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란한 속삭임 위픽
예소연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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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 있는 아홉 시간보다 퇴근 후 지하철을 타고 있는 한 시간이 더 싫은 ‘모아’는 정치 선전물 같기도 한 동영상을 이어폰도 없이 큰 소리로 듣는 아저씨가 불편했지만 이어폰을 꺼내 양쪽 귀에 끼는 것으로 그 상황을 무시한다.

좋아하는 음악의 음량을 최대한으로 키우려던 찰나, 아저씨에게 항의하는 여자가 등장한다.
둘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고 여자는 모른 척하는 ’모아’의 어깨를 치며 ”시끄럽잖아요.“ 라고 동의를 구한다.

여자를 무시할 수 없었던 ’모아’는 너무 시끄러웠다고 소리치고 지하철 안의 여러 사람들이 동조하기 시작하자 남자는 욕을 내뱉더니 지하철에서 내린다.
’모아‘와 함께 내린 여자는 모아에게 ‘속삭이는 모임’에 가입할 것을 권유한다.

’모아‘와 자신을 ‘시내‘라고 소개한 여자, 회원은 단 둘이다.
”비밀을 속삭이진 않으나 그것이 마치 큰 비밀이라도 되는 양 속삭여야 돼요.“ (p16)
다음 날 만난 ‘모아‘와 ‘시내‘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을 외치는 ’수자‘도 회원으로 가입시킨다.

’소란‘과 ’속삭임‘은 양립하기 어려운 단어지만 소설을 읽고 나면 우리의 속삭임이 얼마든지 소란할 수 있고 그 소란은 한 사람을 변화시키고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누군가에게 나의 뜻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목소리를 높여야 한다는 생각을 먼저 하게 되는 데 작은 목소리로 누군가에 귀에 속삭이는 순간 얼마나 상대에게 집중하는지 알게 된다.

지하철이 불편했던 ‘모아’는 소란스러움이 불편하다고 목소리를 냈던 ‘시내’를 만나고 누구보다 소란스럽지만 다른 사람을 살필 줄 아는 ’수자’를 만나고 ’두리’의 사정을 알게 된다.
혼자일 때는 절대 엄두를 못 내는 일도 둘이 되고 셋이 되고 넷이 되는 순간 힘이 쌔진다.
누군가에게 집중하는 ‘속삭이는 모임‘이야말로 요즘처럼 소란한 세상에 꼭 필요한 게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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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함께 걸을까? - 2022 볼로냐 The BRAW Amazing Bookshelf 선정작 문지아이들
엘렌느 에리 지음, 유키코 노리다케 그림, 이경혜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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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만이 친구인 오르탕스 부인은 아침마다 ‘수국 화원’ 안쪽에서 어여쁜 꽃다발을 만들어요.
오르탕스 부인은 세심하게 꽃을 골라 서로 잘 어울리게 엮어 꽃다발을 만들지만 누구 하고도 말을 하지 않아요.

오르탕스 부인은 오후가 되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언제나 산책을 나갑니다.
주변 풍경에는 눈길 한번 주지 않고 머릿속은 온통 꽃 생각뿐이지요.
어느 날 튤립 꽃다발보다도 키가 작은 개 한 마리가 종종걸음으로 즐겁게 부인을 따라오고 있었어요.

그러다 건너편을 지나가는 노부인의 바구니에 꽃다발과 파 한 다발이 담겨 있는 걸 보게 되지요.
기묘한 조합의 꽃다발을 본 부인은 다음 날 시적이면서도 독특한 꽃다발을 만들고 오후에는 산책을 나섰고 작은 개를 다시 만나게 됩니다.

누구와도 어울리지 못하고 꽃다발만 만들던 오르탕스 부인은 산책을 하다 작은 강아지를 만나고 독특하게 어우러진 꽃다발을 보면서 닫혀있던 마음의 문을 열게 됩니다.
수줍음을 무릅쓰고 날씬한 개를 위해 함께 산책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기도 합니다.

함께 산책하는 강아지의 숫자가 늘어날수록 오르탕스 부인은 많은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고 함께 한 강아지들에게 영감을 받아 더 멋지고 근사한 꽃다발을 만들게 됩니다.
새로운 꽃다발을 감상하기 위해 단골손님이 몰려와도 산책할 시간이 되면 날마다 같은 시간에 문밖으로 나서는 부인이 사랑스럽네요.

누군가의 마음을 여는 것에는 큰 힘이 필요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아무 말 없이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는 걸 산책 친구인 강아지들과 오르탕스 부인을 통해 배우게 됩니다.
화려한 색상의 그림과 그림자를 끌고 산책하는 강아지들의 모습은 혼자가 아닌 함께 할 때의 행복을 느끼게 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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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사이
케이티 기타무라 지음, 백지민 옮김 / 문학동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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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 해문클럽 활동 중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혼자 남은 엄마마저 싱가포르로 이주하자 ‘나‘는 우리 가족 누구의 출신지도 아닌 뉴욕을 떠나 네델란드 헤이그로 오게 된다.
그리고 그곳에 위치한 국제 재판소의 일 년 계약직 통역사로 일하게 된다.

현재 ‘나’는 런던 지인을 통해 알게 된 미술관 큐레이터인 ’야나’와 친밀하게 지내고 있고 아주 멋진 남자인 ’아드리안‘과 사귀고 있다.
문제라면 아드리안이 결혼해 아이들이 있고 아직 결혼 생활이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다.

’나’는 반인도적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는 서아프리카의 어느 나라 대통령의 통역을 맡게 되면서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한편 남자 친구인 ‘아드리안’은 결혼 생활을 결판 내기 위해 아내가 있는 포루투칼로 떠나며 ‘나’에게 자신의 아파트에서 지내라는 제안을 한다.

친하다는 말보다는 왠지 격식이 느껴지는 친밀하다는 지내는 사이가 친하고 밀접한 것을 뜻하는 단어다.
소설 속 ‘나’는 전혀 연고가 없는 낯선 나라에 살면서 사람들을 여러 방법을 통해 사귀고 친하게 지내기도 하고 친밀하게 다가오는 이들에게서 불편을 느끼기도 한다.

헤이그에 정작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한 이유 중 하나였던 연인은 친밀한 사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기도 하고 마음을 나누고 있다고 생각했던 친구 ‘야나‘와는 ‘아드리안‘이 끼면서 불편하고도 꺼림칙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친밀하게 지내고 싶었던 이가 동생의 비밀을 숨기기 위해 동생의 아내를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관계가 끝나기도 한다.

어느 순간 친밀함이 불편함으로 다가오기도 하고 부당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친밀하다고 하지만 멀리 떨어져 지내기도 하고 충분히 가까운 밀접한 거리를 유지하고는 있지만 친밀하다고 할 수 없는 인물들도 등장한다.
‘나‘의 삶을 풍요롭게 해 줬던 친구는 어느 순간 의논 상대에서 제외되기도 하고 사랑하던 연인의 친밀함마저도 별 것 아닌 것이 되기도 한다.

친밀이 소원으로 변하는 순간 이유가 분명한 경우도 있지만 두 사람 사이에 작지만 미묘한 파열이 생겨 멀어지는 경우가 다반사다.
소설 속 ’나’의 일상 역시 누군가와 가까워지고 멀어지는 일들이 자신의 의지가 아닌 생각하지 못했던 변수가 나타나면서 벌어지기도 한다.

소설은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도 않고 겉으로 보기엔 평온함의 연속같지만 주인공인 ‘나’는 자신의 일은 물론 사랑과도 멀어지게 된다.
살다보면 영원한 건 없는 것처럼 관계 또한 영원한 것이 없음을 알기에 ’나‘의 주위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우리 일상과 별반 다르지 않아 공감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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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랜지션, 베이비
토리 피터스 지음, 이진 옮김 / 비채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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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 출판사 서포터즈 활동 중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리즈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임신이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아이를 키우고 싶어 한다.
에임스는 남자라는 성별을 갖고 태어나 제임스로 불렸지만 에이미가 돼 리즈와 연인이었다 현재는 여성이 되기를 포기하고 디트랜지션 남성으로 돌아온다.
에임스의 연인인 카트리나는 예상치 못한 임신으로 고민에 빠진다.

리즈와 에이미(에임스)가 중심이 된 과거의 이야기는 트랜스젠더 여성으로 살아가는 두 여성의 고민과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시선을 다루고 있다.
카트리나의 임신을 다룬 현재의 이야기는 시스젠더 여성이 바라보는 트랜스젠더 여성에 대한 선입견과 연인이자 아이의 아버지가 원래의 성으로 환원한 남성이라는 데서 오는 혼란스러움을 중심에 두고 있다.

에임스는 카트리나의 임신 소식을 듣고 오랜 연인이었던 리즈를 떠올리며 한때 둘이서 그토록 꿈꾸던 부모가 될 기회라는 생각에 일반적인 가족 형태가 아닌 전혀 다른 가족 형태에서 아이를 키울 계획을 세운다.
에임스 없이 아이를 키울 생각이 없던 카트리나는 처음엔 황당해하다 리즈와 만남 후 셋이서 함께 아이를 키울 계획을 세운다.

근래에 읽은 책 중에서 가장 이야기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일상적인 대화에서 주제가 되기 어려운 젠더 이슈와 트랜스젠더, 디트랜지션, 동성애 등을 전면에 내세운 소설은 노골적인 성행위 묘사와 이해하기 힘든 상황 속 세 사람의 관계를 쉽게 따라가기는 힘들었다.

작가 본인이 트랜스젠더 당사자인 까닭에 소설 내내 리즈의 심정을 잘 나타내고 있지만 모든 상황을 오롯이 이해하며 읽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타고난 신체와는 다르게 자신의 성을 인식하는 여성이 느끼는 사회의 시선과 고립을 보며 우리가 무심코 저지르고 있는 폭력을 직접 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어떠한 경우라도 모든 인간은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과연 나는 진실로 그 말에 수긍하는지 여러 번 반문하게 된다.
그냥 말과 글이 아닌 현실에서 내 잣대로 타인을 재단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없는 나는 소설이 불편했고 그들의 삶을 이해하려 무던히 애쓰며 소설을 읽어낼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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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문학과지성 시인선 438
한강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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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가 있는 이야기를 좋아해 평소에 시집을 잘 읽지 않습니다.
하지만 한강 작가의 노벨 문학상 수상 소식을 듣고 작가의 책을 검색하다 시집을 발견했습니다.
도서관에서 빌려온 시집을 여러 날 읽다 작가의 마음이 느껴져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고 찰나의 무언가를 잡고 싶어 졌습니다.


거리 한가운데에서 얼굴을 가리고 울어보았지
믿을 수 없었어, 아직 눈물이 남아 있었다니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
선 채로 기다렸어, 그득 차오르기를

모르겠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갔는지
거리 거리, 골목 골목으로 흘러갔는지
(눈물이 찾아올 때 내 몸은 텅 빈 항아리가 되지,일부)


시인의 시는 어려운 언어로 나를 사로잡기도 하고 어느 순간 고개를 끄덕이게도 했습니다.
학창 시절 밑줄 그어가며 공부하던 시 말고는 외울 수 있는 시가 한 편도 없는 데 작가의 시를 외우고 싶다는 강한 열망을 느껴보기도 했습니다.
곁에 두고 오래오래 읽고 싶어 집니다.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서시,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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