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냥’이라는 말의 온도를, 지훈을 짝사랑하는 세경이에게서 배웠다.
지붕 뚫고 하이킥 121화.
지훈에게 수학 과외를 받으러 나가는 길, 세경이 앞으로 외국에 나가 있던 아빠의 편지가 날아든다.
동생 신애와 함께 자신이 있는 곳으로 와서 함께 살자는 편지. 세경은 편지를 받고 고민한다.
떠나려고 보니 지훈에게서 받은 것이 너무 많았다.
눈대중은 없지만 그냥 추석이니까 입으라며 안겨준 추석빔도,
사랑니로 고생하던 자신을 치과에 데려갔던 것도,
겨우내 입고 다녔던 검은 코트도, 겨울을 버티는데 큰 힘이 된 빨간 목도리도,
없으니까 연락도 안 되고 답답하다며 선물해준 핸드폰도,
시린 손에 쥐어주었던 아메리카노 모두 지훈이 준 것이었다.
다음 날. 지훈에게 서류를 전하기 위해 병원으로 향하는 길, 세경은 지훈을 위한 선물을 함께 챙겨간다.
선물은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났던 그날, 지훈이 세경에게 들려주었던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Pale Blue Eyes' LP판이었다.
세경이 병원을 떠나고, 지훈은 홀로 휴게실을 찾는다.
턴테이블에 LP판을 올려놓고 소파에 몸을 묻은 지훈의 모습 위로 세경과의 통화 내용이 흐른다.
지훈 : 이거 언제 샀어?
세경 : 그날요. 아저씨랑 우연히 만났던.
지훈 : 그날 나랑 헤어지고 레코드점 다시 갔었니?
세경 : 예.
지훈 : 왜?
세경 : 그냥요.
당시 세경이에게 감정을 200% 이입해서 챙겨보던 나는, 세경이의 “그냥요.”가 사무쳤다.
“조용히 어떻게 놀았냐고? 이렇게.” 하며 벽에 기대 음악을 듣는 지훈을 바라보던 그 눈빛.
지훈이 먼저 자리를 뜨고 혼자 남은 학림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다 발견한 낙서,
‘지훈이 다녀가다’ 아래 ‘세경이도 다녀가요’라고 써넣는 그 마음.
잃어버린 핸드폰을 찾느라 마음이 급하지만, 저 LP판을 구매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떨어지지 않던 레코드점에서의 발길.
학림다방을 다시 찾아 ‘Pale Blue Eyes'를 다시 들으며, 대학생인 지훈의 모습을 상상하는 시간.
이 모든 것 하나 하나에 지훈을 향한 세경의 마음이 묻어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저한테 주신 것들 감사드려요.’
라는 카드와 함께 놓인 LP판을 보며 뒤늦게 세경의 마음이 궁금해진 지훈이 물었다.
왜 그곳에 다시 갔냐고, 왜 이 LP판을 사온 거냐고. 지훈의 물음에 세경은 이렇게 답한다.
“그냥요."
어쩌면 가장 가까운 답은 ‘지훈의 추억이 담겨있는 음악이자,
이제는 자신의 추억이 되어버린 그 음악을 오래 간직하고 싶어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가까운 답을 설명하기에는 지훈을 향한 자신의 마음이 너무 깊었다.
그 모든 감정을 설명하자니 어려워서, 그런 마음을 담아내기에 가장 쉬운 말을 골랐을 세경이.
그냥요.
이유가 하나 둘 쌓이면서 지훈을 좋아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굳이 이유를 대지 않아도 될 만큼 충분히 소중한 존재가 되었으니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냥’보다 더한 표현은 없었을 게 분명하다.
“추억이 사는 기쁨의 절반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아. 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도 추억이잖아.”
추억이 사는 기쁨의 절반이라는 말을 들려주고, 또 시간이 지나고 나면 오늘도 추억이라는 걸 알려준 사람.
그런 지훈을 짝사랑하는 세경이를 지켜보면서 내가 배운 것은, 이 책의 제목처럼 ‘언어의 온도’였다는 생각이 든다.
언어에도 온도가 있음을, 그 온도가 내게 얼마나 전해졌는지를.
그렇게 전해진 온도가 그 겨울, 내 마음을 얼마나 데워주었는지를 말이다.
이 책 《언어의 온도》에서 ‘그냥’에 대해 이야기하는 글을 마주했을 때, 그냥 좋았던 건 그 때문이다.
p.s. 비가 생각보다 많이 내려서, 글이 생각보다 길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