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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평점 :
절판
나의 개츠비는, 스무 살에 처음 만났다. 친구와 고전 문학을 읽기로 계획하고, 처음 읽은 책이 <위대한 개츠비>였다. 에드워드 호퍼의 ‘간이 식당’을 표지로 한 민음사판. ‘이게 그 유명하다는 <위대한 개츠비>구나. 어디 한 번 읽어보자!’는 마음으로 시작한 책은 줄거리를 쫓아가기 바빴고, 끝내 완독했지만 뿌듯하지 않았다. 이 책을 왜 그렇게 읽으라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 때는 그랬다.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을 알려주는 이 책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고등학생 때나 심지어 중학생 때(덜덜덜!) 우리가 이 책을 읽게 된다는 사실은 나쁜 소식이다. 그때 우리는 너무 어리고,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고, 회한이 인생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알 길이 없다. (p.13)
중학생은 아니었지만, 고등학생의 티를 아직 벗지 못한 스무 살이었으므로 감정적으로 궁지에 몰려 있고, 회한이 인생을 어떻게 일그러뜨리는지 알 길이 없었다.
어렴풋하게 개츠비를 이해한 건, KBS2 단막극 <위대한 계춘빈> 덕분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위대한 계춘빈>의 대본 속 ‘기획의도’ 덕분이었달까.
스무살 때, ‘고전문학의 이해’라는 교양수업에서 위대한 개츠비를 읽고, ‘1920년대 신생강대국인 미국의 현주소를 객관적으로 고발한 목가주의와 기계주의의 대립과 갈등을 잘 표현한 작품’이라는 레포트를 썼다고 한다. A+을 받은 그 레포트가 여지껏 부끄러운 이유는, 그 책을 읽고나서 제일 먼저 든 생각 때문이었다. 그 생각은 바로 ‘개츠비... 미친놈...’이었다고 한다.
다소 격한 표현이지만, ‘미친놈’이라는 단어를 보면서 나는 개츠비를 어렴풋이 이해했다. 그렇다. 개츠비는 미친놈이었다. 위대한 모든 사람이 사랑에 미친 것은 아니겠지만, 사랑에 미친 사람이 위대할 수 있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었던 개츠비. 책장을 덮으면 ‘위대한 개츠비’라는 제목을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개츠비. 위대한 놈이다.
나를 비롯한 독자들은 《개츠비》를 읽으며 주인공이 사랑에 홀딱 빠진다는 점을 좋아하지만, 정작 이 소설은 신학에 대해서건 낭만적 사랑에 대해서건 시큰둥하다. 《개츠비》에는 신학 대신 우상 숭배가 나오고, 사랑 대신 타인에게 마냥 무릎 꿇는 자아가 등장한다. (p.34)
또 《개츠비》는 공허를 정면으로 응시한 최초의 현대 소설 가운데 한 편이지만, 높이 뛰어오르기 전에 멈춰버린다. 피츠제럴드가 예전에 버린 가톨릭 신앙과 그의 낭만적인 기질이 여전히 영향을 미친 탓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개츠비를 쓴 피츠제럴드. 개츠비를 논할 때, 빠지지 않는 이름이다. 이 책의 부제에서는 개츠비보다 피츠제럴드가 먼저 언급되는데, 나는 다음 구절을 읽으면서 피츠제럴드를 새롭게 이해했다.
결국 피츠제럴드는 항상 원하기를 원한다. 그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말이다. 최종적으로 《개츠비》를 위대한 미국 소설이 될 만큼 가치 있는 작품으로 만든 것은 뭔가를 단언하고 싶어 하는, 피츠제럴드의 희미하지만 결국 살아남은 충동이었다. (p.35)
이 책을 쓴 문학 비평가 모린 코리건이 글을 잘 써서 그렇겠지만, ‘그 기대에 부합하는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항상 원하기를 원하는’ 피츠제럴드가 참 멋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츠비는 그저 그 시대에 쓰였기 때문에, 비단 위대한 사랑 이야기인 소설은 아니기 때문에 가치 있는 작품이 아니라 ‘뭔가를 단언하고 싶어 하는, 피츠제럴드의 희미하지만 결국 살아남은 충동’이 있었기에 가치 있는 작품이라는 것이 정말이지 멋있다.
개츠비에 의한, 개츠비를 위한, 개츠비의 이야기인 동시에 피츠제럴드에 의한, 피츠제럴드를 위한, 피츠제럴드의 이야기인 이 책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그가 창조한 최고의 인물들은 들뜬 채로 인생이라는 물에 대책 없이 뛰어들고, 그다음엔 떠 있기 위해 싸워야 하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1부 ‘물 그리고 물, 어디에나’.
위대하고 새로운 무언가를 열망하는 사람들을 끌어당기고, 파괴하는 도시 ‘뉴욕’에 대해 이야기하는 2부 ‘야망과 성공의 땅에서’.
이 소설을 사랑 이야기로 보고 강의하려는 게 ‘아니다’. 적어도 오늘 밤은 아니라고, 자신은 이 소설을 아메리칸드림의 은밀한 썩은 부위를 들여다보는 누아르로 애기하고 싶다 말하는 3부 ‘랩소디 인 누아르’.
할리우드가 그를 싸구려 글쟁이보다 약간 나은 존재로 취급했을 때조차도, 진지하게 자기 자신이 작가라고 생각했던 피츠제럴드에 대해 이야기하는 4부 ‘중서부 싸구려 작가와 그의 걸작’.
그는 중요한 연구 대상이 되었고, 전기와 소설과 연극의 주제가 되었으며 그가 쓴 이야기는 수백만 관객을 대상으로 각색됐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그의 책을 읽는다. 필독 도서이기 때문이 아니라 좋아하는 책이기 때문이라며 이야기하는 5부 ‘물 위에 제 이름을 쓴 사람, 여기 잠들다’.
나이 들어 인생을 후회하는 독자들을 위한 《개츠비》가 있지만, 젊고 무모한 이들을 위한 《개츠비》도 있다며 이해하는 마지막 6부 ‘처음에는 이해하지 못했다’.
목차를 조금 길게 풀어놓은 것 같아 보인다. 부끄럽게도 정말 그렇지만, 그렇게 한데는 이유가 있다. 개츠비는 알아도 피츠제럴드가 낯설다면 나는 과감하게, 이 책을 뜯어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 개츠비를 뉴욕 속 누아르로 읽었던 스무 살의 내게는, 야망과 성공의 땅에서 들려오는 랩소디 인 누아르가 잘 읽힐테고, 개츠비의 심화 과정인 ‘피츠제럴드 읽기’를 원하는 사람은 중서부 싸구려 작가와 그의 걸작이 와 닿을 것이다.
덕 중의 덕은 양덕이라고 했던가. 개츠비-피츠제럴드 덕질은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던 멋진 책. 그 어떤 문장보다, 이 책의 제목이 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을 덧붙여본다.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