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창비시선 237
김태정 지음 / 창비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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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네 뼈로 내 뼈를 세우리
네 살로 내 살을 보태리
네 몸을 이루는 바다로
삶의 부력을 완성하리
은빛 비늘의 눈부심으로
무디어진 내 눈물을 벼리리
어느날 문득 육지를 보아버린
네 그리움으로
메마른 서정을 적시리

그리하여 어느 궁핍한 저녁
한소끔 들끓어오르는 국냄비
생의 한때 격정이 지나
꽃잎처럼 여려지는 그 살과 뼈는
고즈넉한 비린내로 한세상이 가득하여,

두 손 모아 네 몸엣것을 받으리
뼈라고 할 것도 없는 그 뼈와
살이라고 할 것도 없는 그 살과
차마 내지르지 못하여
삼켜버린 비명마저도

 

  

누가 봐도 단연코 최고라고 할 만한 시집은 내기가 쉽지 않다. 특히 거의 대부분이 운동권이라고 할 만한, 내 어머니 아버지 나잇대의 시인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시대를 반영하려는 시를, 문학을 써내려는게 도리어 그들의 족쇄가 되었다. 그들이 옳지 않은 일을 한 게 아니다. 다만 자연과 시의 본연이였을 노래로부터 도망쳤다. 이런 말을 써도 될지 모르겠지만, 마치 고된 수행만 반복함으로써 사후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 노력하는 수도원의 늙은 꼰대 수도사들을 보는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 시집은 달랐다. 일단 스케일이 크다. 시인은 글을 씀으로써 자신의 몸을 열어 우주를 보여주고, 우주를 잠시 닫고 자신의 몸을 보여주기도 했다. 마치 어릴 때 거기서 우유를 빨아먹고 살았을 어머니의 가슴을 30살에 만져본 것 같은 충격이 손바닥을, 이윽고 온 몸을 스쳐지나갔다. 이래서 남자들이 그러는구나. 좋아하는 여자가 마치 자신의 어머니 같다고. 이제서야 그 의미를 알았다. 양성애자인지라, 퀴어로서의 감정도 있긴 있었지만 그 느낌이 깬 건 고3 이후 오랜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연모의 감정을 느낀 듯이 마음 설렜다. 감히 그녀를 내 눈으로 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멀찌감치 팬사인회를 여는 그녀의 실루엣을 지켜보거나, 팟캐스트에서라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행복해 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충격이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떠나갔다니. 그것도 2011년 9월이라니.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가 리뷰를 쓰기 시작한 지 1년 후이고 블로그가 해킹당하기 1년 전이다. 한창 데이트하고 운동권 사람들과 만나서 술을 퍼마시고 촛불시위에 참가하는 거 가지고 내가 무언가 대단한 일을 하는 듯이 날뛰었던 시간이었던 듯하다. 바보같다. 이 시인을 그냥 스쳐 지나가다니. 그러나 이 시인은 지금 60년에 태어나신 우리 어머니보다 젊으신 분이다. 어머니와 팔십년대를 같이 회상할 수 있는 분이 그렇게 돌아가셨다니 생각도 못했다.

 

 

  

 어떻게 그녀의 시를 도마에 올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녀의 시를 감히 비평하자면, 그녀는 결국 과거를 버리지 못한 게 아닐까 싶다. 시의 첫 부분부터 그녀는 20년 동안 써 온 호마이카상을 버리려 다짐한다. 세상의 끝 같은 느낌을 주는 땅끝마을 근처 절에 가서 미련을 떨쳐버리려고 다짐한다. 하지만 간질로 인해 첫사랑에 실패한 여성을 불쌍히 생각하면서, 점점 과거의 공장을 다니던 기억을 끌어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 속에 죽는 순간까지 담겨 있었을 그의 이야기가 독자의 마음에 애절함을 일으킨다. 하지만 결국 시인은 실밥뜯기 1EA에 50원을 받는 아줌마(그나마도 다루기 좋고 약한 나이 어린 시다를 발견하면 쉽게 갈아치워질)들에 함락된다. 그들의 찌라시같은 시를 쓰리라고 다짐했다. 하지만 이 세상에 내려오시기 전 본래 모습이셨을 천사가 되기 위해 가신 것인가, 아니면 다른 살기 좋은 세상을 저승 어딘가에서 찾으신 건가. 그녀는 가셨다. 그리고 그녀가 30대에 쓴 글을 내가 서른 살에 읽고 있다. 나는 그녀처럼 아프게 살지 못했다. 어머니의 추억으로, 그녀의 친구라고 하는 이인휘 씨의 가슴아파함으로, 김사인 씨의 시로, 그리고 그의 절절한 글에 의한 모든 이의 눈물로 인해 그녀가 앉았을 법한 컴컴한 암흑을 더듬어갈 뿐이다. 그녀는 나와는 다르게 마음이 따스하고 솔직하여 친구도 많았다. 모두의 가슴에 별똥별같이 그녀의 이름이 스쳐지나갔다. 나에게는 너무나 벅찬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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