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평점 :
품절


   
  "데이비드, 자네는 문제를 혼동하고 있어. 자네더러 후회를 하라고 하는 게 아냐. 우리나는 자네 동료로서, 그게 아니라면 자네 말대로 세속적인 위원회 위원들로서, 자네의 영혼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몰라. 다만 성명서를 발표하라는 주문을 하는 것 뿐일세."- p. 76  
   

 '추락'이라는 제목 그대로 인간의 영혼이 한없이 추락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무언가 시골에서 일이라도 하면서 살아가는 노인의 배부른 푸념이야기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만, 이 책은 어디까지나 영혼의 추락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사실 본인은 여자때문에 찌질대는 남자이야기를 가장 싫어하지만, 마지막 장면만큼은 그래도 깔끔해서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여성 차별을 남성적인 시각으로 바라보면서 안타까워한다는 설정이 독특했다. 자신의 딸보다도 더 어린 대학생과 연애를 하다가 쫓겨난 늙은 교수는, 속절없이 성적 폭력을 당하는 자신의 레즈비언 딸이 무너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안타까워한다. 그는 한참 후에야 자신을 쫓겨나게 만든 대학생의 가족을 만나서 참회를 고한다. 그러나 그의 본능 속 남성은 그 순간에도 수그러들 생각을 보이지 않는다. 이래서야 참회한들 무슨 소용이고, 그런 그에게 세상의 모든 여성들이 분노한들 무슨 소용인가. 순간 허탈함이 느껴진다. 딸 루시에게 의탁하기 시작하는 장면에서부터는, '시골에서 살아간다는 것이 그렇게 만만하지는 않다'는 설정을 중후반부터 노골적으로 보여준다. 갑자기 귀농하고 싶다는 생각이 수그러들기 시작하는 순간이랄까. 
 이 책에서는 사회에 대한 답이 제시되어 있지는 않다. 글 속의 교수는 점차 동물들에게 애정과 교감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가 맡은 역할은 그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도와주고, 그 시체들을 차에 태워서 소각장까지 나르는 일이다. 문득 간호조무사 학원에 다닐 때,  호스피스만은 절대 하지 말라고 주장하던 간호사가 생각난다. 죽음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기 시작하면 사람이 매우 무기력해진다나. 사람은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추해지고, 보수적이 되고, 빈곤해지고, 세상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죽어간다. 아니, 딱히 노인이 되는 순간뿐만 아니라 인생에 무심해지고 무기력해지는 순간이 바로 죽어가는 순간인 것이다. 마음에 들어오려는 것 자체를 단절하고 포기해버리는 그의 말로가 매우 안타까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나
김사과 지음 / 창비 / 2008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압사당한 채로, 그녀는 가장 높은 탑의 꼭대기에서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질식된 채로.- p. 88  
   

 처음부터 스토리를 매우 쉽게 예측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함부로 이 책을 '미나'이야기로 결단지을 수는 없다. 이 책은 친구 수정의 눈으로 미나를 보고 있다. 문제는 이 수정이라는 아이가 폭발적인 열등감과 자기우월감에 동시에 시달리고 있어서 중후반기가 되면 미나의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전부 다 미나 탓으로 돌려버린다. 참 무식하고 단순하면서도 편한 사고방식이구나. 결국 미나는 수정의 이기적인 사랑에 의해 최악의 상황까지 치닫게 된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기엔 뭣하지만. 미나의 말대로 요즈음 점점 이런 인물들이 많아지고 있는 것 같다. 딱히 우리나라 학교의 경쟁과잉 문제만이 아니라, 사랑 차원에서 말이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어서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거부하지만, 끊임없이 다른 사람들에게 사랑받기를 원한다. 세속적인 인물들이다. 조금 가볍게 해도 될 짐을 기어이 무겁게 만든다. 결국 자기에 대한 동정과 자기에 대한 사랑으로 마음을 꽉 채워버리는 것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가 누리고 있는 것에 조금도 만족하지 않는다. 가방이 닫혀지지 않으면 화가 잔뜩 치밀어오르고, 결국 발을 들어 있는 힘껏 안에 있는 것들을 눌러버리고 지퍼를 채워버린다. 그 안에 '타인'이 들어갈 자리는 없다. 왜냐? 수정이는 완벽하니까. 
 미나의 솔직담백한 질타가 왠지 나를 향하는 듯해서 부끄러웠다. 그런데 그녀가 생각하는 것처럼 세상이 그렇게 좇같지 않을까? P시가 어떤 곳인지는 모르지만 그녀도 결국 이런 말을 털어놓을 사람은 수정밖에 없지 않았던가? 분명 주인공은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를 서서히 깨닫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녀의 부모님은 애초 소설에 등장하지도 않고, 대안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은 다 특별한 척 해서 어른들의 환심을 사려 할 뿐이고, 오빠 민호는 살아남기 위해 침묵을 택했다. 결국 그녀는 자신과 놀아주는, 그리고 자신이 놀아주는 유일한 친구 수정에게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결국 그녀의 외침은 마돈나의 노래 속에서 허망하게 묻혀버린다. 내가 가타부타하기엔 좀 부끄럽지만 김사과님의 작품도 미나의 운명과 똑같은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리나라 문학계에 충격을 주려고 했는지 아니면 좀 튀어보려고 했는지 아니면 원래부터 문체가 그랬었는지 작가의 의도는 알 수 없으나 아무튼 이 소설은 장르파괴적이다. 그녀가 하려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메세지는 명확하지만, 자칫 묘한 분위기와 파괴적인 결말로 인해 모호하게 왜곡될 수도 있다. 일단 이 책을 다 읽고 난 후 네이버책의 리뷰를 봐라. 미나의 외침에 주목하는 사람이 많아 보이는가? 난 그렇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장르파괴도 좋지만, 무언가를 섞으려면 제대로 섞으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그렇다고 김진명씨처럼 메세지만 명확하고 결말은 모호한 그런 답답한 소설을 쓰라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까지 그녀의 작가로서의 매력이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레알 청춘 - 일하고 꿈꾸고 저항하는 청년들의 고군분투 생존기
청년유니온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1년 6월
평점 :
품절


   
  멀쩡한 강에다가 삽 내리꽂는 일로 국가원수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위인의 만행을 저지하라. 그리하여 남는 돈은 문화 예술 시장에 펑펑 뿌리고 내키는 만큼 생색내라. 흥행은 보장한다.- p. 109  
   

 단순히 말하자면 이 책은 청년유니온과 깊이 관련되있는 분들이 각자 자신들의 일상에서 접한 사람들을 인터뷰한다. 인터뷰하는 사람과 인터뷰되는 대상이 각자 인터뷰 속에서 자신들의 경험을 털어놓으며 공통점을 찾는다. 몇몇 분들은 익명으로 등장했지만 낯익은 말투와 태도로 봐선 누구신지 알 수 있을 것 같기도 했고 ㅎㅎ. 막연히 청년유니온 회원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만을 털어놓는 책이 아닐까, 생각했던 나로서는 조금 뜻밖이었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런 책들엔 한 가지 치명적인 약점이 존재한다. 단순히 주관적이다, 객관적이다 구분하기엔 조금 다른 개념이지만... 어떤 한 개인의 일생을 다른 사람이 설명할 때는, 아무리 조심한다고 하더라도 자신의 관점과 섞어서 해석하기 때문에 독자가 다른 관점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나 그만큼의 장점도 있다. 특히 이 책에서는 소박한 꿈에 도전하는 중인 평범한 사람들을 인터뷰 대상으로 삼았기에, 공감적인 측면이 강하다. 사실 그들을 인터뷰하는 청년유니온 회원들이 적극적으로 동감을 해주었기에, 더욱더 책에 몰입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혼자 자신의 경험에 대해 진술하는 형식에선, 아주 내밀한 경험 속에 어떤 가치가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걸 다 드러내지 못할 수도 있다. 혹은 혼자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일기에서도 그런 경우가 종종 있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게 되는 책에서는 오죽할까. 그러나 이 책에서는 인터뷰마다 2명씩 등장하여 서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꺼내도록 북돋아주고 다듬어준다. 서로 일상에 찌들어 축 늘어져 있는 어깨를 감싸주고 있었다. 본인은 그 장면이 너무나 흐뭇하기도 했고, 안타깝기도 했다.
 비록 일과 세상에 지쳐있다고 할 지라도, 우리나라의 청년들은 유머감각과 유흥정신을 잊지 않는다. 그 사실이 너무나 신기하고 경이롭기까지 할 때가 있다. 그들을 정규직, 비정규직으로 갈라놓고 소통하지 못하게 만드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아마도 아주 높은 탑의 꼭대기에서 우리들을 내려다볼 그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들에게 이 책을 선사하고 싶다. 서로 보듬는 이들처럼 아주 조금만 상대방의 입장을 헤아릴 수 있다면, 세상은 아주 많이 행복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싶다. 청년들은 의외로 잘 뭉치는 경향이 있고,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해 많은 생각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공포 문학 단편선 3 - 나의 식인 룸메이트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12
이종호 외 9인 지음 / 황금가지 / 2008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직 살아있다는 것만이 공포였다. - p. 403  
   

 전반적인 한국공포문학단편선에 인지도를 단숨에 띄운 소설이다. 또한 우리나라 공포문학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은 소설이기도 하다. 평판도 매우 괜찮은 소설이며, 우리 학교 도서관까지 합쳐서 이 책을 읽으려고 경쟁하는 사람들이 많다. 최소 호러계에서는 엄청난 명성을 얻고 있는 책이다. 참고로 우리 학교 도서관에서는 분실신고까지 뜬 적이 있다. (소장하려고 보관해뒀거나 팔아치웠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대체 어떤 책인가 싶어서 친구의 도움으로 인천대학교 도서관에서 얻어 읽어보았다. 
 어떤 사람들은 이 책이 아동들의 순수성이 한없이 잔혹해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본인의 눈으로 보기엔 좀 다른 느낌이었다. 전반적으로 '아동을 포함한' 소시민들이 공포라는 감정에 어떻게 적응해가는지를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개인적으로는 <나의 식인 룸메이트>가 가장 재미있었다. 원초적인 공포에 직면했을 때 인간의 본성이 어떻게 혹은 얼마나 적응해가는지를 보여준다. B급영화로 제작되어 나오기에도 손색이 없을 듯하다. 뭐 우리나라의 영화제작수준으로 봐서는 기대를 접어야 하겠지만(...)
 위의 좋은 글귀는 단편선 중에서도 <얼음폭풍>에서 따온 글이다. 물론 이 책에 실린 작가분들 모두 훌륭한 글을 쓰셨지만, 소설의 마무리에 있어서는 이 분이 가장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반전은 없었지만 매우 깔끔했다고 해야 할까. 황희라는 분은 주로 미국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겪는 차별에 대한 소설을 많이 쓰는 편이다. 공포소설같지 않으면서도 읽는 사람을 문득 소름끼치게 한다. 공포문학단편선이 계속 쓰여짐으로 인해 한국의 공포소설이 좀 더 많은 발달을 이루었으면 한다. 
 



*배너를 누르시면 책과 음악이 뒤섞인 제 개인블로그 세계로 이동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피지의 난쟁이
무라카미 류 / 예음 / 1997년 10월
평점 :
품절


   
  "미국같은 대국이 베트남같은 소국에게 군사개입을 하여 괴롭히는 행위는 참을 수 없었어요."
"그렇지 않아."
"뭐가 그렇지 않죠?"
"너희들은 강력한 조국인 미국이 가난한 소국인 베트남조차도 간단하게 점령할 수 없다는 점에 초조했던 거야."
 
   

 위의 내용만 보면 "오오미 개념글이네요"라고 칭찬할 사람들이 있겠지만, 무라카미 류는 파시즘을 어느 정도 찬양하는 사람이라는 점을 항시 명시하시길 바란다. 무튼 <사랑과 환상의 파시즘>과는 달리 이 소설은 상당히 몽환적인 이야기가 많이 등장한다. 굳이 중요한 부분을 꼽자면 소설 중후반이라 생각한다. 미국에 있는 어떤 공장도시에 갖힌 매저키스트 난쟁이와 여자가 미치지 않기 위해 이야기를 자꾸 하기 시작하는데, 그 때 그들은 자신의 상황과 비슷한 처지의 가상인물을 만들어내고 그 가상인물이 상상하는 가상인물을 만들어낸다. 게다가 난쟁이의 할아버지가 죽기 전에 썼던 동화이야기까지 합치면 이게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엄청나게 집중해서 읽어야 한다. 특히 그들이 환상의 세계에 있는지 아닌지를 무지하게 신경써야 한다. 스토리가 뒤죽박죽이고 끝도 열린 결말이라서 전체 내용을 열심히 훑어보지는 않아도 된다. 난 지금 할아버지의 수기에 집중해서 읽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도에 끝나버려서 쿠스쿠스가 신에 의해 코끼리에게 깔려 죽었는지 아닌지가 엄청나게 신경쓰이는 중이다. 잠도 안 올 기세다(...)  

 소설은 사회 문제에 대해서 다루는 듯하다가, 점점 범위가 넓어지면서, 여자와 남자의 관계를 SM에 기초해서 근본적으로 설명하기 시작한다. 결국엔 인간의 정신적인 한계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독자의 정신적인 한계까지 실험할 태세다. 이 책을 읽고 '재밌었다'라고 말하는 사람 자체가 마조히스트가 아닐지 의심될 정도. 아무튼 '피어싱(유년의 기억)'같은 소설과는 차원이 다를 정도로 엄청 하드한 SM들이 등장하므로, 굳이 SM소설을 읽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집어보시라. 이미 품절되어 시중에선 팔지 않으며, 중고책방에서도 발견하기 어려운 책이다. 본인은 국회도서관에서 짱박혀서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