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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 밖의 전복의 서 ㅣ 읻다 프로젝트 괄호시리즈 8
에드몽 자베스 지음, 최성웅 옮김 / 읻다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고독, 문체의 공간 중에서
ㅡ너의 책은 얼마나 많은 쪽수로 이루어져 있는가?
그가 답했다, ㅡ정확히 96쪽으로 이루어진 평면의
고독이오. 한쪽이 다른 한쪽 아래에 놓여 있소. 첫 장이 정상이고 끝 장이 그 기저라오. 문체의 도정이 이러하오.
그리고 또 덧붙여
말했다, "나를 궁금케 하는 것은 결코 한 장 한 장 넘기며 책의 모든 계단을 내려갔다는 점이 아니라, 애초에 어떻게 내가 가장 높이 위치한,
맨 첫 장에 이르렀느냐는 점이오."
물의 바닥이 별들로 점철되어 있다.

삼위일체를 의식해서인지 자꾸 세 구도를 그려나간다.
일단 신, 생각, 책을 주요 주제로 하여 시같은 구절(사실 읽으면서 판타지의 마법 주문을 읊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을 써내려간다.
그리고 생각 뒤에 생각이 있으며 그 너머에 무언가가 감싸고 있다는 이론을 펼쳐나가고 있다. 그러나 중간중간 여백이 남겨져 있는 그 짧은 문장
하나하나가 결코 만만치 않은 것들이며, 끝없이 생각에 잠기게 한다. 마치 전 세계 고대 유적에 쓰여진 언어들을 아무렇게나 섞어서 하나로 뭉뚱그린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에는 프랑스 원어가 같이 쓰여져 있는데, 일단 난 그걸 해석할 만큼의 지식이 없지만 이렇게 난해한 문장을 번역하면서
원서로 대조해 보라 내놓을 만한 용기가 있다면 번역가나 출판사나 보통내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에드몽 자베스라는 사람은 이 책으로 인해
국내에 첫 출간되었다고 들었는데, 번역가들이 손대기를 꺼려하는 책들을 손대는 것 자체도 용기가 가상하다. 칭찬해주고 싶다.
특히
결론은 독서에 대해 쓴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만화책이 한층 더하긴 하지만, 소설의 여백도 중간중간마다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 자체를 시적으로 표현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인상깊은 글귀도 책에 관련된 문장 중에서
많이 나온 듯하다. 세상을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책밖에 없으며, 책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것(당연하다거나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없이
너무나 당연해서 당연이란 말도 안 하는 일)들을 새롭게 표현해내는 일, 한계를 돌파해 나가는 일이다. 이 시는 그걸 몸소 실천해 나갔다고 본다.
유태인이 쓴 책과 종교에 관한 책은 매우 조심해서 보는 편이었는데, 이 책이 선입견을 깨뜨리는 계기가 되었다. 아무리 로봇이 발달해서 책을 쓴다
해도 이런 내용의 책을 쓸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