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돌, 큰 돌, 옆구리가 깨진 돌, 대가리 날카로운 돌 모아 담장을 쌓아올린다. 황토와 짚을 잘 섞어서 두 집 사이에 돌 울타리를, 매화나무와
감나무의 경계선을 후회도 없이 쌓아올린다. 나는 큼지막한 돌덩이를 양손으로 옮긴다, 감나무 그늘로 옮긴다. 저만치 매화나무 꽃눈이 지켜봐도
돌풍과 작달비에 끄덕없는 돌담을 쌓는다.
오늘 나는 담장을 쌓아올리며 겨우내 잠자던 어깨 근육을 흔들어 깨웠다. 돌덩이 하나 놓고
수박만한 태양을 놓는다. 돌덩이 하나 놓고 굴참나무숲 그림자를 놓는다. 곰곰이 바람의 각도와 수평을 맞추고 또다시 돌덩이와 재미없는 한낮의
하품을 마저 놓는다. 그때 나는 줄곧 이 담장 타기를 좋아하는 장미와 능소화의 유쾌한 질주를 생각한다.
나는 자명하게도 담장을 쌓는 일에 끝없는 동작으로 있는 힘을 탕진 중이다. 누가 또 돌담을 쌓아
격장을 이루는가, 그러나 나는 돌담처럼 맑디맑게 정다울 것이다.
사실 이 시인은 명랑한 남극을 보고 나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왠걸, 첫 시집의 첫 시부터 왠지 내 이야기같아서 너무 좋았다. 어언
27년간 사람간의 관계에 벽을 치고 산다고 (내가 의도한 것도 아닌데 ㅠㅠ) 온갖 욕을 다 먹던 나였다. 그래서 최근 장벽을 걷는다고 일부러
허물없이 대했더니, 이제는 좀 아닌 척 하면서 살라고 한다. 심지어 이용해먹고 배신까지 때린 인간들도 나왔다. '좋아, 그래서 대체 어떻게
살라는 거야?' 라고 생각하며 잔뜩 심통이 나 있던 차에, 이 시를 읽고 정말 위안을 받았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그러나 그런 위안도 잠시, 다음 시들을 읽어보면서 도대체 이 시인을 믿어야 할지 어째야 할지 감을 못 잡겠다. 깜짝 놀라서 시집을 확
덮다가 시집의 표지를 새삼 보게 되었는데, 보라색이다. 역시나 이 시인도 나처럼 별난 부류이구나 싶은 허탈감이 들면서도, 당당하게 인간 관계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정한' 벽을 친다고 시를 쓰는 시인도 저렇게 사는데 나도 계속 이렇게 살아도 되는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달까.
뭐 딱히 시가 이상하다거나 내 취향이 아니란 건 아니다. 도리어 심하게 내 취향이라서 문제다. 인공수정 같은 시에서는 물고기의 인공수정을
보면서 인간을 인공수정시킨 후 죽이는 장면을 떠올린다. 처음 듣자마자 뇌리에 꽃힌 명랑한 남극에서는 자신이 품고있던 알을 맹렬하게 쪼아먹는
황제펭귄을 등장시키면서 자연의 부성애 모성애 운운하는 인간들의 주둥이에 강펀치를 날린다. 자연과 동화하여 자연의 시선으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는
시인의 관점이 굉장히 두드러지는 시였다. 마치 샤머니즘을 떠올리게 한달까. 개인적으로 마지막 페이지에 소문과 안녕, 서울이여!를 넣은 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사회비판적인 시를 좋아하는 편이지만, 이 시인은 자연에 대한 시를 쓰는 게 훨씬 더 나은 것 같다. 마음은 벌써 남쪽
마이산이 있는 곳으로 가 있는 것 같으신데, 지금쯤엔 혹시 그 쪽에서 살고 계시는지?

월광욕이란 시에 등장하는 사슴이 뭔지 궁금한 분들은 이 사진을 참조하시길.
시인이 시를 쓰는 동안 어떤 아바타로 존재할 것인가에 대한 기준인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