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련 전차 창비시선 264
손택수 지음 / 창비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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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달

스무살 무렵 나 안마시술소에서 일할 때, 현관 보이로 어서 옵쇼, 손님들 구두닦이로 밥 먹고 살 때

맹인 안마사들도 아가씨들도 다 비번을 내서 고향에 가고, 그날은 나와 새로 온 김양 누나만 가게를 지키고 있었는데

이런 날도 손님이 있겠어 누나 간판불 끄고 탕수육이나 시켜먹자, 그렇게 재차 졸라대고만 있었는데

그 말이 무슨 화근이라도 되었던가 그날따라 웬 손님이 그렇게나 많았는지, 상한 구두코에 광을 내는 동안 퉤, 퉤 신세 한탄을 하며 구두를 닦는 동안

누나는 술 취한 사내들을 혼자서 다 받아내었습니다 전표에 찍힌 스물셋 어디로도 귀향하지 못한 철새들을 하룻밤에 혼자서 다 받아주었습니다

날이 샜을 무렵엔 비틀비틀 분화장 범벅이 된 얼굴로 내 어깨에 기대어 흐느껴 울던 추석달

 

  

그러고보면 시는 일기라 할 수 있겠다.
자기 생각이 가부장적인 건 어찌보면 그쪽의 사상이나 사고방식 문제라서, 욕을 먹어도 서로 토론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있다. 혹은 시대반영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문제는 애매하게, 잘난듯 흐리멍텅한 시를 쓰면서 뒤로는 성추행 성폭행을 해대는 문인 무리들이겠지.

 

 이 시집은 전반적으로 색채가 뚜렷하다. 어두운 밤하늘 별똥별 하나가 떨어지는 장면을 지켜보고 서 있는 시인과 여성 한 명. 그 여성은 한 때 시인이 다리를 주물러줬던 애인일 수도 있다. 또한 그를 밸 때 시어머니 몰래 홍어를 먹다가 죄책감에 다 토해내고 눈물을 흘린 어머니일수도 있다. 온갖 미신을 다 지켜내고 땅에 씨를 뿌리듯 이야기하여 시인의 창작열을 일으켜낸 할머니일수도 있다. 그의 시는 가부장적이지만, 시대의 차별과 압박을 견디어낸 여성들의 이야기를 풀어낸 데서는 또한 페미니즘적이기도 하다. 이 모순을 현대의 합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여성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일단 그 여성들도 가부장제에 속해 있는 여성의 몸 속에서 나왔다. 우리는 아무리 애를 써도 한 몸이 되어 한 생각을 할 수 없다. 동시에 우리는 철저히 개인이 될 수 없다. 이 딜레마를 우리는 어떻게 풀어내야 하는가. 손택수는 남자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성별 때문에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다는 우는 소리를 하지 않는다. 단지 알면서도 묵묵히 자신에게 속아준 아내에게 감사를 표한다. 티비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며 총에 씌운 콘돔보다 더 자극적인 요소를 찾아보는 평소의 자신을 냉철하게 관찰한다. 그리고 써낸다. 시를 창작해낸다. 비유적인 출산의 고통으로서 여성을 이해해보려 애를 써본다. 남성이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어른이 아이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메이저가 마이너에게, 다수자가 소수자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지켜보는 일이다. 빛이 있는 세상에서 음지의 세상에 대해 써내려가고, 말을 함으로서 알리는 일 뿐이다. 진정한 내부자들이란 그런 것이다.

 쓸모없는 짓이라고 느껴지더라도 상관없다. 그렇게 마음먹고 시작했다면 최선을 다해라.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해도, 아무 것도 하지 않음으로 인해 무언가 변하는 운명이 있다. 손대지 않는 게, 행동하지 않는 게 반드시 나쁜 것만은 아니다. 여자가 미니스커트를 입는 게 눈꼴시다면, 그걸 훈계하지 않는 게 꼰대들이 '해야 할' 최선일 것이다. 떨어지는 게 반드시 나쁜 일만은 아니다. 정치에서 낙선은 관록을 나타내기도 하다. 이왕 떨어질 거라면 별똥별이 되어라. 이 시집에선 교훈을 얻을 만한게 많다. 그러나 시인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삶만을 이야기할 뿐이다. 보면 볼수록 신기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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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하나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조오현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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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월동에 갔다 와서

지난달 무슨 일로 광주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망월동에 처음 가 보았다
그 정말 하늘도 땅도 바라볼 수 없었다

망월동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망월동에서는 묵념도 안 했는데
그 진작 망월동에서는 못 본 것이 보여

죽을 일이 있을 때는 죽은 듯이 살아온 놈
목숨이 남았다 해서 살았다고 할 수 있나
내 지금 살아 있음이 욕으로만 보여

  

나에게 신흥사란 복잡한 느낌이 드는 곳이다. 현미녹차를 사라고 권하지도 않고 공짜로 주던 때가 있었는데 거기 보살님이 굉장히 살뜰하니 잘해주셔서 한때 거기 자주 들렀었다. 내가 책을 가방에 보따리로 들고 다니니 처음엔 여행자로 알았다고 한다. 그런데 빈번하게 드나드니 정말 착실한 불자라고 생각했다가 이 그 근처에서 산다는 말을 듣고 정말로 깜짝 놀라셨다나? 아무튼 그 분 덕분에 자주 절 근처에 놀러다니는 경험을 했다. 성철 스님의 책을 좋아해서 그 책도 많이 샀었다.

 

 그러나 제법 소문은 흉흉했다. 일단 설악산의 땅값을 절에서 챙긴다는 것 자체가 별로 좋아보이진 않다. 게다가 보살님들과 스님들 간에 섬씽이 있다는 건 강원도에서 제법 유명한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한 설악산 케이블카 설치 반대 1인 시위를 하는 주부와 아이를 매몰차게 내쫓은 곳도 신흥사다. 그 옆 낙산사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을 대놓고 찬양하는 축제를 벌이기도 했었다. 그런데 조오현이란 스님이 시도 지으면서 설악산 신흥사 조실을 살고 있다고 하면 마음이 복잡해진다. 신흥사의 내부가 하도 넓어서 마음이 올바른 사람 하나가 있어도 전체를 다스릴 수는 없다는 걸까. 아니면 힘써서 다스린 게 그나마 그 정도인가? 그러고보니 시인의 말에서 '물속에 잠긴 달은 바라볼 수 있어도 끝내 건져낼 수는 없는 노릇이구먼.......'이라는 말을 중얼거리고 갔다는 노인이 의심스럽다.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는 이 스님의 시는 하이쿠처럼 함축적인 시가 대부분이다. 그런데 하이쿠보다는 훨씬 난이도가 높다. 하이쿠가 갈매기 두 마리를 그리고 있다면, 그는 갈매기 두 마리가 떠난 다음 날 '울음을 그친 동해 바다'를 그리고 있다. 황동규 시인의 시 '사라지는 것들'에 답하는 시 '삶에는 해갈이 없습니다'는 제목부터 한참을 곱씹게 된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밭을 가느라 온 몸을 땅바닥에 던지고 허연 거품을 무는 대목에선 전율마저 느껴진다. 대지라는 소설을 쓴 펄 벅이 우리나라에서 소와 함께 볏짚을 지고 가는 농부를 마주쳤을 때 그런 기분이 들었을까?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머리를 굴리면서 시를 읽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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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책과 혁명에 관한 닷새 밤의 기록
사사키 아타루 지음,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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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최근에 완전한 문맹인 제일한국인 할머니의 리포트를 읽었는데 아주 고통스러웠습니다. 전시나 전후의 혼란 속에서 한국어도 일본어도 읽을 수 없는 상태로 자란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 해외에 나갔을 때 이상한 감각을 느끼는 경험을 하게 될 겁니다. (...) 그런데 그 할머니에게는 세계 어디에 가도 '이향'일 뿐입니다. (...) 자기가 사는 집 문에 페인트로 인종차별적인 낙서가 쓰여 있는데도 그 내용을 읽을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누가 가르쳐줘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때는 아직 소녀였다고 하는데, 그날부터 도로 표지판이나 시내의 간판이 모두 자신을 차별하는 말이 아닐까 하는 망상에 사로잡힙니다. 그러나 이는 정신적인 병리가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어릴 때는 신경질적인 편이었는데 그 때문에 고질라라고 놀림받았다. 중고등학생 때는 통통했는데 외양으로 놀림받았다. 20대 초반에 남친을 사귈 땐 있지도 않는 상상의 '커피 나르는 일만 하는 회사원 여성' 이야기를 줄곧 들어야 했다. 페미니스트 남성들에게 가정주부 하지 말고 직장에서 죽을 때까지 일하라는 소리는 수없이 듣는다. 지금은 남자가 나를 밀쳐서 옆의 상자에 다리를 부딪쳤는데 내가 피하는 모습이 발레리나 같다고 추근대며 내 옆에서 발레리나 흉내를 줄창 냈다. 근처에 그의 여친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전부 별것도 아니란 사실을 안다. 어쩌면 나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지도 모르겠다. 내가 이렇게 광적으로 책을 읽지 않았다면, 대학을 가지 않았다면, 이 정도의 페친이 있었을까? 직장동료들의 이지메가 이 정도로 끝났을까? 직장상사는 내가 고졸이었으면 내가 실수할 때마다 내 멱살을 들고 목을 졸랐을 거다. 정신병력이 없는 여자를 찾는 페친이 있다. 정신이 멀쩡한 여자? 존재할까? 이런 정신나간 사회에서 두 다리 뻗고 편안히 잘 수 있는, 정신이 멀쩡한 내가 이상한 게 아닐까? 요즘은 동성의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겠다. 불쌍해서. 그러고보면 여자들이 문맹에서 대부분 벗어난 게 언제인지 이 책에선 다루지 않는다. 책의 분량을 짧게하기 위해서였겠지만, 어쩌면 책을 읽는 여성이 너무나 최근에 많이 생겨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보니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못지 않게 미친 제목이 있었는데. 박원순이 썼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였나. 어디에 다리 잘라달라거나 자르라는 제목은 있는지 모르겠다. 거기다가 섹스와 공포라는 책까지 있으니 확실히 그런걸 진열하는 서점과 '주인장이 선택할 여지도 없는' 도서관은 사사키 아타루 말대로 중2병의 소굴일지도...

 서른살 먹은 요즘 와서 알게 된 게 있는데, 시나 소설을 별로 읽지 않는 사람은 내 주위에 한 명도 성공한 사람이 없다. 심지어 문학책을 읽은 수만큼 월급이 많은 경우도 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다지만, 그래도 죽어라 도서관에 가서 책을 빌려 읽어라. 빚을 내서라도 판타지 소설을 시리즈째 사서 읽어라. 아무리 어릴 때부터 읽어도 시간이 없는 게 소설 읽기다. 그리고 무한 반복해서 읽는 소설책 한 권은 구해둬야 한다.
 맨날 블로그에서 책문답 올리는 걸 보고 '조회수 올리려고 그러시나봐요?'라고 하는 사람 자주 본다. 뭐래니? 내 인생 잘 되려고 올리는 거다. 담배는 물었는데 라이터 불이 안 켜져서 계속 땡기고 있는 거랑 똑같다. 제발 소설 좀 읽으세요. 뭐 여기 이 책에서는 문학의 의미를 좀 더 넓게 생각하지만.

 

 그러고보니 이리야의 하늘 UFO의 여름에서는 다 함께 죽거나 다 함께 사는 건 행복한데, 다 사는데 나만 죽거나 혹은 다 죽는데 나만 사는 건 슬프다고 했던가. 특히 맨 끝의 상황은 그게 사는 동안 지속되서 최악이라 했던가.
 주인공은 '세상이 다 망해도 이리야만 살면 돼' 라고 했고 그를 체포했던 군인 아저씨는 '세상의 끝에서 나는 네 손에 죽고 싶었다'라고 절규했었다. 그럼 세카이계는 종말이 아니라, 종말 이후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인가. 뭐랄까 그러고보니 인류 멸종이 아니라 그건 단순히 대재앙이잖아.

 사사키 아타루는 야전과 영원을 소개받으면서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 책을 보고 또 감동받았다. 페미니즘이란 양념을 참 적절하게 뿌렸다.
 이 책을 읽고 난 후엔 독서모임에서 다루는 면역에 관하여를 읽는다. 그 다음엔 구별짓기 하를 읽고 염무웅의 자유의 역설을 빌리고 내여귀를 읽는다. 그러다보면 독서모임에서 읽을 책이 또 정해지겠지. 요즘은 이런 시간이 즐겁다. 정말로. 그리고 다행이다, 내가 책을 읽는 여성이라는 게. 그럴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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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명한 유령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64
조영석 지음 / 실천문학사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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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어

해변에서부터 너무 멀리 와버린 것일까.
암초 위에 앉아 젖은 머리를 말리며 듣던 노래
더는 들리지 않고

지상의 물기를 모조리 핥아먹는 여름
쨍쨍한 정오의 태양을 온몸으로 짊어진 채
인어 한 마리 눅눅한 아스팔트 위를 기어가고 있다.
목소리를 내어주고 얻은 것은 무엇이었나,
인어는 다만 제 꼬리를 고무로 바꾸었을 뿐.
힘차게 한번 펄떡일 힘도 없이 꼬리는
까맣고 끈적거리는 비늘을 녹이며 추진력을 얻는다.
칼날을 밟는 아픔을 참느라
고개를 숙인 인어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다.
인어가 앞세운 녹슨 카세트에서
기쁨과 축복의 노래가 가난하게 흘러나온다.
지느러미처럼 생긴 손바닥 위에 소쿠리를 얹은
인어는 지상에서 살기 위해 구경거리가 된다.

때마침 격렬한 소나기가 쏟아지고
인어의 곁을 쿵쿵거리며 걷던 다리들이
거품처럼 가볍게 사라진다.

또다른 해변이 멀지 않은 것일까.

인어는 고개를 들어 빗물을 마신다.
밍밍하기만 한 물에 땀방울을 섞어 염분을 섭취한다.
꼬리에서는 푸시시 열기가 꺼지며 김이 솟아오른다.
소쿠리 속 동전들이 미역처럼 번들거린다.

까끌까끌한 눈알들이 인어의 몸을 핥으며
곳곳에서 담배 연기를 피워 올리고 있다.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어려운 시들이 많다는 불평이 사람들 사이에서 많다. 그래서 조영석 시인은 이해하기 쉬운 시들을 썼다. 그러나 그는 제목을 이렇게 썼다. '선명한' 유령이라고.

 

 예전에 유행했던 단어가 진정성이라면 이번에는 선명성이라고 본다. 확장성이란 단어랑 같이 사람들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쓰는 말이다. 진정성은 아주 최근에 진심이라는 단어와 얽혀져 있다는 사실이 여러 권의 책들에 의해 밝혀졌다.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부제 또한 '진심을, 너에게'이니 이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게 어떤 느낌인지 파악이 되리라 생각한다. 그렇담 선명성이란 건 또 무엇일까? '미학'사상가 바움가르텐은 이를 미감적 빛이라고 하며, 명석함과 이해 가능성을 뜻한다 했다고 한다. 다시 '이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그리고 이 책을 펼쳐볼 때, 우리는 충격과 공포에 휩싸이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는데 나도 이 시인처럼 회를 먹지 못했던 적이 있다. 어렸을 때 참돔으로 추측되던 게 머리째로 올라온 적이 있는데, 한참동안 그 머리를 바라봐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잘린 머리 속 눈동자가 움직인 것만 같았다. 나는 그게 너무 소름끼쳤었다. 그러다보니 생선의 가시가 목구멍에 박힌 것 같은 느낌까지 들었다. 그게 양심이라는 걸 한참 후에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마치 뾰족한 모서리가 있는 삼각형의 물체가 부딪치면서 닳아가듯, 나는 생선의 뼈도 잘 발라먹게 되었고 회도 곧잘 먹게 되었다. 주로 소주랑 같이 먹어야 맛이 있었다. 나중에는 무얼 먹는지도 모르게 되니까.

 시인의 미감적 빛은 너무나 심하게 자연스러웠다. 그의 눈에 비치는 제주도는 이제 낙타의 발굽이 갈라지는 딱딱한 아스팔트와 절규하는 햇빛밖에 남지 않았다. 그에게 봄밤은 사랑했던 여자에게 돈을 탈탈 털린 날이다. 그에게는 전쟁이나 전쟁같은 무언가로 두 다리를 잃고 다리 대신 검은 고무를 질질 끄는 걸인이자 장애인이다. 그의 선명함은 세상의 온갖 먼지와 인간이 낼 수 있는 모든 분비물에 찌든 냄새다. 확실히 20대 파릇파릇한 청년 시절 IMF를 겪은 사람이라면 느낄 법한 선명함이다. 진정한 실천문학이란 이런 것이구나 느끼게 된다.

 

 P.S 건담으로 인해 알게 된 페친이 이 형(?!)과 알고 지낸다고 한다. 덩치가 크셔서 절대 시인이 안 되실 줄 알았다고 한다. 그러나 문인들에겐 헤밍웨이라는 좋은 사례가 있지. 그나저나 세상 참 좁다 ㄷ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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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프라하,함흥 문학동네 시집 29
이홍섭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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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접가

내 사랑이
십자가처럼 무거울 때
춘천 향교 옆 은행나무 두 그루는
여전히 노란빛으로 환했다

열병처럼 환한
은행나무 두 그루 사이에
노란 길이 새로 열리고
그 길로 내 사랑도 얼른 지나갔으면
나비처럼 가벼웠으면
꿈꾸기도 했다

어쩌지 못하는 사랑에
고개 숙이고 걸을 때
혹은, 춘천 향교 옆 은행나무 두 그루 사이를
먼산 보듯 지나갈 때

휘파람처럼 쏟아져내리던
노란 나비떼

  

보통 남의 시를 읽다보면 시인의 고통을 액면 그대로 쓰는 경우가 많다. 육하원칙과 인과관계가 생략되어 있기 때문에 슬프다 기쁘다 외에 구체적으로 어떤 감정인지조차 모를 수가 있다.

 

 그러나 이 시를 읽으면 잘 모르겠다라는 난해함보다는, 되려 호기심이 생긴다. 그의 사랑은 왜 꽃이 아니었을까? 그들을 꽃피게 하지 못했던 세계의 꽃은 어떤 것이었을까? 절벽 어딘가의 돌단풍으로 남게 된 그의 사랑은 그녀에게도 그렇게 남았을까?

 그의 지나간 사랑 이야기는 사실 처절하다. 혼자 술을 마시고 있는 아버지로 점철된 과거, 시를 쓰기 위해 밥 먹을 돈을 벌지 못하고 단식하는 현재의 나, 굶주릴 때마다 떠오르는 북한 사람들 그리고 함흥. 그의 괴로움과 세상의 괴로움은 잘 연결되지 않는다. 소통하려는 그의 노력은 실패했다. 그러나 아픈 그대와 차창만 바라보는 나 사이에 펄펄 내리는 눈에 대한 비유는 아름다웠다. 섬과 육지 사이에서 물결치는 바다는, 절터에서 알을 까고 병아리가 되어 종종 뛰어다니는 번뇌는 빛을 발하고 있었다. 시인은 강릉의 풍경을 기준으로 하여 '멀쭉이'서 그것들을 바라본다. 90년대에 30대이던 그의 청춘은 그렇게 흘러간다. 시집도 한 권 냈으니 그의 청춘은 고독하게 승리했다고도 할 수 있겠다.

 스위치백식 기차를 다룬 시를 보면서. 내가 탔을 땐 그게 없어지고 마냥 긴 터널속만 뱅글뱅글 돌았던 점이 아쉬웠다. 지금 새로 개발한 기차에선 이 시인이 탔던 스위치백식 기차의 느낌이 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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