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 - 가성비의 시대가 불러온 콘텐츠 트렌드의 거대한 변화
이나다 도요시 지음, 황미숙 옮김 / 현대지성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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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했다. 사람들은 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것일까?

궁금해한 이유는 내가 그렇게 보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책은 속 터질 정도로 정독하고, 속도감 빠른 상업 영화와는 거리가 먼 독립 영화를 좋아하며 결코 빨리 감기 할 수 없는 연극과 뮤지컬을 몇 번이고 보는 사람이 나다. 나라고 시간이 많아서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지 않는 것은 아니고, 영화의 상영 시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낭비는 악이고, 가성비는 정의라던데 그렇다면 나는 악 중의 악인 것인가.

이나다 도요시의 책 <영화를 빨리 감기로 보는 사람들>에 따르면 뉴스나 보도처럼 정보성 콘텐츠도 아니고 드라마, 영화, 애니메이션과 같은 영상을 빨리 감기로 보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말한다.

첫째, 영상 공급 미디어의 다양화 및 증가로 영상 작품의 공급 과다.

둘째, SNS로 공감을 강요당하고 '개성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고 생각하며 실패를 두려워하는 바쁜 현대인의 시간 가성비 지향.

셋째, 얕은 감상이 많아지면서 알기 쉬운 것이 추구되어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영상 작품의 증가.

라인에서는 언제 어디서든 친구와 연결되어 있다. 말 그대로 아침에 눈을 떠서 밤에 잠들 때까지 언제든 연락할 수 있고, 늘 어떤 반응을 요구받는다. 그렇다고는 하나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야깃거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런 상황에서 손쉽게 분위기가 살아나는 데는 “그거 봤어? (혹은 그거 들었어?) 재미있더라. 꼭 봐!”가 유용하다. 영화나 드라마, 애니메이션 혹은 음악 등의 콘텐츠를 화제로 삼는 것이다. 이런 화제를 무시하면 대화에 끼지 못할 뿐 아니라 후폭풍이 따른다. 소위 말하는 ‘읽고 씹기’는 ‘그 화제에 관심이 없다’라는 적극적인 태도로 받아들여진다. 화제가 된 작품은 가급적 보고 감상을 말해야 그룹의 평화가 유지된다.

(p.104)

위에서 언급한 세 가지 요인 중 첫째와 둘째를 아우르는 상황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든 어떤 반응을 요구받고, 새로운 콘텐츠는 이야깃거리가 된다. 우리에게는 너도나도 구독 중인 글로벌 OTT가 있으니까. 편 수마다 돈이 드는 것도 아니고 대여와 반납도 필요 없이 그 즉시 감상할 수 있는 VOD 서비스가 말이다. 친구나 직장 동료들이 이야기할 때 나도 한 마디 얹을 수 있으려면 시간을 내서 콘텐츠는 챙겨봐야겠는데 시간이 너무 부족하다면? 영상을 빨리 감아 보고 초반부 회차는 건너뛰고 때때로 마지막 회차를 보거나, 그 모든 게 한데 어우러진 요약본을 챙겨 보며 콘텐츠를 ‘소비’하는 것이다.

내가 가장 흥미로워했던 지점은 세 번째 요인이다. 얕은 감상이 많아지면서 알기 쉬운 것이 추구되어 대사로 모든 것을 설명하는 친절한 영상 작품이 늘었다는 것. 나는 이 부분을 웹소설 플랫폼에서 느꼈다. 연재 작품의 특성상 회차마다 댓글이 달리는데, 댓글을 다는 독자들은 한결같이 ‘고구마 구간(갈등)’을 못 견뎠다. 당장 ‘사이다(해소)’를 내놓으라는 여론이 우세했다. 아니 갈등이 있어야 해소도 있을 거 아니냐고 이 사람들아... 싶었지만 댓글을 달지는 않았다. 사이다를 요구하는 주장이 나의 독서 방식과 다를 뿐이지 틀린 건 아니기 때문이다.

“좋아하는 정보나 콘텐츠만 보고 싶다.”, “관심이 없는 건 아예 눈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 “편향되어 있다고 해도 괜찮으니 좋아하는 정보에만 둘러싸이고 싶다”. 영상 오락 콘텐츠뿐만 아니라 뉴스 같은 정보도 마찬가지다.

같은 리포트에서는 ‘아무 생각 없이 보내던’ 시간을 바로 잡고 자신의 기분에 맞는 미디어 콘텐츠를 고르는 사람을 “피키 오디언스Picky Audience”라고 칭한다. 픽pick이란 ‘고른다’는 뜻이다. 뷔페에서 좋아하는 음식을 원하는 만큼 접시에 담는 이미지를 생각하면 된다.

(p.158)

댓글에서 사이다를 내놓으라고 외쳤던 사람들은 다른 콘텐츠 앞에서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까. 이런 사람들을 피키 오디언스라고 부른다는 것도 흥미로웠다. 좋게 말해서 피키 오디언스지 그냥 편식쟁이다. 나도 이와 같은 편식에서 결코 자유롭지 않다. 나는 트위터에서 뮤트 기능을 곧잘 활용하는 편인데, 그 기능을 넷플릭스에서도 사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내가 어떤 이유로 좋아하지 않는 배우나 감독·작가의 작품은 포스터도 보고 싶지 않아서 트위터처럼 뮤트 기능이 있었으면 했다. 다른 의미의 편식인 셈이다.

세상에는 자신과 완전히 다르게 생각하고 다르게 행동하는 ‘타자’가 존재한다. 그 가치관에 동의할 필요는 없지만 존재만큼은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 존중은 ‘마주하고 이해하는 의무까지 포함한다. 하지만 이야기의 가치를 공감에서만 찾으려는 사람은 ‘공감하기 어려운 가치관을 마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일이 익숙하지 않다. 그러려면 큰 에너지가 필요한 데다 가성비가 좋지 않으니 말이다.

결과적으로 자기 생각을 보강해줄 이야기나 말을 찾고 그것만 강화하게 된다. 타자의 입장에서 바라보는 관점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 없는 그들은 “세상에 자신과 다르게 느끼는 사람이 있다”라는 당연한 사실을 잊는다. 혹은 그런 사람을 쉽게 적으로 치부한다.

(p.161)

이 책의 재밌는 지점이 여기에 있다. ‘영화’를 주어 삼았지만, 영화를 포함하여 영상 작품을 빨리 감기로 보는 흐름이 생겨난 데는 비단 앞서 언급한 세 가지 이유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줄로 말하자면 아래와 같다.

소비'와 '감상'의 시점을 오가며 엮은 미디어론이자, 커뮤니케이션론이고, 세대론이자, 문화론이다.

(p.277)

평소 해왔던 생각들과 책에서 언급된 이야기들이 만나는 지점이 여럿(이를테면 라이트 노벨의 길고 긴 제목 같은 것들) 있었다. 조목조목 뜯어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화를 ‘소비’하는 사람과 ‘감상’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앞으로도 후자일 테지만, 전자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이 책을 읽은 보람이 있었다.

추신. 재밌는 사실은 이 책 역시 ‘감상’이 아니라 ‘소비’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책을 빨리 감기 할 수는 없을 테니 요약본을 읽고 싶어 하는 독자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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