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표라는 압도적 차이로 영국 정부와 EU의 합의안이 영국 의회에서 부결되었다. 나의 첫 반응은? 꼴 좋다. 원래는 한 달 전, 그러니까 작년 연말에 했어야 할 표결이었다. 그런데 메이 총리가 예정되어 있던 테레비젼 토론도 취소하고, 표결 당일이든가 전날이든가 표결 자체도 취소해 버렸다. 그때 표결했으면 이렇게 크게 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표결 전에는 최대로 잡아 150표 안쪽으로 지면 총리가 사임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들 했었다. 그런데 230표로 지고 나서도 메이 총리는 사임할 생각이 없단다. 재미있는 나라다.
이번 합의안이 부결된 이유. 누누이 말한 것처럼 영국 정치의 부재 때문이라고 본다. 첫째, 정치적 무능력, 무책임. 북아일랜드 국경 문제를 어떻게 할까? 에라, 모르겠다. 다음으로 넘기자. 불필요한 불확실성을 신속하게 제거하는 것이 정치의 책무라면 메이 총리는 이런 책임을 방기한 것이다. 국경 문제에 대해 이번 합의안은 최종적인 해결책이 마련되기 전까지 현상태를 유지하되, 영국이 일방적으로 이 상태를 변경할 수 없도록 하고 있다. 강경파들이 보기에 이는 영국을 EU의 의지에 종속시키는 것이고 그러므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노동당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번 합의안은 잠정적인 것이므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제거하지 못한다. 나도 이에 동의한다. 잠정적인 것이 영구적인 것이 될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이 말장난의 책임은 나에게 있지 않다.
둘째, 엘리트주의적, 대결주의적 정치. 결과적으로 이번 합의안은 제일 야당인 노동당 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메이는 시종일관 노동당을 대화 상대로 인정하지 않았다. 메이는 노동당을 배척하고 당내의 60석 정도에 불과한 강경파들을 회유하려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메이는 합의안도 망치고, 합의안이 의회에서 부결되는 사태를 초래하여 영국을 노딜의 위험 속으로 몰아가고 있다. 메이가 노동당과 협의하여 합의안을 만들어 냈다면 압도적인 찬성으로 의회 통과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면 메이가 고대해 마지 않던, 위기의 시대에 순조롭게 브렉싯이라는 과업을 완수한 위대한 총리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당장 오늘 메이에 대한 불신임 표결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들 메이가 살아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국 국민들은 코벤의 노동당이 더 나은 대안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일단, 제2의 국민투표가 가능할까? 국민투표를 다시 하게 되면 EU 잔류가 55:45 정도로 우세할 것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이상적으로는 7:3, 적어도 6:4 정도가 되어야지 재투표의 의미가 있지 않을까? 노딜에 대한 우려의 기사들이 쏟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국민들의 30% 정도가 노딜을 원한다. 이 사람들은 브렉싯이 주권의 문제이지 경제의 문제가 아니라고 말하곤 한다. 대단한 사람들이기는 하다. 암튼 분명한 것은 재투표를 할 정도로 여론이 바뀐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생각에는 총선 말고는 답이 없는 것 같다. 총선을 통해 노동당 주도의 연정을 설립하고 EU 탈퇴 시한을 연장한 후 관세동맹 잔류를 합의하는 것이다. 그러면 강경파를 제외하면 크게 반발할 세력이 없을 것이다. 사실은 메이가 이렇게 했어야 했다고 본다. 그러나 보수당도 메이도 노동당이 집권하는 꼴을, 특히나 메이는 자신이 불명예 퇴진하는 사태를 감내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에 총선을 한사코 막으려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아무도 모른다. 어쨌든 남의 일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영국 국민들도 남의 일 보듯 하는 것 같다는 것이다. 어쩌면 내가 한국인이기 때문에 한국인다운 조바심을 낸 결과일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