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와의 결별 문학의전당 시인선 192
정서정 지음 / 문학의전당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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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목숨

아 또 시작했다
(사람 미치게 하는 저) 문어와 낙지 활극
설마 오늘이 마지막이겠지?
(제발 그러길 바래)
내일 아침엔 필경, 아니 분명 몇 분 안에,
경찰차 사이렌 달려오고 말 거야
(제발 그러길 바래)
시커먼 먹물 토하고 뻗어버린 낙지
수갑 찬 문어, 악귀에 사로잡힌 눈빛
울화통 땡땡한 민머리 꼿꼿이 세우고
구경꾼들 노려보는 광경
(정말 지겨워)
상투적인 그 사회면 기사 한 커트
(대체 나와 무슨 상관인데)
무슨 일로 나 모자이크 처리된 화면 속 덜덜 떨며
(난 몰라요, 아무 소리도 들은 적 없어요)
가증스레 고개 내젓고 있나?
(비겁한 꼴뚜기 같은 년!)
하느님 고맙게도 다시 깨워준 아침
꿈이든 현실이든 다신 그 비명소리 듣고 싶지 않아!
만일 또 저 칡덩쿨 같은 문어와 낙지
수족관 벽에 척 달라붙어 아드등거리는 꼴 보이면
이번엔 꼭, 꼭 뱉어주고 말 거야!
매번 목구멍 끝에 치밀어 오르던 그 말,
매번 어금니 사이에 꾹꾹 끼워놨던 그 말,
"제발 좀 떨어지라니까!"

마침내 시원하게 단칼에 베어버린
해파리 같은 남의 목숨

  

 이 시의 독특한 점은 순우리말의 사용만이 아니라 시집 마지막에 시창작에 대해 직접 강의를 함으로서 많은 아마추어 창작자들에게 용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혹 시를 정말 읽기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이것만이라도 읽기를 강력 추천한다. 짧은 에세이로서는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을 처음 읽었을 때와 버금가는 감동을 느꼈다.

 

독자에게 어떤 시가 감동을 준다면 그것은 시적으로 형상화된 언어가 그에게 울림을 일으킨 것이다. 바슐라르 식으로 말하자면 '혼의 울림(resentissment)'이 일어난 것이다. 좋은 시는 다양한 상상력의 표현을 보여주며 독자의 내면에 깊은 울림을 일으킨다. 그렇게 볼 때 한 편의 시를 읽는다는 것은 그 시가 우리 내면에 불러일으키는 울림이 뭔지를 이해하는 일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원로격 시인들도 요즘 시는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둥의 말을 하는데 그 분들은 그럼 강은교 시를 읽지 않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말이 된다. 그 분의 시는 육하원칙을 알 수 없는 것들 천지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는 것에 관해 이야기하는 게 시이기 때문에 일단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시적 단어? 그런 거 존재도 안 하고, 자신의 그 잘난 머리를 가지고 의미를 해독하려고 치중하지만 시를 이해할 수 없다. 사실 난 그게 시라고 본다. 쉽게 쓰여진 것들은 그냥 글일 뿐이다. 이건 신춘문예에 뽑혔나 못 뽑혔나, 자기 경험에 대해 썼느냐 추상적으로 썼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만일 시의 의미가 알기 쉽다면 그건 이미 시가 아니다. 최종적으로 좋은 시엔 인간 삶에 대한 고민이 들어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백석의 시라던가 서정주의 시를 전부 서울말로 바꿔 읽으면 굉장히 아무것도 아닌 글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꼭 서울말로 쓴 시가 좋지 않은 시인가?  시 하나하나마다 타이밍이 있고 스타일이 있다. 그걸 성찰하는 게 좋다고 본다.

 전반적으로 섹드립치면서 페미니즘을 설파하는 특이한 시이다. 더불어 시에 대한 시인 특유의 연구 자체를 시로 담아낸 게 돋보인다. 살짝 아쉬운 점이 있다면 해외에 관련한 시들 중 몇 개였다. 너무 기대치가 높았던 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 시집을 계속 읽다가 갑자기 해외여행 이야기가 나오길래 여름하늘을 묵으로 묘사한 난데없는 참신한 묘사를 여기서도 기대했다. 그러나 양탄자 짜는 여인은 그저 비참한 한 인간에 관한 르포에 지나지 않았다. 소재는 좋았는데. 좀 더 그녀를 통해 자신과 세상의 여인들을 투사해 나갔다면, 아예 통 크게 김지하처럼 긴 장편의 시를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싶다. 그 외 여성의 삶을 다루거나 학대를 암시하는 시들은 다 좋았다. 물론 미라 2를 포함해서. 세계를 무대로 하여 페미니즘을 표현한 시이니 꼭 보길 바란다. 남들이 그냥 그러려니 하는 걸 그냥 못 넘어가는 예민한 감수성이 시를 쓰는 계기가 되는 좋은 사례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마치 소녀같은 면이 있다. 파릇파릇 핑크핑크하면서도 마음 속에서는 다 허물어져 가는 폐허를 담은, 어딘가 아름다우면서도 애잔한 일본 일러스트를 보는 느낌이랄까. 내가 여기 올린 일러스트들처럼 말이다. 책을 보는 중 성적인 악몽을 꾸었다. 이번 일하고도 관련된 게 아닐까 하지만 생각해보니 이 시집을 봐서인 것 같기도 하다. 그보다 그런 꿈을 가끔 꾸는데, 그 꿈에 관해 냉정히 분석해본 게 이번이 처음인 듯하다. 생경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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