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이 피기까지는 시인생각 한국대표 명시선 100
김영랑 지음 / 시인생각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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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 중에서

죽어도 죽어도 이렇게 죽는 수도 있나이까
산 채로 살을 깎기어 죽었나이다
산 채로 눈을 뽑혀 죽었나이다
칼로가 아니라 탄환으로 쏘아서 사지를 갈가리 끊어 불태웠나이다
홋한 겨레이 피에도 이러한 불순한 피가 섞여 있음을 이제 참으로 알았나이다
아! 내 불순한 핏줄 저주받을 핏줄
산고랑이라 개천가에 버려둔 채 까맣게 연독한 주검 하나하나
탄환이 쉰 방 일흔 방 여든 방 구멍이 뚫고 나갔습니다
아우가 형을 죽였는대 이렀소이다
조카가 아재를 주였는대 이렀소이다
무슨 뼈에 사무친 원수였기에
무슨 정치의 말을 썼기에
이래도 이 민족에 희망을 부쳐볼 수 있사오리까

 

 

  

11월 5일 모두 촛불시위를 하러 나갔다. 박근혜 정권의 부조리함에 대한 분노를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아닌 게 아니라 나는 정말 대한민국의 현실이 하나의 부조리극으로 느껴진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는 나는 밤까지 일을 했다. 일의 특성상 겨울에는 도저히 쉴 시간이 나지 않는다. 잠도 잘 오지 않을 것 같고 축제날이나 다름없을 이 밤을 어떻게 혼자 즐기지? 그렇다고 아주 경사도 아니라서 집에서 미러볼을 돌릴 수도 없고 말이다. 집에다 촛불을 피웠다가 실수로 아파트를 태울까봐 무서웠다. 결국 내 나름의 방식으로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그가 그립다라는 책을 빌렸었다. 그러나 생각지도 않은 데서 마치 축제일같은 밤을 보낼 수 있었다. 바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같이 같은 서정적인 시를 기대하고 도서관에서 빌린 이 시집이었다.

 

 

 그의 시는 끝부분으로 가면서 점점 노골적이고 정치를 비난하는 부분이 대놓고 드러났다. (각하! 정치를 대국적으로 하십시오!)

 그러나 그는 일단 아나키스트를 표방한 사람이었다. 지독하게 한국에 환멸적인 시들을 읽으면서 속은 후련해했지만 시집을 덮으니 돌연 의문이 들었다. 왜 그는 아나키스트이면서 국가주의적인 면모를 보이는가? 사실 그의 시에는 전반적으로 어두운 그늘이 조금씩 드러나 있었다. 교과서에도 쓰여져 있듯이 그 점은 시대의 어려움을 대변한다. 그는 왜 아나키스트이면서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있을까? 국가의 흐름에 대한 그의 해박한 지식은 또한 그가 자신의 나라에 관심을 가지고 사랑하고 있음을 반영한다. 사실 이래서 나는 아나키스트를 싫어한다. 마치 일본 애니메이션을 혐오한다면서 '어휴 럽폭도들'이라거나 '어휴 @ㅏ재들'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오타쿠를 욕하는 애들과 마찬가지다. 사랑의 반대말은 무관심이다. 만일 진정 국가에 관심이 없다면, 일제가 우리나라를 지배하는 게 반대하는 게 아니라 시대의 흐름이 사람을 죽이는 데 반대해야 했다고 본다.

 

  

 이래서 아나키스트들은 대부분 민족주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서 이야기하면, 아나키스트가 함정에 빠질 경우 아나키 콜로니스트가 될 수도 있다. 간단히 말해서 정치적인 성향을 지닌 아나키스트라는 뜻인데, 아나르코생디칼리즘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들은 우파로 가기가 굉장히 쉬운 집단이다. 결국 서정시를 즐겨 쓰고 시형식에 엄격했던 김영랑도 정치계에 뛰어들었을 땐 우파를 도왔다고 한다. 이렇게 아나키스트->생디칼리즘->우파는 사상이 좌파에 비슷했던 사람들이 흔히 우파로 전향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내가 이명박 퇴진 촛불집회를 그만둔 여러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아나키즘 사상이 그 주변에서 판을 쳐서다. 김영랑의 시는 물론 모두 아름답다. 그러나 마지막 부분에 가서는 다소 노골적인 면을 보인다. 이 시집을 읽을 때 그런 요소를 보면 좋겠다. 의도치 않게 드러난 것은 그의 국가에 대한 사랑만이 아니다. 이데올로기에 대한 그의 처절한 고민도 있다. 사람 목숨이 사상보다 중요하다곤 하지만 결국 사람 정신을 사상이 좌지우지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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