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여애반다라 문학과지성 시인선 421
이성복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뚝지 중에서

2
때로 수컷 뚝지가 쫓아내도, 쫓아내도 떠나지 않는 암컷 뚝지를 기어코 밀어내는데, 그것이 왜 그렇게 안 떠나려고 버둥거렸는지는, 혼자서 풀이 죽어 떠나가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대왕문어의 밥이 된 다음에야 알 수 있다 갈가리 찢긴 암컷의 아랫도리엔 미처 다 쏟아내지 못한 알들이 무더기로 남아 있었던 것이다 바보야, 그러면 그렇다고 말이라도 할 거지, 바보야

3
또 어느 때는 수컷 뚝지가 눈 껌벅거리며 쉬임 없이 지느러미 놀려 가지런한 알들에게 산소를 불어넣어 줄 때, 제 짝을 못 구한 암컷 뚝지가 두리번거리며 찾아와 연애 한번 하자고, 한 번만 하자고 졸라대지만, 수컷은 관심이 없다 아예 쳐다도 보지 않는 수컷은 막무가내로 암컷을 밀어내지만, 그것이 왜 그토록 집요하게 치근덕거렸던가는 그 또한 대왕문어의 밥이 되어 뱃가죽 터지고 사지가 너덜거려야 알 수 있다 아무도, 아무도 애무해주지 않아 쏟아보지도 못한 알들이 무더기무더기 깊은 바다를 떠다니고 있었다

 

멍텅구리는 원래 뚝지를 뜻하는 말이다. 옛날에 자연에 관련된 글을 굉장히 많이 읽었는데 민물고기에 관한 글 중 가장 많이 나오는 게 뚝지였다. 누구 보기에 찔리라고 이 시를 인상깊은 구절 메인으로 올린다. 그런데 마침 평론가 분도 뚝지가 메인시 같다고 한다. 같은 생각을 한다는 점이 기뻐서 이 분 평론글은 끝까지 봤다.

 

이별 없는 세대 시리즈는 뭔가 고독을 즐긴다는 세대들을 일컫는 듯한데 맞나 모르겠다. 아무튼 시인 본인은 굉장히 꼰대란 생각이 드는데 또 이렇게 시로 솔로인 젊은이들의 느낌만 상상해서 적어주니 그럭저럭 읽을 만하다. 아 나이드신 분들은 비혼을 이렇게 생각하는구나하는 감으로 보면 좋을 듯하다.

그래도 다른 남성 시인들과는 다르게 여성들과 인간으로서 이야기를 나누려는 게 상당히 드러나지만, 그나마도 아내와 아내의 4자매들을 다방과 술집의 카운터 여성과 대비시키는 느낌이 난다. 그래도 뭐 동시를 지으면서 자신의 시집에선 다방 레지들과 놀아나는 남성 시인 누구누구와는 달리 상당한 진보를 보이지만 말이다. 이 시집은 팟캐스트에서 상당히 좋은 시집이라고 여러번 이름이 나 있다. 그러나 이런 글들이 나온다면... 페미니즘이 문학의 사조로 떠오르고 있는 만큼 좀 더 자신의 면모를 돌아보며 생각한 뒤 시를 쓰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물론 이 시 이후엔 그랬던 자신이 부끄럽다고 시인은 기술한다.

나는 현실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래서 계속 그렇게 생각해왔었다. 나는 사회성이 좋지 않았고 그래서 계속 책을 읽으며 현실로 도피했다고. 그런데 지금은 잘 모르겠다. 몸이 남들보다 더 잘 아프긴 했지만 사회성이 남들보다 확연하게 떨어지지도 도망가지도 않았던 듯하다. 다만 남들이 오락으로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나는 너무 진지하게 책을 읽은 것이다. 지금은 뭐랄까, 너무 오락에 빠진 나머지 신나서 사람들이 귀중품인 것 아닌 것 가리지 않고 마구 허공으로 던져대는 느낌이다. 차창의 문을 열고 쓰레기를 던지는 것도 문제지만 똑같이 차창의 문을 열고 강아지를 차도에 던지는 걸 보고 나는 뭔가 한참 잘못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것도 대부분 젊은이들이다. 나중에 자신들도 똑같이 그렇게 버림받을 수 있다는 걸 그들은 아직 모를 것이다.

 

또한 조각에서 1이란 시가 정말 마음에 들었다. 단순히 여혐이라고 주장하기엔 깊은 의미가 있었다. 마치 밭은 무처럼 억척스럽고 무식한 여성의 자식이 한 마사지걸을 죽였어도 세상 사람들은 그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내용이다. 이는 마치 가네코 미스즈의 참새의 어머니를 보는 느낌이다. 이 시의 전에 있는 시도 엄마오리의 새끼를 까치가 잡아서 자신의 새끼에게 주는 내용이라서 설득력이 있을 듯하다. 피해자와 가해자가 섞이는 대목이라 볼 수 있는데, 나는 이게 페미니즘을 넘어 세상 사는 이야기에 심도를 더했다고 본다. 잘못 쓰게 되면 시인의 개인적인 주장이 실려 전반적인 내용을 심각하게 망치게 되는데, 그렇게 되지 않은 데서 시인의 연륜이 느껴진다. 어머니들이 보통 그런 것이라 본다. 내 가족 내 새끼를 위한다는 맹목적인 사랑이 결국 남의 새끼를 죽인다는 무서운 생각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가네코 미스즈의 시도 훌륭하지만, 어머니 둘과 새끼 둘이라는 이슈에서 무관심한 사회로 뻗어나갔단 점에서 이 시는 더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있다.

 

청도시편 2

길 따라 귀두처럼 솟은 망주석 사이로
초로의 유방처럼 꺼져가는 키위빛 무덤들
어디서 무엇을 하며, 어떻게 살았는지......
이박사 메들리는 여기서도 끝날 줄을 모른다
길 옆 붉은 칸나는 지나가는 덤프트럭과
레미콘 행렬에 일일이 인사하느라 바쁘고
망혼처럼 떠도는 복숭아 꽃잎, 꽃잎 사이로
우리 업소는 시집 안 간 암퇘지만 고수합니다,
펄럭이는 플래카드 따라 들어가면, 갑자기
너는 고수할 것이 없다 앙앙 깨물고 싶은
식욕은 어느 식육식당 육고기에도 없는 것이다 

 

 

이 청도시편이란 시도 마찬가지이다. 왜 하필 시집 안 간 암퇘지만 고수하는가. 시집 가도 임신 안 한 암퇘지는 안 된단 말인가. 처녀를 고집하는 이런 사회에 대해서 당장 분노하고 싶은 마음이 치솟지만, 키위빛 무덤이란 표현에 또 마음이 산뜻해지는 것이다. 어떻게 그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이상한 소리로 들릴까봐 조마조마한 마음을 지니지 않고 있는대로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그가 두렵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시의 초행을 읽었을 때, 별안간 놀라고야 말았다.
'귀두'와 '유방'이라는 단어. 아무 생각없이 갑자기 툭 던져져버린 외설적인 느낌.
'이방인'을 내놓은 알베르 까뮈든, '기사단장 죽이기'를 써낸 무라카미 하루키든, 그런 세기의 대문호들도 외설적인 내용을 가미하긴 하지만, 어쨌든 그건 대놓고 하지는 않거나 설령 대놓고 해도 앞의 내용을 봤을 때는 의미있는 것이니...보통 이렇게 첫 문장부터 대뜸 나오진 않는다. 사람들에게 "아니 비유를 해도 왜 저런식으로??"라는 생각이 들게 할 정도니.
또한 도살이란 것은 생명을 뺏는 행위이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행위라 볼 수도 있겠다. 고기먹으면서 으허허헝 돼지야 미안해 그러면서 이미 젓가락은 입속에 있게 되니..
그렇게, 처녀만이 고집되어서 그저 정육점에 '상품화'되어 죽임 당하는' 개돼지'들. 그런데 그걸 아는 어느 누군가가 씹어서 자신의 목에 넘길 수 있을까. 복숭아 꽃잎은 그걸 왜 알면서도 그저 망혼처럼 지나가기만 할까. 무덤들은 왜 꺼져가기만 하는지. 칸나는, 어찌보면 자신을 괴롭히는 덤프트럭과 레미콘에 애써 웃으면서 인사한다. 매연이 몸에 안 좋다는걸 몰라서 그러진 않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첫 문장에서부터 치고 들어오는, 그 외설적인 '시어'들을 화자가 왜 처음부터 넣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듯하다.

 

정선

내 혼은 사북에서 졸고
몸은 황지에서 놀고 있으니
동면 서면 흩어진 들까마귀들아
숨겨둔 외발 가마에 내 혼 태워 오너라

내 혼은 사북에서 잠자고
몸은 황지에서 물장구치고 있으니
아우라지 강물의 피리 새끼들아
깻묵같이 흩어진 내 몸 건져 오너라


너무 교과서에서 나올법한 시지만 그런 만큼 자꾸 눈에 밟히는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