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도서는 열린책들 출판사에서 제공받았습니다.><암전들>이라는 제목과 잘 어울리는 검은 표지의 소설은 실존하는 연구서인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에서 시작한다.20세기 초 퀴어 사회학자인 잰 게이는 실제 퀴어들을 인터뷰한 연구서를 출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이름을 숨기고 남성 의사의 권위를 내세워야만 했다.퀴어들의 증언들은 검게 칠해지고 그들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그들의 욕망은 장애로 해석된 채 잰 게이의 이름이 아닌 남성 의사의 이름을 달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직업도, 학위도, 혈통이랄 것도 없으니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몰랐고 도움받을 남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p14)던 네네라고 불리는 남자는 죽음을 앞둔 후안을 만나기 위해 사막 깊숙한 곳에 있는 마을로 향한다.팰리스에 도착한 네네는 후안의 간병인을 자청하고 후안은 네네에게 자신의 사후에, 팰리스에 방을 넘겨받는 대신 자신이 완성하지 못한 프로젝트와 잰 게이라는 여성의 이야기를 완성하라고 부탁한다.소설은 내용을 요약하기 어려울 만큼 네네와 후안의 이야기가 순서 없이 진행되고 군데군데 검게 칠해진 [성적 변종들: 동성애 패턴 연구]와 여러 장의 사진과 삽화가 등장한다.20대의 젊은 동성애자 네네와 임종을 앞둔 늙은 동성애자 후안의 대화는 여러 형식을 넘나들며 그들의 이야기를 이어간다.특히 영화처럼 이야기하기는 본인들의 삶을 제삼자의 시각으로 보는 듯해 더 사실적으로 다가왔다.실존 인물인 잰 게이의 삶과 그의 연구서인 [성적 변종들:동성애 패턴 연구]가 출간되는 과정과 잰 게이의 성(姓)을 물려받은 후안과 그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과거를 반추하는 네네의 이야기가 소설의 큰 줄거리이다.후안과 네네는 실존 인물이 아닌 허구이지만 그들이 살았던 동생애자의 삶은 허구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젠 게이가 살았던 20세기 초 성소수자의 삶과 현재의 그들의 삶을 같은 선상에 두고 비교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겠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여전히 그들을 터부시하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나는 퀴어들을 다 이해한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취향에 대해 왈가왈부할 생각은 없다.퀴어들은 연구 대상도 아니고 그들의 성적 취향은 정신병이나 장애가 아닌 개인의 욕망이고 취향일 뿐인데 누가 손가락질할 수 있겠는가.네네가 무아지경이 돼 열심히 답했던 남성성- 여성성 테스트 중 긍정으로 대답한 질문들을 읽어본다. 그 질문들은 이성애자도 LGBTQ도 여성도 남성도 사람 누구든 긍정의 대답을 할 수 있는 질문들이다.질문을 반복해 읽으며 우리는 내내 사람들을 여성과 남성으로만 구분하려 들었고, 같은 문항에 같은 답을 체크하는 이들조차 성적 취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우리와 다른 이상한 사람으로 봐 왔던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돼 내친구의서재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명탐정의창자 와 #엘리펀트헤드 를 읽으며 시리이 도모유키라는 작가의 머릿속이 어떻길래 이런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까 궁금했다.특수 설정이지만 탄탄한 스토리 구성은 물론 누구도 흉내 내기 어려운 기괴하고 불쾌하고 속까지 불편하게 하는 표현이 쉴 새 없이 등장하지만 한번 잡은 책을 덮을 수 없었던 작가의 매력에 빠져 그의 신간을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단편집으로 돌아왔다.모든 소설을 읽고 나면 몸풀기 정도로 느껴지는 ‘최초의 사건’은 명탐정이 되고 싶어 하는 초등학생의 좌충우돌 탐정 놀이지만 등장인물이 어린이여서 더 끔찍하게 느껴진다.지구에 무시무시한 존재들이 도착하고 32일간 64명의 인간 샘플의 지능을 측정한 후 그들이 세운 기준에 닿지 않으면 한 지역을 몰살시키는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사회 규범상 범죄자이자 악인이지만 ‘말로 상대의 방어벽을 허물고 마음을 사로잡아 자기 뜻대로 조종’하는 희귀한 능력의 소유자 기미코가 인간 샘플로 차출되고 과연 그가 세계를 구할 수 있을지 ‘큰 손의 악마’에서 확인할 수 있다.불쾌한 냄새까지 전해지는 듯한 가장 참혹했던 이야기 ‘나나코 안에서 죽은 남자’는 일본 유곽 안 여인들의 참혹한 삶과 독살 사건은 오래된 영화 한 편을 본 듯하다.이야기의 화자가 꼭 인간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모틸리언의 손목‘에서는 인간이든 외계인이든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는 장사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천사와 괴물’은 누구보다 어린 양들을 돌보는 데 힘써야 하는 성직자의 타락과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사람들의 구경거리가 돼야 했던 프릭쇼 단원들의 이야기다. 밀폐된 욕실에서 벌어진 살인이 2년 전 예언과 어떤 관계가 있는지 따라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세 가지의 추리는 무릎을 딱 치게 하고 추리 소설의 결말이 이리 슬플 수 있나 싶게 한다.모두 5편의 단편이 실린 <나는 괴이 너는 괴물>은 바로 이 맛에 작가의 책을 읽는다고 못 박게 하는 이야기들이다.다섯 편의 단편을 작가의 이름을 가리고 본다면 한 작가의 작품이 아닌 괴이한 이야기 앤솔러지로 느낄 수 있을 만큼 다양한 소재의 소설로 말 그대로 잘 고른 랜덤 선물 박스 같은 소설집이다.외계인이 등장하는 sf 미스터리에서는 인간의 사악한 마음을 드러내고 살인 사건의 진실 뒤에는 약자들이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읽게 하기도 한다.혹시나 작가의 특수 설정과 잔혹함에 그의 소설 읽기가 두려웠던 독자가 있다면 전작보다는 덜 광적이고 덜 불편한 단편집에 도전하길 권해 본다.“예언, 밀실, 독살, SF, 다중추리, 논리성, 천재성, 추악함, 미친 상상력…무엇을 기대하든 그 이상을 보게 된다.”라는 뒤표지 문구가 거짓이 아님을 느끼게 될 것이다.
나이 차이 나는 언니와 동네 여자들을 상대로 불법 눈썹 문신을 하는 엄마, 그리고 특별히 하는 일 없이 엄마의 조수를 자처하는 아버지를 가족으로 둔 ‘나‘는 중학교 평준화 시대에 불쾌하기 짝이 없는 온조 중학교에 입학하게 된다.꽤 좋은 성적이었지만 초등학교 때는 왕따를 당했고, 중학생이 되면서 그때 왕따를 주도했던 달미와 단짝이 된다.스스로 치치림이라고 말하는 30대 초반의 여자가 이야기하는 열네 살 봄은 잔인하다.어떤 내용의 소설인지 자세히 모르고 읽기 시작한 탓에 2000년대 남녀공학 중학교에 다닌 여자의 회고담 정도로 생각했다.하지만 이야기가 종반에 다다를 때쯤에는 어린아이가 겪기에는 너무 슬프고 잔인한 경험은 책을 덮어버리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부모는 그저 자신들의 알량한 사랑에만 가치를 두고 자식을 낳기만 하고 전혀 책임지거나 사랑하지 않는다.제대로 마음 둘 곳 없는 아이는 친절하게 다가오는 이에게 느닷없이 사랑을 느끼고 그것이 진짜 사랑이라고 생각한다.아이에게 제발 멈추라고 수없이 외치게 된다.내 이름은 치치림. 치치새가 사는 숲이라는 뜻이다. 치치새는 아주 진귀한 새로,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그 새는 마음씨가 고운 사람에게만 보인다. 행운을 가져다준다. (p7)소설의 첫 문장을 다시 돌아와 읽으며 여전히 세상에는 아이들에게 치치림이라고 부르는 이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아름답던 문장은 악마의 속삭임이 된다.여러 번 멈출 수밖에 없었던 치치림이 되는 순간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표현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가 문득 제대로 눈을 뜨고 보라고 현실은 이보다 더하다고 눈 돌리고 외면하지 말라고 멱살을 잡고 흔드는 기분이 들었다.아직 자신의 힘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아이들에게 첫 번째 울타리는 가정이어야 하는데 대책 없는 부모와 20년의 세월이 지나도 달라지지 않는 교육 현장과 사회가 수많은 치치림을 만들고 있는 것 같아 슬프고도 슬프다.죽지 않고 살아남은 ‘나‘에게 작은 위로를 건넨다.
홀로 사는 레미 할머니가 아끼는 작은 서랍장의 맨 아래 서랍에 딸이 선물한 작은 초콜릿 상자를 넣어둡니다.깜깜한 서랍 안에는 바삭바삭한 쿠키를 담았던 빈 쿠키 깡통, 과일 맛 사탕이 담겼던 둥그런 빈 병, 장미 꽃다발을 묶은 노란 리본, 빨간 털 뭉치 등이 들어 있어요.어느 봄날 할머니는 둥그런 빈 사탕 병을 꺼내더니 막 완성된 딸기잼을 가득 넣었습니다.여름이 되자 서랍 안의 긴 유리병을 꺼내 여름 채소로 만든 피클을 채웠습니다.리본도 털 풍치도 차례차례 서랍에서 꺼내져 필요한 곳에 사용되는 데 작은 초콜릿 상자만 여전히 서랍을 지키고 있습니다.어린 시절 동그란 깡통에 든 쿠키가 선물로 들어오면 쿠키보다는 깡통이 욕심이 나 언제 과자를 다 먹고 깡통을 가질 수 있을까 기다렸지요.만약 엄마가 반짇고리나 다른 용도로 쓸 요량을 보이면 몇 날 며칠을 졸라서 내 것으로 만들었습니다.그 깡통 안에는 작은 실핀도 넣고 공깃돌도 넣고 종이 인형도 넣어 아주 소중히 갖고 다녔던 추억이 생각납니다.레미 할머니의 서랍 속 물건들도 꼭 맞은 곳에 재사용됩니다.사탕 병이 딸기잼 병이 되고 남은 털실은 소중한 사람의 모자가 되고 오랫동안 서랍을 지켰던 초콜릿 상자도 아름다운 곳에 사용됩니다.서랍 속 물건들의 재탄생을 보며 그 물건의 깃든 사연까지 떠오르게 합니다.단순한 재활용에 대한 그림책을 넘어 아름다운 인생의 한순간을 볼 수 있어 더없이 사랑스러운 그림책입니다.
‘첫눈이 내린 날, 첫눈으로 만든 눈사람을 냉동실에 넣어두고 출근한 영지‘는 근무하는 도서관이 코로나 팬데믹으로 대면 활동이 어려운 시절 서비스를 시작한 메타버스 플랫폼 미러라클의 인수인계를 받기 시작한다.현재 담당인 이정아는 최선을 다해 미러라클 동그라미도서관을 운영했지만 기간제 사서로 계약 기간이 끝나면서 영지가 담당하게 된다.하지만 이정아가 떠난 후에도 무슨 이유인지 이정아의 아바타인 동그리는 미러라클 도서관 안에 머무른다.짧은 소설은 점수에 맞춰 문헌정보학과에 입학해 사서가 된 영지와사서가 되기 위해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사서교육원을 다녔던 기간제 이정아 이야기를 통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의 염원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한다.자신이 진정으로 하고 싶어 하는 일을 할 때 우리는 <사서 고생> 일지라도 행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우리가 지금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하고 싶은 일을 못 하기 때문인 것 같아슬퍼지기도 하는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