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팜 파탈 문학과지성 시인선 340
김이듬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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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나 잡념 중에서

어디선가 뵌 것 같아요
내가 머리를 굴리느라 우물쭈물하는 사이
벗겨놓으면 그년이 그년이라고

 

 

  

시에서는 여자는 벗으면 다 똑같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한편으론 시 자체로 그걸 또 부정하고 있다. 실비아 플라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녀는 실비아 플라스의 시에서 보이는 어마어마한 자괴감과 실비아 수수께끼라는 시집에서 보여지는 가정에 대한 극도의 집착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시인의 기구한 삶이 시집에서 그대로 드러나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성으로서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 보임으로서 슬픔을 중화시키고 있다. 슬픈 와중에 이 분열된 인격들이 갑자기 등장하여 이리저리 날뛰고 있는지라, 그녀가 결국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도 알기 힘들다.

 한때 성별이 무엇이냐고 물을 때 '중성'이라고 쓰는 게 유행했다. 남성들은 대부분 여성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려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여성 자신들에게는 여성의 아름다움이 대체 어디에 있는지 암담하기만 하다. 보통 여성의 아름다움은 남성이라던가 성관계에 의해서만 발견되기 때문이다. 화자 즉 팜 파탈은 철학자들의 이름을 부름으로서 '자신'의 아름다움을 분석적으로 찾아내려는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래서 그녀의 시는 일기 형태거나 스토리텔링으로 쓰여 있지만, 결코 읽기 편한 시는 아니다.

 그러고보면 "좋은 사람으로 불리우는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이기만 할까", "이 세상을 편하게 살기 위해선 매사에 진지해야만 하는구나. 강간으로 테크닉을 배웠다는 농담조차 할 수 없다니." 등의 사유를 할 수 있는 팜 파탈은 여성들이 필수적으로 갖춰야 할 백치미에 어긋나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녀는 사유를 포기하지 않는 한편, 끊임없이 세이렌의 노래를 불러댄다. 물론, 그건 파리의 능글맞은 남성을 향한 추억의 노래같은 것이지 딱히 남성을 유혹하는 노래는 아니다. 착각하지 말기를.

유령 시인들의 정원을 지나 중에서

#6
우르르 유령 시인들이 몰려와 여자의 종이를 찢어 버립니다. 종이만 찢었을 뿐인데 여자의 가슴에서 피가 흐릅니다. 욕조 안에 핏물이 고입니다. 유령 시인들은 종이에 대고 협박합니다. 자신의 시를 모방했다고, 갖은 기교 범벅 비스킷 같다느니 뭐니 벽돌로 여자의 머리를 빗어줍니다.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기분이 좋아집니다. 이상 옆에서 김수영이 사랑에 미쳐 날뛰는 날을 이야기합니다. 전 당신들을 닮을 생각도 없고 오마주도 모르는데요. 우리는 영원히 무한히 우리를 배신하여...... 입에서 두부만 한 핏덩이가 쏟아집니다. 가만히 보니 오래 묵은 자의식과 낭패감 따위가 묻어 있습니다. 초라한 절망으로는 충분히 가벼워지지 않은 근육들이 핏물에 자유롭게 꿈틀거립니다. 여자는 잠에 빠지듯 혼몽합니다. 몸이 조금씩 빠져나갑니다. 스르르 욕조 구멍에서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흘러갑니다. 모든 수치와 장난, 인연으로부터 먼 세계로 나아갑니다. 기고 있지만 날아가는 것 같고 유령들과 한패가 된 듯도 하지만 동물들의 울음을 이해합니다. 용감무쌍하지 않고 나약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절반 죽은 것 같습니다.

#7
이모네 근처 키노쿠니야 서점이 있는 건물의 화장실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일 년 내내 무더운 도시의 길거리에서 책을 오래 읽는 건 위험합니다. 태생적으로 스스로에게 반한 여자는 유령들이 자신을 모방하는 것에 질렸습니다. 눈 나쁜 사내와 팔짱을 끼고 오래 산책했습니다. 그는 거리의 싸구려 화가였고 아무데서나 키스하는 걸 좋아했습니다. 하루속히 미래로 사내는 사라져야 합니다. 여자는 그의 안경을 엘리자베스 산책로 쓰레기통에 던져넣고 시구절을 주웠습니다.

#8
급하니 빨리 빨리 빨아

 

 

 

직접적으로 이름이 나오지 않았지만 왠지 에반게리온과 시간을 달리는 소녀의 이 두 장면이 결합되는군요.

 

여드름투성이 안장 중에서

셔텨 내리고 있는데 누가 기어들어왔다
내 자전거와 부딪힌 승용차 주인이다
나의 안녕을 묻기 위해 퇴근길에 들렀단다
약간의 가슴 통증 외엔 괜찮다고 말하자
천만다행입니다 나를 걱정해주는 보험사 직원 같은 아버지 같은
그가 가져온 상자 백 퍼센트의 순수 원액 어쩌고저쩌고 올라가는 내 책상
이름이 책상이지 무릎 담요와 운동화 칫솔 따위가 있고 쭈뼛하게 사전이 있다
백 퍼센트 말이 되는 거짓말같이 다시 가슴 부위가 저려온다
여기 유방과 쇄골 사이 손바닥으로 눌러주면 조금 낫는 듯하다
교통사고와 연애는 후유증이 더 무섭다고
내일은 병원에 가보라며 남자가 아픈 데를 주물러 준다
호호 불어주다가 애도 아닌데 침을 발라대기 시작한다
한 세트의 유리병들이 위태롭게 부딪히는 소리를 내고
십이 간지 꾸러기 수비대와 몬스터 만화책이 자빠지고
과일을 사라며 고래고래 고함지르는 행상인이 지나가고
얼떨결에 심드렁한 개처럼 남자는 내 치마 아래로 기어들어간다

삐죽삐죽 뻐드렁니가 튀어나온 안장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았다 손잡이를 뿌리치고
오르막길을 달려간다 페달을 돌리면서 살짝살짝 음핵을 비벼주는 게 자전거 타기의 묘미다

 

 

몬스터하면 요한, 꾸러기 수비대하면 치치죠. 잘 어울리는 조합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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