리고는 나는 없었지만 다음시간에 교양 수업이 있던 사람들이 휴강이란 것을 아시고 계획하셨던 술자리를 갖자고 하셨다. 그리하여 교수님이 약속까지 깨시는 것을 보고 술을 같이 마시지 않을 수는 없었기에(애초에 술자리 계획도 있었고) 하야, 우리반 애들과 같이 수업듣는 다른 학과 사람 두명, 그리고 1학년때 같은 반애들이 모여서(그래봐야 20명도 채 안된다.) 고기집에 갔다.

삼겹살에 소주를 하는데 오늘처럼 내가 술을 많이 마신적도 없다. 소주만 한 여서,일곱잔은 마신듯하다. 내 평생 소주를 이렇게 많이 마신적은 없는데 내일이 걱정이다. 일찍 출근해서 미완결 업무도 해야하는데..

알딸딸한게 기분이 좋은게 이상하다...ㅎㅎㅎ 암튼 대학에 들어와서 교수님과는 처음같는 술자리라서 기분이 새롭다. 애들과 더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그전까지는 맨날 도망다녔다.) 그래서 왠지 기분이 많이 많이 좋다. 다음부터는 되도록(몸이 좋지 않은 날 제외하곤) 술자리가 있다면 끼는 것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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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에 교양과목중 한국전통문화의 이해라는 수업에 학교박물관에 가보고 레포트를 써내라라는 과제가 있어서 입학하고 처음으로 학교 박물관에 들어가 보았다. 박물관하면 생각나는 것은 도자기, 다양한 유물들 그리고 긴 복도.. 정도인데, 솔직히 말해서 학교 박물관을 보고 실망했다.

작아도 너무나 작아서(진짜 웬만한 강의실의 반의 반도 안돼는 크기였다.) 아무것도 없는 듯이 느껴질 정도였다. 전시되어 있는 유물들은 전부 책.. 물론, 책 좋아하는 내가 할말은 아니지만 옛 글로 적혀 알수도 없는 책들을 무슨 재미로 보겠는가..! 그래도 레포트를 써야한다는 일념으로 아무 상관관계도 없는(이친구는 전통문화수업을 안듣는다.) 친구를 끌고 그 작은델 두번 돌았다. 두번도는데 거짓말하나 안하고 15분도 안걸렸다. 그것도 안내문 다 읽으면서도.

크고 화려한 박물관을 상상한 것은 아니다. 학교, 그것도 전문대학의 학교 박물관이 커봐야 얼마나 크겠는가 말이다. 그래도 나는 그런 협소한 박물관을 상상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책들이 보기 좋게 전시되어 있었고 오래 보관될수있도록 처리(?)까지 되어있었지만 솔직히 실망이다. 이것도 속좁은 내 생각탓일지도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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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정말 술을 잘 못한다. 아니, 취할때까지 마셔보질 않았으니 본인의 주량은 나자신도 알지 못하니.. 술 못한단 말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허나 정말로 간만에 소주 한잔을 걸쳤다.(진짜로 한잔밖에 안마셨다.) 군대에 갔다가 어제자로 휴가나온 학교 동생을 보기 위해 나간자리였다. 아침 10시 반부터 문자가 왔다. 왜 안오냐고.(사실 이녀석이 다음카페에 10시부터 모여서 놀자고 공지(?)를 올리긴 했다.) 빨리 오라고 문자가 왔다. 하지만 난 2시부터 스터디가 있는 몸. 끝나는 대로 가마 하고는 문자 한번, 전화한통 날린뒤 미련없이 신천으로 갔다.

문제는 생각보다 스터디가 늦게 끝난데 있었다. 2시에 시작한 스터디는 5시반쯤 원서책을 끝냈지만 실습해보고자 라우터를 만지작대는 통에 6시반이 넘었고 배가 너무 고픈나머지(사실 토요일부터 제대로 먹은게 없다.) 저녁을 해결하고 가기로 하고. 분식집으로 향했다. 어쩌다보니 분위기가 내가 내는 방향으로 흘러서 2만원가량을 쓰고나니 지갑엔 칠천원밖엔 남은 것이 없었다.

애니웨이, 이얘긴 할 필요가 없었고 신촌으로 와서 아이들이 있는곳에 가니 거의 파장 분위기였다. 그 호프집에서만 4시반부터 있었단다. 나와 학교 동생 장모양이 도착한 시간이 8시가 조금 넘어서였고 술먹는 분위기는 이미 넘었었다. 덕분에 운좋게 술을 얼마마시지 않았지만(나에겐 술 마시는 것은 괴로운 행사이다. 술 마시는 분위기가 좋다면 모르지만 말이다.) 간만에 보는 애들이랑 웃고 떠드니 10시가량이 되어 호프집에서 나왔다. 주인공인 안군이 많이 취해서 어쩔수없이(?) 우리는 헤어지기로 했다.

그리고 집에 와서 레포트 하나를 쓰고 지금 이글을 쓰는 중인데 아무리 그래도 역시 조금 피곤하다. 술한잔도 술은 술인가 보다. 난 술마시면 피곤해지는 스타일이다. 어쩌면 내일 이것도 마신것이라고 속이 부대낄지도 모른다. 난 조금마시고도 다음날 고생한 적이 있기에...어쩔지 모르겠다.

내일도 또! 술자리가 있을 예정이다. 멤버는 오늘과 같다. 안군의 휴가일정이 4박5일뿐인게 다행스럽지 아니할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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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위한 ‘선생님 장학회’ 만세

부산 신선중, 12년째 모든 교사가 참여
석포여중·금성중도 교사 장학금 만들어


[조선일보 김용우 기자]
스승의 날을 이틀 앞둔 13일 부산 영도구 신선중학교 교장실에 카네이션을 손에 든 3학년 학생 5명이 찾아왔다. 학생회장 박동범군과 부회장 김혜원양 등 모두 학생회 간부들이다. 스승의 날이면 교실에서 담임 교사에게 카네이션을 선물하는 여느 보은 행사와 달리 이들이 교장실 문을 연 까닭이 있다.

어느새 12년째, 가난한 가정이 많은 이 동네에서 교사들은 끼니를 거르거나 과거 ‘육성회비(현 학교운영지원비)’조차 낼 수 없던 딱한 제자들에게 따뜻한 정을 나눠왔다. 그간 이 학교에 전근 온 교사들 중에 제자를 위해 호주머니를 털지 않은 이는 없다. 이 학교에 있는 모든 교사가 ‘해송장학회’ 회원이기 때문이다.

지난 93년 이 학교에 근무하던 몇몇 교사들이 육성회비를 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돕기 위해 만든 모임이 이 장학회의 시작이다. 현재 이곳 교사들 중 가장 오랜 4년을 이곳에서 근무하고 있는 김부기 교장도 “워낙 조용히 시작된 교사들의 선행이라 누가 모임을 주도했는지 어떤 교사들이 참여했는지 딱히 아는 이들이 없다”며 “회비를 못내 졸업하지 못하는 제자들이 안쓰러워 교사들이 호주머니 돈을 턴 것이 장학회의 시초”라고 기억할 뿐이었다.

교장실을 찾은 학생 대표들은 “저희 친구들을 도와주신 선생님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라며 저마다 쥐고 있던 카네이션을 교장선생님과 옆에 있던 교사들의 가슴에 달아주자, 교사들은 “고마워, 좋은 사람 되라”며 머리를 쓰다듬었다.

해송장학회는 결성 연도에 6명의 학생에게 모두 60만원을 지급한 것을 시작으로 매년 금액이 늘어 올해는 330만원이 거둬져 제자들에게 전해질 예정이다. 작고도 큰 액수인 이 돈은 주로 급식비와 학교운영지원비를 내지 못하는 제자 50여명을 위해 쓰여진다. 현재 재직중인 교사 36명 모두 1구좌당 1000원씩 작게는 5000원(5구좌)부터 3만원(30구좌)까지 매월 월급에서 떼고 있다. 20구좌를 내고 있는 진명순 교감(여)은 “얼마만큼 구좌를 낼까 고민하는 교사만 있지, ‘왜 내냐’고 반문하는 교사는 아직 없다”고 웃으며 말했다.

어려운 처지의 제자들을 돕는 교사들의 사연들이 스승의 날을 앞두고 훈훈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상당수 학교에서 교사들이 학부모들과 연계하거나 스스로 보이지않게 불우학생들을 돕고 있다. 부산 남구 용당동 석포여중 교사 30여명은 관내 사회보호시설에서 생활하는 본교 재학생들을 위해 매달 3000~5000원씩 모아 보육원을 통해 용돈을 주고 있다. 또 지난 94년 당시 3학년 담임교사로 근무했던 교사 10명은 ‘돌개 장학회’를 만들어 지금까지 해마다 석포여중생들 가운데 불우학생 1~2명을 선정해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동구 좌천동 금성중학교에선 IMF사태가 터진 지난 98년부터 ‘교사 장학위원회’를 구성, 가정형편이 어려우면서도 모범적인 학생들을 돕고 있다. 교사들은 매월 식대 중에서 1만원 가량을 거둬 매년 20여명을 도와오고 있다.

연제구 연산동 연산중학교 교사들도 3년 전부터 모금을 시작해 가정 형편 탓으로 끼니를 거르는 제자들의 급식비를 대주며 ‘결식 제자 없애기 운동’을 벌이고 있고, 남구 우암동 성지중학교도 지난 97년부터 ‘작은 사랑 나눔회’를 만들어 결식 학생들의 점심 문제를 해결하거나 방학 중 생활비 일부를 지원하고 있다.

(김용우기자 yw-kim@chosun.com )                                                       -조선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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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당시엔 국민학교에 다닐 때였다. 내 기억으로 아마 4학년, 혹은 5학년 때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나는 책읽는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얌전한 아이였는데.

전국국민학교글짓기 대회였던것 같다. 거기에 내보낼 아이들을 찾기위해서 학교자체에서 전교생을 대상으로 글짓기대회를 했었다. 논설문, 수필 뭐 그런 것들을 받았던 것 같은데. 나는 그때 기억으로 환경에 대한 글짓기를 했었다. 내가 알고있는 것에 대한. 물론, 담임선생님께서 조금 틀린 부분이나 문법정도는 고쳐줬던 걸로 기억한다. 그리고 나는 우수상을 받게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상장을 받는 날이었는데(그때 당시 전교생을 모아놓고 조회시간에 상장을 주곤했었다.) 분명히 우수상 전모모해야 하는데 이상하다. 우리반의 다른 아이 이름이 나왔다. 선생님은 나보고 나가라고 하셨다. 이상하다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담임선생님은 나에게 실수로 그렇게 된것이니 이름을 바꿔주겠다 하셨다. 어리고 순진했던 나는 그냥 네. 대답하고는 무심히 넘겼었다.

집으로 가서는 엄마에게 이야길 하는데 엄마가 이 멍청아, 하면서 소리소리 지르시는 거다. 생활기록부에는 분명히 그 상을 받은게 그 아이가 될거라는 식으로 그러면서 그 선생이 나쁜 놈이네 하면서 멍청하다고 나를 구박하는 것이다. 그렇게 혼나면서도 나는 선생님이 그럴리가 없다라고 믿으면서 아닐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날부터인가 선생님이라는 존재가 더이상 완벽하다거나 깨끗하기만 한 존재가 아니란 것을 아게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나는 글을 쓰지 않게 되었다. 학교에서도 여러번 글짓기대회라든지 독후감내기 등이 있어도 나는 참가하지도 않았고, 차라리 못그리는 그림이나 대충 그려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린 내가 무척이나 바보같기도 하고 글쓰기를 멈춘것이 후회되기도 한다.(그 이후로 나는 일기조차도 쓰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이렇게 말도 안돼고 뒤죽박죽 섞이기도 한 글들을 줄기차게 일기쓰듯이 써내려 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얼굴도 이름도(나는 사람 기억하는 재주가 없다) 기억나지 않는 선생님과 그때 그 상을 대신 받은 아이. 순전히 어른들의 이기심이라고만 생각하고 그때당시 같은반이었던 그아이는 몰랐을 것이라 믿고. 당시 나의 담임이셨던 그분에게 묻고 싶을 따름이다. 왜 그러셨는냐고. 진실이, 사실이 영원히 묻히는 일은 거의 없는 법을 선생님은 모르셨는냐고. 그 이후에 어린 내가 받았을 상처와 불신을 당신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셨냐고. 정말 정말 그런것이셨냐고. 아직도 선생님의 실수로만 믿고 싶지만 비슷한 이름도 연결된 번호도 아니었던 그아이와 나를 정말로 착각할 수도 있는 것이냐고.

스승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이제 나에게 기억나는 담임선생님이란 중1때의 담임과 중3때의 담임과 고등학교때의 선생님들뿐이다. 그래도 존경의 마음까지 생겨나지 않는 것은 나의 탓일까, 아니면 선생님들의 탓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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