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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하로부터의 수기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3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연경 옮김 / 민음사 / 2010년 2월
평점 :
- 치졸함에 대하여
두근거린다. 수화기를 들었다가 내렸다가는 반복한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선생님이 뭐라고 답하실까. 욕은 하시지 않을까. 이미 멘트는 만들었지만 다시 한 번 더 읽는다. 그래도 불안하다. 지금 오전 10시이니 10시 반에 걸자. 아니다. 옆의 차장님이 일어나서 딴 곳으로 가면 걸자. 안받으면 어떡해야하지. 오만가지 생각이 다 든다. 미루다 미루다 결국 건다. 선생님이 받는다. 내가 보낸 메일을 잘 받았으며, 확인 후에 회신을 주겠다고 하신다. 30초 내외의 짧은 통화. 문제 없이 통화를 끝냈다는 안도감, 그 이후로 붙는 자신감, 행복감. 대회 참여를 권유하기 위해 메일을 보내고 확인 전화를 걸기 전의 나의 치졸한 모습이다. 그냥 딱 걸어서 딱 말하고, 딱 끊으면 되는데, 왜 그렇게 소심하게 행동했는지 모르겠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은 알지 못하는 나만의 치졸함.
이 책에서는 그 치졸함이 밑도 끝도 없이 이어진다. 어느 술집에서 자신을 물건 옮기듯이, 사람이란 것도 인지 못했다는 듯이 치워버린 장교에 대한 분노를 가진 주인공은 복수를 결심하지만,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분노는 매일같이 하며 그 장교가 자주 다니는 파티나 길목을 외우고, 복수 방법도 수만가지를 생각하지만 결국 치졸한 생각으로 끝내고 만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고 자신이 생각한 복수 방법인 길가에서 어깨를 툭 치는 방법이 의도하지 않게 갑자기 이루어지면서 주인공은 행복해한다. 남들이 보기엔 정말로, 정말로 아무것도 아닌 일이지만 주인공은 몇 년을 부글부글했을 일이었기에 기쁨을 느꼈다. 그 이후에도 사창가 여인에게 막말을 한 이후로 자신의 집으로 찾아오지 않을까 집에서 전전긍긍하는 모습에서 치졸함을 보인다. 사창가에서는 여인에게 모욕을 줄 정도로 막말을 했지만 결국 집으로 돌아와서는 불안에 떠는 모습. 이것이 우리의 진짜 모습이지 않을까 싶다.
당당하고 자신감 넘치는 사람이 인정받고 대우 받는 사회에서 치졸한 모습은 냉대 받는다. 어떠한 상황에 있어서도 우리는 호탕해야 하고, 배려가 넘쳐야 하고 선량해야 한다. 이런 사람들만 존재한다면 세상은 참으로 안정적이고 사건, 사고 하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인간이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호탕함이 있으면 소심함도 있고, 치졸함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드러내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솔직한 감정을, 특히 나쁜 감정을 점점 드러낼 수가 없는 환경이 되고 있다. SNS에서 글을 올리면 삽시간에 퍼져버리고, 친구들에게도 말해도 정보가 너무 빨리 퍼져나가면서 왜곡되어 더 큰 부메랑이 되어 돌아올 수가 있다. 이렇게 나쁜 감정들을 배출하지 못하고 좋게 좋게 하려다 보니 나중에 폭발하고 사건, 사고가 일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우리는 주인공 ‘지하인간’을 배워야 한다. 자신의 치졸한 모습, 퇴폐적인 모습, 타인에 대한 이유 없는 분노를 가감없이 드러낸다. 분노, 불만을 표현하는 것도 인간의 모습 중 하나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치졸한 것도 우리의 일부요, 우리를 더 인간답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나.
- 이성에 대하여
이성(흔히 본성과 대비되는)이라는 것은 대체 무엇일까. 막연하게 이성은 인간으로써 지켜야 하는 것 .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하인간’은 대관절 이성이라는 것이 인간에게 무슨 이익이 있냐고 분노한다. 1부의 횡설수설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몇 문장이었지만 이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이성이란 정말 인간에게 필요한 것인지, 인간에게 이성이란 것이 있기 전에는 우리는 어떻게 생활을 했었을 것인지, 이성이라는 것은 언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것인지, 그동안 생각해보지 않았던 질문들이 떠올랐다. 인간은 원숭이로부터 진화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원숭이는 이성이 아닌 본능에 따라서만 행동한다고 생각을 한다. 그렇다면 인간으로 진화하면서 이성이라는 것이 생겨났다는 말인데, 원시인 시절에도 단지 구체화 되지 않았을 뿐, 이성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는 말이다. 물론 이성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먼저 말해야 하는 것이 순서이지만 사실 이성이 정확히 무엇인지도 모르겠다. 인간이기에 지켜야 하는 규칙인 것인지, 지금 이걸 쓰면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 이성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이성은 대체 무엇인가라는 그동안 생각하지 않았던 질문을 생각한 것만으로도 일단은 만족하기로 한다.
- 책 표지에 대하여
책 표지에 대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이 책은 표지가 나름 괜찮다고 생각한다. 작가인 도스토예프스키인지 주인공인지 모르는 한 남자가 정면을 주시한다. 눈동자가 내가 보는 방향에 따라 움직이는 것만 같아서 책을 읽고서 딱 덮는 순간, 눈을 마주치면서 순간적으로 저 그림이 계속해서 말을 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잘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