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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야구의 디테일
배우근 지음 / 넥서스BOOKS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9회말 2아웃 만루상황. 원정팀이 1점 앞선 가운데, 홈팀의 다음 타자가 타석에 들어선다. 타석에 들어선 그는 우선 장갑을 단단하게 조이고 헬멧을 이마의 끝선에 맞춰 고쳐 쓴다. 그리고 스파이크에 흙이 엉겨 붙어 있으면 두세 번 점프해서 털어낸다. 이어 방망이를 연필 삼아 홈 플레이트에 쭉 선을 그린다. 이게 끝이 아니다. 왼손으로 허벅지를 한 번 툭 쳐야 타격 준비가 끝난다. 그 중에서도 헬멧 속 냄새를 맡는 것처럼 보이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여유가 있는 상황, 모두가 숨죽이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가리지 않고 매 타석 자신만의 독특한 준비동작을 하는 선수들이 있다. 이때, 이 준비동작을 ‘루틴’ 혹은 ‘쿠세’라고 부른다. 자신이 알기도 하고 모르기도 하는 이 루틴은 선수의 마음을 안정시키고 집중력을 높이는 수단이다. (p.239)
앞서 소개한 루틴의 주인공은, ‘꾸준함’의 대명사로 불리는 삼성라이온즈 우익수 박한이다. 다른 선수에 비해 유난히 준비 동작이 많고 길어 ‘버퍼링 박’, ‘킁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올해로 8년차 삼성팬인 나뿐만 아니라 타 구단 팬들 역시 박한이 선수의 루틴을 따라 해낼 정도로 루틴은 그에게 트레이드마크다. 나 역시 종종 따라 해보곤 하는데, 성실하고 꾸준한 그의 기록 속에 한 경기, 한 타석, 한 구 한 구 차곡차곡 쌓였을 루틴을 생각하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듯 사소해 보이지만, 루틴이 없는 선수가 없을 정도로 야구에서 루틴은 중요하다. 아니, 야구에서 중요한 게 어디 루틴뿐이랴. 투수는 왜 선글라스를 쓰지 않는지, 홈런을 칠 때 ‘손맛’을 느끼는 게 정말인지, 포수는 왜 매니큐어를 바르는지, 야구는 왜 9회까지 하는지 등등 꼭 알 필요는 없지만, 알고 보면 더 재미있는 야구의 디테일이 담긴 책이 있다. 이름하야 ‘야구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 바로 그 책이다.
야구를 챙겨보기 시작하던 8년 전, 주위에 야구팬이 없었던지라 이 용어, 저 용어를 찾아가며 경기를 챙겨봤던 기억이 난다. 보크와 낫아웃에 대해서는 조금 낯설었던 그때. 그래도 야구가 꿀잼이라는 건 제대로 알았고, 그렇게 매년 챙겨보다 보니 어느새 8년이 흘렀다. 이쯤 되면 야구에 대해 모르는 게 없을 줄 알았던 내 생각은 이 책을 만나면서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8년이나 봤는데도 모르는 게 많았다. 그 중 하나를 꼽자면, ‘삼진 후 내야 라운딩 세리머니’다.
투수가 타자를 삼진 잡으면 포수는 미트에 있던(타자가 삼진을 당한) 공을 꺼내 1루나 3루수에게 던진다. 그렇게 내야를 한 바퀴 돌고 나서야 그 공이 투수에게 향한다. (p.271)
경기를 8년이나 봤으면서도 그게 세리머니인 줄 몰랐던 것이다. 이럴 수가. 허탈한 마음에 허허허 하고 웃으면서 계속 읽어 내려가는데, 이 세리머니에 대한 감독들의 답변이 재미있다. 유격수 출신 류중일 감독은 “어릴 때부터 그랬는데, 삼진 잡고 나서 포수가 투수에게 바로 던지면 서먹하지 않을까. 바로 던지는 경우를 거의 못 봤다. 어릴 때부터 하다 보니 습관이 배어 있는 것 같다”라고 했다고 답한다. 다음으로 투수 출신 감독인 양상문 감독의 답변이 이어진다. “의식하지 못했다. 진짜 그러느냐?”라며 눈을 크게 떴다는 그의 답변을 읽는데 안심했다. 휴, 나만 모르는 건 아니었구나 하고.
그리고 양감독은 앞에 있던 포수 최경철을 불러 세워 삼진을 잡으면 정말 내야에서 수비수끼리 공 돌리기를 하는지, 왜 1루나 3루에 던지는지 물었고 최경철 포수는 “그렇게 하라고 지시 받은 건 아니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해왔다. 프로에 와서도 경기 진행을 빨리 해야 할 때 말고는 1루나 3루수에게 던졌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렇게, 삼진 후 내야 라운딩 세레머니는 여기서 끝인 줄 알았는데, 얼마 후에 다시 만난 류감독이 삼진 후 내야 라운딩에 대해 자기 나름의 해답을 내놓았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야통’은 늘 명쾌한 답을 내놓기도 한다’라는 괄호 속 문장과 함께.
해답은 둘째치고, 질문을 듣고 저자를 다시 만나기까지 이 문제(?)에 대해 계속 생각했을 감독님의 모습이 눈에 선해서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정답은 없지만, 정답에 가까운 해답은 이 책의 274쪽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책의 매력은, 그라운드 위 혹은 덕아웃 한 구석에서 이야기를 듣는듯한 현장감 있는 인터뷰와 그 선수의 준비동작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묘사에 있다. (특히 류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을 때마다 류감독님의 음성이 지원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 정감 가는 일러스트와 적재적소에 배치된 사진들이 이 책에 매력을 더한다.
야구의 꽃 홈런과 짜릿한 끝내기 안타에 가려 빛을 바랬을지라도 발로 뛰어 만드는 호수비와 도루가 쌓이고 쌓여 결국 승리로 이끌 듯이, 깨알 같을지라도 이런 디테일들이 큼직한 볼거리 사이에서 재미를 선사한다. 그래서 이 책은 오랜 야구팬에게도, 이제 막 야구를 보기 시작한 팬에게도 좋은 책이다. 야구가 진정 좋아서 쓴, 야구만큼 재미있는 진짜 야구 이야기가 담긴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에필로그 속 구절처럼, 이 책은 힘껏 방망이를 휘두른 상태다. 타구의 방향은 미정이었으나, 내 품안에 날아든 이 한 권의 책만큼은 스위트스폿을 정확하게 맞았다.
* 인상 깊었던 구절들
오죽하면 아이슈타인이 "내게 야구를 가르쳐주면 당신에게 상대성이론을 가르쳐주겠소. 아니 그러지 맙시다. 당신이 상대성 이론을 깨우치는 게 내가 야구를 깨우치는 것보다 빠를 겁니다"라고 말하며 불확실하고도 오묘한 야구의 세계를 거론했다고 하지 않은가. (p.5)
사실 최고 수준에 다다른 타자는 이미 투수를 이기고 들어간다. 타고난 기량에 경험과 수 싸움이 더해지며 마운드 위의 투수를 압도한다. 여기에 이승엽처럼 안주하지 않는 자세까지 더해지면 최고 타자로 롱런할 수 있다. 그런데 이승엽을 비롯해 정상에 오른 선수들이 전하는 마부작침(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든다)의 성공 방정식은 어찌 보면 식상하고 지루한 스트레오타입이다. 이를 예상한 듯 이승엽은 "진정한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그리고 평범한 노력은 노력이 아니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p.27)
슬럼프는 인생의 동반자인 외로움처럼 늘 함께한다. 중요한 건 슬럼프에 안 빠지는 게 아니라 수시로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인 그 슬럼프에서 가능한 한 빨리 탈출하는 것이다. (p.46)
야구는 집(홈 베이스)으로 돌아오는 여정이다. 그리고 그 여정은 쉽지 않다. 홈런을 쳐서 한걸음에 돌아오는 방법이 있지만, 대부분 많은 난관을 통과해야만 마지막 홈 베이스를 밟을 수 있다. 그래서 처음 출발한 그곳으로 돌아오기 위해 오늘도 많은 선수가 베이스 앞에서 몸이 부서져라 스스로를 던지고 있다. (p.130)
빠름과 느림은 동전의 양면처럼 균형을 이뤄야 한다. 속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려면 느린 커브와 함께 던져야 한다. 세상은 여전히 빨리 돌아가고 있지만, 장대한 우주의 역사 속에서는 찰나에 불과하다. 시간이 상대적이라면 느리게 살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다.인생이든 야구든 '빨리빨리'와 '천천히'가 균형을 맞춰야 한다.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