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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에 가까운 말 ㅣ 창비시선 386
박소란 지음 / 창비 / 2015년 4월
평점 :
김밥천국
연인이 밥을 먹네
헝클어진 머리통을 맞대고 늦은 저녁을 먹네
주방 아줌마 구함 벽보에서 한걸음 물러나 정수기가
놓인 맨 구석에 앉아
푸한 김밥 두어줄 앞에 놓고 소꿉을 살듯
여자가 콧물을 훌쩍이자 그 앞으로 쥐고 있던 냅킨 조각을 포개어
내미는
남자의 부르튼 손이 여자의 붉어진 얼굴이
가만가만 허기를 달래네
때마침 식당 앞 정류장에 당도한 파주행 막차
연인은
김밥처럼 동그란 눈으로 젓가락질을 멈추네
12월의 매서운 바람이 잠복 중인 바깥
버스 뒤뚱한 꽁무니를 넋 없이 훔쳐보다 이내 버스가
떠나자
그제야 혓바닥 위에 올려놓은 김과 밥의 부스러기를 내어 재차 오물거리네
흰머리가 희끗한 주인은 싸다 만 김밥 옆에서 설핏
풋잠에 들고
옆구리가 미어지도록
연인은 밥을 먹네 김밥을 먹네
시에서는 어지간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단상이 많이 나온다. 아버지에 대한 시는 맨 끝에
지익이라는 시에서 나온다. 시집에서는 전반적으로 어머니와 언니와 같이 살았던 것처럼 나온다.
이 시집을 쓴 박소란 시인은 세상과 타협을 하기 시작한 시기의 시들을 뒤에 넣은 것 같은데, 지익은 그 마지막을 장식했다. 20대에 혼자
실컷 울음을 터뜨렸던 자취방에서는 이제 이사를 갔다고 하니, 울음에서 그만 벗어나고 싶은 것일까. 눈물을 너무 많이 흘려 더이상 나오지 않는
삶을 표현했던 그녀였다. 시 속에서의 그녀를 보자면, 말 그대로 박복한 삶이다. 자살은 너무 힘들어서 싫고, 자연사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도처에 드러나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저절로 우울하고 아픈 시이다. 그녀는 아프다고 중얼거리며 황량한 거리들을
헤메인다. 연인은 그녀의 얼굴에 침을 뱉고 때리며, 무당은 그 옆에서 차라리 웃으라고 충고를 해 준다.
신파극의 절정에 있는 이 시는 아무리 음식으로 분위기를 따뜻하게 하려 한들 이미 통제가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