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눈앞에 없는 사람 ㅣ 문학과지성 시인선 397
심보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8월
평점 :
늦잠
별은 어둠의 미묘한 순응자.
시간이 닦아놓은 밤의 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다
우리는
젖은 흙 위를 걸어 집으로 돌아온다.
잘 익은 사과 맛이 나는 발자국들을 찍으며.
나의 어느 쪽 귀에 더 많은 속삭임이 고여
있을까?
내가 모로 누워 웅크리고 자는 쪽의 반대편.
당신이 메마른 숨결의 흰 가루를 떨어뜨리는 그 움푹 팬 곳.
새벽의
결정, 입술에서 이슬로 옮아간다.
금화를 세어본 적 없는 당신의 손.
언제나 잘못된 시간의 열쇠를 아침에 건넨다.
등
뒤에서 당신은 나지막히 묻는다.
"지금은 몇 시죠?"
나는 생각한다.
멀리 떨어진 두 개의 눈동자를 이어주는
흙길.
녹슨 나침반의 떨리는 북쪽.
오전 열 시.
이제 일어나야 해요.


첫번째로, 진은영 씨는 평론을 잘 쓰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보선 시인은 대리석으로 계단을 만들지 않고 그 계단으로 조각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데서 퍼뜩 맞다 맞아라는 직감이 오면서
무의식적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었다. 발렌타인 데이다. 사랑하는 남자에게 초콜릿을 선물해야 한다. 초콜릿을 기초 재료부터 사서 웰빙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초콜릿을 중탕해서 하트로 찍어내는 사람이 있다. 평범하게 마트에서 빼레로 로쉐같은 걸 사서 주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애니메이션을
보면 꼭 초콜릿으로 다비드 상을 만드는 재벌집 규수 아가씨가 있다.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위대해 보이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평범하지도
않다. 소설보단
시가 좋다고 독자들에게 강제 권유를 하는 그의 시는
어처구니없이 거대하다. 분명 초콜릿은 먹으라고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나 초콜릿 다비드 상과 심보선 시인의 시는 우리의 좁은 생각의 벽을 망치로
사정없이 부숴버린다. 그러고선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냥 그 언어(초콜렛) 속에 들어있는 형상을 조각해서 세상에 내보냈어요.' 그러면 우리는
세상에, 아연실색할 준비도 없이 혼돈 속에 내던져지는 것이다.
나에게는 이 시집의 맨 마지막에 들어있는 시가 그러했다. 분명
시인의 아버지를 포함하여 시인 자신까지, 방구석에 틀어박혀 자신의 공간을 표시하고 싶으면서도 방황하고 싶어하는 남자들에 대한 자세한 묘사들이
많이 등장하기는 했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 시로 그 모두를 다비드로, 영웅으로 만들어버렸다. 이 길은 험난하다. 그의 부인을 포함한 여성들은
모두 그를 비웃을 것이다. 그 거대한 초콜렛 다 먹을 수 있냐. 애초에 사람 모양이라 먹기가 여러모로 불편하다. 혹은 이렇게 잘 만들었는데
먹기가 너무나 아깝다는 말이 나올 수도 있다. 이미 다비드 상까지 가면 초콜렛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아니라 사랑과 장인정신이 담긴 예술이다.
결론을 말하자면 이렇다. 심보선의 시집을 도서관에서 빌리려고 한 내가 소홀했다. 한 권만 읽고 덮으려고 했던 내가 경솔했다. 시를 하나하나
소리내서 읽고 그 거대한 초콜렛을 그저 핥기만 하고 지나가려 한 내가 죄인이다. 질러라. 소장해라. 입덕 작품이 되라. 내 입덕 작품은 설악산을
담은 훌륭한 동시 작품이기에 후회는 없지만, 심보선 시인이 만일 입덕 작품이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다. 시에 대한 기준이 터무니없이
높아졌을까?