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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실점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17년 2월
평점 :
뉴스에 한 실종 사건이 보도된다. 실종 사건의 중심에는, 지명도로 치면 대통령과 유재석 다음으로 유명하다는 KBS 9시 뉴스 여자 앵커 최선우가 있다.
그런 최선우가 교외 외딴 집에서 알몸의 변사체로 발견된다.
“확인하고 말고 할 것도 없습니다. 최선우 맞습니다.”
이 형사의 보고에 수화기 너머에서 서장은 숨을 몰아쉬었다.
수도권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력 범죄 발생율이 낮은 지방 소도시의 경찰서장. 기껏해야 조폭들의 난투극이나 서울에서 도망친 강력범들을 추적하는 광수대의 수발을 드는 게 전부였는데, 전 국민이 가장 집중하고 있는 사건 피해자의 시체가 관할 구역에서 나온 것이다. 아나운서 최선우의 시체라니...! (p.25)
당대 최고 아나운서가 강간 살해된 사건으로 인해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히고, 강력부의 유능한 검사 강주희가 사건의 수사를 담당하게 된다.
용의자로 검거된 이는 최선우가 변사체로 발견된 집의 주인인 미술교사 서인하. 검찰청에서 주희를 대면하게 된 서인하의 첫 마디는 “증거대로, 사실만 갖고 나 기소할 수 있을까요?”였고, 이어지는 두 마디는 강렬했다. “나는 최선우 섹스 파트너였어! SM! 사도마조히즘 커플이었다고, 우리가!”
최선우가 세상에 알려진 고상한 이미지와 달리 SM 취향의 섹스를 즐기는 변태적 성향의 여자였다고 주장한 것이다.
매일 저녁 같은 시간 대한민국 인구 가운데 1500만 명 정도 되는 사람들에게 자기 얼굴을 보여 주는 여자가, 그 긴 시간 동안 카메라 앞에서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진 적 없는 여자가, 수천 개의 단어로 구성된 문장을 읽는 동안 발음 한 번 꼬였던 적이 없는 여자가, 자기 등 한복판에 속눈썹이 붙었대도 다른 사람보다 자기가 먼저 알아차리고 자기 손으로 뗀다고 말해도 믿어질 것 같은 여자가, 머리채를 휘어잡혀 바닥에 패대기쳐지고 남자에게 섹스를 해달라고 구걸하다가 ‘개 같은 년’이라는 욕을 먹으며 그것을 즐겼다는, 그 여자가 그것을 위해 자신의 발아래 무릎 꿇고 구걸했다는 말을 믿으라는 것인가. (p.75)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으나 타살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없는 상황 속에서, 서인하의 일관된 진술과 이를 입증하는 증거들은 수사를 더욱 혼란스럽게 한다.
그러던 중, 우연히 발견된 하나의 증거는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데...
스포일러가 있다는 말은 그 자체로 스포일러지만, 난 저 문장 때문에 이 책이 궁금했다. 강렬한 사건 속에서,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키는 하나의 증거라. 어떤 증거일지, 그리고 그 끝에는 어떤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했다.
앞으로 하는 이야기는 스포일러를 거르지 않은 이야기라, 스포일러를 피할 분들은 여기까지만 읽어주시면 좋겠다.
이 소설에 대해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소설의 제목인 ‘소실점’에 관한 이야기다.
“소실점, 을 아세요?”
2차원의 평면에 원근법과 입체감이 살아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기준이 되는 선을 연결하는 방법. 그 정도의 상식을 가진 주희에게 서인하는 조용히 그림을 그리며 설명하기 시작했다.
“소실점을 하나로도 할 수 있고, 둘로도 할 수 있고, 셋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소실점 하나로는 소실점 셋을 써야만 그릴 수 있는 높은 빌딩 같은 것을 그릴 수 없죠. 어렸을 때, 처음으로 이 개념을 알고 난 후 너무 신기해서, 보이는 모든 걸 소실점 찍고 그려보고 혼자 감탄하고 그랬습니다.” (p.276)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시킨 하나의 증거는 서인하가 비단 최선우 사건의 범인이 아닌, 연쇄 방화 살인범이라는 증거였다. 그리하여 그는 최선우를 살해, 시신을 방치한 상태에서 다음 살인 계획을 실천하고 있었던 범죄자가 되었다.
서인하는 묵비권으로 일관했고, 판사는 검사의 구형을 그대로 언도했다. ‘사형.’
사건이 종결되고 새롭게 맡은 사건에 매달리면서 주희는 이제 정말 온전하게 그녀를 보내고 서인하를 잊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인하가 수감 중인 청송교도소에서 연락이 왔다. 5892번, 서인하가 강주희 검사를 뵙고 싶어한다는 연락이었다.
서인하를 만나기 위해 찾은 청송교도소에서 주희는 사건의 진실을 듣게 된다.
“저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서인하를 연쇄 방화 살인범으로 몰았던 그 증거는 사실 ‘조작’에 관한 증거였다. 서인하 자신이 연쇄살인범이 될 수 있도록 만든 증거.
사고였는지, 정말 죽기로 작정하고 손을 놓은 건지는 여전히 자신도 모르고, 자신이 최선우와 연인이었는지도 모른다고 했다. 다만 자신이 최선우를 사랑한 것은 분명하다고 서인하는 말했다.
남들에게 보여지는 자신의 완벽한 모습과, 자신의 본질에 대해 오래 고민하고 괴로워했던 최선우. 그녀의 선택 끝에서 서인하는 준비해왔던 소실점을 찍는다. 증거를 조작하고, 용의자로 지목되고, 묵비권을 일관하여 끔찍한 사건의 범인이 되기로 자처하는 ‘소실점’을 말이다.
“저는 최선우를 똑바로 보기 위해 매 순간 새로운 소실점을 찍고, 제 위치를 바꿔가며 그녀를 보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있는 자리에서 결코 움직이지 않고, 자신이 한 번 찍은 소실점에 변동 없이, 그 구도 안에 선우를 밀어 넣은 사람들은 보지 못했던 모습을, 저는 그래서 볼 수 있었고, 저는 그래서…” (p.277)
유일하게 최선우의 본질을 알아봤던 남자, 서인하. 숨을 쉬고 싶어서 그를 찾았던 여자, 최선우.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온전하게 해주지 않은 여자를 위해 자기 인생에 허락받은 모든 것을 걸어버린 남자. 그가 뒤늦게 밝힌 ‘진실’이라는 소실점 앞에서, 그 사랑의 깊이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그는 주희에게 그랬던 것처럼 다시 한 번 이렇게 말할 것이다.
“제가, 사랑한 거니까요.”
최선우를 몰아넣었던 ‘편견’이라는 소실점, 그리하여 최선우가 괴로워했던 ‘가면’이라는 소실점, 그런 그녀를 위해 범죄자가 되기로 마음먹은 남자의 치밀했던 ‘조작’이라는 소실점. 이 모든 소실점의 끝에는 ‘사랑’이 걸려있었고, 나는 그 소실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