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겁고 시원한 신앙
배광하 지음 / 바오로딸(성바오로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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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전라도 목포에서 6.25 전쟁고아들을 돌보던 일본인 여성 '다우치 치즈코' 여사께서 선종하셨습니다. (...) 그토록 아름다운 일들을 시작한 치즈코 여사의 아들 윤기 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이 있는 한 인간의 내일은 걱정할 일이 없습니다."

 

  

아무리 책을 많이 보고 대학교와 대학원을 다니고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남을 위해 희생할 줄 모른다면 사람으로 태어나서 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주님은 그 사람이 숨쉬는 것마저 아까워하지 않을까? 나는 이 신부의 뜻에는 일단 크게 공감함을 밝힌다.

 

글들은 참 좋은데 문법이 무지 많이 틀려서 그게 참 안타깝다. 이전에 봤던 정신병인가 귀신들림인가에서도 목사였던 저자가 길어지는 문장을 도무지 끊어내질 않아서 읽는 데 불편했었다. 이 책에서는 그런 데다가 미사여구까지 치렁치렁 달아놓아서 보기가 불편할 정도다. 역시 책읽기와 글쓰기 훈련은 별도의 성격을 지니고 있는가 보다. 하지만 책을 많이 읽으셨다면 어떤 문장이 보기에 꺼려지는지 알고 계시지 않을까? 기쁜소식 출판사는 왜 생명의말씀사처럼 문장을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올렸을까? 종교관련 서적들의 교정 수준을 높이는 게 시급하지 않을까 싶다. 이러니 일반 사람들에게 종교서적이 인기가 없지..

그리고 하나님의 어원에 대한 설명도 틀렸다. 대한성서공회에도 '하나님'은 하느님의 서북방언이 어원이라고 설명한다. "하ㄴ.(아래아)ㄹ"의 경기방언은 아래아가 "ㅡ"로 변하고 서북방언은 "ㅏ"로 변해서 "하늘" vs "하날"로 바뀐다. 그래서 구한말 평양에서 번역한 주기도문은 "우리하날에게신아바지..."로 시작한다. 천주교는 천주학이라는 학문으로 들어와 자생적으로 신앙이 된 사례고 반면 개신교는 미국 선교사들이 전했는데, 주 활동무대가 평양이었다. 길선주 도사 주도로 교세 확장이 크게 일어난게 평양대부흥이었고. 관련해서 장로교에 "평양노회"라는 흔적이 남아있는데, 이들이 '하나님'이란 단어의 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아니면 까먹었는지? 아무튼 갑자기 하나밖에 없는 신이니 하나님이라 부른다는 그런 망언을 하는 것이다.

교황이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직접 세운 제도라고 한다.
1. 그렇다면 그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실수들은?
2. 그 실수들로 인해 희생된 사람들은?
3. 왜 교황 중 여자는 하나도 없는가?
어디까지나 교황직은 그리스도교의 역사에 속한다고 본다. 또한 모든 걸 하나님의 뜻이라고 입 밖으로 말하기엔 곤란한 요소가 많으니 조심스러워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다른 책들에 대한 지식은 정확하다. 일단 책을 많이 읽으시는 신부님 같다. 흔하게 들어보고 읽어보기도 한 시인들의 이름이 많이 나왔다. 또한 나로선 거의 지식이 전무한 신학책들도 많이 인용되었다. 특히 엔도 슈사쿠의 침묵과 하이쿠 시인 바쇼의 시들이 많이 인용되어서 굉장히 인상깊었다. 연세가 지긋하신 분들은 보통 일본 저자들의 절도있는 매력을 이해하지 못하고 선입견을 지니고 계신다. 그래서 왜놈들의 책을 왜 읽냐면서 책 읽기를 피하고 언짢아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이 신부님은 그렇지 않으신 듯하다. 정녕 지식과 진리를 추구하시는 분이다. 독자들은 이 분이 인용하신 글을 위주로 읽는다면 책을 읽는 재미가 더 깊어지리라 생각된다.

또한 그의 인생 사는 법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는 공감한다. 나는 어떤 사람이 불면증에 걸렸을 때 운동을 하라고 추천한다. 그러다 몸이 소진되면 지쳐서 잠이 드니 대부분의 경우는 그걸로 해결된다. 그러는 와중에도 나는 잠이 오지 않는 경우 자체가 이해 안 가고, 특히 종교를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라면 더욱 규칙적인 생활을 살려 노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믿음으로써 안심할 수 있다.

 

 

일본 나가사키 소토메 마을의 엔도 슈사쿠 침묵비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님,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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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면서도 다 듣는 애인아 문학동네 시인선 91
김개미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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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가

별이 떨어지지 않도록

창문이 개울처럼 출렁이지 않도록

늑대가 심장에 들어서지 않도록

머릿속에 코일이 엉키지 않도록

애인의 꿈에 악마가 찾아가지 않도록

우리들의 달이 썩지 않도록

달링, 눈을 감아요 울음을 그쳐요

  

그러고보면 엄마가 들려준 자장가가 섬집아기였는데 그 노래의 에피소드가 겁나 험난했었다.

 

이미 블로그에 상세히 올린 듯하니 다시 그 가사에 대해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지만, 자장가로 부를 노래는 잘 선택해야 한다는 걸 새삼 느낀다. 어머니는 잘 자라 우리 아가 앞동산 뒷동산에도 있는데 왜 하필 그 곡을 택하셨을까.

 

 

보통 동시나 동화책을 쓰는 사람이 자서전이라던가 펑전이라던가에 유년에 일어났던 충격적인 사연을 쓰기는 한다. 그 다양한 표현 중에서도 일반 시집으로 드러내는 형태가 가장 각별하다. 왜 그런지 생각해보면, 동시나 동화책도 시와 굉장히 비슷한데 그 똑같은 형식으로 전혀 다른 이야기를 쓰니 낯설어지는 듯하다. 확실히 꽃밭으로 들어가 몰래 자위하는 여자애들 이야기는 동화로 쓸 수가 없겠지(...) 이 시는 동시나 동화책으로 쓸 수 없는 줄거리들을 표현해냈다 할 수 있겠다. 하긴 간호사로 일하면서 병든 환자들을 많이 접하고, 그러면서도 희망적이고 아이들을 위한 시를 쓴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닌 듯하다. 특별한 사명이 있지 않은 이상 불가능한 일에 가깝다. 

 

시집에서는 연애부터 자연환경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전반적으로 어둡고 대부분 소녀의 잔혹한 어린 시절을 다루고 있다는 게 특징이다. 아버지는 그 자신의 문제에 방황하느라 소녀의 정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어머니는 원인 모를 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언니들은 질투에 휩싸여 그녀에게 시체놀이를 할 것을 강요하며 괴롭힌다. 일단 평온하게 가난한 사람의 복지를 논의하기에는 절대 무리인 절박한 상황이다. 이는 설령 교실에 태양이 들어오더라도 자신에게는 미치지 못한다는 구절을 통해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 궁극적인 복지로 인해 하루 세 끼 식사는 물론이고 그녀의 꿈과 영혼을 지켜줄 수는 없는 것일까. 그런데 또 생각해 보면 이것은 나의 이야기이다. 내가 어렸을 때 나와 주변의 여자애들이 겪었던 이야기인 것이다. 그래서 갓건배같이 세상에 분노한 여성이 있는가 하면, 갓건배에게 분노하여 남성이라는 기득권층에게 아첨하기 위해 갓건배 죽이러 가기 퍼포먼스를 하는 여성이 있다. 그런데 이 둘은 서로 이해하고 화해할 줄은 모른다. 그들이 서로 비슷한 일을 겪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 발악하는 것이다. 우리들의 자장가는 왜 그렇게 슬프고 비뚤어져 있는가. 이 운명은 어디서부터 부수고 가루로 만들어야 해결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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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도인술 - 글과 그림으로 읽기 쉽게 풀어쓴 장수와 양생의 교과서
지부 지음, 신진식 옮김 / 일빛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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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겨울, 골짜기를 떠돌던 길고양이가 눈 깜짝할 사이 수평아리를 채어갔을 때 남은 한 마리가 밤새 잠을 못 자고 울어대는데, 도무지 미안해 나도 잠을 잘 수 없었다. 춥고 귀찮기도 했지만 녀석을 품에 안고 졸면서 군불을 때고는 하였다. 병아리는 이내 골골대며 졸았다. 위로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맞닿아 팔딱거리는 심장소리로 느낌이 전해졌다. 위로는 생명에 대한 예의를 넘어 생명을 가능하게 하고 존속시키는 힘의 원천이었다.

  

시골에 살다보면 건강해지는 게 가장 좋다. 좋지만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게(...) 친구들이 내 걸음걸이를 따라잡지를 못하며 무지 짜증낸다는 점이다.

 

 특히 여름에는 덥다고 곧바로 나를 피해 커피숍으로 들어가버리는데 더 걷고 싶은 나는 커피숍 앞 길가에 우두커니 남아버리는데, 나는 더 걷고 싶다고 생각하는지라 왠지 쓸쓸해진다;; 근데 내가 20대 초반에 서울에 살 때도 날 따라서 열심히 걷던 친구가 그 다음날 다리가 저려서 일어나질 못하던 때도 있었으니 이건 내 힘이 원래부터 넘치는 게 문제일까, 아님 남들도 이럴 거라 지레 생각해버리는 게 문제일까. 아무튼 오늘도 친구 한 명이 결국 길가에 나자빠졌는데;;; 내가 일어나라고 열심히 두들겨주고만 있던 찰나 햇빛으로 잘잘 끓는 도로에서 공사일을 하고 계시던 인부 분이 자기 몫의 생수를 주시더라. 나도 친구도 아무 말 없이 금방 그 자리를 떠났다. 나도 무안했지만 친구도 아마 무안했겠지. 무더운 여름 날 차가운 생수 한 병의 위로. 남의 아픔을 보고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알아차리며 그것을 바로 주는 마음. 나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위로를 줬으며 주고 있을까. 주기는 커녕 부담만 더 주는 사람은 아니었을까. 8월호가 아직 안 나와서 저번 호들을 보고 있다. 봄이라서 그런지 7월호보다는 대체적으로 순한 이야기들이 나와서 더위로 인해 솟구치던 짜증이 한풀 꺾였다.

 

머리 다친 사람을 빼고는 결코 잘 먹고 잘 생활하는 것에만 만족할 수 없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자꾸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이 생각나니까, 괜히 그 길을 자식에게 가라고 강요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자신은 충분히 행복하다고 계속 세뇌하고. 하지만 그 세뇌에도 한계가 있으니 나중엔 또 방황하게 되고. 그러나 좀 방황한들 어떠랴. 사람은 모두가 부조리한 존재인 것이다. 완벽한 존재가 아니다. 그저 남성과 여성의 결합이 성공하여 우연히 나온 생명일 뿐, 대단하기는 하지만 어떤 특별한 의미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우리가 기쁨을 느끼지 못하진 않는다.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뿐이다. 그러다 어떨 땐 길가에 핀 무궁화가 너무 이뻐 보이고. 막걸리 이야기도 많이 하시던데 뭔가 노는 법을 제대로 아시는 듯한 사람들의 잔치 이야기가 인상에 강했다.

여행을 하다보면 특별한 사람을 만나기도 한다던데... 지금은 이 의미를 좀 알 것 같다. 어머니와 여수 여행 갔다 대판 싸웠다가 미친 남자가 중얼중얼거리면서 돌아다니는 걸 본 적이 있음. 무지 훈남이었다. 그래서 엄마랑 나랑 싸우다가 입 딱 벌리고 그 남자만 쳐다보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 남자가 훈남인 걸 잘 몰랐는지 일상적으로 행동하고 있었고. 그리고 언젠가는 부산 시내버스터미널에서 표 끊는 아가씨가 너무 이뻐서, 결혼 신청할 뻔했다.

현재 양양에 사신다는 노마 님의 글 잘 봤다. 해외여행을 많이 다니셨던 듯한데, 나는 해외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집 앞 성당부터 여의도 공원에서까지 부모님이 옆에 있던 친구가 옆에 있던 아무도 없던 골고루 성추행 사건을 겪어왔던지라 어딘가 낯선 곳에 있다는 건 나에게 무서움으로 다가왔다. 오지랖 넓은 사람들, 처음의 좋은 인상만이 사람의 전부인 줄 알고 혹은 내 안의 어둠을 보고도 도망치지 않고 선뜻 악수를 청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한국 사람들. 그들의 품 안에서 어린애가 되는 느낌이 좋았다. 다른 사람들은 물론이고 나 자신조차도 챙기는 게 나는 버겁다. 물론 친구의 말대로 무서움도 한 몫 하지만. 그런 점에선 남자들이 좀 더 부럽다. 덩치가 있으면 아무래도 성추행 당할 가능성은 줄어들지 않나. 그렇지만 또 생각해보면 여행은 사소한 것조차도 골똘히 생각하여 행해야 하는데, 삶도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날 아침, 누군가 귀에 대고 멜로디를 들려주고 갔다는 시와 님의 글도 인상적이었다. 요새 내가 직장스릴러물 꿈을 꾸는데(...) 워낙 별의별 일을 회사에서 겪고 나니 어떤 사건이 나던 아무렇지 않게 대처하려고 한다는 걸 이 책의 글을 보고 깨달았다. 

 

참고로 이전에는 판타지물 꿈을 자주 꿨었는데 스토리가 내가 봐도 너무 엉터리라서 실소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간혹 스토리도 탄탄하고 반전도 너무 탁월해서 내 꿈에 내가 감탄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땐 '이걸 소설로 적으면 틀림없이 대박이 날 것'을 의심치 않고 일어나서 펜을 집어든다. 그러나 100% 눈을 뜨면 잊어버리고 만다.
그러고보면 재주소년 보컬 분도 꿈에서 멜로디가 나와서 일어나서 허밍을 녹음했는데, 아침에 일어나 확인해보니 도무지 무슨 음인지 알아차리지 못한 적이 태반이라 하셨었다. 시와 분은 그런 점에서 굉장히 운이 좋으시거나, 아님 꿈을 기록하는 능력이 상당히 발달되어 있으신가 보다.

 

 

 

요새는 하지 말아야 할 말까지 걸러내지 않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욕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차라리 육시럴이라고 해봤자, 직접 육시를 낼 것도 아니고 상대방도 '어떻게 그런 끔찍한 말을 할 수 있어!'라고 진지하게 대응하는 경우도 별로 없으니, 욕이 낫지 않을까.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않는 건 결국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다. 결국 내가 욱해서 먼저 주먹이 나가면 상대도 욱해서 주먹이 나가고, 결국 싸움이 벌어지는 것은 당연하겠지. 다만 그 사람에게 하지 말아야 할 일은 하지 말자고 진지하게 말을 해주는 게 낫겠다. 그러나 만일 남자가 여자에게 성적 희롱을 하는 것처럼 대놓고 말하기 어려운 것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람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아라. 그러면 상습범이 아닌 이상은 스스로 그만두고 물러나게 된다. 같은 인간이니까, 일단 얼굴을 마주보면 그 사람이 어떤 고통을 느끼는지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힘들고 열받아도 손을 잡고, 그 사람을 쳐다보며 그 사람을 생각해 주어라. 자신만 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남을 탓하며 자신의 언행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성공하지 못한다. 돈을 많이 벌어도 되는 게 없지. 항상 사람들이 많은 자리에 끼고 싶어하지만, 그러려면 이전에 해왔던 일들을 반성하고 고치는 과정이 필요한데 자신에게는 잘못이 없다며 생략해 버린다. 결국 모두에게 버림받고 구박당한다. 거리에서 옛날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을 다시 볼까봐 벌벌 떨며 다니고. 안타까운 일이다.

 

 

또한 농산촌에서 자라는 아이들 1명당 무조건 최소 월 50만 원씩은 지급해야 경우 농산촌 멸망을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본 사람이 있었다. 농산어촌에 대한 투자는 시설 지원이나 사업 지원 방식에서 젊은 사람 살리는 방식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1. 나이가 어떠느냐에 따라 그게 아이보다는 부모의 손으로 가서 부동산 땅값 올리기에 쓰일 공산이 크다.
2. 농산촌의 기준은 어찌 정해야 하나. 딱히 서울이 아니더라도 실상 우리나라 대부분이 도시가 아닌가.
3. 어릴 땐 농사를 짓기로 결심했을 수 있으나 나이가 먹으면 도시에서 일을 하며 살기로 마음을 바꿀 수 있으며 또 다시 그 돈이 도시에서 일자리를 구하는 동안 쓰여질 공산이 크다. 또 이를 나쁘다고 할 수도 없다.
4. 농촌에 사는 노인들을 젊은이들이 학대하는 일도 끊임없이 문제가 되고 있다. 그쪽에 대한 시설 지원이나 사업 지원도 꽤 벅찬 것으로 알고 있다.

근데 시골에서 기본소득 운동 하시는 분들이 대체로 한 명(혹은 가구)당 월 50만원 정말 좋아하시네. 어떤 기준이 있는 건가? 아니면 어떤 사람이 이야기한 걸 그냥 출처 안 밝히고 써대는 건가? 무튼 나도 젊은 축에 속하니 뭐 50만원이라던가 30만원이라던가 주면 좋고, 잘 쓸 자신 있지만 혹시라도 그걸 또 이상하게 쓸 사람이 있을까봐 걱정된다. 사람 하나 돌게 만들거나 죽게 만들거나 하는 게 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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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핑 일러스트 - 그림으로 배우는 서핑
존 로비슨 지음, 송창훈 옮김 / 글과바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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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생들의 가장 큰 문제는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민중들도 학생으로 바라보고 계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글과 그림 2017년 7월호를 보다 김훈의 공터에서를 보고 보수층 노인들을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는 데서 나는 깜짝 놀랐다. 나는 그들을 전혀 연민의 눈으로 보지 않는다. 그들이 보수층으로서 누릴 호사를 다 누렸기 때문에 지금 세대와 미래 세대는 대부분 가난에 시달릴 것이다. 선생님들(혹은 선생님같이 행동하는 인간들)에게 힘든 일이 있었다고 말을 해 보라. 이들은 "왜 나한테 그런 걸 이야기하죠? 여긴 그런 걸 말할 자리가 아니잖아. 상담해달라는 거야 뭐야?"라는 대답(?)을 할 것이다. 오늘 실제로 교사 직업에 있는 인간에게 그런 소릴 들었다. 상담거리로 생각하는지 아닌지에 대해선 예수님이 한 좋은 말이 있는데,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알 것이다. "그것은 네 말이다."

 그러고보면 난 똥영화 똥책들은 참 잘 피하는 비상한 재주가 있는데, 내가 의도하지 않을때도 그렇다. 예를 들어 로맨스 영화를 볼 땐 좀처럼 졸지 않는데 어떤 영화를 볼 땐 졸았었다. 근데 나중에 보니 그 영화 말미에 나온 키스가 강제키스라서 페미들에게 욕먹고 감독의 명성에 스크래치가 갔다나. 김훈 또한 칼의 노래 이후의 작품을 보지 않았고 팟캐스트에 나올 때도 듣다 졸았었는데, 이후의 작품들은 여성에 대한 비하가 엄청나다고 한다. 무튼 페미니즘과는 거리가 먼 잡지일지도 모르겠지만 독자들 부담 안 가게 좀 사회적 논란이 덜한 책을 추천하면 어떨까. 그리고 문법에 안 맞는 이상한 문장들 좀 신경써서 고쳐줬으면...

 그러니까 애 낳는 게 문제가 아니라 애 낳고 맘충소리 듣는 여자들 때문에 문제라고 하는데 노영민이란 사람은 아몰랑 젊은이들 출산 안 하면 난 보수갈거야라는 식이다. 가라. 누가 말린대? 근데 다음 글에서는 콩알 심을 때 남자 구실을 하는 기분이 전신에 퍼진댄다. ㅋㅋㅋ... ㅋㅋㅋㅋㅋㅋ.... 보수 가라고. 진짜보수 어르신 검색해보고 그리 살 자신 있으면 해라. 바른보수 바른정당 가든가.

 난 되려 젊은이들의 이런 걸 지적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사실 이것도 굳이 지적할 필요가 있을까 생각하지만.) 이 잡지 중간쯤에 이런 글이 실려 있었다.

 

새벽 어느 만큼에 어둠 속에서 숨죽였던 나무와 호반새, 꾀꼬리, 물까치들과 닭과 돌매미와 냇물과 바람과 구름들이 한꺼번에 깨어나 자기 소리를 내는 시간이 되면 나도 으아아 소리 내며 깨어난다.

 그런데 '나무와 냇물과 바람과 구름들은 살아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자지도 깨지도 않습니다 물론 숨 죽일 수도 없죠'라고 댓글로 지적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시적 표현이니 그렇게 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고 하니 'ㅋㅋㅋ 죄송합니다 공돌이라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돌이는 인간도 아니고 나아가 생명체도 아닌 걸까? 인간의 특성은 다른 것도 자신의 속성처럼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다소 자기중심적인 면에 있다. 공돌이는 인간을 넘어 공돌이라는 자신들의 종류를 만드는 듯하다. 고양이와 강아지가 처음 만날 때 싸우는 이유도 서로 자신들과 똑같이 바디랭귀지를 쓸 거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중에는 금방 친해진다. 왜냐하면 마주 보면서 금방 상대의 언어를 알아듣기 때문이다. 공돌이나 이과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보다보면, 이들은 자신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문과생들이 못 알아듣는 걸 꽤 자랑스러워 한다. 그 말을 쓰면 사회에서 혜택을 얻기 때문에 악의 없이 하는 행동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그게 심해진다면, 이번엔 그들이 문과생(?)들이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실제 대부분의 아이들이 이런 경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 각자의 경험은 너무나 다양한데 남들과 대화를 할 기회, 특히 자신과는 너무나 다른 경험을 한 사람과 대면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SNS에서는 보통 얼굴을 보지 못하니 말을 생각없이 막 쓰게 되고, 내 타입이 아니면 바로 내 글을 읽지 못하게 하거나 이 사람 글을 못 보게 교묘히 설정해 놓으면 된다. 지금은 그닥 티가 나지 않지만, 언젠가는 이게 심각한 사회현상으로 번질지 모른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마도 이는 잘 아는 이웃들끼리 일상에서 서로 맞닥뜨릴 수가 없는 서울 도심에서부터 퍼지리라.

 시도 많이 나와서 인상 깊었다. 그 중 제일 좋았던 시(?)를 소개한다.

 

두일이

장날이다.
두일산업 개
두일이는
킁킁, 좋은 냄새
찾아 간다.

"저 왔어요!"
"우리 어린이 왔네!"

족발집 아주머니는
두일산업 개를
어린이라고 부른다.
"얘가 사자갠데, 4살쯤
됐어요. 어린이야, 어린이!"
어린이는 아주머니가 포장
마치기를 기다린다.

두일이는
검정봉다리에
든 뼈다귀를
기분 좋게 물고 간다.
그렇게 가져가서는
몽땅 새끼들 먹인다
저는 한 개도 안 먹는다.

내력이라고,
근처 사는 할머니들이
말한다.
두일이 엄마도
두일이 형제
키울 때
뼈다귀 간식 얻어다
지새끼들만
먹였다고......

본문의 아름다움을 깨뜨리는 글이라 죄송하지만
1. 개에게는 닭, 돼지, 소 뼈다귀를 먹이면 안 됩니다. 먹다가 내장에 뼈가 걸려서 썩어 그 부위를 도려낸 큰 개를 동물병원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2. 이외에도 피부병 걸리면 정말 고생하니 개를 보면 차라리 간단한 사료나 개 전용 간식을 주세요.
3. 개는 4살이 되면 인간 나이로는 30살입니다. 뭐 할머니들에게는 그 나이도 어린이로 볼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저도 어린이니까 어린이날에 선물을 주시기 바랍니다. (뭣)

 

담인이도 큰 키에 얼굴이 좀 더 소년티가 나고 있다. 라온이는 매일 볼 때마다 얼굴이 달라져서 라온 엄마랑 나랑 서로 놀라워한다. 아이들을 볼 때마다 눈이 부시게 피어나고 있다. 나는 날로 쇠퇴해가는 거겠지.

 

  

우리나라 만화 중에서도 라온이 주인공이고 제목도 라온인 책이 있습니다. 제가 좋아하는 작가가 영챔프에서 그렸었습니다. 보다 말았는데 새삼 재탕해보고 싶네요. 사실 올린 이유는 따로 있지만 비밀입니다 ㅎㅎ

 

 P.S 추가로 이야기하자면 국가 시스템에 저항하여 담배를 길가에 그냥 버리자는 이야기가 이 잡지에 나온다. 말인즉슨 국가의 횡포를 겁내지 말아야지 청소부들이 늘어나는 걸 겁내지 말아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내 주위에도 홍콩에서 이와 똑같은 걸 배웠다는 사람이 있었다.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려 하니 홍콩의 직원이 '그렇게 착실히 버리면 청소부가 할 일이 없지 않느냐'며 가로막았다는 것이다. 나는 그 말에 크게 화를 내며 '쓰레기를 아무데나 버리면 그걸 지나다닐 때 보면서 기분 나빠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느냐'라고 했었고 <버리다>라는 책 서평에도 그렇게 썼었다. 그런데 선생님들이 쓰는 잡지에서 이런 글이 나오다니... 나는 생각해보면 정의로움과 윤리에 민감하고 공중도덕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고 보는 편이다. 그러나 이 책을 보면서 사고를 좀 더 유연하게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공중도덕을 지키는 게 잘못되었단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하지만 기업이 로봇을 앞세워 사람들의 일자리를 빼앗는 세상이 되고 있는 이상, 쓸데없는 것과 인간이 흥미로워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쓰레기가 많아짐으로써 바다가 있는 마을이 좀 더 부유해졌다는 해외기사를 본 적도 있는 듯하다. 쓰레기란 무엇이고 어떻게 다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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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너무도 사랑하는
성석제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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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말을 하고 있는 사이에 젊은 여자가 들어와서 포도가 세 송이 담긴 하얀 접시를 내려놓고 나갔다. 그런데 접시를 내려놓은 곳이 집주인의 손에는 쉽게 닿는 곳이지만 우리가 손을 뻗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거리에 있었다. (...) 갑자기 배가 아파왔다. 만호와 함께 오다가 점심으로 먹은 육개장에 벌건 기름이 너무 많은 것 같았는데 그 때문인지도 몰랐다. 다행스럽게도 싸르르 아프던 배가 조금 나아지며 방귀가 새어나왔다.

 기대치 이상이었다.

 

 소설집이고 초단편은 아니지만 보통 두세장 정도밖에 안 되는 소설들로 이루어졌다는 성석제의 특이한 소설이 확실히 내 눈길을 끌기는 했다. 그러나 무라카미 류가 야성적인 젊음으로 사람을 압도하고 세심하게 리드하는 성격이라면, 성석제는 다정하고 약간 헐렁한 성격의 글이라고 해야 할까? 이걸 에세이로 봐야 할지 소설이라고 봐야 할지 헷갈릴 정도로 소설들은 저자의 경험담같은 이야기들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확실히 그런 점에서는 시 같다. 성석제 씨는 자신의 시같은 글에 살을 붙여서 늘린 소설이 자신의 소설집이라고 결론을 내린 듯하다. 그렇다면 장편소설은 어떻냐고? 놀랍게도 무라카미 류가 단편소설을 늘려서 장편소설을 만든 편이라면, 성석제의 중장편 소설들은 이런 단편소설집과는 또 완전히 다르다. 그의 장편소설은 구도가 완벽하게 짜여져 있는 편이었다. 말미가 열린결말로 두루뭉술하게 끝나는데, 그 점에선 좀 이 소설집과 비슷해 보이긴 하다. 아무튼 순수문학 작가 중에서는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보는 사람들도 있고, 일부러 라노벨에 도전하는 사람도 있다. 그렇지만 장편과 단편의 느낌을 다르게 쓰는 작가는 또 처음 들었다. 그는 자신의 단편집을 설명하며, '쓸 수밖에 없어요.'라고 끝을 맺는다. 나는 그의 굉장히 소설가같은 부분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이야기를 예전부터 많이 좋아하긴 했지만, 그를 어느 강연에서 만난 뒤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된 듯하다. 그래서 이 책을 강연에서 무료로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문학동네에서 그가 옛날에 쓴 단편집들을 재출간한 것들을 다 구입하게 되었다. 한동안은 시를 읽는 대신 이 책들을 읽게 될 것이다. 그렇다. 나는 이 책을 소리높여 읽었다. 그것도 10편씩. 시를 읽는 것보단 확실히 시간이 걸렸다. 단편 하나를 읽을 때마다 어른의 말씀이나 돈의 값처럼 깊이 생각할 거리들이 생기기도 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째 그래요! 같은 짧은 문장이 핵심적으로 마음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휴머니즘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 않아도 사람 사이의 따뜻함을 충분히 담아내는 듯했다.

 

 두번째로 내가 이 책에 감탄한 점은 정치에 대한 비판이었다. 

 이게 잘못 쓰면 완전히 아재개그가 되어버리는 면이 있거나 시대에 통하지 않는 게 있는데, 그는 무슨 선견지명이라도 있는 젊은이마냥 처음 글 쓰는 사람처럼 유독 설렘과 열정에 넘치는 글을 써냈다. 일찍 일어나는 새와 마을 발전 사업에 대한 글이 가장 인상에 남았었다. 두철수에서 계속 일찍 일어나라는 메시지를 던지는데, 보통 한국 사람들이 일찍 일어나면 보라는 책 안 보고 가라는 산책 안 간다. 일을 한다. 책도 보지 않는다. 외국에서 수입되어 온 듯한, 아침형 인간이란 개념은 그렇게 한국에서 망가졌다. 마치 우주선을 쏘아올리지 못하고 한국의 여성우주인은 결국 외국 가서 잘 먹고 잘 살게 되었다는 메데타시적 결말이다. 작가는 이를 풍력발전에 연결해서 글을 써내려갔다. 7년도 더 전에 쓰여진 글인데 이건 마치 미래를 예언한 것처럼 생생하다. 이 정도면 그도 김진명처럼, 기간은 짧았지만 훗날을 예언한 셈이 아닌가?

 

세번째로는 이 책에서 나오는 음식이 가장 인상적이었다. 강연의 진행을 맡았던 정용준이 지적했듯이 게에 대한 이야기가 상당히 재미있었다. (그리고 맛있어 보였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가장 공을 들인 건 따개비죽 같았지만 저자의 의도와 독자의 느낌은 원래 따로 노는 법이지 않은가. 특히 난 생맥주와 소프트셸크랩 볶음 정말 궁금했다. 뉴욕에 있는 식당이라는데, 이거 먹으러 뉴욕가야하나 진지하게 고민했을 정도이다.

 내가 딱 한번 갑각류가 맛있다고 생각한 적이 있는데 그건 새우이고 코스요리였던 지라... 아, 제주도 여행 갔다가 우도 어느 카페에서 대게라면 먹었을 때 메챠쿠챠 맛있었던 건 기억나는데 너무 오래 걸어서 그랬을 수도 있고. 무튼 먹방여행 더 하고 싶다. 살 언제 빼나.
 그리고 최근 나이가 들어서 그러나 내 인생 절대 좋아하지 못할 거 같았던 멸치가 요새 끌리더라. 근데 이 책에서 또 요새 본인이 관심있어 하는 그 음식이 나온다. 제목도 멸치 교향곡. 무라카미 류가 추천하는 음식은 대부분 약간 먹기가 부담가는 면이 있는데, 이 책에 나오는 요리는 나같은 서민도 조금만 노력하면 먹을 수 있을 것 같은 게 또 한 번 매력이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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