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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각기동대 TV판 SAC Vol.5
카미야마 켄지 감독 / 뉴타입 DVD / 2003년 5월
평점 :
품절

1. 어린 시절 접했던 공각기동대가 바로 이 SAC판이었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당시엔 상당히 유치하고 재미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그 당시엔 이렇게 목숨을 맡기고 신뢰할 만한 동료가 없었기 때문에 조금의
감동을 주는 장르만 봐도 재수없다고 생각했던 건 아닐까. 확실히 팀이 비극적으로 깨지는 애니메이션을 자주 봤었다. 이후에 공각기동대 원판을 보고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것도 소령이 독단적으로 새로운 세상을 구축한다는 설정 때문이었고, 에반게리온이라거나 카우보이 비밥을 자주 보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블랙 수트를 입은 일행들의 모습을 보니 굉장히 멋지다는 생각이 드는 건, 고전에서 벗어나 서브컬쳐에 심취한 최근 근황과
함께 내가 점점 유치하고 어려진다는 증거인가 싶다. 뭐, 그렇다고 해서 새삼 내 인생의 흐름을 바꿀 생각도 없지만.

2. 샐린저의 소설에서 아이디어를 따와서 창안된 스토리는 의외로 굉장히
절묘하게 짜여졌다. 6년 전부터 웃는남자 사건을 맡았던 토구사의 동료가 토구사에게 웃는남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어보이는 자료를 보이고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의를 추구하는 토구사의 집요한 수사 덕분에 웃는남자의 정체가 밝혀지고, 그가 무슨 의도로 기업테러를 일으켰는지 거꾸로 추적해가는
설정은 상당히 창의적이었다고 본다. 그림체에선 논란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이 정도면 작붕도 없는 편이고 스토리상에선 완성도가 상당히 높았다.
일본의 정경유착에 관해서 밀도있게 다루었는데, 실제 일본에서도 끈끈한 정도가 찰거머리 수준이라 논란이 되고 있는 그 깊은 유대를 깨기 위해 공안
9과가 희생을 치루는 장면은 꽤 스릴이 있다. 어떤 데서는 장면이나 대사의 진도가 너무 빨라서 긴박감이 떨어질 것을 각오하고 몇 번 반복재생을
해야 할 정도로.


3. 약간의 스포일러이지만, 원래 웃는남자는 해킹실력은 뛰어났으나 책들을 정리하는 사서?같은 일을 보는 사람에 불과했다. 그러다 우연히 세라노
게노믹스에게 누군가 보낸 협박메일을 받게 되었다. 국적이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의 두뇌를 전뇌하기 시작한 시점에서, 그리고 자신의 뇌도 전뇌한
시점에서, 그는 전뇌한 부작용으로 전뇌 경화증이 생길 수 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전뇌 경화증을 치료할 수 있는 무라이 백신이
개발되었지만 마이크로 머신요법과의 특허 싸움 중 무라이 박사가 정치계에 밀려 약사 심의회의 인가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에 분노한다. 이는 미국산
소고기 수입이 우리나라에 매우 불리하게 이루어졌으며, 그로 인해 미국 소고기를 먹는 우리나라 시민 중 광우병에 걸릴 가능성이 있다는 정보를 처음
접한 대학시절의 나를 떠오르게 했다. 사실 별반 능력도 없는 나는 그 사실을 알고서도 촛불집회의 인원 중 하나로 섞이는 수밖에 별다른 도리가
없었지만, 감히 추측해보건대 그는 그 시점에서부터 삶의 전환점을 얻은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최대한 활용하여 세라노 게노믹스
회사 사장의 전뇌를 해킹하고, 그와 이틀간 대화를 시도한 끝에 흥분하여 그를 매스컴에 출연시킨 뒤 총을 들이댔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그는 인간과 사회에 크게 실망하여 6년간 입을 닫고 귀를 막으며 사회에 나타나는 걸 꺼렸다.

4. 그러나 그가 다시 웃는남자 사건에 나설 것인지 고민하게 된 원인은 두 가지이다. 정치계에서는 일부러 마이크로 머신에 독을 넣고 웃는
남자에게 뒤집어 씌우는 등, 웃는 남자의 존재를 크게 불려서 마치 그를 우리나라의 '빨갱이'같은 존재로 만들어 국가 보안예산을 늘리려 했다.
그리고 또 한가지는 사람들의 과도한 호기심에서 나온, 그에 관한 모방이다. 이도 또한 촛불집회의 사태를 연상케 한다. 지금은 정체가 밝혀졌지만,
미네르바라는 가명을 써서 다음의 아고라에 글을 썼던 박대성 씨 주변에서 일어났던 사태가 바로 그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은 여러
유명인사들이 가명으로 인터넷에 글을 쓴다는 사실이 밝혀지기 시작되었으니 가볍게 생각되겠지만, 그 당시엔 '인터넷이나 하고 있는 한 논객'이
2008년 하반기 리먼 브라던스의 부실과 환율 폭등을 추측할 수 있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일이었다. 박대성 씨는 한 때 증권사에서 일했던 사람인
것으로 밝혀졌으니, 책에만 파묻혀 살았던 평범한 사람이 사실 해커의 자질이 뛰어났으며 인터넷 영웅이 되었다는 스토리는 이 애니에서만 진행되었다고
보면 되겠다. 능력을 제외하고 보면 아마 웃는남자 아오이의 설정은 안단테와 비슷하다고 여겨진다. (그 상황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설명을
붙이자면, 그는 평범한 고등학생으로 다음 아고라 이슈청원에 대통령 탄핵을 제안했다. 나는 실제로 그를 만난 적이 있고, 그의 실제 인상도
아오이와 굉장히 비슷한 면이 있지만 이건 리뷰이므로 개인적인 설명은 생략하겠다.) 그러나 정부가 미네르바와 안단테를 잡기 위해 수사에 착수하기
시작했을 때, 시민들은 '내가 미네르바요 안단테다'라고 주장하기 시작한다. 그가 언론에 자신의 얼굴을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썼던 마스코트가
문화계 전반으로 뻗어가기 시작하고, 기자들은 시니컬하게 정부와의 기자회견에 응하기 시작했으며, 경감이 세라노 회사를 옹호하기 위해 직접 나설 때
사람들은 서로 자신이 웃는 남자라 사칭하며 암살을 계획한다. 개인들이 꼿꼿이 일어서서 사회에 저항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아마도 시로 마사무네는
일본 시민들이 정부의 비리에 항의하는 방법은 이것뿐이며, 그렇게 해주길 내심 바랬던 게 아닐까. 좀 소름끼치는 가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5. 사실 긴박감에선 별 도움이 되지 않았지만 이 사건을 해결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요인은 토구사의 집요함 덕분이었다. 그의 의지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었던 요인은 분노였다. 그러나 그것을 냉정하게 걸러내서 객관적으로 추론할 수 있는 바토, 그리고 육체적인 힘이라던가 사격 실력이
어마어마한 소령의 완력, 그리고 정치와 법조계에 매우 빠삭한 인맥을 갖춘 부장의 조력이 없이는 그의 추진력도 불발에 그쳤을 것이다. 특히
아라마키 부장이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게, 그가 공안 9과의 머리 역할을 한다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다. 공안 9과는 확실히 세상에 존재할지
의심이 들 정도로, 부원들이 자기들 멋대로 행동하는데도 원활하게 굴러가는 집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안 9과를 재창조할 각오를 하고(확실히
그는 검찰총장과의 대화에서도 그렇게 말했다.) 아무렇지 않게 돌연 자신이 이끄는 집단을 해산시키고, 자신의 직위마저 벗어던질 각오를 한다. 뭐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무덤덤하게 자신의 정의를 추구했을 뿐이라고 말하는 그의 심플함과 날카로움은
빠져들만하다. 내 이상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