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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도인술 - 글과 그림으로 읽기 쉽게 풀어쓴 장수와 양생의 교과서
지부 지음, 신진식 옮김 / 일빛 / 2010년 12월
평점 :
지난겨울, 골짜기를 떠돌던 길고양이가 눈 깜짝할 사이 수평아리를 채어갔을 때 남은 한 마리가 밤새 잠을 못 자고 울어대는데, 도무지 미안해 나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춥고 귀찮기도 했지만 녀석을 품에 안고 졸면서 군불을 때고는 하였다. 병아리는 이내 골골대며 졸았다.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맞닿아 팔딱거리는 심장소리로 느낌이 전해졌다. 위로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넘어 생명을 가능하게 하고 존속시키는 힘의 원천이었다.

시골에 살다보면 건강해지는 게 가장 좋다. 좋지만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게(...) 친구들이
내 걸음걸이를 따라잡지를 못하며 무지 짜증낸다는 점이다.
특히 여름에는 덥다고 곧바로 나를 피해 커피숍으로 들어가버리는데 더 걷고 싶은 나는 커피숍 앞 길가에 우두커니 남아버리는데, 나는 더
걷고 싶다고 생각하는지라 왠지 쓸쓸해진다;; 근데 내가 20대 초반에 서울에 살 때도 날 따라서 열심히 걷던 친구가 그 다음날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질 못하던 때도 있었으니 이건 내 힘이 원래부터 넘치는 게 문제일까, 아님 남들도 이럴 거라 지레 생각해버리는 게 문제일까. 아무튼 오늘도
친구 한 명이 결국 길가에 나자빠졌는데;;; 내가 일어나라고 열심히 두들겨주고만 있던 찰나 햇빛으로 잘잘 끓는 도로에서 공사일을 하고 계시던
인부 분이 자기 몫의 생수를 주시더라. 나도 친구도 아무 말 없이 금방 그 자리를 떠났다. 나도 무안했지만 친구도 아마 무안했겠지. 무더운 여름
날 차가운 생수 한 병의 위로. 남의 아픔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차리며 그것을 바로 주는 마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위로를
줬으며 주고 있을까. 주기는 커녕 부담만 더 주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8월호가 아직 안 나와서 저번 호들을 보고 있다. 봄이라서 그런지
7월호보다는 대체적으로 순한 이야기들이 나와서 더위로 인해 솟구치던 짜증이 한풀 꺾였다.
머리 다친 사람을 빼고는 결코 잘 먹고 잘 생활하는 것에만 만족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자꾸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이 생각나니까, 괜히 그
길을 자식에게 가라고 강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계속 세뇌하고. 하지만 그 세뇌에도 한계가 있으니 나중엔 또 방황하게
되고. 그러나 좀 방황한들 어떠랴. 사람은 모두가 부조리한 존재인 것이다.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성공하여 우연히
나온 생명일 뿐, 대단하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기쁨을 느끼지 못하진 않는다.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어떨 땐 길가에 핀 무궁화가 너무 이뻐 보이고. 막걸리 이야기도 많이 하시던데 뭔가 노는 법을 제대로 아시는 듯한
사람들의 잔치 이야기가 인상에 강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특별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던데... 지금은 이 의미를 좀 알 것 같다.
어머니와 여수 여행 갔다 대판 싸웠다가 미친 남자가 중얼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음. 무지 훈남이었다. 그래서 엄마랑 나랑 싸우다가
입 딱 벌리고 그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남자가 훈남인 걸 잘 몰랐는지 일상적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리고 언젠가는 부산
시내버스터미널에서 표 끊는 아가씨가 너무 이뻐서, 결혼 신청할 뻔했다.
현재 양양에 사신다는 노마 님의 글 잘 봤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셨던 듯한데, 나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집 앞 성당부터 여의도 공원에서까지 부모님이 옆에 있던 친구가 옆에 있던 아무도 없던
골고루 성추행 사건을 겪어왔던지라 어딘가 낯선 곳에 있다는 건 나에게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 처음의 좋은 인상만이 사람의
전부인 줄 알고 혹은 내 안의 어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선뜻 악수를 청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한국 사람들. 그들의 품 안에서 어린애가
되는 느낌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 자신조차도 챙기는 게 나는 버겁다. 물론 친구의 말대로 무서움도 한 몫 하지만. 그런 점에선
남자들이 좀 더 부럽다. 덩치가 있으면 아무래도 성추행 당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나.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여행은 사소한 것조차도 골똘히
생각하여 행해야 하는데, 삶도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 누군가 귀에 대고 멜로디를 들려주고 갔다는 시와 님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요새 내가 직장스릴러물 꿈을 꾸는데(...) 워낙 별의별 일을 회사에서 겪고 나니 어떤 사건이 나던 아무렇지 않게 대처하려고 한다는 걸 이 책의
글을 보고 깨달았다.
참고로 이전에는 판타지물 꿈을 자주 꿨었는데 스토리가 내가 봐도 너무 엉터리라서 실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간혹 스토리도 탄탄하고
반전도 너무 탁월해서 내 꿈에 내가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땐 '이걸 소설로 적으면 틀림없이 대박이 날 것'을 의심치 않고 일어나서
펜을 집어든다. 그러나 100% 눈을 뜨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고보면 재주소년 보컬 분도 꿈에서 멜로디가 나와서 일어나서 허밍을
녹음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확인해보니 도무지 무슨 음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적이 태반이라 하셨었다. 시와 분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운이
좋으시거나, 아님 꿈을 기록하는 능력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으신가 보다.

요새는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걸러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욕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차라리 육시럴이라고 해봤자, 직접 육시를 낼 것도 아니고 상대방도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 있어!'라고 진지하게 대응하는 경우도
별로 없으니, 욕이 낫지 않을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욱해서 먼저
주먹이 나가면 상대도 욱해서 주먹이 나가고, 결국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겠지. 다만 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자고 진지하게
말을 해주는 게 낫겠다. 그러나 만일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 희롱을 하는 것처럼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아라. 그러면 상습범이 아닌 이상은 스스로 그만두고 물러나게 된다. 같은 인간이니까, 일단 얼굴을 마주보면 그 사람이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힘들고 열받아도 손을 잡고, 그 사람을 쳐다보며 그 사람을 생각해 주어라. 자신만 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탓하며 자신의 언행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벌어도 되는 게 없지. 항상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끼고
싶어하지만, 그러려면 이전에 해왔던 일들을 반성하고 고치는 과정이 필요한데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며 생략해 버린다.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구박당한다. 거리에서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다시 볼까봐 벌벌 떨며 다니고.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농산촌에서 자라는 아이들 1명당 무조건 최소 월 50만 원씩은 지급해야 경우 농산촌
멸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사람이 있었다. 농산어촌에 대한 투자는 시설 지원이나 사업 지원 방식에서 젊은 사람 살리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1. 나이가 어떠느냐에 따라 그게 아이보다는 부모의 손으로 가서 부동산 땅값 올리기에 쓰일 공산이
크다.
2. 농산촌의 기준은 어찌 정해야 하나. 딱히 서울이 아니더라도 실상 우리나라 대부분이 도시가 아닌가.
3. 어릴 땐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을 수 있으나 나이가 먹으면 도시에서 일을 하며 살기로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또 다시 그 돈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쓰여질 공산이 크다. 또 이를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4. 농촌에 사는 노인들을 젊은이들이 학대하는 일도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쪽에 대한 시설 지원이나 사업 지원도 꽤 벅찬 것으로 알고 있다.
근데 시골에서 기본소득 운동 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한 명(혹은
가구)당 월 50만원 정말 좋아하시네. 어떤 기준이 있는 건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이야기한 걸 그냥 출처 안 밝히고 써대는 건가? 무튼 나도
젊은 축에 속하니 뭐 50만원이라던가 30만원이라던가 주면 좋고, 잘 쓸 자신 있지만 혹시라도 그걸 또 이상하게 쓸 사람이 있을까봐 걱정된다.
사람 하나 돌게 만들거나 죽게 만들거나 하는 게 돈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