콩이나 쪼매 심고 놀지머 - 칠곡 할매들, 시를 쓰다 칠곡 인문학도시 총서
칠곡 할매들 지음, (사)인문사회연구소 기획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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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예뿐 며느리

이정란

내마음 전하고파 호선이한테
편지를 서고픈 마음이 간절하지만
마음같이 표현이 않덴다.
엄마를 일직 여위고 사랑이란 단어를
한번도 들어 본 적이 없다.
곳감이 프로포즈 할 때
편지로 사랑한다는 말 한 번밖에 없다.
곳감한테도 딸 아들한테도 들어보지 못한 말
우리 예뿐 며느리가
어머니 사랑합니다.
그말을 듣는 순간 너무 너무 행복했다.
아들이 하는 일마다 잘되고 우리 며느리 복덩이다.

 이전에 시가 뭐꼬?라는 시집 서평을 쓴 적이 있다. 이 시집은 2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칠곡 인문학도시가 조성되고 한글교육을 어느 정도 받은 할머니들이 쓴 시가 많은데, 이번에는 자신의 삶보다는 자연과 교육을 받는 자신의 상황에 대한 만족감을 주로 표현해 놓았다.

 

 

자연에 대한 시에서는 특히 꽃에 대한 시가 많다.

 나이가 들수록 꽃에 대한 관심이 많아진다던 어떤 과학 서적이 생각난다. 식물의 인문학이라고 했던가? 세상은 자신이 그에 대한 관심을 지닐 때 시점이 크게  변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동양에서 태어난 여성은 다양하게 사고할 수 있는 기회가 크다. 미국에서 태어난 유명한 식물학자가 애도 아직 못 낳았을 당시 식물이 땀 흘리나 관찰하다 옻에 걸릴 때, 아이를 낳고 기른 여성들은 자연스레 꽃을 좋아한다. 첫째로 서양에서 철학자들에 의해 퇴출된 애니미즘이 자연스럽게 배어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애를 낳고 기르다보니 식물의 생식기(꽃, 버섯 등)에 관심이 많아지기 때문. 따뜻한 날 교미를 위해 대놓고 길거리에 생식기를 내놓고 있으면 땀이 흐를 수밖에 없다.

 역시 이번 시집에서도 자연스러운 사투리가 압권이다. 최근 인터넷 글의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리다며 분노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농담삼아 이야기하는데, 상황과 글에 따라 지적을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고 각기 다르다. 예를 들어 안철수가 저렇게 쓴다고 생각해 보자고요. (공문에서 띄어쓰기가 틀리셨더라고요.) 하기사 이런 시는 그분도 따라갈 수 없는 경지이지만. 서정주가 문법에 맞게 쓰면 참 별거 아니다... 그러나 이 시집은 내용에서도 서정주를 거의 능가하는 깊이가 있다. 문학은 보면 볼 수록 깊은 데가 있기 때문에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그러지 않던가. 자신이 죽어도 자신의 작품은 불멸의 삶을 살 거라고. 그의 예언은 이루어졌다. 과학으로는 밝힐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김춘수의 꽃을 읽지 않았어도 그들은 이름이 불리는 걸 좋아한다. 김수영의 팽이가 돈다를 읽지 않았어도 팽이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인생을 떠올린다. 뭉크의 작품을 몰라도 봄같은 평온한 계절에 자신의 인생을 돌이켜보며 자신의 한심함을 깨닫는다. 이 시들을 지은 농부들은 저마다 사색을 하면서 철학자이자 시인이자 화가가 된다. 그 누가 이들의 생각을 개똥철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인가. 한글 쓰기 교육을 좀 받은 것만으로도 그들의 사상은 동서양을 초월해간다. 물론 공산당이 아직까지 나쁘다고 글을 쓰는 분들도 계시지만 한 분 뿐이었다. 이미 그들은 학대를 겪었고, 그것이 얼마나 나쁜지를 몸소 알고 있었다. 길을 모르고, 가족들이 죽는 걸 보기 싫어서 도망치지 않았을 뿐이다. 나는 이들의 의식이 깨어 밀양 송전탑에 반대했던 분들처럼 사회의식을 가지고 세상의 불의에 저항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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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의 적들
이인휘 지음 / 실천문학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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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대답 대신 담배를 입에 문 채 어깨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쓸어넘겨 탁자 구석에 있던 고무줄로 동여맸습니다.
"난 이렇게 생각해요. 저들은 총을 들고 있고, 우리는 맨주먹이라고요. 애초부터 승부는 난 싸움이죠. 하지만 그들과 우리가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광장에서 맞붙었다고 생각해봐요. 어린이도 있고 젊은이도 있고, 어른들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는 광장 말이에요. 지하에서 서로 신경전을 벌이며 맞붙어 있다가 불쑥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으로 공간 이동을 했다면, 상황은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요?"

 

이 책을 읽게 된 데에는 작가 이인휘 님을 페친으로 직접 만난 사정이 있다.

 

 예전에 이 블로그에서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이라는 시집을 리뷰한 일을 기억하는가? 팟캐스트에서 어떤 시인이 추천해준 책이라서 아무 생각없이 집어 읽고 시가 너무 좋아서 글을 썼다. 그랬더니 이인휘 소설가님께서 상당한 동요를 보이셨다. 문자는 차갑지만 그 와중에서도 그가 느끼는 슬픔을 읽을 수 있었다. 일생 공장에서 일만 하다가 어머니가 병들어 돌아가시고 자신도 암이 생겨 시 한 권만 남긴 채 죽은 그 시인의 생애를 느꼈고, 나아가 작가의 생애도 얼추 짐작해볼 수 있었다. 원래는 옛날에 그가 처음 쓴 소설을 읽을 생각이었지만 왠지 도서관에서 책이 보이지 않아서 이 책을 집어 읽었다. 페이스북에서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특히 군대 이야기를 할 때 무지하게 타오른 것 같기도 하다 (...) 내 페친 중에 70%는 남자이긴 하지만 젊건 늙건 간에 모두들 군대에 대한 두려움과 군대에서 겪은 설움을 댓글로 한없이 늘어놓는 통에 내가 나중에 따로 '폭력은 군대에 있던 아니던 간에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라는 글을 올려 사태를 수습해야 했다. 하기사 우리나라가 군대 사회란 건 주지의 사실이지만. 반은 가상이지만 반은 실제 인물이라는 소설가의 댓글과 같이 이 책은 그가 살아온 삶과 많이 겹치는 데가 있다. 처음에 작가 소개란을 볼 땐 이렇게 적나라하게 드러내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였다.

 

이인휘.

1958년 서울 출생. 야학에서 공부하고 검정고시를 거쳐 명지대 무역학과에 입학했다. 3학년까지 다녔지만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며 대학을 자퇴하고 군대로 피신한다. 제대 후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농촌을 떠돌며 농사를 짓다가 서울로 돌아와 공장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만나 노동운동의 길로 들어섰고, 운동 과정에서 함께 활동했던 박영진이 파업 도중에 분신하자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추모사업회를 만든다. 이후 구로 독산 지역에서 추모사업회를 통해 노동운동을 하면서 소설을 썼다.

 사실 반드시 불가능한 게 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꿈을 이루려는 수단이 직업이라서 직업을 꿈꿀 수도 있다. 예를 들어서 내가 선생님이 되어서 주도적으로 왕따 없는 세상을 만들겠다 뭐 이런 식의 꿈을 꾼다면 말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강원도라는 낯선 곳으로 가서 몸을 숨겨야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일에 경험이 많은 사람들은 내가 보이지 않게 수배를 당할 것이고, 나로 인해 궁지에 몰린 자들이 또다시 나를 잡아챌 수도 있다고 말했지만 나는 도망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설사 나를 잡으러 온다 해도 나는 내 삶을 더 이상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을 피해 언제까지 내가 숨어 있어야 할지도 아득했습니다. 어쩌면 그건 또다시 내 삶을 내 스스로 회피하는 모습일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한 달 정도 있으면 잠잠해질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시골에서 내가 키웠던 꿈을 미뤄놓을 수 없었습니다. 돼지도 키우고, 소도 키워 선생님이 되고 싶고 시인이 되고 싶었던 그 꿈을 버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가 꿈이 있고 이것을 이루기 위해선 돈이 필요하니 안정적인 직장을 구하겠다 이런 마음가짐까지도 상관없다고 본다. 문제는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아무 생각없이 돈 벌 수 있는데를 가고 싶다고 할 때이다. 직장을 얻기 위해서 뭔가 마구 외워대는 게 공부인지도 의문을 제기해야 될 판인데, 우리나라는 특히 남성들이 출세해서 권력으로 날 비웃는 인간들을 찍어버리자고 생각하는 심각한 케이스가 많아서 그 의견조차도 눌린다. 마치 돼지를 죽여버렸는데 '사람을 죽이지 않은 것만 해도 어디냐'하고 안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우리나라는 정말 선생님 되려 하거나 공무원 되려는 인간들 마음가짐부터 철저히 심리학적으로 테스트하지 않으면 이 이분법적인 사회를 벗어나기 어려울 듯하다. 당장 사립 어린이집이 늘어나면 어찌 될까 부모들이 걱정하는 이유는 근본으로 따지고 들어갈 때 선생님이 저질이라서가 아니라 저질들을 사전에 걸러내지 못하는 시스템 때문이다. 또한 그 시스템을 분석해보면 사방 도처에 폭력이 깔려있다. 힘들겠지만 폭력을 저지르는 계기가 되는 위부터 뜯어내야 희망이 있다. 그 위에는 가부장제에 찌든 아버지, 국가보안법을 들먹이는 군인, 지독한 사장, 외면하는 선생님이 있다.

 그러나 만일 내가 그들에게 고문을 받는다면 난 더욱 한술 더 떠서 그들에게 협력하겠다고 싸바싸바거리다 한 대만 맞고 끝날 거 두 대 맞을지도 모르겠다. 난 살고 싶은 욕구가 강해서.

 

오랜만에 데로드 앤 데블랑이라는 판타지 소설 생각난다.

 1권인가 2권에서 난데없이 주인공 여친 죽었을 때 펑펑 울면서 아직도 살아있는 주인공을 욕했었다. 그쪽도 주인공인가 여친인가가 장애가 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아무튼 목숨같이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다 하니 주인공도 거기서 삶을 끝낼 줄 알았는데 그 인간이 계속 살아있어서 미웠다고 해야 할까. 자살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난 사랑하는 사람이 죽으면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너무 괴로워서 같이 죽는 줄 알았다. 정말 진지하게 그랬다. 근데 나같이 찝찝하게 생각하는 독자들이 많았는지 마지막권에선 끝내 주인공을 죽였는데 지금 생각하니 주인공도 생명 있는 사람인지라 좀 머쓱했다. 머리가 크니 작가의 존재가 인식되면서 '작가가 주인공을 너무 굴려먹네' 이런 생각도 들고..

 

  

살다보면 내가 친하다고 생각했거나 정말로 좋아했던 사람보다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이 더 많은 인연을 가져다주는 경우가 많다.

 죄와 벌에서 왠 지 범죄를 저지르기 직전에 누군가를 만나고 싶어서 무작정 술집을 간 라스콜리니코프는, 삶의 밑바닥에서 어떤 사람이라도 붙잡고 이야기하고 싶었던 마르멜라도프를 만나고 그의 딸 소냐와 인연을 맺는다. 이인휘 소설가가 지은 소설 내 생의 적들에서는 상현이 야심한 밤에 학생회로 주인공을 무작정 끌고 가면서 시작된다. 그의 첫사랑 연희와의 만남부터 시작되는 게 아니다. 낭만적이라기보다는 되려 여러모로 심신이 불편하고 불쾌했던 그 만남들이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주인공 김광훈의 삶을 바꾼다. 소설가의 일생을 잘 아는 사람들은 소설이 아닌 것 같다는 말을 많이 하지만, 적어도 이 책은 소설이 맞다. 누군가를 만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시작되지 않는다. 전광석화같은 그 스침이 세상을 바꾼다. 소설가는 원고지 360매를 일 주일 만에 썼다고 하는데, 그만큼 놀라운 가독성을 보이면서 재미도 있다. 형사가 등장하는 한 장면 한 장면이 마치 무협을 읽는 듯 손에 땀을 쥐게 한다. 특히 강제 징집된 군대에서 제대하고 나오는 길에 검은 자동차가 서 있을 때... ㅋㅋㅋ 그러나 스토리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은 게 놀라울 따름이다.

 

1980년 6월25일,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
-“고문실에 들어가 봐라, 부처도 개가 되지!”
이인희 친구의 소설 [내 생의 적들] p.142-
김준태

광주항쟁을 詩로 노래했다고
그들은 잠행하는 나를 추적했다
도망쳐 다니던 날이 23일째였던가
어린 두 아들녀석이 하도 보고 싶어서
주위를 살피며 전남대 앞 우리집으로
(그때 나는 전남고 교사, 셋방살이었다)
들어서자마자 5분도 안되어 그들은
나를 체포하여 검정차로 달렸다
그 지프차는 검은 커튼이 처져 있었다
▲김준태-“어디로 가는 것인가요?”
▼그들-“서부경찰서(월산동)로...간다”
그러나 내가 끌려간 것은 화정동 보안대
지하실로 끌려들어가자마자 비명소리
어디서 듣던 스님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짜식, 중놈새끼가 염불은 하지 않고
...신도들을 선동해! 이놈 죽어봐!”
▲“시민들을 그렇게 죽이면 돼냐고 했지요
그게 선동이라면...부처님께서 하신거지요”
그들 군수사관은 똥 묻은 군홧발로 스님의
맨머리(그들은 ‘대갈통’이라고 말했다)를
짓이기듯이 차고, 누르고, 밟아대는 것이었다
스님은 정말 개처럼 쓰러질 수밖에 없었다
●아 그때 그 스님! 스님! 어디에 계신가요?!
세상이 풀린 후로 백방으로 찾으려 했으나
스님은 내 눈으로는 볼 수 없었다 무등산과
하늘은 저리도 미치게 푸르러갈 뿐이었다.

※2017.4.21(聖금요일).
작가 이인휘의 글을 읽고 쓰다

 

  

어디 계십니까 스님.
 이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살아계십니까?
 아님 우리보다 먼저 극락세상으로 가셨습니까?
 시인 김준태 님이 소설가 이인휘 님이 연희를 찾듯이 애타게 찾고 계십니다.
 둘이 꼭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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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다는 것 지혜사랑 시인선 166
애지문학회 엮음 / 지혜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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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눈물은 다녀간 것일까

조영심

이 파장은 모국어의 맥놀이라
귀를 세워 주파수를 탐색합니다

동글납작하니 고만고만한 대여섯의 품세 딱, 창밖 단풍잎만큼 물들어가거니와 어느 바람에건 떨어질 듯도 보입니다 늦가을 카페에서 깔깔대는 저 둥그런 회동에 가까워지려고 나도 자리를 옮겨봅니다 아, 합격을 한 모양입니다
칠순 넘어 늦공부 하느라 애를 먹었다는 둥 한 번 낙방하고 두 번째 붙었을 땐 장원급제한 것 같았다는 둥 다 늙어 필요 없을 것 같아도 붙고 보니 시원하다는 둥 철 지난 회고사는 단풍잎에 써내려가는 햇살의 기록이 됩니다 저 연세에 운전면허 딴 것도 대단하다 싶은데,
선서할 때 말이야, 성조기에 충성을 맹세하는데 가슴께로 무엇이 철렁하고 내려앉지 않겠어! 이를 악물고 눈물을 참았어! 고국 떠나 온 지 삼십 년도 넘었는데 글쎄! 눈시울 훔치며 다시 깔깔댑니다

돌아보면, 추억도 가지 치며 자라는 생명입니다
흔들리는 단풍 쪽으로 누군가 귀를 돌려놓습니다

 
예전에 내가 애니 소개 코너로 나가려다 파토난 팟캐스트 방송이 하나 있었다. 나 없이 계속 진행하고 있을 거다. 그 방송에 참여하는 사람 중 소설가가 있었는데 항상 오프닝 멘트의 마지막 대사가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대부분의 청춘들은 좋아한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알지만 버려진다는 것은 어떤 기분인지 모를 듯하다. 그러니 계속 사랑을 하려 하겠지. 버려진 것들은 모두 흘러간다.

 

 이 시집이 특히 그런 기분이다. 최근 소설들은 마치 유행이라도 되는 듯 작중 인물이나 풍경을 상세히 묘사하지 않고 넘어가는데, 여기에 나오는 시들은 대부분 굉장히 지금 여기의 현실을 상세하게 설명한다. 특히 소외되는 것들을. 소외되는 것들 그 자체가 문제가 되기보다는 시대라던가 권력이라던가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 실수 한 번 할 수 있지. 하자 하나 있을 수 있지. 그들은 이렇게 외치며 이를 악 물고 날카로워진다. 혹은 둥글어진다. 저마다의 필요성에 의해 그들은 변해간다. 그 변화는 앞으로 그들 스스로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까. 그리고 무언가에게 버려지고 무언가를 버리며 내 안의 벽을 부수고 있는 나는 어떻게 변해가고 있을까. 적어도 사자 낙타 어린아이 중 낙타라도 되면 좋으련만.

 이번에도 김정원 시인 분이 주신 책인데 김명이 시인 분이 여기 애지문학회에 속하신 줄은 정말 몰라서 깜짝 놀랐다. 섹드립을 페미니즘 식으로 신명나게 하시는 분인데 니체의 피로 쓴 책을 여성의 월경과 연관지어 달에게 받은 힘이라 쓰실 줄이야 ㅋㅋㅋ 원래 이런 분이신 건 팟캐스트 방송으로 처음 뵐 때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주 참신한 시이자 아이디어였다. 오랜만에 혼자서 유쾌함을 만끽했다.

 

  

의외로 강원도에 대한 시가 하나 있어서 반가웠다. 그런데 왠지 가본 기억이 없다(...) 생각보다 강원도끼리는 서로 오고 가기가 힘들다. 강릉은 좀 수월한 편인가? 아무튼 물속에서 수영하기엔 나이가 좀 뻘쭘해도 한번 보고는 싶다. 이번 여름에 계획을 잡는다면 계곡은 정말 오랜만에 가보는 거 같다. 어라 그러고보니 다음주 월요일날 삼척 가는데...? 블로그에 사진이라도 올려보겠다. 

내 삶의 징검다리

류현

강원도 삼척 삼화산 무릉계곡을 찾아서
조용히 지난 시간을 반추하는데

20대부터 지금까지
잡힐 듯 말듯 아득하기만 하네

감고 있는 두 눈 속에 부처님 미소가 어리고
지나간 추억의 징검다리들은 껑충 껑충
나를 향해 뛰어 오고 있네

보이지 않는 추억들은 어디 갔을까
징검다리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에 실려
가냘픈 비파소리처럼 이별을 알려오네

내 앞으로 바짝 다가오는 시간들
흘려 보내야할
세월들은 잡히지 않는데

계곡물은 깨지고 부서지는
아픔의 상처를 안고
말없이 뒤돌아보며 흘러만 가고 있다

조용한 계곡에 산그늘이 어슬렁거리는데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방울
징검다리 건너라고 내 등을 밀어주고 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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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 완역본 하서 완역본 시리즈 1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유성인 옮김 / (주)하서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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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그래요. 당신들은 아직 모르고 있어요. 이 애의 마음이 어떤지. 이 애가 도둑질을 했다고요? 이 애가? 이 애는 당신들이 필요하다면 입고 있는 단벌마저 벗어줄 만큼 착한 아이랍니다. 이 애는 그런 앱니다! 이 애가 황색감찰을 받은 건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 아이들이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리를 위해서 몸을 판 것입니다. 아아! 돌아가신 당신, 여보! 여보, 당신은 보셨어요? 이것이 당신의 추도식이랍니다. 아아, 하느님! 자, 이 애를 보호해주십시오. 뭘 우두커니 서 있어요? 당신도 그 말을 믿고 있습니까? 당신들은 모두, 모두, 모두 이 애의 새끼손가락만큼도 못합니다. 하느님, 제발 보호해주소서!"

 

  

어렸을 적 수십 번은 죄와 벌을 읽은 듯하다. 그러나 지금처럼 완역본을 통째로 읽은 건 처음이다. 확실히 예전에 책을 읽었을 때와는 다르게 세상에 대한 잡지식도 풍부해지고 윤리에 대한 생각도 많이 달라져서 좀 더 다양한 관점으로 책을 볼 수 있었다. 일단 도저히 종잡을 수 없던 스미드로가일로프라는 인물에 대해 확실히 감이 잡히게 되었다. 마치 독일 사람을 소시지 장수라고 욕하는 장면에서 크게 웃으면서 반응했듯이(...), 이 남자는 난봉꾼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어쩌면 정의에 어긋나면 망설임 없이 철퇴를 때려박았던 어린 시절이었으니, 증오도 없이 철저하게 무관심으로 일관했던지도 모른다. 이 소설에서 나오듯이 증오도 일종의 관심이 있다는 제스쳐니까.

 

 수법이 너무 뻔해서 여전히 왜 여성들이 그에게 빠져 있는지는 도저히 알 수가 없는 일이지만, 어쨌던 간에 그와 얘기를 하고 그를 구원하려 했던 두냐가 옛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다부진 매력이 있는 여성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잠시 루진의 돈에 홀린 것 같다고 시인하면서 넘어가지만, 이 영문 모를 찝찝함은 가시지 않는다. 아니 왜 스미드로가일로프랑 같이 그의 방으로 걸어들어가냐고? 정절 이전에 생명의 위기가 닥쳐오는데 오빠따위 알게 뭐야? 뺨이나 갈겨주고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될 것을. 라주미힌과 만나서 결혼하지 않았더라면 로쟈의 독백처럼, 이 여성은 창녀인 소냐보다도 더 천박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르겠다. 남자를 잘 만나야 여자가 패가망신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배어있는 듯도 하여 좀 씁쓸하지만, 사람은 언제나 일생일대의 선택에 마주하는 법이니까.

 

 

지금도 난 이 책의 종교적인 구도와 해피엔딩에 감동을 먹고 있다. 

 

 마르멜라도프와 카테리나에게 아직도 연민의 감정을 품고 있다. 소냐가 좀 인간으로서 과하게 완벽해 보이긴 하다만 광신도라니, 터무니없는 중상이라 생각한다. 그런 후기를 책에 붙일 시간이 있으면 오탈자나 섬세하게 수정해줬음 좋으련만. 지하 생활자의 수기를 많은 사람들이 추천해줬는데, 이 책의 설명을 보니 로쟈의 감옥생활에서 소냐가 없는 엔딩이라 하여 도저히 흥이 나지 않는다. 게다가 감옥 생활에 대한 글은 이 소설의 에필로그로도 충분히 본 것 같다. 난 사실 톨스토이를 더 좋아하는 편이고 도스토예프스키는 그에 비해 놀라울 정도로 섬세한 필력을 보여두고 있지만 스케일이 비교적 작다. 차라리 국내의 감옥 생활에 관련된 다른 소설책을 읽는 게 나을 것 같아서 도스토예프스키는 여기까지만 읽기로 한다. 찌질한 로쟈가 갱생했다. 라자로가 부활했듯이. 여기까지만 읽으면 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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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에 계신 하나님
윤영배 지음 / 바이북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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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는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는다

김정원

그는 경주 남산 기슭에서 살았다 어느 날 골짜기에서 수달을 잡았다 살은 발겨 구워 먹고 뼈는 산기슭에 버렸다 이튿날 그곳을 지나가다 뼈가 사라진 것을 알았다 핏자국을 따라가 보았다 앙상한 어미 수달의 뼈가 옛 굴로 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끌어안고 쭈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탄식이 절로 나왔다 그길로 그는 출가해 이름을 혜통으로 바꿨다


이 글을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읽고, 나는 신열이 났다 늦은 밤에도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자꾸 유의경의 세설신어에 나오는 단장의 고사가 머릿속에서 맴돌 뿐이었다


진나라 환공이 촉나라를 정벌하기 위해 장강을 따라 험준한 삼협 물가에 닿았을 때, 한 사병이 원숭이 새끼를 사로잡았다 어미 원숭이는 강 저편에서 새끼를 부르며 슬피 울었다 군선이 백 리도 채 못 갔을 때, 그 원숭이가 배 위로 뛰어내렸다 떨어지자마자 죽었다 배를 갈라 보니 창자가 모조리 마디마디 끊어져 있었다


수달, 원숭이, 넋 잃고 맹골수도를 바라보는 어머니, 죽은 예수를 안은 피에타의 마리아와 한 점 다를 바가 있으랴 하나뿐인 자식을 잃은 어버이 마음이!

 

 

  

SNS가 세상 사람들과 소통 창구를 열어줘서 좋은 점도 있지만, 똥같은 말들을 우연히랄까 어쩔 수 없이 거르지 못하고 텍스트로 봐야하는 부정적인 점도 있다. 옛날 사람들은 똥 묻었다면서 귀를 씻는다거나 귀머거리인 척 했다는데, 의도적으로 페이스북을 켰다가 페친에게서 똥 얘기를 들으면 쿨하게 넘어갈 수가 없는 것 같다. 눈을 씻어야 하고, 그 다음에 그 사람 프로필을 다시 한번 더 봐가면서 페친을 끊어야 한다. 페친이 4천이 넘어간 건 좋은데 페친 정리라는 게 아주 큰일이다. 7년째 하고 있는 블로그 쪽은 아예 손을 놓아버린 케이스고...

 

 아무튼 솔직히 말해 이번에 페친을 끊은 분들은 정치에 매우 관심들이 많다. 인간이 아닌 이데올로기를 너무 사랑하다 못해 누군가를 죽여버리겠다느니 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자신과 이데올로기가 맞지 않는 가난한 사람들을 비방한다. 부자가 아니라 말이다. 그것도 모자라서 심지어 댓글은 장애가 있는 사람들도 비방하는데 이건 완전 지옥의 도가니다. 나보다 못한 인간 혹은 잘 되어가는데 예전엔 나랑 비슷한 위치에 있었던 인간 혹은 만만해 보이는 인간들 때리기는 너무나 쉽다. 이데올로기를 핑계로, 정당을 핑계로, 매스컴을 핑계로. 그들이 대신 생각해주는데 뭐하러 우리 뇌로 직접 생각할 필요가 있겠냐는 거다. 그래서 사람들이 책은 안 읽고 양심도 없고 형식만 중요시하는 무뇌아로 변해가는 것이고. 정치를 진보계열로 정하고 하느님을 믿고 대학교 다니면 뭐해. 사랑하는 사람도 없고 사랑을 받을 줄도 모르는데. 편견을 갖기는 싫은데 앞으로도 정치와 관계된 정의로운 페친이 점점 줄어들게 될 것 같아 염려된다.

 

 

김정원이라는 시인 분께서 집주소를 좀 이야기해달라고 하셔서 왠지 자연스럽게 대답했었다.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은 있었다. 그런데도 정말로 책이 선물로 올 줄은 몰랐다. 다음 시집을 리뷰할 때도 이야기하겠지만 시집은 두 편이었으며 이 시집은 그 중 하나였다. 

 

 윤영배라는 분은 시인이자 목사이시다. 가족의 이야기를 많이 꺼내시는 편. 목사님답게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노래하시기도 했지만, 유달리 자신의 가정에 대한 관심이 남다르신 듯했다. 즉, 시를 짓는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광주 사람들의 특성이 살아 있어서인지 진보 성향이 간간히 돋보인다.



 전에도 소개한 김정원 시인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훈계하는 교사의 속성이 강했든데(나중에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만 가르친다는 건 결코 부정적인 의미가 아니다. 최근에 부정적이 되었을 뿐이지.) 이 시집에선 더 강해지는 느낌이었다. 기독교인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대부분이며, 정말로 '기독교인들에게'라는 제목의 시가 있기도 하다. 하지만, 신발의 '신'과 하느님이란 뜻의 '신'을 이중적으로 뭉뚱그려 시를 지은 점에선 그가 언어를 사용하는 방법이 이 중 가장 비상하다 할 수 있겠다. 다양한 종류의 나무들이 있지만 그들은 다 땅에 뿌리를 담고 있다는 '같은 종교에선'이라는 시에서는 땅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이 시집의 제목과 연결되는 구석이 있었다. '어쨌던 모두가 각자의 방식으로 신을 믿고 있으니 쓸데없이 우겨대서 종교 전쟁 일으키지 말고 고집을 좀 꺾어서 일상에서 좋은 일을 실천하자'라는 메세지가 있다고 나는 보았다. 제대로 읽은 건지는 모르겠다만.



 요새 신자와 비신자들의 관계가 시간이 갈수록 더더욱 악화되고 있다는 느낌이다. 만일 철학을 신봉하고 있어서 신을 믿지 않는다는 주의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요컨대 새끼발가락 끝부분만 보여줘도 쉽게 그쪽에 대해서 믿음을 품는 인물들이 많은 게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나도 요새는 하나님이 있다는 맹신에서 어쨌던 간에 신은 있겠지 라고 가볍게 생각하는 쪽으로 점점 돌아가는 중이지만, 내 냉담의 이유는 좀 보기 거북할 정도로 독실한 신자들과 가까이 있기가 괴로워서이기도 하다. 자꾸 극단으로만 가려 하지 말고 반대쪽 극단도 의식하면서 그들의 의견도 경청할 때 세상은 좀 더 좋은 길로 향한다고 생각한다. 이 두 저자 분이 종교인이면서도 나름 '철학'을 받아들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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