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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의 역사 1 : 지식의 의지 - 제3판 ㅣ 나남신서 410
미셸 푸코 지음, 이규현 옮김 / 나남출판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한국에서 가져 온 푸코의 “성의 역사” 제1권. 예쁘게 장정된 이 얇은 책을 보니 1990년대 한국에서 이 3권짜리 “성의 역사”가 일으킨 열풍이 새삼 떠오른다. 이 책은 거리를 지나는 누군가의 손에도 들려 있었고, 어느 곳 탁자 위에도 놓여 있었다. 눈에 띄는 장정이어서 그런지 어디서나 이 책과 맞닥뜨리고는 했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나는 그런 흐름에서 낙오되어 있었던 것 같다. 뒤늦게 책을 샀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줄을 그으며 읽었다. 그러나 별 감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이번에 다시 책을 펼쳐 들었는데, 첫 몇 페이지를 읽다가 문득 원저의 출판 연도가 궁금해졌다. 1976년. 상당히 늦게 나온 책이다. 무엇에 대해서? 68에 대해서. 이 책에서 풍기는 사후적, 평가적 분위기는 그런 거리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68의 한계를 돌파하고자 하는 야심 찬 기획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이 책의 급진성이 특히나 도드라져 보인다. 푸코가 그 기획을 제대로 성취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일 것인데, 이는 푸코의 방법론을 고찰한 다음에야 판단할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번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번에는 한 마디 지적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개정판에서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몰라도, 초판에서는 원서의 ‘섹슈얼리티’가 ‘성적 욕망’으로 번역되어 있다. 내 생각에 이는 완전한 오류다. 이 책의 주요 테제 중 하나는 성을 욕망이나 본능, 유기체적 에너지의 흐름이라는 식으로 해석하지 말라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 책의 또 다른 주요 테제 중 하나인 억압 가설의 폐기는 사실상 욕망 이론의 폐기와 다른 것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푸코에게 섹슈얼리티란 무엇인가? 성sex을 핵으로 하는 이러 저러한 현상들의 총체인가? 푸코는 이러한 관점에 반대한다. 푸코에 따르면 섹슈얼리티란 특정한 시대와 장소를 배경으로 하여 육체, 쾌락, 담론, 지식 등의 영역들이 권력의 전략에 따라 연결된 거대한 복합체다. 푸코가 보기에 이러한 복합체는 17, 18 세기 유럽의 부르주아 계급에서 나타나 전계급으로 확대되어 갔다. “성의 역사”라는 책이 평가적이라는 말은, 그리고 그것이 급진적이라는 말은, 성을 유기체적 에너지의 흐름으로 해석하고, 그러므로 억압과의 관련 하에서 그것의 해방을 주장하는 이론들은 도학적이고 억압적인 담론들 못지않게 근대적 섹슈얼리티의 직접적인 산물이라는 푸코의 비판에서 잘 드러난다.
섹슈얼리티에 대한 푸코의 정의에서 칸트주의의 흔적을 느낄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섹슈얼리티가 유럽 고전주의 시대의 권력의 전략에 있어 어떤 중요한 기제라면, 예컨대 조선 시대의 섹슈얼리티란 말은 성립하지 않는 것일까? 분명 우리는 섹슈얼리티의 일반적 용법에 따라 이러한 사고를 표현할 권리가 있다. 그리고 조선 시대의 섹슈얼리티와 유럽 고전주의 시대의 섹슈얼리티를 비교하는 것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이 말은 전자와 후자 사이에 어떤 공통적인 것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누구나 이 공통적인 것을 성sex이라 지칭할 것이다. 이때 우리가 성이라는 말로 의미하는 것은 어떤 ‘실재reality’이다. 그러나 푸코는 이 성 역시 특정 섹슈얼리티에 의해 구성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우리와 푸코 사이의 논쟁은 순환적일 수 밖에 없다. 이 논쟁은 정신 밖에 실재가 존재하느냐를 두고 벌어진 실재론-관념론 논쟁의 현대판이고, 그 기반은 주관성-객관성의 이원론이다. 내 생각에 이러한 이원론은 극복될 수 있는 것이다. 여하튼 푸코는 여전히 그 이원론에 기반하여 칸트주의적 해법에 기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여러 요소들이 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푸코가 스타일리스트라는 점일 것이다. 푸코는 문장의 수사적 효과를 무척 중요시하여 어떤 대목은 거의 시처럼 읽힐 정도이다. 또 푸코는 실증적 자료들을 제시하는 수고를 들이는 대신 인상주의적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는 일화들을 불쑥 불쑥 들이 민다. 결과적으로 푸코는 자신이 그토록 반대하는 헤겔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즉, 독자들은 수미일관하는 논증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는 동시에 그것의 허구성, 기만성을 의심케 되는 것이다.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마지막 장에서 푸코는 봉건 시대의 죽음에 대한 권리와 근대의 삶에 대한 권력을 대비시킨다. 전자를 봉건 시대 군주의 권리로, 후자를 근대 국민 국가 관료제가 행하는 권력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그러면서 푸코는 근대에 있어서의 대규모 전쟁, 사형 제도, 자살 등 죽음에 대한 권리와 더 많은 관련성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들을 삶에 대한 권력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해나간다. 명쾌하다. 그러나 문제는 죽음에 대한 권리와 삶에 대한 권력을 병렬적으로 대비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홉스봄이 말하는 두 개의 혁명(산업 혁명과 프랑스 대혁명)이 유럽 세계 전체를 뒤흔들 때까지 유럽 세계의 사람들 대부분은 농촌 공동체에 살았다.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규율한 것은 군주나 영주의 폭력적 명령들이라기보다는 농촌 공동체의 관습과 전통이었을 것이다. 근대 국민 국가의 중앙집권적 관료 조직의 장치들이 대체한 것은, 그러므로 바로 이 관습과 전통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민의 삶을 직접적으로 규율하는 기제로서 대비되어야 할 것은 이러한 관습(전통)과 근대적 제도, 기관일 것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푸코가 공들여 서술한 마지막 장 전체의 의의가 허물어져 버린다. 푸코는 전통, 관습에 대해서는 아예 논하고 있지 않으므로 이러한 붕괴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방법이 없어 보인다. 헤겔주의적 이론들의 운명을 따르는 셈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관습과 근대적 장치들 사이의 대비라는 관점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 세계에 국민 국가가 등장했다는 것은 국가가 국민이라는 단일체를 관리할 수 있는 물질적 수단(대표적으로는 교통과 통신의 발달)과 각종 제도적 장치들(행정 조직, 학교, 헌법 등등)이 구비되었다는 것을 뜻할 것이다. 여기서 사회, 혹은 공적 공간의 창출이라는 측면에 주의해보자. 공적 공간이 창출되면서 사적 공간(가족, 마을 공동체 등)도 동시에 특정되고, 그러면서 둘 사이에 미묘한 긴장 관계가 성립되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학교를 예로 들어보자.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학교란 인구의 생산 계열(노동, 출산, 가업 잇기 등등)에의 즉각적인 투입을 보류하면서 창설된, 가정과 내적 관계에 있는 공적 공간이다. 여기서 내적 관계는, 예컨대 공적 공간(학교)에서의 수음에 대한 비판과 훈육은 학업이나 신체 능력의 신장, 더 넓게는 건강한 국민의 양성이라는 국가 수준에서의 이념과 관련되겠지만, 그것이 가정에 투사되면 애초의 이념과 다른 논리가 발현되어, 요컨대 청소년의 금지된 성적 활동과 부모(성인)의 합법적 성적 활동이라는 두 영역을 뚜렷이 대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지시한다. 이 두 영역 사이의 긴장 관계는 프로이트에 의해 잘 포착된 바 있고, 그것의 본질은 (내 생각에는) 아이의 눈을 의식하게 된 어른의 성일 것인데, 이른바 빅토리아 시대의 금욕주의의 많은 부분은 이러한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런데 실은 근대에 발생한 공적 공간이라는 아이디어는 푸코의 것이다. 푸코는 이를 (혼인 장치와 대비되는) 섹슈얼리티 장치라는 개념으로 포착했다. 내가 이를 사적 공간, 공적 공간이라 한 것은 당대 유럽 역사의 전체 운동 속에 섹슈얼리티의 문제를 포괄해 넣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푸코라면 이러한 총체사적인 입장을 단연코 거부할 것이다. 푸코는 권력이라는 하나의 계열 안에서만 문제를 다루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게 되면 근대라는 시기에 공적 공간, 혹은 섹슈얼리티의 장치가 등장하게 된 이유를 설명할 수 없게 된다. 내게는 이것이 커다란 문제로 보이는데, 발생론적 과정을 구축할 수 없는 이론은 자의적 구성에 빠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좀 더 이론적인 차원에서 살펴볼 수도 있다. 푸코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권력 관계는 의도적이고 동시에 비주관적이다. 권력 관계 구석 구석에 계산이 스며들어 있다. 일련의 목표와 목적 없이 행사되는 권력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권력이 개별적인 주체의 선택 또는 결정에서 유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108페이지) 우리는 푸코에 쉽게 동의할 수 있다. 비-주체적인 의도란 충분히 가능하며 건전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전제는 권력, 의도, 전략이라는 개념을 실제로 구축해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개념은 자의적인 것이 되고 만다. 도대체 푸코는 근대적 권력의 전략이 육체에 대한 규율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가?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대해 그것이 과학인가 신화인가 하는 의문이 끊이지 않는 것과 동일한 이유에서 우리는 푸코의 자의성을 의심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리학 이론들의 역사가 잘 보여주듯이 이론과 실천은 동일한 차원에 있다. 근대 세계의 역학을 푸코의 주장대로 권력의 지배 전략과 그 저항이라는 단차원 안에서 이해해보자. 이런 관점에서, 예컨대 한국에서 최근 문제가 된 사립 유치원 사태에 어떤 해법을 내놓을 수 있을까? 푸코적인 해법은 신자유주의적인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 될 것이다. 푸코식의 정치 철학은 파산할 수 밖에 없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