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일.그날은 오후 열 시 이십삼 분 그 일이 없었다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하루였다.대통령의 긴급 대국민 특별 담화를 듣는 순간 육성으로 “미쳤나”가 터져 나왔다.황정은의 <작은 일기>는2024년 12월 3일 화요일에 시작해 2025년 5월 1일 목요일에 맺는 150일의 기록이다.나는 작가가 일기를 쓴 150일 동안 일을 하고 밥을 먹고 친구를 만나고 잠을 자는 일상을 살았지만늘 마음 한 구석이 답답함을 느꼈고 계엄이 지속되는 느낌 속에서 살았다.작가와 나의 차이라면 작가는 종종 시위 현장을 나갔고나는 내 안식처에서 그 시간을 보냈다는 점이다.작가의 일기가 끝난 후 새 대통령이 탄생했고 3특검이 진행되고 있고 윤석열은 재구속 상태에 있다.만약 12월 3일 윤석열의 바람대로 비상 게엄이 성공했다면 상상만으로도 괴롭다.“광주는 어떻게 견뎠을까. 1980년 이후로 그 혐오와 오욕을,타지의 이웃을 어떻게 견뎠을까.” (p44)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요즘 뉴스를 듣다 보면아직은 모든 것이 완전하게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한 기분이다.부디 윤석열이 “오염시킨 말과 헌법의 풍경이 제자리를 찾는 모습을 꼭 보고 싶”다.(p112)
1년에 네 권씩 출간되는 <소설 보다>는 ‘이 계절의 소설‘ 선정작(문지문학상 후보작)을 묶은 단행본이다.올해의 여름 ’소설 보다’는 여름 느낌 물씬 풍기는 포도가 그려진 표지이지만 수록된 소설 세 편은 포도의 상큼함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김지연 작가의 <무덤을 보살피다>는 사촌 수동과 처음으로 할아버지 산소에 간 화수는 산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수상한 비닐하우스와 컨테이너를 발견한다.물고기 양식장으로 보이는 그곳에서 수상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남자가 자신의 일을 도와줄 것을 요구하자 어쩔 수 없이 물고기 먹이 주는 일을 하게 된다.그때 화수를 찾아 헤매던 수동이 오고 남자가 집안에서 잊힌 막냇삼촌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마을로 데려다 주라는 부탁을 하지만 남자는 수동과 화수를 컨테이너에 가두고 떠나 버린다.이서아 작가의 <방랑, 파도>의 ‘나’는 작은 바닷가 마을의 백반집의 일을 도우며 그 마을에 있는 요양원의 일을 돕고 있다.요양원 입소자인 향자 할머니와 가까워진 ‘나’는 자신의 반지와 밑줄 그어진 책을 선물 받지만 할머니가 돌아가시자 반지와 책을 어떻게 돌려줘야 할지 고민한다.함윤이 작가의 <우리의 적들이 산을 오를 때> 속의 노아는 소도시 면사무소의 신입 공무원으로 접수된 민원 때문에 천문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간다.같이 간 상사 녹원의 요청으로 본명을 숨기고 엄마의 이름을 말하게 되고 천문대에 머물고 있는 사람들의 리더인 선화와 이름이 같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우리 편은 착하고 선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워 나는 습관처럼 책을 읽을 때든 영화, 드라마를 볼 때면 우리 편을 찾게 된다.세 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확실히 우리 편이라고 규정짓기 어려운 존재들로 가득하다.화수의 어린 시절에 좋은 할아버지였던 할아버지는 베트남 참전 용사였지만 명확히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는 모르지만 국립묘지에 묻히지 못한다.‘나’가 머물고 있는 백반집의 남매도 마약에 연루됐다는 소문이 마을에 파다한 인물이지만 ‘나’에게는 더없이 좋은 사람들이다.사이비 종교 느낌이 나는 집단의 우두머리인 선화 역시 노아에게 특별한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다.작가의 인터뷰를 읽은 후에도 내 편, 우리 편을 먼저 찾는 나는 확실한 우리 편을 찾지 못했다.영원한 내 편도 절대적인 내 편도 없는 세상에서 내 편만 찾다 보니 일반적이지 않는 인물들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듯 세 편 소설 어렵다.
<본 도서는 문학과지성사에서 선물 받았습니다.><어차피 세상은 멸망한 텐데>라는 절망적인 제목의 소설집은 제 15 회 젊은작가상 수상 작가인 공현진의 첫 소설집이다.모두 8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은 우리 주변의 누군가의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지구에 마지막 남은 인간 ’하나’의 기록으로 끝맺음한다.결혼이주여성 ‘녹‘과 이혼하고 아이를 혼자 키우고 있는 시간강사 ’나‘의 이야기 <녹>은 아이의 죽음이 두 사람만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기에 더 마음이 아프다.모순과 타협하지 못하는 세상 무해한 주호 씨와 희주 씨의 일상이 <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라는 절망보다는 ‘살고 싶다는 충동에 절실하게 시달(p54)’리며 지금처럼 흘러가기를 바란다.마음이 따듯해지는 <선자 씨의 기적의 공부법>을 읽으며 지금쯤은 선자 씨가 훌륭한 요양보호사로 대상자들을 돌보며 행복하게 살고 있을 것이라 믿음을 갖게 된다.가장 마음을 아프게 한 <우리는 숲>의 가영과 미영 자매의 이야기가 소설 속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라 더 슬프다.소설 속 인물들은 각자의 외로움과 슬픔과 어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다.마지막 이야기인 <모두가 사라진 이후에-3인칭의 세계> 속 ‘하나‘는 지구에 혼자 남은 인간이다.그렇게 혼자 남은 하나도 차를 마시고 산책을 하고 자신의 남은 날을 기록한다.’사람들이 죽은 이후의 세상이 얼마나 조용하고 평화롭고 안전하고 고독하고 아름답고 무서운지. 소란스럽고 외롭고 소름끼치고 사랑스러운지’ (p274) ’하나’는 말하지만 나는 어차피 세상이 멸망한다면 살아가는 동안은 혼자가 아닌 여러 사람들과 이 세상을 살아가고 싶다.자신의 슬픔에 매몰돼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드는 <권능>의 이모보다는 5만 5천 원짜리가 아닌 3만 원짜리 꽃다발을 선자 씨에게 선물하는 진아처럼 딱 적당한 거리를 두고 지내고 싶다.처음 알게 된 작가의 소설은 인터넷 서점의 관심 저자의 출간 알림을 할 정도로 꽤나 큰 울림이 있다.
푹푹 찌는 더운 날, ‘수박 한 입만‘ 생각에 눈이 둥그레진 동물들이 무엇에 홀린 듯 수박을 찾아 나섭니다.그토록 찾아 헤매던 수박을 덩치 큰 눈호랑이가 풀숲에서 가장 먼저 발견했습니다.“난 수박이 아니야.날 먹으면 큰일이 벌어진다.”“먹어 보면 알지.”눈호랑이가 수박을 한 입 와사삭 먹는 순간 둥글둥글 수박이 돼버립니다.동물 친구들에게 먹힐까 두려워 숨어 있던 호랑수박을 찾은 동물들은 아무리 사정해도 한 입 먹어 보겠다고 달려듭니다.그 순간 어디서 나타났는지 알 수 없는 팥할멈이 번개처럼 수박을 낚아채서 사라집니다.욕심 많은 눈호랑이 덕분에 생겨난 ”팥빙수의 전설“을 시작으로 한 이지은 작가의 전설 시리즈 네 번째 그림책입니다. 딱 요즘 같은 날씨에 팥할멈이 들려주는 그날 밤의 이야기는 으스스해 더위를 잊게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그날의 숨겨진 진실까지 궁금하게 합니다.읽어주기에도 아이 스스로 읽기에도 적당한 길이의 재미난 글은 물론 풍부한 동물들의 표정을 보는 것도 즐겁습니다.특히나 무엇에 홀린 듯 수박을 외치는 동물들의 비밀은 ‘그날 밤 이야기‘를 동물들의 증언을 통해 들어도 제대로 알 수 없습니다.한 번도 수박을 먹어 본 적 없는 지렁이에 증언도 다들 수박, 수박 하니까 따라갔다는 곰의 말도 그날의 진실을 오리무중에 빠지게 합니다.힌트라면 ’작가의 말‘속에 그날 밤의 비밀의 정답이 있지않을까 싶네요.굳이 <태양 왕 수바: 수박의 전설>을 보지 않아도 재미있지만 먼저 보면 더 재미있는 <먹어보면 알지>입니다.다시 한번 느끼지만 그림책의 시작은 표지부터 시작해 면지 곳곳까지 모든 것이 이야기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본 도서는 넥서스 출판사에서 진행한 이벤트에 당첨돼 제공받았습니다.>‘끼리끼리‘라는 표현은 유착이나 편파적인 관점에선 부정어지만, 공통된 신념과 가치를 지닌 이들에게 적용해 보면 결속의 의미를 지닌 긍정어임이 분명한 것 같다._윤회(당한) 자들, 성해나의 작가의 말 중에서그를 제대로 알려면 주위 사람을 보라는 말이 있듯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과 닮은 사람들과 어울린다.소설 속 ’끼리끼리’는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비슷한 성격이나 환경, 목표를 가진 이들이 느슨하게 관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권혜영 작가의 <럼콕을 마시는 보통 사람들> 속 등장인물들은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적으로 흔하게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니다.입양아인 ’한나‘는 아빠만 둘인 게이 커플 부모를 두고 있고 유학생 ‘솔‘은 자신을 낳은 엄마를 포함 엄마만 둘인 가정에서 성장한다.특별해 보이는 가정에서 사는 둘이지만 페스티벌을 즐기고 보통 사람들처럼 고민하고 부딪히며 살아간다. 성해나 작가의 <윤회 (당한) 자들> 은 윤회를 믿는 사람들 속에 잠입한 다큐멘터리 감독이 만난 사람들의 모습이 팍팍한 현실을 어떻게든 돌파하고 싶어하는 몸부림 같아 입맛을 쓰게 한다.성해령 작가의 경제적이고 현실적인 제목의 <임장> 속 여성들의 작은 연대가 가슴 뭉클하게 다가온다.마지막으로 한지수 작가의 <목소리들>에서 ’나’는 동료 ’홍’의 미투 사건의 증인으로 서는 걸 막기 위해 힘쓴 상사인 가해자에 의해 프랑스에 가게 된다.미투의 피해자도 가해자인도 아닌 방관자인 ‘나‘를 통해 누구든지 억울한 가해자가 될 수도 있고 죽고 싶은 피해자가 될 수도 있는 현실을 무섭게 그리고 있다.요즘 가장 핫한 젊은 작가 다섯 명이 “끼리끼리 문화의 기쁨과 슬픔……아름다운 결속 그리고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존재들의 아픔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있다.특히 특별한 사건이 없는 나날을 특별하게 쓰는 이주란 작가의 <산책>은 오랫동안 함께 했던 연인 ’우진’과의 이별과 멀지도 그렇다고 가깝지도 않은 ‘무은‘과의 관계가 일상적이라 좋다.문득문득 떠올리게 되는 기억들이 평범해서 좋았고 그를 잊기 위해 죽도록 노력하지 않아 평온함까지 느껴진다. 어찌보면 사람들은 그렇게 모였다가 흩어지고 그 후 영영 만나지 못할 수도 있고 엉뚱한 곳에서 재회하기도 하고 또 전혀 새로운 누군가와 끼리끼리 모이기도 한다.소설은 ‘끼리끼리’라는 단어에 들어있는 배타와 함께 연대까지를 품은 이야기는 현대인들이 꿈꾸는 질기지 않는 결속을 담고 있어 끈적이지 않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