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 원도심 관련 유튭 동영상들이 재밌는 게 참 많다. 위의 것은 청년 창업 관련 동영상이다.


솔직히 재작년 쯤 한국에 갔을 때 한 집 건너 하나씩 카페들이 난립해 있는 것을 보고는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취업이 어려우니 창업을 선택하는 청년들이 많고, 상대적으로 쉽게, 저자본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카페 등이다 보니 이러한 아이템으로 창업을 하게 되지만, 결국은 과도한 경쟁에 내몰리게 될 것이라는 생각... 


그러다 작년 가을에 한국에 가보고는 생각이 바뀌었다. 금호역 앞의 작은 카페였는데, 커피 맛은 정말 탁월했지만 위치도 안좋고 가게도 작아서 곧 망하겠지 했던 곳이 맛있다고 입소문도 나면서 장사를 잘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커피 전문성에 있어서는 이곳 영국의 웬만한 커피점들, 그러니까 스타벅스 같은 곳들과 비교해서 확연히 한 두 단계 위였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이 있고, 그것에 대해 전문성도 갖추고 있다면, 굳이 넥타이 매고 아침마다 사무실로 출근하여 책상에 붙어 앉아서 일생을 보낼 필요가 있을까? 꼭 그래야 할까?


좋은 대학에 가기 위해 새벽부터 밤까지 참고서와 싸우고,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는 또 똑같은 일을 반복하여 예컨대, 공무원이 되고, 그 관료 사회에서 비슷하게 기계적인 업무를 하며 하루를 보내다가, 몇몇은 이런 거 하려고 그토록 치열하게 공부를 하며 젊음을 불태웠나 하는 회의에도 빠지고... 남들 하는 대로 하라는 표준 경로에 대한 압박은 여전히 강력하지만, 그 경로 밖의 다른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도 많아지는 것 같고, 그러한 사람들을 위한 기반 조건들도 어느 정도 성숙해 가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다.


재작년 우리 집에 놀러 왔던 화가 부부. 남편은 중학교 미술 교사를 하고 있었다. 같이 강가를 걸으면서 현대 미술에 대한 재밌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고, 벤츠 자동차 박물관에 가서는 전시품들의 구성 방식, 예컨대 용접을 어떻게 했는가 하는 것 등에 대해 대화를 하며 함께 즐거워 하기도 했었다. 그런데 그 분은 자신의 교직 생활에 답답해 하고 있었고 결국 작년에 교직을 그만두고 제주도로 내려가 정착을 하였다. 지금이 삶에 있어 가장 행복한 때라고 한다. 그러면 뭘 먹고 사나? 이러 저러한 문화 사업이 있어서 공모해서 프로젝트를 따내고 그런 작업을 하면서 살고 있단다. 


이런 얘기들을 하면서 아내에게 이리 말한다. 나도 예술적인 감수성이 있었더라면! 어쨌든 우리는 둔한 사람들인지라... 


남들 하는 대로 하라는 압박은 여전히 강력하다. 그러나 그런 삶이 언제나 정답은 아니라는 자각은 50, 60대의 은퇴 기로에 놓인 사람들 뿐 아니라 젊은 세대에게도 왕성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그것은 매우 건강한 자각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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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튭에서 목포 적산가옥 관련 동영상을 찾아보니 많이 나온다. 몇 개 봤는데 이 영상이 가장 아름답고 기억에 남는다)


최근 본 한국 뉴스 중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민주당 손혜원 의원의 투기 의혹을 보도한 SBS 뉴스였다. 어제 SBS 뉴스에서는 이해 충돌의 회피 원칙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예컨대, 손혜원이 정부에 게스트하우스 활성화 대책을 요구하면서(공익) 동시에 자신과 관계 있는 사람에게 게스트하우스를 운영토록 했다면(사익) 이는 이해 충돌의 회피 원칙에 저촉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의문이 아주 그럼직한 가설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구체적으로 이 사안을 검증해야 할 것이다.


무엇을 검증해야 할까? 손혜원이 요구한 대책과 그 게스트하우스의 개발, 운영 사이의 어떤 관계. 예컨대, 그것이 정책화됨으로써 손혜원 측이 게스트하우스를 구매하고, 리모델링하고, 홍보하고, 운영하고 하는 등등에 있어 어떤 직간접적 이익을 얻었는가? 만일 그렇다면 그 이익은 어느 정도인가? 꼭이 이익을 본 것은 없다고 하자. 그렇더라도 다음 역시 검증 대상이 될 수 있다. 손혜원이 그 과정에서 의원 특권으로 접근 가능한 정보를 이용하였는가? 혹은 부당한 압력을 행사하였는가? 혹은 본인이 직접 구매, 운영하지 않고 제삼자를 내세운 점에 있어서 불법은 없었는가? 등등.


그런데 SBS의 보도에는 사실상 이 검증 부분이 없다. SBS는 이런 검증 절차를 수행하지 않았거나, 그 결과가 애초 가설과 부합하지 않자 이를 보도하지 않은 것 같다. 그런데 이는 정말 심각한 문제다. 가설과 결론을 아무렇게나 뒤섞으면 못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왜 SBS는 이런 허술한 보도를 하였을까? 손혜원의 목포 구시가에 대한 구상은 도심재생 방식의 개발이다. 그런데 SBS의 모기업은 토건 기업이고 이런 기업은 재개발 방식의 개발로 먹고 살기 때문에 손혜원의 방식과는 이해가 배치된다. 그러므로 SBS 뉴스는 모기업의 이해에 상충되는 손혜원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자, 이렇게 아주 그럼직한 가설 하나가 성립되었다. 물론 이것은 하나의 가설이다. 그러나 SBS가 하는 방식대로라면 우리는 이 가설을 그대로 결론으로 삼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SBS 뉴스는 모기업의 이해에 상충되는 손혜원을 공격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라고. 그리고 해외 사례든 뭐든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사례들을 아무 것이나 가져다 앞 뒤로 배열해 두면 된다. 


우리는 어떤 논쟁에서든 승리할 수 있다. SBS가 이를 반박하기 위해 수 많은 증거를 들이민다고 해보자. 그래도 우리는 요지부동이다. 이렇게 말하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토건 기업을 모기업으로 하는 방송의 뉴스가 부동산 개발 관련 보도를 하는 것 자체가 이해 충돌의 회피 원칙을 어기는 것이라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나? SBS 뉴스가 정말 진정성 있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 진정성을 증명하기 위해 SBS의 뉴스 부문을 없애든지, 아니면 모기업이 SBS를 운영하는 것 자체를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가? 


(부질없는 논쟁들... 이런 부질없는 논쟁들이 온 세상에 꽉 차 있다. 피곤하고 싶기 때문일까?)


사실 이번 논란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이런 것들이 아니라 손혜원이 문화의 영역에서 그동안 해온 일들이었다. 재작년 한국에 갔을 때 서울 성북동에 있는 만해 한용운 선생의 성북동 심우장을 찾았었다. 좁은 골목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변소 냄새가 풍기고 이윽고 만해 선생의 자택이 나온다. 아직 서울에 이런 달동네스러운 골목이 남아 있다는 것에 놀랐다. 예를 들면 내가 태어난 서울 옥수동의 달동네는 재개발로 이제 흔적도 찾을 수 없다. 작년 한국에 갔을 때는 김제의 이모 댁에 들렀는데 아파트 단지가 서 있었다. 또, 익산에서 기차를 기다리는데 역주변에 거대한 아파트 단지가 건설되고 있었다. 왜 이런 곳에 저런 아파트가 서지? 너른 땅에 마당 있는 집을 지을 수도 있을텐데... 물론 각자에게는 각자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요즘의 한국에는 어떤 각성, 혹은 좀 더 중립적으로 말해서 어떤 새로운 관점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느낄 수 있다. 예컨대, 성북동 동사무소에서 본 한옥 짓기 학교 포스터. 그것을 굳이 전통의 발견이라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의 발견이라고 해야 하리라.


구시가를 개발한다고 이명박 식으로 싹 다 밀고 아파트, 상가를 지어야 할까? 이제 더 이상 사람들은 그렇게 단순한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나전칠기같은 것은 박물관에나 들어가야 할 물건일까? 영국 사람들 동네에 한 두개씩 화랑이 있고 집집마다 벽에 그림이 한 두 점씩 걸려 있는 것처럼, 앞으로 한국의 집들 거실에 칠기들이 한 두 개씩 놓이게 되리라는 것은 아주 쉬운 예상일 것이다. 초등학교 아이들이 피아노만큼이나 가야금, 거문고를 배우게 되리라는 것도. 창, 문 등에 대한 한국인들의 감수성이 되살아나리라는 것도. 영국의 가든은 집 뒤에 숨어있다. 그래서 그 집의 가든이 어떤지는 그 집에 들어가 봐야만 알 수 있다. 영국 사람에게 집이란 그의 성이라는 말은 이런 폐쇄성을 의미한다. 반면 전통적인 한국의 마당은 집 앞에 있다. 마당을 거쳐야만 집으로 들어갈 수 있다. 나는 이런 마당의 개념이 너무도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마당에 대한 이러한 감수성을 한국 사람들은 앞으로 더욱 자각하게 될 것이다. 런던의 브릭 레인이나 서울의 인사동도 특색있는 거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내 눈에는 둘 다 너무 상업화되어 있는 것 같다. 다시 말하면 관광객을 위한 거리같다는 느낌, 거리 자체가 자신의 컨텐츠를 생산하는 것을 멈추었다는 느낌. 목포 구시가의 개발에 대해서 손혜원이 한 이야기 중 내게 가장 큰 공명을 준 것은, 거기 직접 가서 살면서 카페를 하든 게스트하우스를 하든 하라, 라는 것이었다. 단순히 젠트리피케이션을 피해야 한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목포 구시가가 일차적으로 그곳의 주민들, 목포의 시민들을 위한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그렇지 않으면 또 하나의 상업지구가 되어 흔하디 흔한 관광 거리가 될 것이라는 뜻으로 나는 받아들였다. 그렇게 해야만 자체적인 콘텐츠 생산이 가능해진다. 무엇보다도 거기에는 고풍스러운 적산가옥들이 있고, 손혜원에 따르면 나전칠기 박물관이 올 것이고, 칠기 장인들이 공방을 낼 것이고, 카페, 찻집, 게스트하우스, 소극장, 작은 공연장 등등이 들어설 것이고... 한국은 콘텐츠가 매우 매우 풍부한 나라이기 때문에 이 정도 규모의 거리를 메우는 것은 일도 아닐 것이다. 


이런 점들에 대해 대충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SBS의 난동을 계기로 그것을 구체적으로, 비젼을 가지고, 큰 규모에서 실행하고 있는 '부자'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너무도 놀랍고 흥분이 된다는 것이다. SBS가 이 사업에 대해 이렇듯 대대적인 홍보를 해주었으니 각종 콘텐츠를 가진 사람들이 목포를 정착지로 활동할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지 않을까 싶다. SBS 뉴스가 신뢰성에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 것이 이 좋은 일의 댓가라니 거의 꿈만 같이 완벽한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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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영국 정부와 EU의 합의안이 영국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나의 첫 반응은? 꼴 좋다. 원래는 한 달 전, 그러니까 작년 연말에 했어야 할 표결이었다. 그런데 메이 총리가 예정되어 있던 테레비젼 토론도 취소하고, 표결 당일이든가 전날이든가 표결 자체도 취소해 버렸다. 그때 표결했으면 이렇게 크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표결 전에는 최대로 잡아 150표 안쪽으로 지면 총리가 사임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230표로 지고 나서도 메이 총리는 사임할 생각이 없단다. 재미있는 나라다.


이번 합의안이 부결된 이유. 누누이 말한 것처럼 영국 정치의 부재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정치적 무능력, 무책임.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를 어떻게 할까? 에라, 모르겠다. 다음으로 넘기자. 불필요한 불확실성을 신속하게 제거하는 것이 정치의 책무라면 메이 총리는 이런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국경 문제에 대해 이번 합의안은 최종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기 전까지 현상태를 유지하되, 영국이 일방적으로 이 상태를 변경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강경파들이 보기에 이는 영국을 EU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이고 그러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노동당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번 합의안은 잠정적인 것이므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잠정적인 것이 영구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이 말장난의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다.  


둘째, 엘리트주의적, 대결주의적 정치. 결과적으로 이번 합의안은 제일 야당인 노동당 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메이는 시종일관 노동당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메이는 노동당을 배척하고 당내의 60석 정도에 불과한 강경파들을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메이는 합의안도 망치고, 합의안이 의회에서 부결되는 사태를 초래하여 영국을 노딜의 위험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메이가 노동당과 협의하여 합의안을 만들어 냈다면 압도적인 찬성으로 의회 통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메이가 고대해 마지 않던, 위기의 시대에 순조롭게 브렉싯이라는 과업을 완수한 위대한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당장 오늘 메이에 대한 불신임 표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메이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국민들은 코벤의 노동당이 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제2의 국민투표가 가능할까? 국민투표를 다시 하게 되면 EU 잔류가 55:45 정도로 우세할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상적으로는 7:3, 적어도 6:4 정도가 되어야지 재투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노딜에 대한 우려의 기사들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들의 30% 정도가 노딜을 원한다. 이 사람들은 브렉싯이 주권의 문제이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대단한 사람들이기는 하다. 암튼 분명한 것은 재투표를 할 정도로 여론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총선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다. 총선을 통해 노동당 주도의 연정을 설립하고 EU 탈퇴 시한을 연장한 후 관세동맹 잔류를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면 강경파를 제외하면 크게 반발할 세력이 없을 것이다. 사실은 메이가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본다. 그러나 보수당도 메이도 노동당이 집권하는 꼴을, 특히나 메이는 자신이 불명예 퇴진하는 사태를 감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총선을 한사코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남의 일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영국 국민들도 남의 일 보듯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다운 조바심을 낸 결과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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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2019-01-17 1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제 메이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이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누구나 예상했던 것이지만 표차는 아주 적었다. 19표. 메이는 다음 주 월요일까지 대안(플랜 B)을 만들어 의회에 보고해야 한다. 그러므로 지금 각계의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중이란다. 이런 얘기들이 들린다. 사람들이 메이에게 좀 더 유연할 것을 충고하고 있다고, 노동당의 관세동맹 잔류안을 받아들이라고... 노딜 브렉싯을 피하기 위한 가장 쉽고 현실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EU도 좋아할 안이고. 문제는 메이 총리가 이를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메이는 노동당의 안은 브렉싯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거기다가 노동당 당수 코벤과 인간적으로 사이가 너무 틀어져 있다. 현재 메이는 노동당 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중이라고 한다. 메이는 자신의 합의안이 노딜 브렉싯보다 국민들 사이에서 더 인기가 없었다는 사실을 아직도 모르고 있는 모양이다. 메이는 어제 의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개인이나 자기 당의 이익보다는 국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십시오.˝ 영국에게, 그러므로 메이에게 선택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담 주 월요일 대타협의 뉴스를 기대한다.

weekly 2019-01-24 04:23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영국의 정치 상황은 나의 낙관론, 혹은 순진함을 비웃는 듯 하다. 메이 총리는 여전히 강경파들을 회유하여 자신의 안을 통과시키려 하고 있다. 노딜 브렉싯이라는 재앙도 불사하면서. 메이의 수정안은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에 대해 영국의 자주권을 강화하자는 것이지만 이 안이 EU에서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하다. 그러므로 메이는, 이번에는 EU를 상대로 블레임 게임을 벌이면서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 할 것이다. 메이를 욕하는 것도 이제 지겨운 일이다.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의 이번 호 표제를 보니 이 모든 난장판의 원흉은 정치권이라고 비판하고 있더라. 물론 동의는 한다. 그러나 궁극적인 원흉으로 지목되어야 할 것은 영국 국민들일 수 밖에 없다.
 
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서 가져 온 푸코의 “성의 역사” 제1권. 예쁘게 장정된 이 얇은 책을 보니 1990년대 한국에서 이 3권짜리 “성의 역사”가 일으킨 열풍이 새삼 떠오른다. 이 책은 거리를 지나는 누군가의 손에도 들려 있었고, 어느 곳 탁자 위에도 놓여 있었다. 눈에 띄는 장정이어서 그런지 어디서나 이 책과 맞닥뜨리고는 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런 흐름에서 낙오되어 있었던 것 같다. 뒤늦게 책을 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러나 별 감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이번에 다시 책을 펼쳐 들었는데, 첫 몇 페이지를 읽다가 문득 원저의 출판 연도가 궁금해졌다. 1976년. 상당히 늦게 나온 책이다. 무엇에 대해서? 68에 대해서. 이 책에서 풍기는 사후적, 평가적 분위기는 그런 거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68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야심 찬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의 급진성이 특히나 도드라져 보인다. 푸코가 그 기획을 제대로 성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인데, 이는 푸코의 방법론을 고찰한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마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개정판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라도, 초판에서는 원서의 ‘섹슈얼리티’가 ‘성적 욕망’으로 번역되어 있다. 내 생각에 이는 완전한 오류다. 이 책의 주요 테제 중 하나는 성을 욕망이나 본능, 유기체적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요 테제 중 하나인 억압 가설의 폐기는 사실상 욕망 이론의 폐기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에게 섹슈얼리티란 무엇인가? 성sex을 핵으로 하는 이러 저러한 현상들의 총체인가? 푸코는 이러한 관점에 반대한다. 푸코에 따르면 섹슈얼리티란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육체, 쾌락, 담론, 지식 등의 영역들이 권력의 전략에 따라 연결된 거대한 복합체다.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복합체는 17, 18 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에서 나타나 전계급으로 확대되어 갔다. “성의 역사”라는 책이 평가적이라는 말은, 그리고 그것이 급진적이라는 말은, 성을 유기체적 에너지의 흐름으로 해석하고, 그러므로 억압과의 관련 하에서 그것의 해방을 주장하는 이론들은 도학적이고 억압적인 담론들 못지않게 근대적 섹슈얼리티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푸코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푸코의 정의에서 칸트주의의 흔적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섹슈얼리티가 유럽 고전주의 시대의 권력의 전략에 있어 어떤 중요한 기제라면, 예컨대 조선 시대의 섹슈얼리티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분명 우리는 섹슈얼리티의 일반적 용법에 따라 이러한 사고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섹슈얼리티와 유럽 고전주의 시대의 섹슈얼리티를 비교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말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구나 이 공통적인 것을 성sex이라 지칭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성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실재reality’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성 역시 특정 섹슈얼리티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푸코 사이의 논쟁은 순환적일 수 밖에 없다. 이 논쟁은 정신 밖에 실재가 존재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실재론-관념론 논쟁의 현대판이고, 그 기반은 주관성-객관성의 이원론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푸코는 여전히 그 이원론에 기반하여 칸트주의적 해법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푸코가 스타일리스트라는 점일 것이다. 푸코는 문장의 수사적 효과를 무척 중요시하여 어떤 대목은 거의 시처럼 읽힐 정도이다. 또 푸코는 실증적 자료들을 제시하는 수고를 들이는 대신 인상주의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일화들을 불쑥 불쑥 들이 민다. 결과적으로 푸코는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는 헤겔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즉, 독자들은 수미일관하는 논증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것의 허구성, 기만성을 의심케 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마지막 장에서 푸코는 봉건 시대의 죽음에 대한 권리와 근대의 삶에 대한 권력을 대비시킨다. 전자를 봉건 시대 군주의 권리로, 후자를 근대 국민 국가 관료제가 행하는 권력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푸코는 근대에 있어서의 대규모 전쟁, 사형 제도, 자살 등 죽음에 대한 권리와 더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삶에 대한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나간다. 명쾌하다. 그러나 문제는 죽음에 대한 권리와 삶에 대한 권력을 병렬적으로 대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홉스봄이 말하는 두 개의 혁명(산업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 유럽 세계 전체를 뒤흔들 때까지 유럽 세계의 사람들 대부분은 농촌 공동체에 살았다.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규율한 것은 군주나 영주의 폭력적 명령들이라기보다는 농촌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이었을 것이다. 근대 국민 국가의 중앙집권적 관료 조직의 장치들이 대체한 것은, 그러므로 바로 이 관습과 전통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민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기제로서 대비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관습(전통)과 근대적 제도, 기관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푸코가 공들여 서술한 마지막 장 전체의 의의가 허물어져 버린다. 푸코는 전통, 관습에 대해서는 아예 논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붕괴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방법이 없어 보인다. 헤겔주의적 이론들의 운명을 따르는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관습과 근대적 장치들 사이의 대비라는 관점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 세계에 국민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국가가 국민이라는 단일체를 관리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대표적으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각종 제도적 장치들(행정 조직, 학교, 헌법 등등)이 구비되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여기서 사회, 혹은 공적 공간의 창출이라는 측면에 주의해보자. 공적 공간이 창출되면서 사적 공간(가족, 마을 공동체 등)도 동시에 특정되고, 그러면서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 관계가 성립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학교란 인구의 생산 계열(노동, 출산, 가업 잇기 등등)에의 즉각적인 투입을 보류하면서 창설된, 가정과 내적 관계에 있는 공적 공간이다. 여기서 내적 관계는, 예컨대 공적 공간(학교)에서의 수음에 대한 비판과 훈육은 학업이나 신체 능력의 신장, 더 넓게는 건강한 국민의 양성이라는 국가 수준에서의 이념과 관련되겠지만, 그것이 가정에 투사되면 애초의 이념과 다른 논리가 발현되어, 요컨대 청소년의 금지된 성적 활동과 부모(성인)의 합법적 성적 활동이라는 두 영역을 뚜렷이 대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시한다. 이 두 영역 사이의 긴장 관계는 프로이트에 의해 잘 포착된 바 있고, 그것의 본질은 (내 생각에는) 아이의 눈을 의식하게 된 어른의 성일 것인데,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실은 근대에 발생한 공적 공간이라는 아이디어는 푸코의 것이다. 푸코는 이를 (혼인 장치와 대비되는) 섹슈얼리티 장치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내가 이를 사적 공간, 공적 공간이라 한 것은 당대 유럽 역사의 전체 운동 속에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해 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푸코라면 이러한 총체사적인 입장을 단연코 거부할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하나의 계열 안에서만 문제를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근대라는 시기에 공적 공간, 혹은 섹슈얼리티의 장치가 등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내게는 이것이 커다란 문제로 보이는데, 발생론적 과정을 구축할 수 없는 이론은 자의적 구성에 빠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이론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 관계는 의도적이고 동시에 비주관적이다. 권력 관계 구석 구석에 계산이 스며들어 있다. 일련의 목표와 목적 없이 행사되는 권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권력이 개별적인 주체의 선택 또는 결정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108페이지) 우리는 푸코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비-주체적인 의도란 충분히 가능하며 건전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제는 권력, 의도, 전략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구축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은 자의적인 것이 되고 만다. 도대체 푸코는 근대적 권력의 전략이 육체에 대한 규율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그것이 과학인가 신화인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우리는 푸코의 자의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리학 이론들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이론과 실천은 동일한 차원에 있다. 근대 세계의 역학을 푸코의 주장대로 권력의 지배 전략과 그 저항이라는 단차원 안에서 이해해보자. 이런 관점에서, 예컨대 한국에서 최근 문제가 된 사립 유치원 사태에 어떤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푸코적인 해법은 신자유주의적인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 될 것이다. 푸코식의 정치 철학은 파산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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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로 2019-01-02 18: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weekly님 (글도 자주 써주세요ㅎㅎ) 약간 관련 있는 푸코의 언급이 생각나 찾아 봤는데

˝내 책을 읽은 사람들, 심지어 내 작업의 가치를 인정하는 사람들조차도, 내게 종종 웃으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당신도 결국 알고 있겠죠? 당신이 이야기하는 것이 허구일 뿐이라는 것을요!˝ 그러면 나는 항상 이렇게 대답하지요. ˝그 누가 자신이 허구가 아닌 것을 쓴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을까요?˝

이렇게 나오면 더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습니다... 조금 앞에서는 ‘여전히 자신에게 진리의 문제는 매우 까다로운 것‘이라고도 말하네요. 저도 최근에 읽은 김에 첨언을 해봅니다. (개정판에선 sexuality를 성생활로 번역하고 있네요. 약간 농담조로 할법한 ‘성성‘ 이라는 번역어를 택하는 분들도 있는 것 같습니다)

weekly 2019-01-03 17:14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이여로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인용해 주신 푸코의 말이 저는 여러 면에서 아주 아주 마음에 드네요.:)

섹슈얼리티라는 말의 번역에 대해서 저는 한국의 번역자들이 지나치게 원칙주의적이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냥 ˝섹슈얼리티의 역사˝라고 하면 안되는 것인지... 불경을 처음으로 중국어로 번역하던 시대에도 ‘원칙‘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을 터인데 말입니다.
 

엊그제 비비씨에서 방영하는, 존 르 까레 원작의 6부작 "북치는 소녀" 완결편이 끝났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한다 하여 방영 전부터 큰 화제를 모았었는데, 나도 보면서 그 세련되고 섬세한 연출에 감탄을 금할 수 없었다. 영어도 할 줄 모르고 서구와 아랍 문화에 문외한인 한국인 감독이 어떻게 저런 섬세한 연출을 할 수 있었을까? 나는 요즘 비비씨 드라마들이 하나같이 매너리즘에 빠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박찬욱의 이 작품을 더욱 신선하게 느낀 것일 수도 있겠다.


"북치는 소녀"는 팔레스타인 테러 조직을 소탕하려는 이스라엘 정보 기관, 그리고 거기에 휘말려 들어간 젊고 예쁜 영국인 연극 배우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작가는 최대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겠지만 이 작품이 친-이스라엘적인 것이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 같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 반대의 입장에 서는 것은 이곳 영국에서는 아예 불가능했을 것이다. 


예를 들면, 최근 1, 2년간 영국 노동당 안에서 벌어진 가장 커다란 논란은 반-유대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이스라엘 정부가 팔레스타인에 행하는 탄압을 비판해도 될까? 비판하면 안된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이스라엘 정부의 탄압 정책을 비판하는 것은 그 자체로 반-유대주의를 구성하거나, 그것을 부추길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우스운 일이다. 이중으로 조소를 보낼 만 하다. 첫째, 영국이 팔레스타인 분쟁의 원천적인 기초자라는 점에서(즉, 팔레스타인 사람들에 대한 근원적인 가해자 중 하나라는 점에서), 그리고 둘째, 반-유대주의라는 금기는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 중에서 대표적으로) 영국이 그동안 저질러 온 반-인륜적인 행태들을 히틀러라는 절대악 뒤에 숨기려는 가련한 노력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래서 이런 생각도 해본다. 이런 인화성 있는 이야기를 다루는 게 껄끄러워 아예 기획 단계에서부터 제삼국의 감독을 데려 오기로 한 것은 아닐까 하고... - 근거가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방영이 시작되고 나서 허겁지겁 책을 주문했는데, 책이 늦게 오기도 했고, 이야기가 굉장히 느리고 섬세하게 전개되어 후다닥 읽을 수 있는 성격의 책도 아닌지라 결국 초반부 밖에는 읽지 못했다. 여튼, 여주인공 역을 맡은 배우가 마치 책에서 튀어나온 듯 책에서 묘사된 인물 그대로여서 감탄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드라마, 혹은 이 책의 근원적인 문제는 도저히 해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 같더라. 즉, 젊은 영국 여자(즉, 서방 세계의 젊은이)가 강자 이스라엘 편에 서서 약자 팔레스타인 저항 조직을 파괴하려 한다는 것은, 아무리 많은 페이지를 동원해 그 동기를 구축하려 해도 도저히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는 결코 드물지 않겠지만...


존 르 까레는 스파이 소설이라는 대중 쟝르의 대가이다. 더하여 단순히 대중 소설 영역을 넘어서 영국의 대표적인 현대 작가 중 하나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의 책들을 읽다보면 이러한 평가가 결코 헛말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낄 때가 많다. 그러나 대표작 중 하나랄 수 있는 "북치는 소녀"의 이런 근원적인 넌센스와 마주하게 되면, 이런 넌센스를 극복하는 방법은 딱 하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뭐 그냥 재미로 읽는 대중 소설인데 뭘 더 바래, 재밌으면 그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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