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주병 실천문학 시집선(실천시선) 147
공광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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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침대 위에서

황금침대 위에 옷 벗고 누워
반성 없이 핥아주고 빨아주고 대준다

"어서 내려와 이놈아!"
젊은 마르크스가 내게 소리친다

"제발 인간의 얼굴 좀 보여줘!"
늙은 교황의 절규도 들린다

황금침대에서 떨어진 적이 있던 나는
겨우 가계를 연명하는 수혈을 받고
그놈에게 예쁘게 보이려고 안달한다.

  

30살이 되고나서 나는 어엿하게 한 직장에 취직한지 만 4년이 지나려 한다. 이것도 얼마나 유지할지 알 수 없다. 어제만 해도 반년에 한 번 볼까말까한 본사 사람들에게 몇십만원짜리 실수를 했네 뭐네 하면서 사정없이 걷어차이는 신세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람들이 온 이유도 매장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는데, 뭐 어쨌든.

 

 그러나 주변의 다른 사람들도 그닥 다르지는 못한 듯하다. 외국으로 떠나겠다거나 꿈이 달리 없으니 공무원에 취직하겠다는 상념에 빠져 살거나, 나에게 기발한 아이디어가 있고 이 계획을 발표하면 세상이 폭발할 게 확실한데 그외 다른 일은 남에게 떠맡길 생각이라거나, 분노에 눈이 멀어 그토록 침을 튀기며 욕해댔던 기득권의 황금침대에 눕길 자발적으로 선택하거나. 아주 최악의 경우엔 그저 '군대에서 저질렀던 관습'을 습관적으로 일상생활에 옮기면서 산다.

 시인은 소주병이라는 시에서 알멩이도 없고 텅 빈 병으로 남은 아버지를 의식한다. 그 안에서 바람이 감돌면서 들리는 흐느낌같은 소리와 소주 엑기스같은 눈물을 매우 서정적으로 표현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버지 시체를 먹어보자는 아버지의 이야기인지 자신의 이야기인지 애매한 이야기가 나오다가 결국 휴일, 권태라는 시에서 아버지가 된 자신의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진술한다. 성관계까지도 적나라하게 진술하는 걸 보면 단순히 꼰대가 되어버린 건 아닌 듯하지만, 그 고어에 가까운 리얼리티가 오싹하기까지 하다. 자본주의 사회에 열렬히 저항하면서 그 안에서 이상향처럼 표현되고 강요되는 가족의 화목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그가 경건해지는 유일한 계기는 오로지 불교이다. 종교도 기득권으로 취급되는 오늘날을 생각해보면 결국 그는 다르면서도 비슷한 황금침대에 누워버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시집에서 나오는 자연이 바다에서 점점 산으로 바뀌는 것도 우연은 아닌 듯하다. 나이가 들면 점점 산을 오르고 싶어한다지 않는가. 의식이 깨인 듯 자기성찰과 관련된 시를 쓰면서 서슴없이 자신을 비난하면서도 가부장제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시인을 비난하지 말길 바란다. 그의 지나치게 솔직한 시는 사실은 당신들을 겨냥하고 있었다. 곧 꼰대가 될 새싹들과 이미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당당한 꼰대가 되었거나 꼰대가 아닌척 하는 비겁한 꼰대들을 말이다.

 

 

시인 분은 결정적으로 대천 바다를 좋아하시는 듯하다. 문체에서 상당히 신경을 쓴 티가 난다. 하지만 어째 대관령이라거나 태백산이라거나 강원도에 관련된 시가 양은 더 많은 편이다. 그나마 백사장에서 모래를 퍼올리겠다고 시가 어리석은 돈욕심을 내는 바람에 경관은 많이 망가졌지만, 등대를 삼킬 듯이 몰아치는 파도는 여전하다.

 

속초에서

겨울 부두 끝에 서 있는 등대가
추위에 몸이 얼어 빨갛다
등대가 바닷가에 나온 이유는
망망대해에 나간 배를 기다리는 것
그것도 모르는 멍청한 바람은
등대가 불에 잘 익은 소세지인 줄 아는지
게걸스럽게 먹어보려다 이가 시려서
웅웅 언 입으로 벙어리처럼 운다
철없는 파도도 그것을 먹어보려고
달려들다 넘어져 이빨이 부러진다
얼굴이 빨갛게 언 어머니 한 분이
방파제에 생선 구럭을 들고 나와
등대처럼 앉아 모닥불을 쬐며 존다
그걸 내려다보는 흰머리 설악은
마음이 안 좋은지 그늘이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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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모르게 어른이 되어 문학동네 시인선 69
박은정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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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키스

네 얼굴이 빛난다
백지 위 모래바람을 맞으며
대체로 너는 기억이 없고
단호한 표정이 없다
내일은 새로운 사건이 올지도 몰라
발갛게 익은 사지를 버둥거리며
기형의 아이가 하나의 세계를 그린다
어떤 이야기는 부끄러운 몸이 되고
귀기울이면 잠든 애꾸눈 하나가
뒤척이는 소리가 들려
원 안에서 소스라치듯 놀라는
저기, 죽은 새의 부리
점 속의 불길한 운명처럼
가까운 곳에서 먼 시간으로
모호한 정지를 덧칠한다
백색의 안쪽은 적색
다발의 안개는 짙어지고
저를 버린 사람들이 잠에 들면
기꺼이 짙어지는 창백들
죽은 새의 부리가
울음이라는 작은 묘혈을 판다
구름의 평화가 시작된다
맵고 거대한 심장이
부풀어오른다

 

  

동생이 자꾸 글을 쓰겠다고 되도 않는 소리를 한다.

 

 그러면서 한 자도 못 쓰는지 안 쓰는지 하는 걸 보면 아마도 평생 쓰지 못하리라고 생각한다. 그 녀석이 되고 싶다는 공무원도 될 수 있을지 의문인 판국이다. 안철수를 지지하고 문재인은 싫어하지만 둘 다 싫어한다는, 성서의 탕아를 생각하게 하는 그 남자애는 우리나라 사람들을 원숭이에 비유하는, 조지 오웰 식의 풍자소설을 쓰고 싶다고 한다. 참 경청이란 게 사람 스트레스 받게 하는 짓이구나. 차라리 치고박고 싸우며 우는 게 덜 스트레스 받을 것 같다. 하지만 녀석은 180 이상의 키를 자랑하고 전에는 몸싸움을 하다가 앞니가 날아갈 뻔한 적이 있어서 얌전히 귀를 파면서 들었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지는 때가 있다나. 그래 자기계발 소설 열심히 써라, 빈정거림이 섞인 격려를 하니 녀석도 갑자기 열심히 귀를 파며 공무원 시험 대비하러 지 방으로 들어간다. 문득 노르웨이의 검은 황소라는 시의 일부분이 생각나 이렇게 물어보고 싶었다. 너는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기 위해 하얀 스타킹을 신고 발바닥이 까매지도록 원숭이춤을 출 수 있니? 근데 녀석의 이전 연애 경력을 보건대 남자의 알량한 자존심에 기스를 남기기만 할 거 같아 그만두었다.

 시인이 묘사한 엄마와 딸 간 창녀 대물림의 불행은 그래도 많이 사라지지 않았나 싶다. 성적 특성은 둘째치고 정말 성추행을 당해도 그게 추행인지 모르고 살았고 성폭력을 당해도 쉬쉬 넘어가기 급했던 내 어릴 적 시절을 보면 말이다. 지금 세상을 보면 참 어안이 벙벙해진다. 핸드폰 끼고 자면 암 걸리네 어쩌네 해도 네트워크 때문에 좋은 세상이 온 건 사실이다. 덕분에 이런 시도 알게 되고 말이다. 예를 들어 여초 카페란 곳에서 이런 글이 올라왔다. 처음엔 부산 남포동에 가면 겪는 일이라고 하다가 나중엔 지역 상관없이 한번씩 다 당했다고 한다. 남자는 못 건들고 여자들만 머리채 휘어잡고 강제로 휴대폰 대리점으로 끌고 간다고 한다. 핸드폰을 숨겨서 안 돌려주지 않나. 남직원이 여자손님 데리고 들어가면 다른 남직원들이 문 닫고 입구를 지킨다고 한다. 사진 찍은 뒤 경찰서에 직접 사진 들고가서 고소장 적으면 접수된다고 하니 참고 바란다. 그런데 이 시인도 부산 출생이라고 하더라... 고통받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시에 너무나 많이 나와서 안타깝다.

 왠지 이 시집에 대한 수많은 리뷰 중에서는 누런 벽지란 단어의 의미를 한 분밖에 의식하지 않는 듯한데, 아니, 그 분도 누런 벽지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이런 제목의 단편 소설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이 시집을 읽은 사람은 소설의 성격을 짐작하고도 남겠지만, 페미니즘에 기반한 공포 소설이다. 고어물이라기보단 전형적인 우리나라 공포 영화를 연상케 하는데, 19금 여고괴담 정도가 딱이라 생각한다. 여성의 광기에 대해 잘 쓰고 있어서 영문학도라면 꽤 즐겁게 감상할 수 있으리라.

 

 

  

시 중에서 사루비아가 있어서 검색했는데, 사루비아 짱 무려 담배피는 갸루였구나... ㄷㄷㄷ 더욱더 사랑스러운데♡?(?) 어렸을 때 봐서 기억을 못하는 건지 아님 한국방송이 시키지도 않은 심의를 해서 담배 끝에 사탕을 그려놨는진 모르겠지만 여러분 사랑스럽지 않습니까!! 웨딩피치 중 최애에요!!! 츤데레 눈빛 사이쿄오!!!! 그래서 내 인생이 정상적인 여성의 길로 가지 못했나 싶기도 하지만.

사루비아 중에서

떠돌이 개의 발정난 눈알처럼
불현듯이 터져나오는 산모의 하혈처럼
너의 빛깔은 리듬에 취해
격렬한 영혼이 된다

차가운 심장을 옷깃에 달고
유일무이한 존재의 방이
아무도 없는 방으로 변하는 일

붉음의 일, 금지된 것들의 탄생, 그리고 서서히 사라지는
세상의 감탄사들을 생각해내는 일

커튼을 열면 흩날리는 입술들
황달에 걸린 땅거미가 덮치면
모든 격렬한 것들이 눈을 감고
공중의 잎들을 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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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커스 Workers 2017.4 - 29호
워커스 편집부 엮음 / 사단법인참세상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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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노조 출범 전까지는 원청이 모든 작업 배치와 변경, 업무 지시 및 감독, 근태 관리, 징계, 근로시간 등을 결정했다. 배 지회장은 "원청의 보전팀 과장이 업무를 지시했고, 그는 업무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인사조치하겠다, 자르겠다고 이야기했다"고 설명했다. (...) 한라홀딩스의 자회사 '만도헬라'와 만도의 자회사 '만도브로제'는 인천 송도에서 무상 임대 혜택을 받았다. 무려 50년 간 무상 임차가 가능하다. 이들을 포함해 부지 무상 임대 혜택을 받은 5개 기업의 면제 액수는 1300억원에 달한다. 경제자유구역 입주 혜택을 받고, 불법파견을 양산하며 이중으로 자본을 축적하고 있는 셈이다. 노조에서는 자동차 전기모터를 생산하는 만도브로제 역시 파견 형태의 인력 공급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 만도헬라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평균 연령은 30대. 시급 7620원을 받으며 일을 하고 있다. 채용정보에 기재된 임금을 받으려면 한 달 4~5번의 특근과 잔업을 꼬박 채워야 한다. 배 지회장은 "예전에는 공장장이 전 사원을 모아 놓고 우수사원은 정직원을 시켜주겠다고 공표를 했다. 하지만 정직원은 고사하고 하청업체 노동자들을 하대하고 인격모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 남 말이 아닌데 조금 나와는 다르다. 난 일단 최저임금이고, 그거 받는데도 감지덕지 아니냐며 휴가를 안 가는 대신 돈 받는 제도도 없애버리고, 그러면서 본사의 '정직원'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원청에서의 일도 무료로 해주고 있고, 지시도 받고, 갖은 모욕을 현재진행형으로 받는 중. 이 회사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다.

2. 프랑스가 점점 재밌어지는 듯하다. 극우파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공산당원이었던 중년 남성 로랑 다쏭빌 씨가 당적을 옮겨 와 대선을 준비중이다. 기업의 상당주의 책임 법이라는 걸 만들어 프랑스 대기업들이 저지른 사업관계 전반의 인권 및 환경침해 여부를 파악하고 예방까지 하겠다고 한다. 전자는 굉장히 국가보호주의적인데 후자는 제3세계를 의식하는 면이 있어서 대조적이다. 국민 스케일로 광장에서 밤샘토론을 했던 이들이 그 교훈을 어떻게 실행으로 옮길지 지켜볼 바이다.

3. 시스젠더 헤테로라는 단어가 나오던데, 이런 전문 단어들 좀 언어 방대하게 하나로 정리된 책 있었음 좋겠다. 30살은 뭔 소린지 하나도 몰라영. 워커스같은 잡지에서 정리해줬음 하는데 얘네들은 단어만 휙 던져버리고 분량 얼마 안 남았다고 슥슥 쾌속으로 지나가버리니.

 

 

 

그리고 꼴페미들 폭발할 뇌는 가지고 있어서 뭐하니? 폐기해야 한다. 이 사상이 훗날 포스트모던 페미니즘이란 것들과 만나 괴랄한 사상으로 이어진다던데, 그게 뭔진 모르겠지만 너의 이름은 극장에서 상영할 때 스크린에다가 아침햇살 던진 혼모노들이 되지 않았을까 예상해본다.

 

 4. 워커스에서 특히 직장과 사상 간 갈등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 듯하다. 만일 직장 문화가 나에게 맞지 않는다면, 본인이 그랬던 것처럼 직장 문화를 내 관점에 맞게 바꾸는 법이 가장 이상적이다. 그러나 동료 간의 갈등이 심해지고 직장을 그만두라는 권고가 심심찮게 들어왔으니, 가족을 부양하는 사람이 그렇게 간단히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가족들을 설득하고, 좀 더 가난하게 살더라도 자신의 이상에 맞는 직장을 찾아다니는 것도 한 방법일 수는 있다. 현재 경제가 60년대를 떠올리게 하는 상황인지라 어차피 뭘 해도 어렵다. 즐겁게 할 수 있고 비전이 있는 일을 찾도록 하자.

 

 

5. 우리나라에선 건담 동호회가 엔하위키를 만든 게 소셜웹의 시초라 알고 있다. 퍼스트 건담은 일본 공산당과 관계가 있는 인물들이 각본짜고 그림그린 애니로 공대 소년도 다룰 수 있고 무지 센 건담이란 로봇을 만들고 그 안에 여자라던가 민간인들도 잠깐잠깐 들여놓아 다룰 수 있게 한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엔하위키는 돈 때문에 운영진들이 싸우다 결국 폭망하게 되었고, 현재 건담 시리즈는 애니 계에서 명성을 올리려는 조폭들로 인해 전쟁물이 아닌 느와르물이 되어가는 중이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은 사기로 본다. 앨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까지가 정확한 게 아니었나 본다. 앨빈 토플러는 천재였지만 결국 나이가 들어 사망했다. 그만한 인물이 없는 지금, 새로운 이론은 우리 자신들이 만들어가야 한다. 나는 사람들이 지금까지 만들어 온 기계를 응용하여 자연을 보존하는 것이 스마트 시대요 미래에 대한 답이라 본다.

 

 6. 그나마 공현같은 필진을 과감하게 빼버리고 현실과 밥에 집중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 마지막에 성지훈 씨가 하신 청년에 대한 기준 지적하는 이야기는 워커스 10회부터 내가 줄곧 지적한 문제라서 더 이상 뭐라 할 말이 없다. 직장을 옮겼다 하시던데 그 신문사도 나는 개인적으로 무지 꺼림찍하고 그런 똥 같은 기사들 그럼 여태 왜 썼냐 지적하고 싶지만, 어차피 사람 변하지 않는다 하지 않던가. 그냥 잘 가시라는 말밖에 뭘 더 말하겠는가. 사회학이 무슨 종교도 아니고 맑스 숭배해라 이런 움직임 몹시 불편했다. 전에는 자기 할 말만 무지 하더니 지금은 책 소개 위주로 싹 분위기를 바꾼 배성인의 칼럼도 보기가 한결 편해졌다. 혁명은 먹을 걸 달라는 민중들의 항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기대했던(?) 야당마저 노동자들을 외면하는 판국인데 이제 와서 무슨 사상이니 철학이니 또 그런 걸 몰라서 부끄럽네 하는 게 있겠는가. 밥 달라, 휴가 달라, 우리 노후 좀 생각해주라. 그 요구들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말 그대로 제로부터 나아가야 할 때인다.

 7. 근데 SF 연재 소설은 다시 올릴 기미가 없는가. 이 잡지 중 가장 정상적인 글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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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아, 미안하다 민음의 시 139
심언주 지음 / 민음사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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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아이를 배지 않겠다구요

화분을 창밖으로 내어 놓아요.
아이 있던 자리가 젖고
아이 그늘 있던 자리가 젖고
빈자리에 빗방울들이
알을 슬어요.
하늘이 뿌리는 씨알.
흙 알갱이들이 간질간질 재채기할 때마다
화분 여기저기
씨알들이 튀어 올라요.

하늘이 씨를 뿌려요.
연못에 수련 씨를
텃밭에 장다리꽃씨를
길에는 빨노초 신호등 꽃씨를 뿌려요.
내 안의 유리창에
알을 슬려고 빗방울들이 안달이에요
으깨진 채 수만 개 알들이 굴러 떨어져요.
나는 하느님의 아이를 배지 않겠다구요.

  

이 시집에서는 아무것도 말해주고 있지 않지만 머릿속에서 이런 스토리가 떠오른다. 시 속의 화자는 아이를 배고 있었고 이름은 사월이였다. 그런데 뱃 속에서 유산되어버리고 실의에 잠긴 화자는 죽음과 삶에 대해 고민하며 긴 시를 쓰고 이 시집에 모든 미련과 고통을 묻어버린다.

 

 근데 실제로 이 시집 이후에 시인이 쓴 다른 시집에선 이 정도로 슬픈 섹드립이 담겨져 있지 않다. 사실 그래서 이 시집을 택한 것도 있다. 슬픈 일을 겪으신 건 유감스럽지만 이래야 아이를 잃은 어머니의 심정을 독자들이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어제 이런 일이 있었다. 아버지가 가끔 여성 비하발언을 하시는 경향이 있는데, 그 분과 같이 티비를 보다 다운증후군 같은 얼굴을 한 아이를 한 여성이 나온 것이다. 아마 그녀를 비난하려고 의도한 건 아니겠지만, "이래서 여자가 술담배하면 안 돼."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나는 "남자가 술담배해도 저렇게 되요."라는 식의 이야기를 하며 그냥 넘어가도 될 이야기를 계속 트집잡고 열심히 싸웠다. 이 시집이 페미니즘 이야기는 아니지만, 시집에서 화자가 겪었을 온갖 고생을 생각하니 자연스럽게 그렇게 된 듯하다.

 

  

심언주 씨 시집을 볼 때 그리자이아의 과실 에피소드 중 이 분이 자꾸 떠오른다. 사카키 유미코라고 한다.

 대략 내가 본 애니메이션으로 살아온 내력을 읽어보자면, 일단 대기업의 딸이긴 한데 첩에게서 나온 자식이다. 아들을 낳으려고 의도했었던지라 첩에게 소홀하게 되었고 정실에게서 결국 아들을 낳는다. 하지만 아들도 병약해서 숨지고 유미코의 어머니도 몸이 허약하여 세상을 떠났다. 유미코는 어머니에게서 '네가 아들이었다면 좋았을 것을'이란 말을 들었고 커터칼로 머리카락을 자른다. 결국 그 커터칼로 자신을 험담하던 친구까지 해치게 되어 대기업에서 학교를 차려둔 뒤 세상과 단절시킨 것.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건 머리 상태의 변화다. 우리나라에서는 머리를 늘어뜨리고 있다가 결혼하면 머리를 틀어올린다. 그러나 결혼의 주 목적이 '아이(아들) 낳기' 인지라 아이를 못 낳으면 석녀라고 놀림당하거나 버려진다. 버려진 여자는 다시 머리를 내린다. 부스스해진다는 게 더 맞는 표현 같기도 하지만. 혹은 현재 자유연애시대인 우리나라는 남자친구와 헤어질 때 여자가 이미지 변신 혹은 자신이 잘 살고 있다는 어필을 위해 머리칼을 짧게 자를 때가 있다. 확실히 등장하는 건 아니지만 이 시에서 올라가고 내려가고하는 그 모든 것이 여성의 상태에 따른 헤어스타일을 생각나게 한다. 가위라는 시가 대놓고 등장하기도 한다. 뭐 그 스토리의 결말까지 계속 이야기하자면 머리를 계속 길러 늘어뜨리던 그녀는 불꽃의 전학생(...)인 남자주인공을 만나며, 그와 맺어지는 유미코 애프터 스토리에서는 머리칼을 묶는다.

 

 

강원도가 싫다는 이야기인지 좋다는 이야기인지 알쏭달쏭하지만 일단 강원도에 대한 시가 쓰여져 있어서 올려본다. 

 

비명

누우면 하늘, 일어서면 산이 보이는 강원도.
저 산 좀 치워주세요.
저혼자부푸는산, 제풀에꺼지는산, 들어가도산, 나와도산. 강원도 해는 ㄱ산에서 뜨고 ㅎ산으로 져요.

안개로 빚어진 한계령으로 흘러가기 싫어요.
백당나무, 산사나무에 얹힌 알약같은 꽃 이파리들이 싫어요. 바람이 머리 위에 아스피린을 뿌려요. 눈동자는 짖는데 울지 못하는 새의 부리가 싫어요. 아무 때나 울어대는 풀벌레는 더 싫어요.
감자 꽃, 메밀꽃, 옥수수 꽃. 저 꽃들을 다 따 버리면 강원도의 허리가 무너질까요?
저 산들을 다 치우면 강원도 얼굴이 사라질까요?

가도 가도 숲에서 꺼내 주지 않더니 끝내는 바다 속으로 밀어 버리려구요?
싫어요. 제대로 죽이지도 죽지도 못하고 스르르 마취가 풀려 버리는 강원도 나비는 정말 싫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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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모닝 팝스 2017.4
굿모닝팝스 편집부 엮음 / 한국방송출판(월간지)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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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 Easy Decision

Kenneth Patchen

I had finished my dinner
Gone for a walk
It was fine
Out and I started whistling

It wasn't long before
I met a
Man and his wife riding on
A pony with seven
Kids running along beside them

I said hello and
Went on
Pretty soon I met another
Couple
This time with nineteen
Kids and all of them
Riding on
A big smiling hippopotamus

I invited them home

쉬운 결정

케네스 패천

저녁 먹고
산책을 나갔지
날씨도 좋아
휘파람 불면서

그렇게 좀 걷다가
당나귀를 타고 가는
남편과 부인을 봤어
그 옆엔 자식들 일곱 명이
같이 뛰고 있지 뭐야

안녕 인사하고
가던 길을 가는데
또 다른
부부를 만난 거야
이번엔 자식들이 열아홉 명
모두
함박 웃고 있는 하마를
타고 있었어

전부 우리집에 초대해버렸지 뭐

 

  

여태 들어보니 대부분 30살이 10대에 들어봤을 법한 팝송들이 많았다. 

 

 인트로 부분에 비욘세 노래가 나올 때부터 눈치챘어야 했나. 제작진 중에 비욘세빠가 있는지 군데군데 비욘세에 대한 소개가 있었는데 지금 대놓고 그쪽과 음악스타일 비슷한 레이디 가가의 Born this way 노래를 다루겠다고 한다. 나에겐 학창시절 추억의 노래가 많이 나와서 좋긴 한데 간혹 알아듣기 힘들 정도로 가사가 빠르게 나오는 노래가 나와서(심지어 비트가 빠른 것도 아니다.) 굿모닝팝스로 영어 공부를 했던 사람들은 다 떨어져나갈 것 같다. 이래서 이근철 선생님이 노래로 공부할 땐 음악 선곡이 중요하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막무가내라니. 레이나 선생님 방송 중에서도 격려의 글이 나오면 대놓고 화색을 보이던데 좋은 현상은 아닌 것 같다. 무작정 내뱉는 격려에 위로를 받는다는 건 그만큼 방송의 질이 떨어진다는 증거다.

 대신 책은 자기계발이라던가 성공담이 줄고 영미시와 영미가수에 대한 소개, 요즘 유행하는 외국영화에 대한 상세한 프로필이 나와서 좋았다. 특히 영미시는 순간의 기지만으로 선택한 게 아니라 계속 등장하기를 바란다. 레몬쌤의 원서 읽는 법도 인간의 한 인생으로써 재밌게 읽었다. 하지만 난 아무래도 요즘 영어로 쓰여진 시에 급격히 관심이 기울어진 듯해서, 아쉽지만 패스하겠다.

 주말에 길게 이야기하는 기사의 대사 전체 글이 궁금했는데, 상세히 올라와서 기쁘다. 듣기 실력이 딸리는지라 그쪽에 집중적인 공부가 필요한데, 내 기억으로는 이전에는 대본이 없어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젠 공부를 게을리할 핑계거리도 없어졌으니 더욱더 분발해야겠다. 대화내용의 이해를 넘어서 대화하는 동안 대사를 필기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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