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된 지 십 년이 넘은 작가의 소설집 #비행운 을 읽으며 비행운(非幸運)의 연속인 등장인물들이 십여 년이 지난 현재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궁금했다.2019년과 2024년도 발표된 소설 속 인물 중에는 홈 파티에 참석하고 해외로 한 달살이를 떠나는 이들도 있지만 아쉽게도 누군가는 여전히 주거 불안에 떨고 돌봄 문제로 경력이 단절되기도 한다.<홈 파티> 속 호스트인 ‘계산이 정확하신’ 오대표보다는 초대받았지만, 물 위에 기름처럼 제대로 섞이지 못하는 이연과 <숲속 작은 집>의 남편 ‘지호’처럼 세상을 꼬지 않고 천진하게만 보지 못하는 ’나‘가 이해되고 <좋은 이웃> 의 ’나’처럼 기회를 잡지 못한 쪽에 가까운 까닭에 시우네를 마냥 축하하지 못하는 ‘나‘의 심정이 어떤 것에서 기인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7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세상을 열심히는 살지만 쉽고 편하게는 살지 못하고 있다.세상을 살아가는 데 팍팍한 이들에게 가만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라고 묻는 듯한 마지막 이야기 <빗방울처럼>은 그래도 살아가라고 말해 줘서 첫 소설을 읽을 때의 마음보다는 단단하게 힘을 얻을 수 있었다.얼마 전 우연히 오래 전 방영됐던 방송 프로의 쇼츠를 본 적이 있다.아이들에게 부자지만 바쁜 부모님과 가난하지만 가정적인 부모님 중 어떤 부모님을 선택하냐는 질문에 쇼츠에 나온 아이들은 모두 부자 부모를 선택했다.적잖이 충격적이었고 그게 현실이라 더 슬프기도 했다.소설 속 인물들의 문제도 부자였다면 생기지 않았을까 반문하며 그렇다면 그들은 다른 문제로 고민했을 거라고 생각하다가 위안 삼을 게 그것밖에 없나 싶어 참 한심하다 싶기도 한다.세상의 문제를 제대로 꼬집는 작가의 소설은 선명했고 내 마음속에도 분명 들어있는 감정이라 공감하며 읽었다.앞으로도 계속 찾아 읽을 작가 중 한 분이다.
‘갈레드 데 루아‘, 왕의 과자라는 이름의 파이는 프랑스의 전통적인 과자라고 합니다.1월 중이면 어느 날에나 먹는 파이 속에 페브라고 불리는 작은 도자기 장식품을 넣어 그것이 들어있는 조각을 고른 사람은 종이로 만든 금관을 쓰고 왕이나 여왕이 되어 1년 동안의 행복을 약속받는 풍습이 있다고 합니다.파티시에 블랑 씨는 아몬드 크림이 담뿍 든 파이 속 도자기 인형 밀리에게 말을 건넵니다.“잘 가렴. 너는 또 누구를 행복하게 해 주려나.”자신의 본분을 몰랐던 밀리는 누구를 행복하게 해 주는지 알 수 없어 깜짝 놀랐어요.그리고 블랑 씨의 파이를 무척 좋아하는 아델 씨가 찾아왔습니다.파이 상자를 건네받은 아델 씨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걸 보니 걱정거리가 있는 모양입니다.친구가 감기에 걸려서 나을 때까지 친구의 딸아이를 데리고 있기로 했는데 아이가 너무 시무룩해 걱정이라고 하네요.블랑 씨가 페브를 아이가 뽑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자 밀리는 가슴이 올랑올랑 뛰기 시작합니다.달콤한 파이 향이 느껴지는 그림책은 프랑스의 새해 풍습을 알려주고 파이 속에 든 페브인 밀리의 고운 마음을 전해줍니다.거기다 소중한 페브를 양보하는 아이의 마음은 물론 행복한 결말을 맞는 이야기의 끝은 추운 겨울을 따듯하게 해 줍니다.행복한 표정의 아이가 그려진 표지를 다시 봅니다.어떤 행복은 자신의 욕심만 채우는 것보다 다른 이에게 양보했을 때 더 커질 수 있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추운 겨울에 더 어울리는 따듯한 그림책입니다.
<본 도서는 비채 서포터즈 활동 중 제공받았습니다.>서포터즈 활동으로 도서를 보내주기 전 보낸 메일을 읽으며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을 새롭게 단장한 소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책날개에 안내된 <전설의 하드보일드 미스터리 탐정 사와자키 시리즈>라는 문구와 소개된 책들을 보고 아차 싶은 마음이 컸다.믿고 읽는 출판사의 도서라 무턱대고 욕심낸 게 아닌가 후회하기도 했고, 초반에는 사와자키 탐정을 전혀 모르는 상태이기에 집중하기 어려워 새로운 이름이 나올 때마다 소개된 등장인물을 들여다보느라 바빴지만, 어느 순간 다음 일정이 있다는 게 아쉬울 만큼 이야기에 빠져들었다.사백 일 만에 도쿄로 돌아온 ‘와타나베 탐정사무소’의 사와자키는 의뢰인을 대신해 자신을 기다리는 노숙자를 만나게 된다.노숙자에게 전달받은 다른 사람의 명함에 적힌 ‘우오즈미’의 연락처로 전화하지만, 통화는 되지 않고 명함 주인이 사망하는 사건이 벌어진다.사와자키는 의뢰인인 우오즈미를 만나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 어렵게 그를 만나지만 사건을 의뢰하지 않겠다는 말을 듣게 된다. 탐정 사무소에서 돌아가던 우오즈미가 괴한에게 습격당하는 일이 발생하고 의식을 잃기 전 십일 년 전 자살한 누나의 사인을 다시 조사해 줄 것을 의뢰한다.소설은 십일 년 전 우오즈미의 고등학교 시절 벌어진 승부조작 사건과 누나 죽음의 관련성을 찾아가는 이야기이다.1990년도가 배경이라 지금처럼 사건 현장에서 발견된 DNA가 수사에 중요한 단서가 되지 않았고, 공공장소에서도 흡연이 용인되던 시기였다.거기다 자동응답기가 아닌 자동응답서비스가 이용되던 아날로그적인 시기라 지금의 수사 환경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그렇지만 사실을 모두 이야기하지 않을 뿐 거짓말하지 않는다는 사와자키의 조사 과정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작은 단서와 상대와 나누는 대화 속에서 진실에 다가가는 모습과 적당한 선을 지키며 조사하고 나설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모습에서 감정 따위 드러내지 않는 냉철함을 돋보이게 한다.거기다 사와자키를 습격한 괴한들과의 격투는 손에 땀을 쥐게 하고 적대관계에 있는 폭력단과의 케미는 다소 무거워질 수 있는 소설에 숨통을 열어주는 역할을 한다.특히 노숙자인 마스다와의 마지막 대화는 인생을 달관한 듯해 더욱 쓸쓸하게 느껴진다.후기를 대신하는 짤막한 토막소설 <세기말 범죄사정-죽음의 늪에서> 일어나는 범죄는 현재진행형으로 지금도 어딘가에 진행되는 범죄를 닮아서 그의 선견지명에 감탄하게 된다.비채 덕분에 사와자키를 알게 됐으니 우선 #그리고밤은되살아난다 를 읽어봐야겠다.
<본 도서는 열린책들에서 진행한 서평 이벤트에 당첨돼 제공받았습니다.>동사 “하다“를 주제로 우리가 하는 다섯 가지 행동 ‘걷다, 묻다, 보다, 듣다, 안다’에 관해 25명의 작가가 참여한 앤솔러지 중 네 번째 <듣다>이다.다섯 명의 작가가 전하는 듣는 행위에 관한 이야기는 과연 나는 누군가의 이야기에 얼마나 귀를 기울여 집중해 들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7년이라는 시간을 함께했지만, 이제는 멀어진 ‘L‘과 ’나‘의 이야기인 <사송>은 둘이 내뱉는 언어가 대화보다는 독백에 가까워 그들이 만나온 세월이 더 서글펐다.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내가 하는 말소리를 나만 듣지 못하는 상황에 내몰린 <전래되지 않는 동화>는 실제로 다른 사람의 이야기는 잘 들으려 노력하면서 내 안에서 들리는 소리에는 무심한 우리의 모습처럼 느껴져 쓸쓸하다.엄마와의 갈등으로 가출 후 삼촌과 지내게 된 아이의 이야기 <폭음이 들려오면>은 한 번 어긋나면 다시 되돌리기 어려운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며 나는 얼마나 아이들 말에 귀 기울였나 되돌아보게 된다.엄마가 다쳤다는 소식에 오랜만에 찾은 <나의 살던 고향은>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 ‘영지‘는 약속을 실행하지 않고 되돌아올 수 있는 길이 아닌 마음의 소리에 따라 일을 저지르게 된다.가장 선명하게 읽혔던 이야기 <하루치의 말>은 ‘애실’과 ‘현서’의 관계가 내내 불안불한하더니 기어코 생각했던 방향으로 진행돼 서글퍼진다.애실이 끝까지 현서가 했던 말을 믿었고, 사정이 있을 거라 이해하려 하는 모습이 답답하기도 했지만 마지막 남긴 현서의 말은 비수처럼 꽂혀 입을 다물게 된다.조용하다는 거야. 원하는 만큼 조용하게 있을 수 있다는 거. 아무 이야기도 안 들어도 된다는 거.현서는 결심한 듯 자세를 고쳐 앉고 마지막 말을 건넸다.애실아, 그동안 네 이야기 들어 주는 거 나 너무 힘들었어.어쨌든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다. 돈은 어떻게든 갚을게. 더는 오지 마. (p62) 나이가 들어가면서 말하기보다 어려운 게 제대로 듣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누군가가 하는 말을 오해 없이 듣기가 어려워 차라리 아무하고도 말하지 않고 하루를 보낸다면 평안해질 수 있겠다 싶기도 하다.그래서인지 원하는 만큼 조용하게 있을 수 있어 좋다는 현서의 말은 특별하지 않은 어떤 말인가를 뱉으려는 내 입을 막고 귀를 열게 한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첫날엔 어떤 친구들과 같은 반이 될까도 궁금하지만 새롭게 만날 담임 선생님이 누굴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학교에 가게 됩니다.초등학교의 마지막 학년을 시작하는 날 새로운 선생님을 맞이하게 될 아이들 앞에 기대와는 다르게 뚱뚱하고 흰머리가 사방으로 뻗치고 코끝에는 조금만 안경을 걸친 할아버지 선생님이 등장합니다.담임 선생님은 아이들에게 선물 꾸러미를 하나씩 주는데 그 안에는 시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카드와 비슷한 카드가 들어있습니다.“잠자리에서 일어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학교에 가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지각하고 싶을 때 쓰는 조커, 숙제를 하고 싶지 않을 때 쓰는 조커, 떠들고 싶을 때 쓰는 조커……“조커 카드에 적힌 글을 읽고 난 후 아이들은 황당해하면서도 흥분합니다.아이들이 기대했던 선생님과는 전혀 다른 노엘 선생님은 아이들의 하루하루를 선물처럼 만들어 줍니다.어른이 보기에는 위태위태해 보이기도 하지만 아이들에게는 꽉 막힌 숨통을 조금은 틔워주는 선생님입니다.하고 싶지 않은 걸 하지 않고 하고 싶은 걸 해도 천재지변은 일어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준 노엘 선생님의 교육관에 모두 찬성할 수는 없지만 조커가 필요한 아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는 있었습니다.“인생에는 조커가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너희가 사용하지 않는 조커들은 너희와 함께 죽고 마는 거야.” (p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