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수에 젖은 서정적인 연주 스타일과 달콤한 사탕 같은 목소리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한 대중 스타였지만, 평생 마약 중독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방황했던 고독한 예술가 쳇 베이커. 을유문화사에서 그의 전기를 번역해 출간할 때 ‘악마가 부른 천사의 노래’라는 부제를 붙였는데, 표현을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2. 영화는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1966년의 쳇 베이커를 비추는 것으로 시작한다. 트럼펫 사이로 기어 나오는 거미의 환영을 보던 그는 영화사의 도움으로 출소한다. 그렇게 자신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에 출연하게 된 쳇 베이커는 자연스레 1954년의 시간으로 흘러 들어간다.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던 그 때 그 시간으로.
영화 속 영화는 흑백으로 처리되어, 1966년을 살아가는 그의 모습 사이로 종종 모습을 드러낸다. 1966년의 쳇 베이커를 이야기할 때, 1954년의 쳇 베이커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는 듯이. (실제로 쳇 베이커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지만, 에단 호크가 연기하는 쳇 베이커가 두 시간을 오간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영화에서 쳇 베이커의 전 부인 ‘일레인’을 연기한 제인은, 그가 자신의 인생에 골칫거리가 될 것임을 알면서도 사랑에 빠진다. 새로운 사랑이 시작되면서 다시 달콤해질 것 같았던 쳇 베이커의 삶은, 큰 사고를 맞으며 내몰린다. 마약상들로부터 구타를 당한 그는 윗니 일부를 잃고, 트렘펫 연주자로서 치명적인 부상을 안게 되는데 그의 진짜 ‘재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틀니를 끼우고서도 제대로 된 소리를 내기 위해 노력하고, 다시 수감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쳇. 그 중심에 새로운 사랑 제인이 있다. 배우의 꿈을 걷고 있는 예술가이자, 그를 마약의 길에서 구원하고자 하는 여자. 쳇과 제인이 사랑하는 동안 영화에는 평온이 깃들고, 그의 연주는 한층 감미롭게 들린다.
노력 끝에 뉴욕의 재즈 클럽 버드랜드에서 다시 공연하게 된 쳇은 두 갈래의 길목에 선다. 음악과 사랑. 나란히 뻗어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길은 다시없을 기회의 순간에 보란 듯이 갈라져있다. 헤로인과 메타돈이라는 이름으로.
결말의 향방을 가르는 첫 번째 곡이 끝나고, 쳇은 이렇게 말한다.
“본 투 비 블루, 들려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암전. 쳇의 말마따나 본 투 비 블루가 흐르고, 엔딩 크레딧이 오른다.
3. 모처럼 스포일러를 피해서 쓰려고 노력했는데, 이도 저도 아닌 글을 쓰게 된 것 같다.
4. 라이브톡으로 보게 되는 영화는 동진님의 해설에서 쉽게 헤어 나오지 못해서 글 쓰는데 한참을 애먹었는데 (이를테면, 한 달 가까이 붙잡고 있었던 ‘사울의 아들’과 아직까지 쓰지 못한 ‘캐롤’이 그렇다) 이 영화는 얼른 리뷰를 써서 영업하고 싶었다. ‘싱 스트리트’를 뒤늦게 챙겨 본 영향일지도 모르겠다. 음악 영화는, 누가 뭐래도 영화관에서 봐야해 (>_<) 싶은 마음에. 마일스 데이비스와 디지 길레스피를 ‘본 투 비 블루’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재즈 문외한이지만, 잊지 못할 것 같다. 영화관을 가득 채우는 재즈 음악, 에단 호크가 직접 불렀다는 노래, 그 어떤 음악이 대신할 수 없는 그의 눈빛 그 모든 것을.
5. 영화는 쳇 베이커의 삶을 그린 영화지만, 온전한 ‘전기’는 아니다. 영화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이 전기는 아니지만, 마릴린 먼로의 영화가 아닌 게 아니듯이.
전기가 아닌 이유는, 전기치고는 허구가 많기 때문이다. 허구에 대해 이야기 하자니,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어 버리는 탓에 허구에 대한 이야기는 넣어 두기로 한다.
정교함을 잃었으나 개성과 깊이가 생긴 쳇 베이커의 음악처럼, 이 영화 역시 아쉬운 부분은 있겠지만 저마다 여운을 가지는 부분이 분명 있을 거라 생각한다. 그건 음악일 수도 있고, 에단 호크의 연기일 수도 있고, 쳇과 제인의 사랑 이야기일 수도 있으며, 두 눈 가득 담기는 아름다운 영상일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들려주고 싶은 인생의 끝에서, 나는 조명 하나를 떠올린다. 점멸되지 않고 또렷이 빛나던 파란 조명. 달콤하고 쌉싸래한 그 파랑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