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정원 (16p 설정집) - 한국어 더빙 수록
신카이 마코토 감독, 이리노 미유 외 목소리 / 아트서비스 / 2013년 12월
평점 :
품절


 

1. 우리나라도 그렇긴 하지만, 일단 일본의 연(恋)이 연애라는 단어로 발전하기까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요즘 들어 흔히 사용하는 자유연애, 즉 love라는 개념은 애초에 아예 없었다는 이야기다. 외국의 문화가 알려지고, 남녀간의 사랑이 금지되자 그 대안으로 여학교 내의 백합이 유행하고 심지어 장려되기 시작하면서(이에 대해선 나중에 퀴어인문잡지 삐라 창간호를 다룰 때 상세히 다루겠다. 물론, 레즈물과 백합물이라는 장르를 다루고 있으므로 여기 애니뉴스에다가도 올릴 생각이다.) 자유연애가 자연스럽게 정착되고, love는 ラブ라는 가타카나로 정착되었다. 즉, 대다수의 일본인들(특히 신카이 마코토.)에게 아이()는 아직도 요원하다. 사실 그래서 나는 '카미카제가 있었던 그 과거로 회귀하려는 듯한' 신카이 마코토의 세계관이 싫다. 내 생각에 대해서 이참에 간단히 이야기하자면, 이들의 연애관은 아직도 너무 일방적인 데다, '사랑하는 사람'보다는 '사랑에 빠진 자기 자신의 모습'에만 집중하기 때문에 진정한 love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책임감도 없다. 헌신도 없다. 그저 좋으면 좋은대로 상처받으면 상처받은대로의 모습에 열중할 뿐. 그러니 감정이 터지면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쉽게 흩어져버리는 거다. 어쩌면 불쌍하다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좋아하는 작품을 이렇게 적나라하게 까서 미안하지만, 앞으로 신카이 마코토의 작품을 계속 리뷰할 생각이니 이 말을 중복하진 않겠다. 그렇다고 수정하거나 철회할 생각도 없지만.

 

 딱 이 작품은 '스키'에서 '코이'로 가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2. 이 글을 보고 계실 분들은 대게 10~20대일테니 어찌보면 필요없는 소리인지도 모르겠지만 학교는 폐쇄된 곳이다. 비좁은 장소에 역시 일본식으로 똑같은 건물에 똑같이 배치되어 있는 반, 권력이 있는 선생님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똑같은 옷을 입고 있는 학생들. 새장 안에 갖혀있는 느낌. 마치 그 세계만이 전부인 듯한 착각에 빠진다. 게다가 요즈음엔 교사와 학생 모두를 감시하기 위해 CCTV가 설치되어 있는 곳도 있다. 폭력을 방지하기 위해서라지만, CCTV에 찍히지 않는 게 딱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분위기 조성과 언어적인 폭력이다. 가뜩이나 숨도 잘 쉬어지지 않는 곳에서 빅데이터를 가지고 극도의 감시사회를 형성하고 있으니, 사실 미치지 않는 게 대단하다. 난 요즘의 10대들을 상당히 장하게 생각한다. 그곳에서 부대끼다보면 민감해지고 작은 싸움 하나마저도 인간의 내부 뼛속 깊은 곳에 깊은 파동을 일으킨다. 게다가 베란다에서 상냥하게 전화하는 그 전남친. 아마도 그녀일 듯한, 저녁을 만들고 있는 듯한 사박사박거리는 소리. 자신에 대한 환멸을 느끼지 않고선 배길 수 없는 환경이었긴 했다.

 

 촛불이 일렬로 늘어서 있다. 하나 둘 씩 꺼져간다. 이미 피워졌었던 불로 인한 짙은 연기가 암흑을 감싼다. 밑에는 나를 받아줄 그물망조차도 없다. 나는 허공에서 맨발로 외줄을 타고 있다. 줄은 예리하다. 금방이라도 발을 베어버릴 듯이. 너무 아파서 그만둘까 싶어지다가도 멈추면 나 홀로 정지되어 있다는 불안감이 든다. 모든 장마와 폭풍이 다 지나간 다음엔 소름끼치는 정적과 고요가 찾아올 것이다, 아니 찾아온다.

 

 선생의 맨발 클로즈업은 발 페티쉬가 아니다. 발병까지 걸릴 각오를 하면서도 힐을 신어야 하며, '여성'이 아닌 '여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사회를 헤쳐나가는 그 상황에 대한 매우 적절한 비유다. 

 

3. 그러나 그 상황에서 그녀가 한 상황이 적어도 이 남주에게 납득될 만한 상황은 아니다. 나중엔 사랑의 힘으로 겨우겨우 이해한 것 같다만. 맥주와 초콜릿. 단맛과 쓴맛이 극적으로 대비되는 그 상황에서,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이 했던 거짓말을 남주에게 그대로 사용했다. 일명 사회에서 매력적이라고 생각하는 위험한 여자, 비밀스러운 여자로 남기 위해. 이제 15살로 그녀가 읊은 단가도 제대로 읽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남주는 (시간아 멈추어라 너는 아름답도다.) 여느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자신의 꿈에 대해서 가감없이 솔직하게 털어놓는다. 단순히 복작거리는 일상에서의 탈출을 바래서, 빗소리와 새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정적을 만끽하고 싶어서 인적없는 고요한 곳을 찾는 중2병 소년에겐 가혹한 일이었다. 남주가 만들고 있고, 어머니에게 선물했던 구두는 그녀의 떠나감을 암시했다. 결국 남주는 그녀에게 구두를 전달해주지 못했다. 서로에게 이끌리기 위해 거짓말로 진실된 말로 스스로를 옭아맸지만, 그녀는 어른이었기 때문이다. (좀 심한 말이지만, 죄책감을 비싼 선물로 무마하려는 건 꼰대의 특징이다.)

 

 

4.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는 맹렬한 기다림'에서 결국 '자기계발적인 기다림'으로 나아간다. 이유는 간단하다. '일단 지금은' 노력만으론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 희망고문은 '운명'이란 단어처럼 사람을 한없이 무기력한 나락으로 떨어지게 한다. 난 이 둘이 차라리 가까운 곳에 있는 사람과 더 발전적인 '사랑'을 했으면 하는 바이다. 랄까 사실 사람 인생이 그렇게 쉽게 되겠느냐마는. 그렇게 안 되니 이 둘이 후에도 서로 편지를 쓰고 있지. 이 영화를 보면 노력만으로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젠장. 그런 거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찝찝한 기분 어떻게 할꺼야 언어의 정원. 내가 이래서 세월의 돌 이후로 이런 작품 안 봤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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