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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곰 라이프 - 더 적게 소유하며 더 나은 삶을 사는 법
안나 브론스 지음, 신예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8년 1월
평점 :
1. 최근 미니멀리즘이 떠오르면서 관련 서적이 많이 출간 되었다. 대세의 흐름에 편승해서 나 역시 몇 권 찾아 읽어봤지만, 나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나는 너무 많은 것을 껴안고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생에 미니멀은 글렀어’하며 소비를 합리화하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나를 탓하기도 했다.
2. 오늘 ‘김생민의 영수증’을 보는데, 나처럼 많은 짐을 껴안고 사는 랩퍼 슬리피가 방송에 나왔다. 의뢰인의 집에 방문해서 분석하고 조언을 해주는 출장 영수증이라는 코너였다. MC들은 슬리피의 집에 들어서자마자 나란히 탄식했다. 거실에 놓인 방대한 짐 때문이었다. 하나씩 보면 쓸 만한 물건들인데, 구별되지 않고 한 곳에 모아두니 전혀 조화롭지 않았다. 또한 신발이 너무 많아서 수납되지 못한 신발들이 나와 있었고, 옷이 넘쳐나는 까닭에 그는 막상 거실에 나와 취침을 하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누가 뭘 준다고 하면 일단 받아두고 봤던 협찬품이 집안 곳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MC 송은이가 가지고 있는 물건들에 대해 솎아 내본 적이 있냐고 묻자 슬리피는 아깝다고 답했다. 이것도 저것도 아깝다는 생각에 버리지 못하고 껴안고 살았던 것이다. 그런 슬리피에게 소비요정 김숙은 “(공짜라도) 물건이 많아지면 그만큼 이고 살아야 할 게 많아진다(유지, 보수의 부담도 커진다)”고 말했고, 이어 “제가 왔던 길이에요. 처음엔 그냥 못 버려요. 하루에 한 개를 버려요. 내일은 두 개를 버려요. 삼일째는 세 개를 버려요.” 라고 충고했다.
3. 내가 읽고 있던 이 책 《라곰 라이프》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흥미로웠다. 슬리피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워낙 짐이 많은 사람들은 하루아침에 미니멀하게 살기란 결코 쉽지 않다. 슬리피는 스웩을 포기할 수 없고, 나는 그간 모아둔 책을 포기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필요한 건 ‘라곰’이 아닐까 생각했다.
라곰 Lagom
(부사) 딱 맞게, 충분히 적당히
(형용사) 알맞은, 충분한, 적당한, 걸맞은
출처 : 놀스텟츠 출판사 스웨덴어-영어사전 NORSTEDTS ORDBOK
아주 적고, 최소로 살기 어렵다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딱 적당하게 사는 것이다.
스웨덴 사람들의 삶에 밴 이 ‘라곰’은 모든 요소에 두루 쓰일 수 있는 포괄적인 단어다. 밥을 먹을 때도, 한잔할 때도, 일을 할 때도 적용할 수 있다. 일에 적용한 예를 들자면, 스웨덴의 커피 타임 ‘피카fika’가 있다.
평소에는 통곡물과 채소를 주로 사용한 심플한 음식을 먹다가도, 친구나 동료와 함께 피카 시간을 보낼 때는 버터를 듬뿍 바른 빵과 혀가 녹을 듯이 달콤한 초콜릿을 마음껏 먹는다.
무엇보다 중요한 핵심은 피카가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이라는 것이다. 바쁜 중에도 짬을 내어 커피 한잔하는 여유를 즐기는 것. (p.103)
피카야말로 라곰이 가장 잘 스며든 문화라고 저자는 설명한다. 일과 먹을 것에 대한 스웨덴 사람들의 라곰한 생각을 알 수 있었다.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숨을 돌리는 시간에 그치지 않고, 피카 그 자체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다. 일과 먹을 것을 지나오면 주거 공간에서의 라곰이 등장한다.
라곰하게 디자인한 집은 곧 미니멀한 집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우리 가정에 라곰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떤 특정한 스타일로 인테리어를 한다는 뜻이 아니다. 라곰한 집 꾸미기를 위해 꼭 장만해야 할 물건이 있는 것도 물론 아니다. 우리의 집이 어떤 공간이길 원하는지, 무엇이 우리에게 중요한지 파악하는 것이 먼저다. 그래야 균형을 잡을 수 있다. (p.131)
그렇게 잡힌 균형은 친밀함으로 나타난다는 생각이 든다. 중요한 것은 결국 가정이고 가족이라는 것.
스웨덴 사람들은 집을 외부인 보란 듯이 근사하게 꾸미지 않는다. 대신 얼마나 편리하고 푸근한 공간인지에 중점을 둔다. 그래서 스웨덴의 집은 포근하고 매력적이다. 누구든 팔 벌려 환영하는 느낌이다. 그곳에 콕 박혀 뒹굴뒹굴하고 싶다. (p.136)
내가 이 책에서 인상 깊었던 부분은 ‘단순함 속의 작은 화려함’에 대해 이야기하는 5장이었다. 일상의 라곰. 바로 반복되는 일상에 예술을 받아들이는 방법이다. 우리 손으로 직접 무언가를 만드는 것, 글쓰기, 뜨개질, 노래 등 나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주는 것이면 무엇이든 좋으니 창조적인 배출구를 찾는 것, 창의력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매일같이 새로운 창의력 타령을 하기는 힘드니 장기 프로젝트에 도전해보는 것, 직접 무엇인가를 만드는 일에 딱히 열정을 느끼지 못한다면 예술가들을 지원하는 것.
라곰을 몰랐던 내가 홀로 실천하고 있는 것들이 담겨 있어서 반가웠다. 일상 속에서 꾸준히 글쓰기를 하며, 그것을 습관화하기 위해 장기 프로젝트를 실천하려 계획 중이고, 내가 도전하기 어려워하는 분야는 예술가들을 통해 핸드메이드 제품을 구매해 선물한다. 다른 건 몰라도 일상의 라곰은 내 안에도 스며들어 있었다.
그 어떤 것보다 라곰이 필요한 부분은 역시 ‘마음’이 아닐까 싶다. 마음을 생각하면 물건이야 얼마든 버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수선한 마음만큼 정리하기 어려운 것도 없다. 이 책에서는 전자기기를 멀리하고 스트레스를 관리하라고 조언하는데, 전자는 충분히 시도해볼만한 일이다. 특히 잠들기 전에 멀리하는 것. 아주 중요하다. 나 역시 잠들기 전까지 스마트폰을 붙잡고 있어서 늘 문제인데, 이걸 위에서 언급한대로 장기 프로젝트로 실천해보기로 했다. 가까이 하는 것이 습관이라면 멀리 하는 것을 습관으로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또 이 책에서는 온라인 교류 대신 직접 만나기를 권하는데, 나는 이걸 사람이 아닌 ‘서점’에 적용하여 실천하기로 했다. 온라인 서점에서 책을 덜 사고, 오프라인 동네 서점을 찾아다니며 책을 구입하기로 한 것이다. 좀 더 자세하게는 독립출판물을 구매하는 것인데, 당장 이번 주에 방문한 동네 서점에서 새로운 사람을 알게 되었다. 계속해서 온라인 서점에서만 책을 샀다면 오지 않았을 기회였다.
이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는 내 삶을 정의할 수 있었다. 미니멀은 멀지만 라곰에는 가까운 삶. 여전히 미니멀은 멀지만, 이 책을 통해 내 일상에 라곰이 스며든 부분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번 생에 라곰은 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