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10
"어느 시간에서든, 어느 공간에서든 반짝이는 것이 있다면 잘 간직해야지. 다듬지 않아도 그건 내겐 보석이니까."
고교 시절에 오가던 소란한 감정이 휘발되고 흐릿한 색채로 남는 과정을 장장 18권에 걸쳐 그린 만화 『다정다감』(박은아) 마지막 페이지에 새겨진 문장이다.
p.27
마침 1990년대 초중반은 초등학생 여자애들이 만화를 맘껏 사랑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시절이었다. 열 살 즈음 된 소녀들을 위한 두툼한 만화잡지들이 창간을 알렸고, TV를 켜면 <꽃의 천사 루루>, <요술소녀>, <베르사이유의 장미>, <뾰로롱 꼬마마녀>, <웨딩 피치>등이 나오는 호시절이었다.
p.41
말할 때마다 슬퍼지지만 한국 순정만화 시장의 몰락은 급격하게 이뤄졌다. 그리고 제대로 평가 받을 기회를 놓치면서 그 중요한 시기를 함께 견인한 대다수 독자들에게조차 만화는 현재진행형의 취미가 아니라 추억으로 남게 됐다. 좋아하는 마음은 어떤 면에서 잔인하다. 대가 없는 애정을 쏟는가 싶다가도 어느 순간 특별한 이유나 계기도 없이 느닷없이 그 마음을 철회해버리니까. 세상이 순정만화를 이야기하지 않는 동안 독자들의 기억 속에서도 순정만화라는 장르가 가진 근사한 부분과 장점들은 축소되고 폄하되고 사라졌다. 왜 설정이 과하거나 필요한 서사를 생략해 유치해진 작품을 가리킬 때 '순정만화 같다'는 비유가 쓰여야 할까? 순정만화가 정말 그런가? 뻔하고 조악한 드라마나 영화는 또 얼마나 많은데.
p.53
최근 많은 여성 소비자가 여자들의 이야기에 환호하는 심리는 '남자가 나오는 이야기가 꼴보기 싫다'는 것보다는 '여자 캐릭터의 고유성을 존중하지 않는 남자들 이야기를 더 보고 싶지 않다'에 가까울 것이다.
p.100
"첫사랑의 사람과 처음으로 사귀고, 교내에서도 이름 난 커플. 그 사람하고만 섹스도 하고 평생을 살아간다. 사실 그런 일이 가능하다면 그게 가장 행복하겠지. 하지만 이젠 이런 생각이 들어. 여러 사람들과 사랑에 빠지고 많은 상처를 받았기에 지금 이렇게 이 사람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지금 누군가 사랑과 연애의 '효용'에 대해 내게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해피 마니아』(안노 모요코)의 주인공 시게타의 이 대사를 고를 것 같다.
p.103
믿음직한 동행을 찾았다면 운이 좋은 것. 하지만 나를 완전하게 채워줄 누군가가 등장하길 바라며 평생을 결핍감 속에 사는 것보다는 혼자, 성큼성큼 나아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때로는 푹푹 발목까지 빠지는 모래밭 속에서 방향 감각을 잃을 때도 있겠지만 나는 혼자가 되더라도 잘 살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이 알려준 감정들이 나를 자라게 했으니.
p.149
한자를 잘 모른다. 유치원 때부터 한자 카드와 시험지까지 직접 만들어주며 한문 조기교육을 시키려고 애쓴 엄마에게 미안할 정도다. 뻔한 간판이나 기사 제목조차 제대로 읽지 못할 때는 좀 무식한 게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든다. 그러나 다행히도 십이지 동물들의 한자는 대강 안다. 1995년 방영된 애니메이션 <꾸러기 수비대>의 마법 같은 주제가 덕분이다.
"똘기 떵이 호치 새초미 자축인묘, 드라고 요롱이 마초 미미 진사오미, 몽치 키키 강다리 찡찡이 신유술해."
자동으로 튀어나오는 이 경쾌한 리듬! 한국의 20대 30대 중 상당수가 십이지 순서를 완벽하게 외운다면 거기엔 이 주제가가 백 퍼센트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p.160
그나저나 최근에 만화책들을 다시 보며 새삼 깨달은 것이 있다. 바로 순정만화가들은 일찌감치 고양이의 매력을 깨달은 종족이라는 사실이다. 그 시절에 트위터나 인스타그램이 있었다면 제일 처음 자기 집 고양이 사진을 올려 RT를 타는 사람들은 분명 이 사람들이었겠다는 확신이 든다.
p.164
창작욕, 책임감, 성실함이란 말로 포장된 험난한 여정을 반복하는 일이 얼마나 커다란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지, '너는 네가 좋아하는 일 하잖아'라는 말이 얼마나 무용한지, 지금은 감히 안다. 끝없는 불평과 수시로 솟구치는 퇴사 욕구로 가득한 직장인의 세계에 발을 들인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