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는 분의 집에 놀러 갔다가 영화 기생충을 보게 되었다. 해외 영화제에서 큰 상을 탔다는 얘기는 얼핏 들었는데 그게 칸느 대상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여튼 기대를 잔뜩 안고 영화를 보게 되었다. 


2시간이 조금 넘는 시간이 조금도 의식되지 않을 정도로, 적당한 웃음거리와 적당한 긴장감을 끊임없이 제공해 주는 재미있는 영화였다. 기술적으로 상당히 깔끔한, 잘 만들어진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살인의 추억’을 개봉관에서 봤었고, 그러므로 봉준호가 천재라는 사실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런 감독에게 이 정도 작품은 소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 그만큼 내게는 이 작품이 가벼운 오락 영화 정도로 느껴졌다는 것이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살며시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왜 이 영화에 칸느를 줬을까?” 아내의 대답은 이랬고 나는 어느 정도 동의했다: “일본 영화 같잖아. 서구 사람들이 일본 스타일 좋아하니까 그런 거 아닐까?”


나는 이 영화가 계급 우화를 이용하고 있다는 점 말고는 그다지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야기를 풀어나가면서 관객들과 심리적 수싸움을 벌이는 감독의 수완이 놀랍다는, 즉 기술적 차원에서의 감탄 말고는 이 영화에 돌려 줄 것이 별로 없는 것 같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적 주제를 드러내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장면인, 이재민 대피소에서의 아버지의 대사를 보라. “무 계획이 가장 좋은 계획이다.” 여기 영국 말로 filler, 즉 구색이나 맞춰 시간이나 때우는 식의 무의미한 대사인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아들의 긴 나레이션도 마찬가지이다. 아무런 영감도 없고 뻔한 대사를 길게 늘어놓을 뿐이다.


현대 사회의 계급 문제를 다루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두 계급 사이의 상호 의존적 관계를 드러내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계급의 절대적 고착 과정, 즉 한 계급의 필연적 전락을 다루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 만약 봉준호 감독이 이 영화를 통해 계급 문제를 다루고자 한 것이 맞다면, 즉 웃기면서도 괴기스러운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계급 우화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감독은 가장 피상적인 방식으로 이 주제를 다룬 셈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자. 송강호 가족들은 반지하에 사는 백수들이다. 도대체 이들은 왜 이렇게 사는가? 영화에서 그들이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는 딱 하나이다. 그들에게는 확실한 계획이 있다. 그들은 그 계획을 깔끔하게 실현해 낸다. 코너링이 좋은 송강호를 비롯해 가족 각자의 개인기는 출중하다. 그런데 그들은 왜 반지하 방바닥에서 뒹굴며 그렇게 사는가? 답은, 주인집 가족이 캠핑을 떠난 후 그 집을 차지하게 된 반지하 가족들의 행태에서 드러난다. 그 반지하 가족들은 그 좋은 주택에서조차 반지하에서 살 때와 똑같이 술이나 퍼마시면서 뒹굴고 있는 것이다. 즉, 그 냄새는 반지하 집에 살면서 몸에 배인 것이 아니라 그네들의 DNA이며, 그네들의 운명인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보자면 이 냄새 때문에 주인집 남자를 살해한 것은 자신의 냄새, 자신의 계급, 자신의 운명, 자신의 존재에 대한 자기 혐오에 지나지 않는다.


안타깝게도 영화는 이런 식의 관점으로 일관되게 해석된다. 그리고 이 관점이란 하층 계급 사람에 대한 경멸의 관점이다. 예전에, 일베라는 사이트에서는 사람들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을까 궁금하여 그곳의 여기 저기를 구경해 본 적이 있었다. 큰 주제 중의 하나는 자기 계급에 대한 혐오였다. “내가 중국집 배달을 하는데, 잘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고, 못 사는 아파트에도 배달을 가보니, 진상들은 전부 못 사는 아파트에 몰려 있드라.” - 미안하게도 영화 기생충은 이런 관점에 머물러 있다. 아내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기분이 나빠졌다고 했다. 그 이유는 이 영화의 관점 바로 그것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이 영화가 우리 속의 아픈 무엇인가를 건드려서가 아니라 말이다.



2. 크리스마스에 맞춰 아마존에서 타겟 메일이 왔고 거기에 켄 로치 감독의 BBC 시절 작품을 묶어 놓은 것이 있었다. 나 스스로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 치고 주문을 했다.  CD 6장. 한 장에 두 편의 드라마가 담겨 있다. 총 18시간 30분의 분량이란다. 지금까지 4편의 작품을 보았다.


켄 로치가 BBC에서 한 작업 중 가장 큰 반향을 일으켰다던 ‘Cathy come home’은 두 번을 보았다. 한번은 혼자서, 또 한번은 아내와. 1970년 영국에서 순진하고 선량한 젊은 남녀가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살면서 전락을 거듭하다 결국 홈리스가 되고 아이들은 고아원에 뺏겨 버린다는 내용이다. 처음에는 더블 인컴이었다가 출산 때문에 남자만 돈을 벌어야 했는데, 운전을 하던 남편이 차사고를 내면서 일이 꼬이기 시작한다. 


아내와 한참을 토론을 했다. 그 젊은 부부가 만일 유죄라면, 그것은 모던 사회의 엄중함에 무지한 죄라는 것이다. 한번 집을 줄여 이사하면 이전 수준으로 회복하기가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절대 집을 줄여서는 안된다. 수입 총액을 계속 유지할 수 있지 않는 한 있던 수입원을 포기해서는 결코 안된다. 아이를 낳으면 여자 쪽이 직장을 포기하게 될 수 있기 때문에 함부러 아이를 낳아서는 안된다, 등등. (두 남녀 주인공이 결혼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를 낳지 않았다면, 그들이 홈리스가 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켄 로치는 주택 보급률이 너무 낫다는 현실과 아이를 홈리스 부모에게서 빼앗는 관료제 기구의 잔인함에 촛점을 맞춘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영국의 전후 첫 세대가 성년이 되어 교육, 결혼, 취직, 주택 마련 영역에서 맞닥뜨리게 된 사회적 갈등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좀 더 추상적으로 보자면 그것은 모던 라이프의 일상적 모습일 수도 있을 것이다.  - 이런 의미에서 한국에서의 '모던' 사회는 IMF를 기점으로 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실존적 이유(살아남는 것과 일정 생활 수준을 유지하는 것) 때문에 결혼과 출산, 다시 말하면 인간 공동체의 가장 중요한 계기들을 포기하게끔 강요하는 사회가 정의상 모던 사회인 것이다. 


(영화는 밝고 선량하던 캐시가 각종 보호소를 전전하면서 날카로워지고, 쉽게 화내고, 책임을 남들에게 돌리는 사람으로 변해가는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가족을 재건하는 일이 이제 불가능해졌다는 것을 깨달은 남편은 더 이상 캐시를 보러 오지도, 돈을 보내지도 않게 된다. 이미 노숙의 길에 접어 들었지도 모른다. 세상 어디든 젊은 남자에 대한 보호 장치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되니까. 그리고 이쯤 되면 이 두 젊은 부부는 하층 계급에 대한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키게 된다. 뻔한 진상 짓을 하며 가족에 무책임한 사람들! 영국말로는 쉐임리스라고 한다. 그들에게 보내는 경멸은 한편으로는 우리 스스로에게 보내는 안도이기도 하다. )



3. 요즘 즐겨 듣는 음악은 로저 워터스의 것이다. 핑크 플로이드의 ‘더 월’도 전곡의 작사와 거의 모든 곡의 작곡을 로저 워터스가 맡았기 때문에 사실상 그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더 월’은 주인공 핑크의 탄생부터, 그가 자신의 주위에 벽을 쌓는 과정, 그리고 기어이 그 벽을 부수고 마는 장면까지를 묘사하고 있는 컨셉트 앨범이다. 핑크가 벽을 쌓는 이유는 간단히 말할 수 있다. 모던 사회의 실존적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서이다. 그런데 그렇게 하여 안전해질 수는 있지만 새로이 고립감이 고개를 들게 된다. 그러므로 이 고립감을 극복하기 위해 일종의 연대감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거짓된 연대감이다(즉, 파시즘). 문제는 벽 자체를 허무는 것 뿐이고, 핑크는 결국 벽을 허문다. 그러나 ‘더 월’에서 핑크는 스스로의 결단으로 벽을 부수는 것이 아니라 신으로 상정되는, 매우 흉측하게 생긴 벌레라는 존재로부터 벽을 허물라는 판결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마치 사르트르의 유명한 “우리는 자유롭도록 처단되었다” 라는 명제에서처럼 우리는 벽을 허물도록 처단되었을 뿐이다. 즉, 사르트르의 명제에서 자유는 일종의 징벌이기 때문에 자유를 회피할 방법을 계속 모색하게 되는 것처럼, ‘더 월’에서 핑크는 벽을 부수라는 징벌에 대해 새로이 벽을 쌓을 궁리를 늘상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유에서의 회피와 벽을 쌓는 행위는 우리 존재의 영원한 조건이 된다. 이러한 순환성의 깊이 있는 구조가 락 앨범인 ‘더 월’을 주조하고 있다.  놀랍지 않은가?


‘더 월’을 듣는 두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을 배경으로 독립성 있는 곡 위주로 듣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체 곡의 흐름 그대로를 듣는 것이다. 후자의 방법에서는 싱글 컷이 가능한 독립적인 곡들은 상당히 이질적으로 들리게 될 위험이 있다. 나는 취향상 후자의 방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예컨대 ‘컴포터블리 넘’ 같은 곡들을 싫어하게 되고 만다. 

앨범의, 짧지만 인상적인 곡은 ‘The Thin Ice’ 라는 곡이다. 가사의 구절인 “If you should go skating / On the thin ice of modern life . . .  / Don't be surprised when a crack in the ice / Appears under your feet” 거의 우리의 관용구가 되었다. The thin ice of modern life보다 정밀하게 우리 시대의 실존을 정의할 있는 말이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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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핑크 플로이드를 즐겨 듣는다. 어렸을 때는 이 밴드를 좋아하지 않았다. 여러 가지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느리고 블루스적인 연주, 온갖 시각적, 음향적 효과의 과다한 사용, 촌스러운 신디사이저 사운드, 웬지 느껴지는 뽕끼 등등. 아마 레드 제플린의 기타 연주자 지미 페이지의 코멘트도 일조를 했을 것이다. "요즘 밴드들의 지적 우월성 과시가 도에 지나치다. 우린 그냥 사랑 얘기만 연주할 것이다." 


위 동영상은 The Wall 앨범 중의 한 곡이다. Mother라는 제목으로 이런 잔인한 가사를 쓸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어떤 이에게는 매우 매우 가슴 아픈 노래일 것이다. 특히나 영국에서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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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개혁에 대한 생각을 몇 번 적어 올렸으므로 마무리를 짓기 위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낙관론자이므로 사태가 여기까지 이를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쨌든 일은 이렇게 진행되고 있고, 검찰은 어떻게든 조국 전 장관을 구속 기소하려 할 것이다. --- 이것이 사태의 한 가닥이다.


검찰이 이길 수 있는 시나리오를 생각해 본다. 그것은 검찰 개혁을 좌절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문재인 대통령의 지지율을 심각하게 깍아먹어야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일단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와 기소가 문재인의 지지율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 같지는 않다. 


검찰에게 가장 좋았던 시나리오는 검찰의 조국 수사에 대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개입해 오고, 그리하여 검찰과 대통령이 충돌하는 모양새를 빚어 내는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문재인 대통령은 검찰의 할 일과 법무부가 할 일을 분명하게 경계지음으로써 이중의 효과를 보았다. 첫째는 검찰의 자율성을 철저히 보장한다는 것을 천명한 것이고, 둘째는 법무부의 업무 영역에 검찰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경고를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국의 법무부 장관은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 본인이다.


공수처나 검경 수사권 조정의 국회 통과와 상관없이 행정부 수반의 검찰 개혁 의지가 이렇게 강력하다면 검찰이 달리 저항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예전처럼 검찰 개혁을 주창하는 정치인들 몇을 날려 버린다고 끝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예전처럼 검찰이 집단적으로 항명한다고 끝날 일도 아니다. 여전히 총선 전망은 현 여당이 우세하고, 다음 대선 전망도 현 여당이 우세하다. 


검찰이 좀 더 똑똑했더라면 조국 일가에 대해 대대적인 수사를 벌일 것이 아니라 조국의 개혁안에 대해 일일이 꼬투리를 잡고 딴지를 걸어서 어느 정도 양보를 얻어내려 했을 것이다. 어정쩡한 타협안을 만들게 해서 이저 저도 아닌 개혁이 되게 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는 조국 장관을 검찰과 절연하게 했고, 그리하여 조국의 개혁안에 검찰 쪽 의견은 거의 반영되지 않은 것으로 안다. 그 연장선상에서 검찰 개혁은 철저하게 법무부와 문재인 대통령 본인 주도하에 논의되고 있고, 검찰은 여기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버린 것으로 본다. 검찰이 징징거리면 문재인 대통령은 예의 그 업무 분장을 이야기하면 된다. --- 검찰이 이길 수 있는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검찰 개혁은 결국 한국 민주주의의 완성도를 높이는 일이다. 역사는 목적론적으로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예컨대 모순이 어떤 마술에 의해 저절로 지양되는 식으로 운동하지 않는다. 어떤 철학자의 말대로 하루에 두 끼만 먹는 이탈리아의 가난한 노동자들에게는 하루 두 끼가 정상 상태인 것이다. 그것이 운동이 되고 혁명이 되기에는 그 객관적 상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직 갈 길이 멀긴 하지만 한국 민주주의의 마술과 같은 전진을 보노라면, 한국 역사의 어떤 특권 같은 것을 느끼게 한다. 그것은 한국의 역사가 특권 계급의 창설 없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에 기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어쩌면 이상이란 기억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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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튭으로 핑크 플로이드 음악을 즐겨 들었더니 위와 같은 타겟 광고가 왔고, 그래서 아내와 함께 동네 극장에 가서 보았다. 핑크 플로이드의 베이스 주자이자 주 작사/작곡자인 로저 워터스가 2017/18에 전세계를 돌며 공연한 것 중 네덜란드 단일 공연을 영상화한 것이다. 로저 워터스의 나이가 이미 70대 중반에 이르렀기 때문에 목소리가 나오기나 할까 걱정을 했었는데, 그의 목 상태나 활기는 전혀 걱정할 바가 아니었다. 핑크 플로이드의 베스트 곡들에 2017년에 나온 로저 워터스의 새 앨범의 몇 곡을 더해 연주하였다. (위 영상에서 젊은 여성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이 인상적인데 로저 워터스의 신보 중 '데쟈뷰' 라는 곡이 연주 중이었다. 미국의 드론 폭격 정책 등을 비판하는 매우 정치적인 곡이다.) 



같은 투어 영상 중 멕시코에서 공연한 것이라 한다. 핑크 플로이드 앨범 중 가장 에너지와 긴장감이 넘치는 '애니멀스' 중의 한 곡인데, 가히 멕시코 관중들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할 만 하다. 멕시코 젊은이들 앞에서 트럼프를 비꼬고 있으니 그럴 만도 할 것 같다. (로저 워터스는 내년에, 그러니까 트럼프 재선의 해에 미국, 멕시코 등지에서 공연을 연다고 한다. 공연 장소 중 하나로 멕시코를 선택한 이유는 설명이 달리 필요 없을 것 같다. 아쉽게도 내년 공연이 그의 마지막 공연일 것이라고 한다. 유럽에서 공연하면 꼭 보러 가려 했는데...)


저번 주 아침에 뉴스 프로그램에서 샌 프란시스코의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를 다뤘다는 영화 The last black man in san francisco 리뷰를 보고는 이건 놓치면 안되겠다 싶어 저녁에 바로 근처 오데온 극장에서 가서 이 영화를 봤다. 잘 만든 영화이긴 했는데 뭔가 아쉬움이 많이 남더라. 내가 느끼기에 가장 큰 문제는 주인공들이 현실과 밀착된 생활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영화는 시와 같았다. 이런 문제를 제대로 다룰 수 있는 작가로 내 머리에 떠오른 사람은 오직 하나 뿐이었다. 켄 로치. (알아보니 마침 그의 새 영화가 개봉했고 이번 주말에 런던으로 보러 갈 예정이다. 택배 배달과 같은 임시직 문제를 다룬 영화라고 한다.)


이런 것들이 현대의 빈곤 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시리아에 떨어지는 폭탄들, 난민들 문제가 뉴스를 가득 메운다. 그러나 어느 작가도 이 극명한 현실을 다루려고 하지 않는다. 오직 70대의 로저 워터스만이 그 문제를 다루고, 그것으로 앨범을 만든다. 진작 은퇴했어야 할 사람을 두고, 나도 나의 아내도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는 공연을 더 하라고, 앨범을 더 만들라고 아우성이다. 은퇴하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 모든 것이 대체가능한 자본주의의 세상에서 도대체 어찌된 일일까? 켄 로치는 진작 은퇴를 선언했었다. 그러다 다시 나와서 '다니엘 블레이크'를 만들었고, 이번에 다시 새로운 영화를 만들었다. 켄 로치가 은퇴를 번복한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현대 사회의 절대적 빈곤. 감독 하나를 대체할 수 없는 절대적 빈곤 탓이다. 버니 샌더스같은 정치인에 대해서도 같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값싼 번민들은 넘쳐 난다. 우리가 그것을 값싸다고 하는 이유는 거기에는 쏘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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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 법무부 장관이 사퇴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 얘기를 듣자 마자 든 생각은, 조국 이 분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이었다. 


어제 나경원이 검찰 개혁안의 국회 본회의 상정과 관련하여 검경 수사권 조정은 협의할 수 있으나 공수처 설치 문제는 조국의 사퇴가 전제되어야 한다고 말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문재인 대통령이 고민을 좀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다. 아마 조국은 그 뉴스를 듣고 즉각 사퇴를 결심했을 것 같다. 자신이 개혁의 걸림돌이 될 시에는 언제든 사퇴할 것이고, 자신을 불쏘시개 삼아 검찰 개혁을 해야 한다고 늘상 말해 왔기 때문이다. --- 사실 엊그제 조국이 발표한 법무부의 검찰 개혁안을 모든 지상파 방송들이 머릿기사로 다루는 것을 보면서, 조국이 할 만큼 했다고, 검찰 개혁을 전국민적 의제로 만드는데, 자의든 타의든, 성공했다고, 그러므로 검찰 개혁안이 국회 통과가 되면 사퇴하는 것이 맞겠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문재인은 참여 정부의 검찰 개혁 노력에 대해 순진했다고 어떤 책에서 사후적으로 평가했다고 한다. 그러나 '순진'이라는 말이 덮고 있는, 혹은 표현하고 있는 것은, 노무현 당시에는 검찰 개혁에 대한 물적 토대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검찰 개혁에 대한 국민적 열망이 높았다고는 하지만 전혀 조직되지 않은 열망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러한 열망을 조직해낼 비전이 없었다. 지금이야 검경수사권 조정, 공수처 설치, 검찰의 직접 수사의 축소 내지는 폐지, 법무부의 탈검찰화를 통한 검찰에 대한 문민 통제의 강화 등등, 사소하게는 피의 사실 공표 금지까지, 수 많이 많은 사안들이 구체화되어 국민들의 머리 속에 들어가 있다. (이런 비젼을 만들어 낸 인물이 조국인 것으로 알고 있다.)


또 다른 것으로는, 만일 검찰이 조직적으로 개혁에 저항한다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노무현에게는 그 대응책이 없었고 그리하여 만들어 낸 것이 아마도 법학전문대학원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하면 검사의 수급원을 다원화하여 검찰 조직의 동일성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검찰 개혁에 대한 검찰의 집단적 반발의 동력을 약화시킬 수 있는 신규 검사 공급원을 마련해 놓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내 생각에는 검찰 개혁에 대한 물적 토대이다. 그런데 그것을 정책화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이다. 정책화를 위해서는 대통령의 정치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보아하니, 문재인은 중소 정당들과, 선거법 개혁안과 검찰 개혁안을 주고 받는 식으로 신속 처리 법안으로 지정한 것 같다. (나는 패스트 트랙이라는 말도 최근에 알았다.) 놀라운 것은 이번 선거법 개혁안이 거대 정당에는 불리한 것이고, 그러므로 여당에서 당연히 반발이 있었을 것인데, 적어도 내 귀에는 별 파열음이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미 그런 파열음의 시간들이 다 지나간 것일까?) 여당을 단속하여 선거법 개정안(이번 선거법 개정안도 물론 개혁안이라고 본다)을 만들어 내고 그것을 중소 정당들에게 제시하면서 검찰 개혁안을 아울러 국회 본회의에 상정 가능하게 만들어 낸 것은 분명히 정치인 문재인의 전략의 성공이라고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검찰 개혁이 성공하기 위한 여건에는 아직 한 가지 사항이 남았다. 개혁도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일단 조국을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고 본다. 검찰 개혁에 대한 확고한 의지를 가진 자, 그리고 밖에서 봤을 때 대통령의 분신급으로 그만큼 강하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조국 이상이 없었을 것이다. (더불어 차기 혹은 차차기 대권 주자로 키우고자 하는 생각이었을 것이고)  


그러나 윤석열의 검찰 총장 임명에 대해서는, 나는 문재인이 어느 정도는 실수한 것으로, 혹은 문재인이 순진했던 것으로 본다. 행정부의 수반으로 당연히 대통령은 검찰을 개혁의 주체로 믿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말 그대로의 믿음이어서는 안될 것이다. 행정부의 수반으로 대통령은 국정원을 믿을 것인가? 물론 큰 틀에서는 믿어야 하지만, 국정원 내부에 온갖 견제 장치를 심어 놓은 한에서, 끊임없이 의심하고 감시하는 한에서 믿어야 할 것이다. 검찰에 대해서도 똑같았어야 했다고 본다. 행정부의 수반인 대통령이 검찰을 개혁의 주체라고 표방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검찰을 철저히 개혁의 대상, 즉 검찰 스스로는 절대 개혁을 할 수 없다는, 정치인 문재인의 확신 속에서 그랬어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윤석열은 단지 개혁의 대상에 머물 수는 없는, 나름의 확고한 입지를 가진 인물이었던 것이다.


(검찰이 스스로 개혁할 수 있는가? 심야 조사 폐지 발표 다음 날 검찰은 정경심씨의 자산 관리인을 심야 조사했다. 검찰의 직접 수사를 축소한다는 발표 직후에 유시민에 대한 검찰 직접 수사를 발표했다. 별 생각없이, 관성대로, 하던 대로 하는 것이다. 내부 개혁은 관성에 의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갈 뿐이다.)


아마도 문재인이 윤석열을 검찰 총장으로 임명한 것은 국정 농단 수사로 국민의 신망을 얻고 있는 윤석열이 검찰 개혁의 취지에 동의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상대적으로라도 개혁적인 인물을, 그 개혁적 이미지로 국민적 신망을 얻고 있는 인물을 검찰 총장으로 임명한 데에는 아마도 상당히 중요한 현실적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검찰이 검찰 개혁을 좌절시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개혁을 주창하는 정치인들을 수사로서 압박하는 것이다. 그 상징적인 결과가 모두들 알다시피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이다. 아마도 지금의 검찰 총장이 국민들에게 개혁적 이미지를 갖고 있지 않은 인물이었다면 미친 척 하고(어차피 견제 장치는 전무하므로) 검찰 개혁을 주창하는 정치인들(지금 즉각 내 머리에 떠오르는 인물은 박주민 의원이다)에 대해 직접 수사를 개시하여 압박했을지도 모른다. 


여튼 모두들 알다시피 역사는 행위자들의 의도와는 달리 흘러간다. 문재인은 검찰 개혁 추진 세력(박주민, 김종민, 이해찬, 이인영 등, 그리고 조국)을 보호하기 위해 윤석열을 검찰 총장에 앉혀 놓았지만, 윤석열은 그 어떤 검찰 총장도 할 수 없었을 정도의 규모로 특수부를 총동원하여 조국 일가를 수사로 압박했다(윤석열이 국민적 신망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역으로 윤석열은 조국 일가에 대한 수사로 문재인의 검찰 개혁을 좌초시키고자 하였지만, 검찰 개혁을 어마 어마한 수준의 에너지가 집결된 국민적 의제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그 최종 결과는 다시 미래에 대해 열려 있다. (행위에 대해 반-목적성이 존재한다는 것은 행위의 근거를 무력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실재의 운동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다. 여기서 회의주의를 도출해내고자 하는 사람이 없기를.)


(현실이 꽉 막혔을 때, 정보가 극히 제한되어 있을 때 사람들은 점을 본다. 재미로지만 나도 그랬다. 유튭에 조국, 윤석열의 사주가 많이 올라와 있다.:) 조국에 대해서는 중간에 낙마하는 것으로 많이들 점치더라. 올 연말에는 낙마하지만 내년 봄에 재기한다고 한다. 윤석열에 대해서는 올 연말까지가 심각하게 위기란다. 그 위기를 넘기면 계속 가고, 그렇지 않으면 낙마라는 이야기. 주로 보수적 색채의 유튭에서 하는 이야기였는데, 그들의 해석은 윤석열이 연말까지 살아 남으면 낙마하는 것은 조국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재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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