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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 알타이 걸어본다 6
배수아 지음 / 난다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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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 여행은 한 자락으로 기억될 때가 있다. 친구와의 남원 여행이 그랬다. 남들처럼 코스를 밟아 여행했던 전주를 뒤로하고, 남원으로 넘어온 우리는 남원에서의 하루를 종일 자전거를 타며 보냈다. 게스트 하우스에서 빌린 자전거를 끌고, 오르막길을 한참 오른 끝에 방문했던 남원랜드. 영업시간은 지나 있었고, 아쉬운 마음에 남원랜드와 서로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우리는 10분 넘게 올라간 그 길을 1분 만에 내려왔다. 여행의 한 자락은 그 1분 사이에 찾아왔다. 넓게 펼쳐진 남원의 풍경 위로 저물어가는 노을이 내 눈에 가득 들어차는데, 우리는 이 노을을 보려고 여길 이렇게 올라왔나보다 했다. 그 풍경은 그렇게 지난 여행의 전부가 되었다.

 

이렇듯 한 자락은 어떤 풍경이 되는가 하면, 한 사람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알타이를 여행한 배수아에게는 한스가 있었다.

 

나는 한스가 그렇게 걸어 식탁에 와서 앉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는 아침마다 반드시 홍차를 마셨으나 그날은 식탁 어디에도 홍차 봉지가 없었다. "한스, 이제는 차가 하나도 없어" 하고 누군가가 말해주자 한스는 아무런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에서 몇 미터 떨어지지 않은 평원으로 걸어가서 허리를 굽히고는 그가 조각을 위해서 돌을 고를 때와 마찬가지로 아주 신중한 태도로 몇 송이의 노란 들꽃을 꺾었다. 그리고 그 꽃송이를 식탁으로 가져와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띄우는 것이었다. 그것이 그의 차였다.

세상과 반쯤 격리된 듯한 한스의 몸짓과 태도에는 내 마음을 건드리는 무엇인가가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시처럼 느껴졌다. 나는 아직도 그날 아침 그의 말없는, 변함없이 주변과 무관하던 표정과 몸짓을 잊을 수가 없다. (p.186)

 

이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그녀가 도저히 저항하지 못할 운명의 힘에 이끌려 몽골로 떠나 약 한 달 간 머물렀다는 서북부 국경 지대인 알타이를 떠올렸다. 사진으로 접한 알타이의 풍경보다, 뜨거운 물이 담긴 그릇에 노란 들꽃을 띄워 그의 차를 마시는 한스가 눈에 선했다. 내가 그곳 알타이에 있었고, 그날 차를 마시는 한스를 보았어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었을까 싶었다.

 

유르테에 불을 피울 야크똥을 모으고, 3주 내내 양고기를 주식으로 먹고 소화불량에 시달리고, 많은 경우 자신의 감정과 언어 안에서 오직 혼자였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플 때조차도 가장 많은 미소를 지으면서 유목민으로 거듭난 그녀. 책의 시작부터 그녀의 책이었으나, 저 구절을 읽으면서 이 책은 온전한 그녀의 책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여기서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늘이 도대체 며칠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사실상 알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또다른 사실도 깨달았다. 이곳에서 나는 내가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음을, 그건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p.138)

 

검은 머리를 길게 기르고 치렁치렁한 양털 스커트를 입고, 손에는 양치기 막대를 들고 걸어다녔을 처음 보는 유목민 여인’. 그녀가 아니었으면, 알타이와 울란바토르 그 어디쯤의 풍경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 노란 들꽃을 뜨거운 물에 띄워 마시던 한스가 하나의 시였다면, 유목민으로 산 한 달간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거의 절반쯤은 정말로 잊어버리고 있었으나 예상치 못하게 아주 행복한 기분이었다 말하는 그녀의 이야기는 내게 하나의 소설이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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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야구의 디테일
배우근 지음 / 넥서스BOOKS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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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회말 2아웃 만루상황. 원정팀이 1점 앞선 가운데, 홈팀의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타석에 들어선 그는 우선 장갑을 단단하게 조이고 헬멧을 이마의 끝선에 맞춰 고쳐 쓴다. 그리고 스파이크에 흙이 엉겨 붙어 있으면 두세 번 점프해서 털어낸다. 이어 방망이를 연필 삼아 홈 플레이트에 쭉 선을 그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왼손으로 허벅지를 한 번 툭 쳐야 타격 준비가 끝난다. 그 중에서도 헬멧 속 냄새를 맡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유가 있는 상황, 모두가 숨죽이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가리지 않고 매 타석 자신만의 독특한 준비동작을 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때, 이 준비동작을 루틴혹은 쿠세라고 부른다. 자신이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이 루틴은 선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력을 높이는 수단이다. (p.239)

 

 

앞서 소개한 루틴의 주인공은,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삼성라이온즈 우익수 박한이다. 다른 선수에 비해 유난히 준비 동작이 많고 길어 버퍼링 박’, ‘킁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올해로 8년차 삼성팬인 나뿐만 아니라 타 구단 팬들 역시 박한이 선수의 루틴을 따라 해낼 정도로 루틴은 그에게 트레이드마크다. 나 역시 종종 따라 해보곤 하는데, 성실하고 꾸준한 그의 기록 속에 한 경기, 한 타석, 한 구 한 구 차곡차곡 쌓였을 루틴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사소해 보이지만, 루틴이 없는 선수가 없을 정도로 야구에서 루틴은 중요하다. 아니, 야구에서 중요한 게 어디 루틴뿐이랴. 투수는 왜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지, 홈런을 칠 때 손맛을 느끼는 게 정말인지, 포수는 왜 매니큐어를 바르는지, 야구는 왜 9회까지 하는지 등등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야구의 디테일이 담긴 책이 있다. 이름하야 야구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바로 그 책이다.

 

야구를 챙겨보기 시작하던 8년 전, 주위에 야구팬이 없었던지라 이 용어, 저 용어를 찾아가며 경기를 챙겨봤던 기억이 난다. 보크와 낫아웃에 대해서는 조금 낯설었던 그때. 그래도 야구가 꿀잼이라는 건 제대로 알았고, 그렇게 매년 챙겨보다 보니 어느새 8년이 흘렀다. 이쯤 되면 야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던 내 생각은 이 책을 만나면서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8년이나 봤는데도 모르는 게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꼽자면, ‘삼진 후 내야 라운딩 세리머니.

 

투수가 타자를 삼진 잡으면 포수는 미트에 있던(타자가 삼진을 당한) 공을 꺼내 1루나 3루수에게 던진다. 그렇게 내야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그 공이 투수에게 향한다. (p.271)

 

경기를 8년이나 봤으면서도 그게 세리머니인 줄 몰랐던 것이다. 이럴 수가. 허탈한 마음에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계속 읽어 내려가는데, 이 세리머니에 대한 감독들의 답변이 재미있다. 유격수 출신 류중일 감독은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 삼진 잡고 나서 포수가 투수에게 바로 던지면 서먹하지 않을까. 바로 던지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어릴 때부터 하다 보니 습관이 배어 있는 것 같다라고 했다고 답한다. 다음으로 투수 출신 감독인 양상문 감독의 답변이 이어진다. “의식하지 못했다. 진짜 그러느냐?”라며 눈을 크게 떴다는 그의 답변을 읽는데 안심했다. , 나만 모르는 건 아니었구나 하고.

그리고 양감독은 앞에 있던 포수 최경철을 불러 세워 삼진을 잡으면 정말 내야에서 수비수끼리 공 돌리기를 하는지, 1루나 3루에 던지는지 물었고 최경철 포수는 그렇게 하라고 지시 받은 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왔다. 프로에 와서도 경기 진행을 빨리 해야 할 때 말고는 1루나 3루수에게 던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삼진 후 내야 라운딩 세레머니는 여기서 끝인 줄 알았는데, 얼마 후에 다시 만난 류감독이 삼진 후 내야 라운딩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통은 늘 명쾌한 답을 내놓기도 한다라는 괄호 속 문장과 함께.

해답은 둘째치고, 질문을 듣고 저자를 다시 만나기까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했을 감독님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답은 없지만, 정답에 가까운 해답은 이 책의 274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매력은, 그라운드 위 혹은 덕아웃 한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는듯한 현장감 있는 인터뷰와 그 선수의 준비동작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묘사에 있다. (특히 류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을 때마다 류감독님의 음성이 지원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정감 가는 일러스트와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진들이 이 책에 매력을 더한다.

 

야구의 꽃 홈런과 짜릿한 끝내기 안타에 가려 빛을 바랬을지라도 발로 뛰어 만드는 호수비와 도루가 쌓이고 쌓여 결국 승리로 이끌 듯이, 깨알 같을지라도 이런 디테일들이 큼직한 볼거리 사이에서 재미를 선사한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랜 야구팬에게도, 이제 막 야구를 보기 시작한 팬에게도 좋은 책이다. 야구가 진정 좋아서 쓴, 야구만큼 재미있는 진짜 야구 이야기가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속 구절처럼, 이 책은 힘껏 방망이를 휘두른 상태다. 타구의 방향은 미정이었으나, 내 품안에 날아든 이 한 권의 책만큼은 스위트스폿을 정확하게 맞았다.





* 인상 깊었던 구절들


오죽하면 아이슈타인이 "내게 야구를 가르쳐주면 당신에게 상대성이론을 가르쳐주겠소. 아니 그러지 맙시다. 당신이 상대성 이론을 깨우치는 게 내가 야구를 깨우치는 것보다 빠를 겁니다"라고 말하며 불확실하고도 오묘한 야구의 세계를 거론했다고 하지 않은가. (p.5)

 

사실 최고 수준에 다다른 타자는 이미 투수를 이기고 들어간다. 타고난 기량에 경험과 수 싸움이 더해지며 마운드 위의 투수를 압도한다. 여기에 이승엽처럼 안주하지 않는 자세까지 더해지면 최고 타자로 롱런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엽을 비롯해 정상에 오른 선수들이 전하는 마부작침(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의 성공 방정식은 어찌 보면 식상하고 지루한 스트레오타입이다. 이를 예상한 듯 이승엽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p.27)

 

슬럼프는 인생의 동반자인 외로움처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건 슬럼프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그 슬럼프에서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p.46)

 

야구는 집(홈 베이스)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쉽지 않다. 홈런을 쳐서 한걸음에 돌아오는 방법이 있지만, 대부분 많은 난관을 통과해야만 마지막 홈 베이스를 밟을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오늘도 많은 선수가 베이스 앞에서 몸이 부서져라 스스로를 던지고 있다. (p.130)

 

빠름과 느림은 동전의 양면처럼 균형을 이뤄야 한다. 속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느린 커브와 함께 던져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빨리 돌아가고 있지만, 장대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면 느리게 살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인생이든 야구든 '빨리빨리''천천히'가 균형을 맞춰야 한다. (p.1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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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책을 읽겠다고 도서관을 멀리한지 이주일째. 내 책이란 건, 사두고 안읽는 책을 말한 거였는데...

왜 나는 책을 사들이고 있는가...(-_-).

도서전가면 구매하려고 벼렀던 책들인데, 도서전 관람 이후 동선상 가방의 무게를 고려하느라 구매하지 못했다.

그렇게 돌아와서는 책을 살때까지 눈에 어른거려서 결국 사고야 말았다...는 얘기.

책을 살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책을 사야되는 이유가 도통 마르지 않는다.

이 책은 이래서 사야되고, 또 저 책은 저래서 사야되고...😃 뭐 결국은 책이 좋아서지만.

이번 구매의 핵심은 역시, 꿈꾸는 책들의 미로다. 이건 정말... 내 인생의 연작소설이다.

 하... 신작이 막 출간됐을때는 책을 살 타이밍이 아니어서 못샀는데,

지금 이 책과 함께 소설 2종을 구입하면 꿈꾸는 책들의 미로 아코디언북을 준다기에 닥치고 구매🙊.

최근 받은 굿즈 중에 단연 탑이다.

그리고 이번에 나온 김연수 복간 3종세트 중에 스무살과 사랑이라니, 선영아만 구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은 자음과모음판으로 있어서 두 권만.

글쓰기의 최전선은 리뷰를 읽다가 꽂혀서 구매. 서점 숲의 아카리는 모으다보니 뒷권부터 모으는 중.

오늘은 책 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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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 페코로스 시리즈 1
오카노 유이치 지음, 양윤옥 옮김 / 라이팅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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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페코로스 씨에게서 만화의 재미뿐만이 아니라 부모님의 치매를 뒷바라지하는 힘겨운 터널을 뚫고 온 자로서 동지와도 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늙어가는 방식이 있구나, 살아가는 방식이 있구나, 죽어가는 방식이 있구나, 라고요. 그리고 인간에게는 인간만의 뒷바라지 방식이 있구나, 라고요.
(p.198 이토 히로미의 추천사 중에서) 

-(마주보고 앉아있는 엄니와 유이치)
-엄니, 내가 누군지 알겠어?
-기요노리(엄니의 남동생).
-아니야!
-그럼 히데요시(엄니의 아버지).
-아니야! '그럼'은 또 뭐냐고요. 자아, 누구?
-(zZ)
-잠들었네!
-(어느틈에...)
-(zZ)
-(zZ)
-(흠칫)눈부셔... (아들의 대머리에 반사된 빛을 보고는)
-(zZ)
-유이치, 언제 왔다냐? 머리는 싹 벗어져서는. 네가 와줘서 참말로 좋다야.
(쓰담쓰담) 


라는 내용이 담긴, 이어지는 4컷만화로 시작하는 이 책은 낙향한 무명 만화가 오카노 유이치가 쓰고 그린 책 <페코로스,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다.

페코로스는 탁구공만 한 크기의 작은 양파 품종을 가리키는 말인데, 이 책의 저자 오카노 유이치 씨의 필명이자 별명이란다. 그런 페코로스가 어머니 만나러 가는 이야기.
아버지의 유족연금을 바탕으로 어머니를 양호시설에 맡겨둔 자신의 처지에 부모를 돌본다는 말은 너무도 염치없는 소리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송구스러운 마음을 담아 '어머니 만나러 갑니다'라는 제목을 정했다고 한다.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그의 만화를 보고 글을 읽고 있으면, 이토 히로미의 추천사에 공감하게 된다.

이건 엄니를 뒷바라지 하는 페코로스, 오카노 유이치만의 방식이라는 것을.

그리하여 엄니는 페코로스의 4컷만화 속에는 살아 숨쉰다. 아들의 대머리를 보고서야 유이치 하고 부르는 엄니. 보이지 않는 실과 바늘로 꼼지락 꼼지락 아들의 나들이옷을 기워주는 엄니. "내가 치매에 걸려서 네 아버지가 나타난 거라면 치매도 그리 나쁜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하고 말하는 엄니. 간호사의 예쁜 장난으로 난생 처음 매니큐어를 바른 짤막한 손을 수줍게, 자랑스럽게 아버지(엄니 안에서 살아계시는 아부지)에게 내보이는 엄니.

가족의 시간 속에 살아 있다는 말이 참 따뜻했던 책. 엄니의 말을 빌려 마지막 문장을 쓴다. 이 책을 읽게 되어서 참말로 좋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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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하고 날카로운 통찰과 재치 넘치는 글쓰기를 선보여 환영받아온 리베카 솔닛의 신작 산문집이 출간되었다. 전세계에서 공감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신조어 ‘맨스플레인’의 발단이 된 글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를 비롯해 여성의 존재를 침묵시키려는 힘을 고찰한 9편의 산문을 묶었다.

잘난 척하며 가르치기를 일삼는 일부 남성들의 우스꽝스런 일화에서 출발해 다양한 사건들을 통해 성별(남녀), 경제(남북), 인종(흑백), 권력(식민-피식민)으로 양분된 세계의 모습을 단숨에 그려낸다. 그럼으로써 우리가 늘 마주하는 일상의 작은 폭력이 실은 이 양분된 세계의 거대한 구조적 폭력의 씨앗임을 예리하고 생생하게 보여준다.

폭넓은 지식과 힘있는 사유로 버지니아 울프와 수전 손택의 문학, 아나 떼레사 페르난데스의 사진, 프란시스꼬 데 쑤르바란의 그림 등 다채로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 여성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서 여성 대 남성으로 나뉘어 대결하는 세계의 화해와 대화의 희망까지 이야기하는 대담하고도 날카로운 에세이다.

 

 

내셔널 북 어워드(NBA) 수상작가 존 윌리엄스의 장편소설. 2013년 영국 최대의 체인 서점인 '워터스톤'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도서이다. 1965년 미국에서 발표된 후, 오랜 시간 동안 독자들에게 잊힌 <스토너>는 영국,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유럽 출판계와 평론가, 독자들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내며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50년의 시차를 가볍게 뛰어넘어, 작가 존 윌리엄스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 만에 비로소 제대로 된 세상의 평가를 받게 된 것이다.

농부의 아들 윌리엄 스토너는 열아홉 살에 농업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선택했던 길. 그런데, 영문학개론 수업에서 접한 셰익스피어의 일흔세 번째 소네트가 그의 인생을 온통 바꾸어놓는다. 문학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고향에 돌아가는 대신 대학에 남아 영문학도의 길을 택한 스토너.

사랑하는 여인과 결혼해 가정을 이루고, 교수가 되어 교육자로서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 교내의 정치나 출세보다는 학문에 대한 성취에 더 열중하고 가정을 사랑한 그였지만 어찌된 일인지 대학에서도 집에서도 그의 위치는 불안하기만 하다. 가족과 동료들로부터 고립되어 슬프고 쓸쓸한 그의 삶은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실패와 다름없다.

그러나 세계대전과 대공황 속에서도, 개인적인 불행과 사랑의 실패에 시달리면서도, 갑작스러운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마지막까지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한다. 일생을 바친 그의 연구처럼 자신의 일생을 통해 무언가를 증명하려는 듯.

 

 

아들을 위한 위트 있고, 클래식 하며, 젠틀한 매너를 가르치는 한 아버지의 어록을 사진들과 함께 엮은 어드바이스 컬렉션. '옷차림에 확신이 서지 않는 날은, 타이를 메어라.', '셔츠 소매가 보이지 않는 다면 자켓 소매가 길다는 뜻이다' 같은 사르토리알 어드바이스부터 '잘 모르는 스위치는 누르지 마라.', '맛을 보기 전에는 소금을 치지 마라.' 등의 실용적인 충고들을 담고 있다.

 

 

아마존 일본 사회·정치, 경제 분야 베스트셀러 1위 도서. 일본 변방 가쓰야마의 작은 시골빵집 다루마리에서 일어난 소리없는 경제혁명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저자는 자본의 논리에 따라 부정이 판을 치는 세태가 싫어 ‘바깥’ 세상으로 탈출하려고 제빵 기술을 배웠는데, 그 ‘바깥’ 세상이어야 할 빵집 공방마저 경제 시스템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는 사실을 곧 깨닫게 된다.

가혹한 노동과 부조리한 경제구조, 위협받는 먹거리…. 이런 실상을 접하면서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그의 삶의 철학은 더욱 굳건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탄생한 빵집 ‘다루마리’에서 그는 할아버지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람의 생명에 대한 책임감, 서툰 작은 정의감을 실천하게 된다.

저자의 빵집 다루마리는 사람들로부터 ‘희한한 빵집’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오카야마 역에서 전철로 두 시간 넘게 걸리는 산 속의 빵집. 고택에 붙어사는 천연균으로 만든 주종으로 발효시킨 빵을 만들며, 그 빵의 가격은 다소 비싼 편이다. 게다가 일주일에 사흘은 휴무, 매년 한 달은 장기 휴가로 문을 닫는다. 이것은 제대로 된 먹거리에 정당한 가격을 붙여서 그것을 원하는 사람들에게 팔고, 만드는 사람이 숙련된 기술을 가졌다는 이유로 존경받으려면 만드는 사람이 잘 쉴 수 있어야 하고 인간답게 살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게다가 다루마리의 경영 이념은 ‘이윤을 남기지 않기’다. 일반적인 경영과 마케팅 성공 잣대를 무시하고 세상과 타협하지 않은 채 최고의 빵을 만들며, 부패와 순환작용을 통해 지역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해 노력할 뿐이다. 이 시골빵집에 찾아낸 ‘부패하여 순환하는 경제’의 핵심은 발효와 순환, 이윤 남기지 않기, 빵과 사람 키우기, 이 4가지로, 다루마리는 이 모든 것을 지향하며 실천하고 있다.

 

 

 

본의 유명한 드라마와 만화 「고독한 미식가」의 작가로 국내에도 잘 알려진 구스미 마사유키의 음식 방랑기. 35년간 다니던 회사에서 정년퇴직한 60세 평범한 가장이 음식과 벌이는 한판 승부를 보여준다.

직장생활 하던 시절에는 시간에 쫓겨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만끽하면서, 그동안 즐기지 못했던 음식들을 하나하나 찾아다니는 가스미 다케시는 마치 ‘도장 깨기’하는 방랑 무사처럼 음식과 대결을 벌인다. 음식은 단지 재료와 맛이 아니라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식당의 분위기와 그곳에 오는 손님들과 먹는 사람의 상황 등 모든 것이 어우러진 하나의 ‘맥락’임을 실감 나게 보여준다.

 

 

1995년 출간되어 스테디셀러로 꾸준한 사랑을 받았던 동화의 개정판. 꿈과 호기심 많은 소년 샘 그리블리가 달랑 주머니칼과 노끈, 도끼, 부싯돌, 약간의 돈만을 가지고 대대로 선조들이 살아온 캐츠킬 산으로 가출을 감행했다. 뉴베리 상, 안데르센 상 수상작.

자연으로 떠난 샘은 처음엔 불도 지피지 못하고, 물고기도 낚지 못한 채 추위와 배고픔에 떨면 생존의 절박함 속에 지낸다. 하지만 점차 야생에서 살아나가는 법을 터득해 하나씩 하나씩 산속 터전을 만들어 나간다. 굴을 파서 집을 만들고, 야생 매를 길들여 사냥을 하면서 자연과 친구가 되어간다.

광대한 자연, 야무진 소년의 꿈 그리고 모험이 함께하는 가슴 뛰는 이야기이다.

 

 

미국 문학 최고의 안티히어로, 찰스 부코스키의 장편소설. <우체국>은 부코스키가 전업 작가가 되기로 결심하고 쓴 첫 장편으로, 하급 노동자로 이런저런 직업을 전전하다 우연히 취직한 우체국에서 10년간 근무하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작품이다. 이 소설에 처음 등장하는 헨리 치나스키는 작가의 분신과 같은 존재로 이후 발표된 일련의 소설을 이끌어 가는 주인공이 된다.

한편 <여자들>은 세월이 흘러 그가 전업 작가가 된 이후의 삶을 그리고 있다. 노동에서 벗어나 글을 쓰고 시 낭독회를 다니며 자유롭고 방탕한 삶을 즐기는 주인공의 일상이 작품의 주된 내용이다.

남자가 여자에게 품는 솔직한 욕망들을 당혹스러울 정도로 가감 없이 그려 낸 작품이다. 육체적인 욕구와 사랑을 동의어라고 할 수 있을까? 한 여자에게 충실한 것은 과연 축복일까, 재앙일까? 하급 노동자 생활을 이어 가다 마침내 전업 작가로 성공한 헨리. 1년에 3백 일은 술 취한 채 지내며, 경마가 유일한 취미인 그의 낡은 아파트에는 여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곁에 있는 여자를 사랑한다 믿으면서도 또 다른 여자에게 눈을 돌리는 그는 안개처럼 짧은 관계의 본질을 찾는 불가능한 항해를 계속한다. 주인공 헨리 치나스키와 그와 잠자리를 함께한 여성들에 대한 포르노그래피 판타지적 묘사 속에는 아이러니하게도 한 남자의 고뇌와 순정 또한 녹아 있다. 부코스키는 음란함과 비천함, 저열함이라는 날것의 감정을 통해 사랑과 관계의 양상을 보다 냉철한 시선으로 비추어 낸다.

 

 

현대 일본의 지(知)를 대표하는 사상가 우치다 타츠루와 오타쿠 출신의 사회비평가 오카다 도시오가 시장경제의 몰락과 대안, 그리고 새로운 공동체에 대해 나눈 대담을 엮은 책. 무도가(武道家)의 박력을 지닌 우치다와 경쾌한 사회감각을 가진 오카다는 이 책에서 세대론, 교육론, 경제론, 연애론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다양한 사회 이슈를 이야기한다.

결이 다른 두 사람의 대담 분위기는 시종 유쾌하고 자유롭다. 하지만 이들이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자못 심각하다. 대화의 공통 기반이 사라진 사회, 욕망을 거세해버린 젊은이, 존경을 잃어버린 연장자, 교육을 포기한 학교, 성과주의라는 괴물이 만들어놓은 일본 사회의 참담한 모습은 여기 한국과 다를 바 없다.

세계 경제의 흐름이 말해주듯 더 이상의 경제 성장도 없다. 모두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하지만 저자들은 미래를 낙관한다. 국가나 행정 시스템에 기대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그들 스스로 실험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은 자기 구제와 공생의 삶을 위해 ‘증여’하는 삶을 제안한다.

개인에게 적용해보면 이렇다. 무언가 받았으니까 되돌려준다는 생각으로 내가 가진 자원과 능력을 남에게 패스해주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확장해보면 이렇다. 세대간의 고립과 단절, 사회 안전망의 붕괴는,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먹여주고, 헐벗은 사람에게 옷을 입혀주고, 잘 곳 없는 사람에게 잠자리를 마련해주는 약자들의 상호부조 네트워크로 극복하고, 복구해낼 수 있다. 이것이 이 책에서 제안하는 증여경제론의 핵심이다.

 

 

민음의 시 211권. 시와 기하학을 접목한 '시각 시'로 독자적 시 세계를 추구해 온 시인 함기석 시집. 전작 <오렌지 기하학> 이후 3년 만에 나온 이번 시집은 4부로 구성, 15편씩 모두 60편의 시로 이루어졌다.

파격적인 해체와 실험이 등장했던 <오렌지 기하학>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이번 시집에서 익숙하면서도 낯선 느낌을 받을 것이다. 충격과 난해함을 선사한다는 점에서 익숙하지만 '죽음'이라는 풍경이 시집 전체를 관통하며 자아내는 정서적인 느낌은 생소함을 주기 때문이다.

<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는 사물을 지칭하지 않는 탈언어적 언어라는 전위의 바탕 위에서 인간이 지각할 수 있는 가장 명징한 질서, 죽음의 풍경을 그린다. 낯선 언어와 익숙한 풍경 사이에서 독자들은 전에 느껴 보지 못한 초현실을 감각할 수 있다. 시집 해설은 고봉준 평론가가 맡았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이자, 일본 문학계의 거장인 오에 겐자부로가 읽은 ‘내 인생의 책’을 소개한다. 1957년에 등단한 이후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매번 탁월한 작품을 집필해온 저자는 이 책에서 ‘평생에 걸쳐 읽어온 보물 같은 책’들을 회고하며, 오직 책으로 살아온 인생을 강렬하게 담아냈다. 그는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한 구절을 삶의 지표로 설정했던 소년 시절의 이야기, 엘리엇과 오든, 포의 시집을 읽으며 언어에 대한 감각을 훈련했던 기억, <신곡>과 <오디세이아> 같은 고전 및 수많은 문학작품을 통해 생의 고뇌를 승화시켰던 여정들을 이 책에 가득 펼쳐놓는다.

여든의 노작가인 오에 겐자부로의 삶은 평탄치 않았다. 죽마고우였던 오랜 친구의 갑작스러운 자살, 장남 히카리의 장애, 본인 작품에 대한 비판 등을 오롯이 감내해야 했고, 소설 집필도 멈출 수 없었다. 그러나 시련을 포함한 그의 모든 삶의 순간들엔 ‘책’이 있었다. 책은 그가 인생의 문제들로부터 버틸 수 있도록 해주었고 더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것은 저자가 일생동안 그토록 치열하게 읽어왔던 이유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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