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 개정판
김훈 지음, 문봉선 그림 / 학고재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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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을 글로 써보니 핸드폰이 알아서 둘레길이라는 단어를 옆에 띄워준다. 내가 쓰려고 했던 말은 결국 남한산성 둘레길이 되었다. 왕의 늦은 전갈, 아니 왕을 배신한 부대들, 아니 초기부터 청이 될 세력을 자극하고 명의 신하가 되기를 자초했던 우리나라는 다 끝장났다. '다 끝장났다'는 단어도 적당치 않게 우리 후손들은 끔찍한 비극이 일어난 그 산성에 알록달록한 길을 만들고 그 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고 페이스북에 올리고 있다.

영화는 마치 김훈의 글을 보는 듯했다. 어두운 분위기와 한자가 많은 오래된 듯한 대사가 그러했다. 그러나 그런 분위기를 이겨내고 작품을 찬찬히 들여보자면 그대로 보기엔 사실 의미심장한 면이 있다. 내부의 적에 대한 이야기와 모든 옛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대사는 흥미를 끌지만 결정적인 면에서 김훈은 역적을 충신과 대등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어 일찌감치 대세를 파악하고 항복하면 끝났을 것을, 왜 남한산성까지 파고들어가 그 주민들에게 민폐를 끼치고서야 항복을 하려 했을까? 정말 항복을 권하는 신하가 왕을 설득하지 못해서 그랬던 것일까? 말을 그렇게 잘하는데? 결국 그는 백성들을 위한 길을 선택한 게 아니었다. 싸움을 선택한 신하와 말이 맞았던 장면이 어떤지 유심히 보면, 결국 그들은 체면과 종묘사직을 보존하기 위해 서로 다르지만 같은 길을 택했음을 알 수 있다. 적국의 설날에 고기와 술을 보내는 때부터 이미 그들이 어떤 길을 갈지는 정해져 있었던 게 아닐까? 왕이 칸에게 무릎을 꿇었다고 해서, 싸우기를 청했던 자가 보직을 그만두고 할복을 한다고 해서 목숨을 잃고 외국에 끌려간 50만의 백성이 돌어오진 못한다.

 

 

병사 300이 죽은 뒤 총책임자가 아니라 그 밑의 밑에 있는 사람이 죽은 것도 결국 실제로는 유능한 사람이어서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자신의 직종을 좀 더 오래 유지하기 위해, 임금에게 찍히지 않기 위해 눈치만 슬슬 보다가 결국 그런 결과를 낸 것이다. 이 실패는 역사스페셜에서는 늠름하게 나오지만 누구나 알듯이 참패이며 현재도 일본의 지배, 남북의 분단과 외국의 내정간섭, 친일파 기업들의 성공으로 이어지고 있다. 실제는 영화보다도 더 지독한 법이다. 과연 민들레는 피고 봄은 올 것인가.

 

 

사드는 결국 배치되고 문재인 정권이 우리에게 찾아온 봄은 아니라는 사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진정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부동산 업자들에게 시달리는 일 없이 봄여름가을겨울 무사히 지낼 수 있으려면 사람의 마음이 뒤바뀌던가, 아님 사람 자체를 통째로 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돼지흥분제를 좋아하는 어떤 변태가 기회를 잡는 건 두려운 일이다. 심지어 대통령을 직접 투표하는 방법조차 항상 올바른 방법은 아님을 우리는 박근혜에게서 확인하였다. 남한산성이 저런 꼴이 될 때조차도 싸우는 백성들은  싸웠다. 국가의 수장은 외국에게 머리를 조아리게 내버려두더라도, 어떤 길이 모두에게 좋은 일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국민 모두가 항상 토론을 해야 하거나 최소한 그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쨌거나 지금은 왕정 시대는 아니니까 말이다.

P. S 그나저나 이때다 하고 페미니즘을 공격하고 김훈을 찬양하는 평론에서는 항상 '어린 나루가 본 세상은 어땠을까' 따위가 나온다. 여성도 전투에 참가했다는 기록은 제껴두더라도 어떤 곳에서라도 살아남는 힘이 센 대장장이와 할아버지를 잃은 어리고 연약한 나루는 참 비교가 된다. 그러고보니 칼의 노래에서도 여성은 항상 나약하고 가냘프게 묘사되었었다. 내가 괜히 김훈의 이슈때문에 의식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하여튼 그렇다. 나루가 보는 세상이 뭐 어떻다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보는 세상과 그렇게 다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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