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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루레이] 화장 : 700장 넘버링 풀슬립 한정판 (36p 포토북) - 컬러 & 스페셜 블랙 버전 본편 수록
임권택 감독, 안성기 외 출연 / 스튜디오 A(STUDIO A) / 2015년 12월
평점 :
일시품절

1. 이 영화를 다 봤을 때 신카이 마코토 작품을 처음 볼 때 느꼈던 그 기분을 느꼈다. 그렇다. 상당히 분노했다. 그나마 반전이 두 가지나 존재하는 반전영화라는 게, 반전영화라면 물불 안 가리고 챙겨보는 나에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반전 중 하나는 청소년 관람불가 딱지에 비해 매우 건전한 영화이며 은근히 기대했던 정사씬이 도무지 나올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차라리 이 영화의 원작인 김훈 소설을 보고 나서 봤다면 충격이 좀 덜했을까? 솔직히 원작까지 볼 수 있을지 자신은 없는데, 칼의 노래를 처음 봤을 때 느낌이 너무 좋아서 그래도 한 번 믿어본다. 그렇다. 사실 김훈이 이런 내용의 소설을 썼을 거라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정말 영화에서 보고 내가 이해한 그 내용을 쓴 건지' 궁금해서 억지로라도 읽어보려고 한다.

2. 이 영화의 주인공(안성기)은 화장품 회사의 상무로 왠만한 직위에 오른 장년기의 남성이다. 암이 계속 재발하는 아내를 두고 사는데, 덕분에 약자에게 퍽 상냥한데다 병간호에 제법 익숙한 모습을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발견된 아내의 뇌종양은 꽤 커 보인다. 그는 처음이 아닌 아내의 병간호에 다시 나선다. 회사일도 같이 병행해서 하는지라 피곤한 모습을 보인다. 힘든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그에게 잘도 아픈 말을 툭툭 던지는 사람들. 게다가 그 힘든 순간에 새로 입사한 젊은 여직원이 너무나도 이쁘게 보인다. 그는 그녀에 대한 욕망을 억누르기 위해 자신과의 혹독한 사투를 벌인다. 정말 때아닌 삼중고이다. 굉장히 아침드라마같은 설정이라서 정말 별로였는데, 이 영화가 철저히 바람피는 남자의 1인칭 시점이다보니 나이들어서 바람피는 사람들의 심정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나 할까.

3. 이 영화를 욕하는 사람들이던 아니던 간에 본인을 포함한 관객들이 가장 불쌍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이 이 암에 걸린 여인이다. 한 때 상당히 부자였던 것 같고, 자신을 미적지근하게 좋아하는 주인공을 잡기 위해서 별별 노력을 다했던 듯하다. 하지만 결국 암에 걸리니 자부심이나 자신감은 길거리에 내팽개쳐진다. 샤워기를 잡을 힘조차 없어서 결국 주인공이 그녀의 알몸을 씻기고, 그녀는 결국 절망적인 울음을 터뜨린다. 으으... 저거 무서워서 병원가서 건강검진하기 싫어진다니까. 결국 저 부인은 자다가 편안히 가셨지만, 이상한 병 걸리면 고통스럽게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젊었을 때 건강을 챙깁시다 여러분.

4. 실제로 겪어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랑하지 않아서 곁에 남아있는 경우가 있고, 사랑해서 옆에 있지 않고 떠나주는 경우가 있다. 만약 나의 사랑이 사랑하는 상대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다면, 나는 가차없이 잔인해질 수 있다. 몇 번이고 잔인한 말을 할 수 있고, 몇 번이고 잔인하게 잘라낼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보내야 하는 게 사랑의 완성이다. '널 사랑해서 떠나보내는 거야' 같은 식의 이별이 오히려 훨씬 더 잔인하다. 사랑하기에 그는 침묵하고, 사랑하는 그녀의 문자를 조용히 지웠다. 그의 옆을 쌩하고 지나친 그녀는 그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한 채로 떠나간 것일까? 아무튼 그는 나름대로 사랑했던 아내를 죽음에게 빼앗겼고, 첫사랑처럼 가슴떨리게 사랑했던 그녀를 잃었고, 아내가 그토록 좋아했던 개를 안락사시켰다. 모든 걸 토해내고 완전히 혼자가 된 그는 담담하게 걸음을 옮긴다.
하지만 난 이런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다.
만약 그가 그녀와 와인을 마시면서 이틀을 같이 보낸 후 그녀를 중국으로 떠나보냈으면, 상황은 어떻게 되었을까?
뭐 어차피 여주인공이 그런 걸 이겨낼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만. 그래서 난 이 영화가 마음에 안 든다. 여자가 약해도 너무 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